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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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벗고 상투를 보인 사진. 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헤어스타일의 하나. 보통 성인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치른 뒤 꾸민다.[1] 조선 이전에도 한반도에 상투 풍습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상투가 가지는 의미는 신체발부수지부모의 유교적 예절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영어로 Topknot hairstyle로 번역하며, 한국의 상투는 한국식 어휘를 알파벳으로 음차하여 Sangtu로 표기하기도 한다. 다만 해외에서는 흔히 Topknot이라고 하면 아시아의 헤어스타일로 생각하며 주로 일본의 촌마게를 먼저 떠올리며, 따라서 조선의 Sangtu를 촌마게와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은 고대부터 상투를 틀었다. 오래된 기록으로 중국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투항할 때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조선 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상투를 틀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
삼국시대 신라토기 중 하나인 위의 기마인물형 명기 하인상에서도 뚜렷하게 상투의 형태가 확인 가능하다.
여기서 머리가 긴 상태에서 상투 트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감아 올린 뒤 동곳 등으로 고정시키고 망건을 써 완성시켰다.의관을 중요시하는 양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투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상투를 가리는 용도의 상투관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상투관이 절을 할 때 흘러내리지 않게끔 고정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상투에서 망건은 이마 가리개가 아니라 머리를 쓸어올려 묶인 머리를 고정하는 일종의 헤어밴드 용도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극에서 망건 앞싸게 부분(통풍구)에 살갗(이마)이 보이는 모습은 잘못된 착용의 예이다. 사극에서는 상투가 미리 틀어진 가발을 연기자가 쓰는 것이라 가발과 연기자 본인 머리가 이어지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가리기 위해 망건을 실제보다 낮은 위치에 둔 것. 구한말에도 눈썹바로위에 망건을 쓴 사진이 있지만 이건 머리숱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망건이 많이 내려온 것이므로 오해하지말자. 당장 페이지 위의 사진속 인물만 봐도 이마가 훤히 드러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이가 어려도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으며[2] 미혼인데도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상투를 틀기도 했다고. 이런 상투를 외자상투라 부른다. 뭐 그냥 한동네 살면서 이런 사정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안 통했으며, 보부상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경우 얕보이지 않기 위해 했다고 한다. 또한 무과에 급제할 경우 부하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투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상투에 관을 썼으면 그것은 임금이거나 왕족, 외척 등 엄청 귀한 신분을 상징했다. 한국 사극에서는 임금이 아닌 자가 상투에 관을 쓴 것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여인천하》에 나온 외척 윤원형(이덕화), 《조선왕조오백년 - 인현왕후》에 나온 왕족 동평군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영의정도 상투는 그냥 틀었고 임금이나 세자, 왕족, 외척 정도 되어야만 상투에 관을 썼다. 왕이 아닌 인물 중에서 상투에 관을 쓴 적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윤원형, 장희재 등이다. 왕족이 아닌데 상투에 관을 쓰려면 최소한 '''부원군(또는 부원군 대리임무 수행자[3] )''' 정도의 직함을 갖고 있어야 가능했다. 정헌대부, 자헌대부 이런 걸로는 택도 없다.
머리가 꽤 많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대머리도 상투를 틀 수 있는가?''''란 문제로 현대인 사이에서 왈가왈부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도 사람 살던 시대이니만큼 조선시대에도 대머리가 당연히 있었기 때문. 일단 대머리라도 대부분 주변머리는 있기 때문에 위 초상화의 윤증처럼 주변머리를 머리 모아올려 상투를 틀고 관을 썼다. 얼핏보면 무슨 일본의 촌마게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빠진 머리를 잘 모아두었다가 남아있는 머리와 묶어서 상투를 트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상투에 대해 찾으면, '성 안[4] 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높이를 한 자로 한다.'는 옛말이 주야장천 언급된다. 풀버전은 '오(吳)나라 임금이 칼쓰기를 좋아하자 백성은 칼에 상한 흔적이 많아졌고, 초(楚)나라 임금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 죽는 여자가 많았으며, 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상투 높이가 한 자가 되었고, 성안에서 큰 소매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소매를 온필[全匹]로 하였다.' 로, 백성들이 흉내내니깐 왕은 알아서 몸가짐 검소하게 잘 하고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내용. 성종실록 197권, 성종 17년 11월 19일 경신 네 번째기사
사실 일생동안 기른 머리카락[5] 의 양은 엄청나서[6] 미관까지 고려한 예쁜 크기의 상투를 트는 것이 힘들다.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실제로 상투를 틀 때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구한말 상투 튼 사진을 보면 간혹 삐져나온 뒷머리가 짧거나 제각기 상투 크기가 다른 건 이 때문이다. 딱 상투 틀 정도만 남기고 자르는 것. 이렇게 자른 머리는 소중히 남겨두었다가 가발을 만들거나 조상 신위 앞에 바쳤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상투 자체가 컸다. 고분벽화를 보면 고대에는 상투 크기가 컸던 경우를 볼 수 있다. 간혹 배코를 예로 들며 가운데 머리를 삭발하고 주변머리는 평생 길렀다고 잘못된 지식을 설파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은 상투를 하나만 틀었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편견과 달리 머리숱이 많으면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 이런 쌍상투는 얼핏 보면 만두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대부분 젊을 때 머리숱이 과하게 풍성하면 쌍상투를 틀었다가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숱이 적어지면 일반 상투를 틀었다. 즉, 또한 누구나 배코를 친 것은 아니며,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쌍상투가 흔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달걀만한 상투가 미의 기준이었기에 머리를 자르거나 길러서 크기를 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마저 덥고 불편하다 여긴 이들은 ‘백호(혹은 '배코')친다’고 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작게는 동전 크기만큼, 크게는 손바닥의 반 크기 만큼 자르고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수리 부근의 가운뎃 부분에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 통풍이 되도록 하고, 남은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트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머리 같이 머리카락을 삭발하지는 않았는데, 손바닥 반 정도만 조금 잘라서 배코 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실제로 본 웹툰처럼 넓은 부위를 빡빡 밀지는 않았다. 촌마게나 변발처럼 민 부위를 드러낼 필요가 없을 뿐더러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따르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에서는 승려가 아니고선 멀쩡한 머리를 삭발하지 않았다.
이런 행위는 사사롭게는 행해졌으나[7] 유교 원칙이나 미관 상 전혀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트는데, 여기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까지 밀면 상투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투는 애초에 머리 길이를 정리하고 틀어올리는 형식이였으며 배코 치는 것은 꺼려지는 행위였기에 어디까지나 꼼수였고 특히 사대부는 정석대로 트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배코를 치더라도 동전에서 손바닥 반 만한 크기를 숱 치는 정도였으므로 조선왕조실톡에 그려진 것처럼 빡빡이는 아니였다.
구한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땐 유생들이 중심으로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 하여 머리 깎는 걸 반대했는데, 이는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길 가다 관원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상투를 잘라버리면 백호친 선비는 소갈머리가 드러나는 망신을 당해야 했다. 정확히는 배코를 치면 가뜩이나 안 좋게 보는데, 그나마 상투로 숨기던 게 아예 드러난다는 게 반발사유 중 하나였다. 당시 상황 기록을 봐도 강제 시행된 단발령 때문에 더벅머리가 되거나 속알머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적혀져 있다.
체면을 중시하던 유학자들이 이런 망신을 당하니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정책을 시행하던 배경에 외세와 개화파가 있었기에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했고, 결국 척양척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1900년에 시행한 2차 단발령 때는 강제 시행이 아니었기에 처음보다 반발이 적었다. 물론 유림 자체에서 박은식을 비롯한 신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외래 문화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많았기에 1930년대까지 상투를 고수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렇게 일제시절 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강하게 상투를 고집하였으나,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북한정권이 각기 수립된 이래로 급속한 외부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6.25 전쟁 같은 거대한 사회구조 변화를 거치면서 전통 보존 의식이 많이 희박해진데다가, 점차 모든것을 경제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풍토가 늘면서 관리가 힘든 상투는 '비경제적',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점차 대중들 사이에서 밀려나[8] 21세기 한반도에서 상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아주 드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학동마을을 비롯한 지역 거주자 및 방송에서도 나온 김봉곤 훈장은 지금도 상투를 하여 지방에서 거주 중인데 상투를 지키고자 모자나 모터바이크 헬멧까지도 상투가 나올 구멍을 하고 다닌다고 나온 바 있다.
상투는 변발류와는 달리 분장시 머리를 밀 필요가 전혀 없는지라[9] , 아니, 오히려 가발 밑으로 드러나는 짧은 현대식 머리가 거슬린다며 옛날 사극처럼 머리를 길러서 깔끔하게 올리라는 불만이 나오는 판국인지라 상투 가발과 망건으로 충분하다. 이에 비해 청나라 사극[10] 을 찍는 중국 배우나 일본 시대극 배우들은 '변발'이나 '촌마게'를 위해 대머리 가발을 쓰거나 '''경우에 따라 정말 앞머리를 밀던지, 아니면 아예 스킨헤드를 해야만 했다.[11] '''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변발'이나 '촌마게' 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질감과 거부감이 좀 덜 한듯하다. 뭐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상투도 경우에 따라 머리를 아주 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민 부분이 크지도 않으며, 대놓고 보이는 변발이나 촌마게보단 낫다. 게다가 실제로는 정말 머리를 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의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조연들은 그런대로 상투를 제대로 틀고 있지만, 주인공은 장발에 봉두난발이다. 조선시대 봉두난발은 '''천민들이나 하고 다니는 머리스타일'''이었고, 더욱이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생머리는 그런 거 없다. 혼인을 안하면 상투를 틀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정작 미혼 남성이 트는 총각머리나 떠꺼머리는 그거 먹는 건가요 취급.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상투에 장발이라는 해괴한 스타일도 나온다. 이런 건 머리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다는 주장도 있지만 상투+장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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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염립본왕회도' 속 삼국의 사신. 이들 중 신라 사신이 머리를 반만 풀어헤쳐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다만, '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에서는 신라의 사신들도 상투를 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극에서 쌍상투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원래 쌍상투는 미혼 남성의 머리였다. 총각이라는 말 자체가 어린 아이가 머리를 두 개의 뿔처럼 만든 것이다. '총각하다'라는 말도 있었다. 이것이 점차 미혼 남성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것.다만 이러한 쌍상투는 주로 중국에서 유행했고, '총각'이란 말 자체도 중국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에 그리 쌍상투가 많지는 않았다. 풍속도 등을 봐도 대부분 상투는 하나 뿐이다.
삼국시대의 상투는 크기가 크다. 하지만 양직공도를 보면 무조건 상투를 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 구한말의 선비들은 '일본은 서양을 따라해 단발이고 중원도 변발이라 호풍이니 선왕의 유풍(儒風)을 간직한 것은 이제 온 세계에서 조선뿐.' 이라며 소중히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2]
중국에서의 상투는 중국의 한족의 전통적인 머리형태였다.[13] 흔히 알려진 변발은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 북방민족의 머리모양새 였다.
하지만 묶는 방식과 남는 머리 처리 등에 있어 한반도 한민족의 전통 상투와 꽤나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정확하게 상투를 트는 법은 문화대혁명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만 삼국지나 여러 시대극에서 나오다시피 중국풍은 조선과 비교하면 만두처럼 크고 둥글게 만들어 천으로 감싸는 형태였다. 중국의 상투는 크고 물렁해서 관을 비녀로 가로지를 수 있게끔 흠을 내고 관을 쓸때 관과 상투를 비녀로 꿰어 고정했으나, 조선의 상투는 위의 사진과 같이 비녀로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매듭이었기 때문에 일반 비녀보다 길이는 짧지만 더 튼튼한 동곳이라는 남성 전용 도구를 사용하여 상투를 고정하였고,[14] 끈으로 관을 죄고 갓처럼 남는 끈을 턱 아래로 묶어서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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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이다.
중국을 정복한 북방민족 여진족, 몽골족 등이 호복(胡服)과 호발(胡髮)을 강요하였으나 한족들의 반발로 흐지부지 된 반면 청나라는 '''목을 남기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기지 말라'''는 치발령으로 항거하는 한족들을 대량학살을 감행하면서까지 한족의 속발을 변발로 대체시켰다. 그나마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북방민 왕조의 특징인지 승려와 도사들은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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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갱을 보면 특이하게도 머리를 네 갈래로 땋아서 뒤통수에 고정시킨 형태의 상투머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은 잔머리들을 땋아서 위로 올린거다. 하지만 전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목용(木俑)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머리형태인 걸 봐서 진나라 때 주로 유행하던 머리 형태인 걸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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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성의 머리 모양 변천사.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머리를 길러서 뒤로 묶거나, 관을 썼을 경우 관 밖으로 삐져 나오는 머리카락을 밀어주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관을 쓸 때 그림에 나와있듯, 머리를 막대 모양으로 모은 뒤 비녀로 뚫어 관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무사들의 경우 늘상 투구를 쓰고 격한 운동을 하기 때문에 열을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 필요가 있었는데, 상술한 관을 쓰는 방식 때문에 관을 쓸 때 필요한 머리카락은 남겨둬야 했다. 따라서 관을 고정시킬 뒷머리는 남겨두고 윗머리를 민 스타일이 무사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촌마게의 기원이다.
이후 무사 정권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스타일은 일종의 지배 계층의 최신 스타일로써 서민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에도 시대쯤 되면 사무라이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촌마게를 하였다. 다만 에도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촌마게를 한 건 아니고, 의사, 유학자, 수도승 등은 예전처럼 머리를 밀지 않고 길러서 뒤로 묶는 소하츠(総髪)라는 머리 모양을 했다. 사무라이 중에서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거나 검소함을 신념으로 삼은 사무라이들은 촌마게를 하지 않고 소하츠를 했다.[16]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 8월 12일 신묘 두 번째기사에는 '방망이 상투'라 나온다.
사실 촌마게는 상투의 일종이면서도 변발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강제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법을 공표해 성년 남자 모두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 일본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촌마게를 의식해서인지 한국의 상투를 그릴 때에도 상투가 거의 뒤통수에 가까이 오도록 그리는 일이 잦다.[17]
류큐 왕국 사람들도 상투를 틀었다. 카타카시라(欹髻, かたかしら)라고 하는데, 나이 열 다섯이 되면 카타카시라를 만듦으로서 성인식을 했다. 조선에서 일부 사람들이 상투를 할 때 백호를 치듯이, 카타카시라도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솎아낸 다음 묶어서 만들었다. 초창기 중국에서 온 도래인들이 뒷머리에 튼 것을 제외하면 카타카시라는 정수리 방향에 틀었다. 카타카시라는 지화(簪, ジーファー)라고 하는 비녀로 고정했는데,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지화의 재질이 달랐다. 왕족은 금비녀를 썼다.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1일 무자 첫 번째기사에는 유구국의 상투에 대해 '그들의 풍속은 남자는 귀천이 없이 모두 머리 좌각(左角)에 크기가 주먹만한 상투를 틀어감는데 머리숱이 많으면 깎아서 감하고 비단 헝겊으로 싸서 돌린다. 그 비단 헝겊의 색깔은 푸르기도 검기도 붉기도 한데 귀인(貴人)은 누런 색을 사용한다'라고 언급된다.
이 카타카시라 역시 틀어올릴 때 배코를 친것으로 보이는데,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7월 20일 무술 두 번째기사를 보면 표류해 온 류큐왕국 사람들의 특징으로, 상투 하나를 틀고 비녀를 두 개 꽂았으며, 상투 아래의 머리를 깎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 임금인 슌텐(舜天)에게 뿔이 있었는데, 그 뿔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틀어 묶은 것이 카타카시라의 기원이라고 한다.
1879년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 흡수되어 멸망하자 일본의 단발령이 류큐에도 적용되어 카타카시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주식 관련 용어로도 사용되는데, 최고로 오른 주식 시세가 상투의 끝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
갓을 벗고 상투를 보인 사진. 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
1. 개요
동아시아의 전통적 헤어스타일의 하나. 보통 성인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치른 뒤 꾸민다.[1] 조선 이전에도 한반도에 상투 풍습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상투가 가지는 의미는 신체발부수지부모의 유교적 예절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영어로 Topknot hairstyle로 번역하며, 한국의 상투는 한국식 어휘를 알파벳으로 음차하여 Sangtu로 표기하기도 한다. 다만 해외에서는 흔히 Topknot이라고 하면 아시아의 헤어스타일로 생각하며 주로 일본의 촌마게를 먼저 떠올리며, 따라서 조선의 Sangtu를 촌마게와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
2. 한국의 상투
한국인은 고대부터 상투를 틀었다. 오래된 기록으로 중국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투항할 때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조선 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상투를 틀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
삼국시대 신라토기 중 하나인 위의 기마인물형 명기 하인상에서도 뚜렷하게 상투의 형태가 확인 가능하다.
여기서 머리가 긴 상태에서 상투 트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감아 올린 뒤 동곳 등으로 고정시키고 망건을 써 완성시켰다.의관을 중요시하는 양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투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상투를 가리는 용도의 상투관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상투관이 절을 할 때 흘러내리지 않게끔 고정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상투에서 망건은 이마 가리개가 아니라 머리를 쓸어올려 묶인 머리를 고정하는 일종의 헤어밴드 용도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극에서 망건 앞싸게 부분(통풍구)에 살갗(이마)이 보이는 모습은 잘못된 착용의 예이다. 사극에서는 상투가 미리 틀어진 가발을 연기자가 쓰는 것이라 가발과 연기자 본인 머리가 이어지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가리기 위해 망건을 실제보다 낮은 위치에 둔 것. 구한말에도 눈썹바로위에 망건을 쓴 사진이 있지만 이건 머리숱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망건이 많이 내려온 것이므로 오해하지말자. 당장 페이지 위의 사진속 인물만 봐도 이마가 훤히 드러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이가 어려도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으며[2] 미혼인데도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상투를 틀기도 했다고. 이런 상투를 외자상투라 부른다. 뭐 그냥 한동네 살면서 이런 사정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안 통했으며, 보부상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경우 얕보이지 않기 위해 했다고 한다. 또한 무과에 급제할 경우 부하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투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상투에 관을 썼으면 그것은 임금이거나 왕족, 외척 등 엄청 귀한 신분을 상징했다. 한국 사극에서는 임금이 아닌 자가 상투에 관을 쓴 것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여인천하》에 나온 외척 윤원형(이덕화), 《조선왕조오백년 - 인현왕후》에 나온 왕족 동평군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영의정도 상투는 그냥 틀었고 임금이나 세자, 왕족, 외척 정도 되어야만 상투에 관을 썼다. 왕이 아닌 인물 중에서 상투에 관을 쓴 적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윤원형, 장희재 등이다. 왕족이 아닌데 상투에 관을 쓰려면 최소한 '''부원군(또는 부원군 대리임무 수행자[3] )''' 정도의 직함을 갖고 있어야 가능했다. 정헌대부, 자헌대부 이런 걸로는 택도 없다.
머리가 꽤 많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대머리도 상투를 틀 수 있는가?''''란 문제로 현대인 사이에서 왈가왈부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도 사람 살던 시대이니만큼 조선시대에도 대머리가 당연히 있었기 때문. 일단 대머리라도 대부분 주변머리는 있기 때문에 위 초상화의 윤증처럼 주변머리를 머리 모아올려 상투를 틀고 관을 썼다. 얼핏보면 무슨 일본의 촌마게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빠진 머리를 잘 모아두었다가 남아있는 머리와 묶어서 상투를 트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상투에 대해 찾으면, '성 안[4] 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높이를 한 자로 한다.'는 옛말이 주야장천 언급된다. 풀버전은 '오(吳)나라 임금이 칼쓰기를 좋아하자 백성은 칼에 상한 흔적이 많아졌고, 초(楚)나라 임금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 죽는 여자가 많았으며, 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상투 높이가 한 자가 되었고, 성안에서 큰 소매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소매를 온필[全匹]로 하였다.' 로, 백성들이 흉내내니깐 왕은 알아서 몸가짐 검소하게 잘 하고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내용. 성종실록 197권, 성종 17년 11월 19일 경신 네 번째기사
2.1. 손질
사실 일생동안 기른 머리카락[5] 의 양은 엄청나서[6] 미관까지 고려한 예쁜 크기의 상투를 트는 것이 힘들다.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실제로 상투를 틀 때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구한말 상투 튼 사진을 보면 간혹 삐져나온 뒷머리가 짧거나 제각기 상투 크기가 다른 건 이 때문이다. 딱 상투 틀 정도만 남기고 자르는 것. 이렇게 자른 머리는 소중히 남겨두었다가 가발을 만들거나 조상 신위 앞에 바쳤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상투 자체가 컸다. 고분벽화를 보면 고대에는 상투 크기가 컸던 경우를 볼 수 있다. 간혹 배코를 예로 들며 가운데 머리를 삭발하고 주변머리는 평생 길렀다고 잘못된 지식을 설파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은 상투를 하나만 틀었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편견과 달리 머리숱이 많으면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 이런 쌍상투는 얼핏 보면 만두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대부분 젊을 때 머리숱이 과하게 풍성하면 쌍상투를 틀었다가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숱이 적어지면 일반 상투를 틀었다. 즉, 또한 누구나 배코를 친 것은 아니며,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쌍상투가 흔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달걀만한 상투가 미의 기준이었기에 머리를 자르거나 길러서 크기를 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마저 덥고 불편하다 여긴 이들은 ‘백호(혹은 '배코')친다’고 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작게는 동전 크기만큼, 크게는 손바닥의 반 크기 만큼 자르고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수리 부근의 가운뎃 부분에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 통풍이 되도록 하고, 남은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트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머리 같이 머리카락을 삭발하지는 않았는데, 손바닥 반 정도만 조금 잘라서 배코 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실제로 본 웹툰처럼 넓은 부위를 빡빡 밀지는 않았다. 촌마게나 변발처럼 민 부위를 드러낼 필요가 없을 뿐더러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따르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에서는 승려가 아니고선 멀쩡한 머리를 삭발하지 않았다.
이런 행위는 사사롭게는 행해졌으나[7] 유교 원칙이나 미관 상 전혀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트는데, 여기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까지 밀면 상투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투는 애초에 머리 길이를 정리하고 틀어올리는 형식이였으며 배코 치는 것은 꺼려지는 행위였기에 어디까지나 꼼수였고 특히 사대부는 정석대로 트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배코를 치더라도 동전에서 손바닥 반 만한 크기를 숱 치는 정도였으므로 조선왕조실톡에 그려진 것처럼 빡빡이는 아니였다.
구한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땐 유생들이 중심으로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 하여 머리 깎는 걸 반대했는데, 이는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길 가다 관원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상투를 잘라버리면 백호친 선비는 소갈머리가 드러나는 망신을 당해야 했다. 정확히는 배코를 치면 가뜩이나 안 좋게 보는데, 그나마 상투로 숨기던 게 아예 드러난다는 게 반발사유 중 하나였다. 당시 상황 기록을 봐도 강제 시행된 단발령 때문에 더벅머리가 되거나 속알머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적혀져 있다.
체면을 중시하던 유학자들이 이런 망신을 당하니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정책을 시행하던 배경에 외세와 개화파가 있었기에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했고, 결국 척양척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1900년에 시행한 2차 단발령 때는 강제 시행이 아니었기에 처음보다 반발이 적었다. 물론 유림 자체에서 박은식을 비롯한 신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외래 문화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많았기에 1930년대까지 상투를 고수하는 이들도 많았다.
2.2. 현재
이렇게 일제시절 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강하게 상투를 고집하였으나,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북한정권이 각기 수립된 이래로 급속한 외부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6.25 전쟁 같은 거대한 사회구조 변화를 거치면서 전통 보존 의식이 많이 희박해진데다가, 점차 모든것을 경제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풍토가 늘면서 관리가 힘든 상투는 '비경제적',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점차 대중들 사이에서 밀려나[8] 21세기 한반도에서 상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아주 드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학동마을을 비롯한 지역 거주자 및 방송에서도 나온 김봉곤 훈장은 지금도 상투를 하여 지방에서 거주 중인데 상투를 지키고자 모자나 모터바이크 헬멧까지도 상투가 나올 구멍을 하고 다닌다고 나온 바 있다.
상투는 변발류와는 달리 분장시 머리를 밀 필요가 전혀 없는지라[9] , 아니, 오히려 가발 밑으로 드러나는 짧은 현대식 머리가 거슬린다며 옛날 사극처럼 머리를 길러서 깔끔하게 올리라는 불만이 나오는 판국인지라 상투 가발과 망건으로 충분하다. 이에 비해 청나라 사극[10] 을 찍는 중국 배우나 일본 시대극 배우들은 '변발'이나 '촌마게'를 위해 대머리 가발을 쓰거나 '''경우에 따라 정말 앞머리를 밀던지, 아니면 아예 스킨헤드를 해야만 했다.[11] '''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변발'이나 '촌마게' 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질감과 거부감이 좀 덜 한듯하다. 뭐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상투도 경우에 따라 머리를 아주 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민 부분이 크지도 않으며, 대놓고 보이는 변발이나 촌마게보단 낫다. 게다가 실제로는 정말 머리를 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의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조연들은 그런대로 상투를 제대로 틀고 있지만, 주인공은 장발에 봉두난발이다. 조선시대 봉두난발은 '''천민들이나 하고 다니는 머리스타일'''이었고, 더욱이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생머리는 그런 거 없다. 혼인을 안하면 상투를 틀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정작 미혼 남성이 트는 총각머리나 떠꺼머리는 그거 먹는 건가요 취급.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상투에 장발이라는 해괴한 스타일도 나온다. 이런 건 머리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다는 주장도 있지만 상투+장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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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염립본왕회도' 속 삼국의 사신. 이들 중 신라 사신이 머리를 반만 풀어헤쳐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다만, '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에서는 신라의 사신들도 상투를 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극에서 쌍상투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원래 쌍상투는 미혼 남성의 머리였다. 총각이라는 말 자체가 어린 아이가 머리를 두 개의 뿔처럼 만든 것이다. '총각하다'라는 말도 있었다. 이것이 점차 미혼 남성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것.다만 이러한 쌍상투는 주로 중국에서 유행했고, '총각'이란 말 자체도 중국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에 그리 쌍상투가 많지는 않았다. 풍속도 등을 봐도 대부분 상투는 하나 뿐이다.
삼국시대의 상투는 크기가 크다. 하지만 양직공도를 보면 무조건 상투를 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 구한말의 선비들은 '일본은 서양을 따라해 단발이고 중원도 변발이라 호풍이니 선왕의 유풍(儒風)을 간직한 것은 이제 온 세계에서 조선뿐.' 이라며 소중히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2]
3. 중국의 상투
중국에서의 상투는 중국의 한족의 전통적인 머리형태였다.[13] 흔히 알려진 변발은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 북방민족의 머리모양새 였다.
하지만 묶는 방식과 남는 머리 처리 등에 있어 한반도 한민족의 전통 상투와 꽤나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정확하게 상투를 트는 법은 문화대혁명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만 삼국지나 여러 시대극에서 나오다시피 중국풍은 조선과 비교하면 만두처럼 크고 둥글게 만들어 천으로 감싸는 형태였다. 중국의 상투는 크고 물렁해서 관을 비녀로 가로지를 수 있게끔 흠을 내고 관을 쓸때 관과 상투를 비녀로 꿰어 고정했으나, 조선의 상투는 위의 사진과 같이 비녀로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매듭이었기 때문에 일반 비녀보다 길이는 짧지만 더 튼튼한 동곳이라는 남성 전용 도구를 사용하여 상투를 고정하였고,[14] 끈으로 관을 죄고 갓처럼 남는 끈을 턱 아래로 묶어서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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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이다.
중국을 정복한 북방민족 여진족, 몽골족 등이 호복(胡服)과 호발(胡髮)을 강요하였으나 한족들의 반발로 흐지부지 된 반면 청나라는 '''목을 남기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기지 말라'''는 치발령으로 항거하는 한족들을 대량학살을 감행하면서까지 한족의 속발을 변발로 대체시켰다. 그나마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북방민 왕조의 특징인지 승려와 도사들은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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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갱을 보면 특이하게도 머리를 네 갈래로 땋아서 뒤통수에 고정시킨 형태의 상투머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은 잔머리들을 땋아서 위로 올린거다. 하지만 전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목용(木俑)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머리형태인 걸 봐서 진나라 때 주로 유행하던 머리 형태인 걸로 추정되고 있다.
4. 일본의 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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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성의 머리 모양 변천사.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머리를 길러서 뒤로 묶거나, 관을 썼을 경우 관 밖으로 삐져 나오는 머리카락을 밀어주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관을 쓸 때 그림에 나와있듯, 머리를 막대 모양으로 모은 뒤 비녀로 뚫어 관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무사들의 경우 늘상 투구를 쓰고 격한 운동을 하기 때문에 열을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 필요가 있었는데, 상술한 관을 쓰는 방식 때문에 관을 쓸 때 필요한 머리카락은 남겨둬야 했다. 따라서 관을 고정시킬 뒷머리는 남겨두고 윗머리를 민 스타일이 무사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촌마게의 기원이다.
이후 무사 정권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스타일은 일종의 지배 계층의 최신 스타일로써 서민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에도 시대쯤 되면 사무라이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촌마게를 하였다. 다만 에도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촌마게를 한 건 아니고, 의사, 유학자, 수도승 등은 예전처럼 머리를 밀지 않고 길러서 뒤로 묶는 소하츠(総髪)라는 머리 모양을 했다. 사무라이 중에서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거나 검소함을 신념으로 삼은 사무라이들은 촌마게를 하지 않고 소하츠를 했다.[16]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 8월 12일 신묘 두 번째기사에는 '방망이 상투'라 나온다.
사실 촌마게는 상투의 일종이면서도 변발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강제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법을 공표해 성년 남자 모두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 일본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촌마게를 의식해서인지 한국의 상투를 그릴 때에도 상투가 거의 뒤통수에 가까이 오도록 그리는 일이 잦다.[17]
5. 류큐의 상투
류큐 왕국 사람들도 상투를 틀었다. 카타카시라(欹髻, かたかしら)라고 하는데, 나이 열 다섯이 되면 카타카시라를 만듦으로서 성인식을 했다. 조선에서 일부 사람들이 상투를 할 때 백호를 치듯이, 카타카시라도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솎아낸 다음 묶어서 만들었다. 초창기 중국에서 온 도래인들이 뒷머리에 튼 것을 제외하면 카타카시라는 정수리 방향에 틀었다. 카타카시라는 지화(簪, ジーファー)라고 하는 비녀로 고정했는데,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지화의 재질이 달랐다. 왕족은 금비녀를 썼다.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1일 무자 첫 번째기사에는 유구국의 상투에 대해 '그들의 풍속은 남자는 귀천이 없이 모두 머리 좌각(左角)에 크기가 주먹만한 상투를 틀어감는데 머리숱이 많으면 깎아서 감하고 비단 헝겊으로 싸서 돌린다. 그 비단 헝겊의 색깔은 푸르기도 검기도 붉기도 한데 귀인(貴人)은 누런 색을 사용한다'라고 언급된다.
이 카타카시라 역시 틀어올릴 때 배코를 친것으로 보이는데,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7월 20일 무술 두 번째기사를 보면 표류해 온 류큐왕국 사람들의 특징으로, 상투 하나를 틀고 비녀를 두 개 꽂았으며, 상투 아래의 머리를 깎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 임금인 슌텐(舜天)에게 뿔이 있었는데, 그 뿔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틀어 묶은 것이 카타카시라의 기원이라고 한다.
1879년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 흡수되어 멸망하자 일본의 단발령이 류큐에도 적용되어 카타카시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6. 상투가 있는 캐릭터
7. 기타
주식 관련 용어로도 사용되는데, 최고로 오른 주식 시세가 상투의 끝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
[1] 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혼하지 않아도 상투를 트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걸 외자상투, 건상투라고 부른다.[2] 반대로 나이먹고도 결혼을 못해 상투가 없으면 어른 대접을 못받았다. 구한말에 꼬마신랑이랑 노총각이 같이 찍힌 사진이 있는데, 꼬마신랑은 아직 '애송이'인 노총각과 사진을 찍는 걸 몹시 불쾌하게 여겨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3] 중전의 오빠 또는 남동생 등.[4] 궁중, 도성(都城)이라고도 나온다[5] 어릴때부터 관례를 치를 때까지는 남자일지라도 머리카락를 꼬고 댕기를 드리우는 것이다.[6] 구글 같은 곳에 검색하면 수십 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은 사례가 나오는데,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면 어지간한 터번보다 거대해진다.[7] 일본인과 비슷한 행색을 했는데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표류해 온 것에 대한 기록이다. 정수리를 밀고 머리를 쪽진 것이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투와 같았다고 언급된다.[8] 이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하다. 긴머리를 일일히 샴푸,린스질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꾸준히 오랜시간 해줘야 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상투를 트는 습관은 견인성 탈모를 부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9] 백호 치는 것이 당연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극에 등장하는 것과 달리 쌍상투도 흔했다.[10] 중국인들도 보는 눈과 흑역사 취급이란게 있기에 옛날 정무문과 같은 시대극은 그냥 변발을 없던 셈 치고 단발로 촬영했으며 80년대 무렵엔 존재는 승인하고 그냥 땋은 머리 가발로 촬영했으나 왠지 이제는 변발을 재현하고 있다. [11] 이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의 사극 전담 배우들은 평소에도 삭발이 기본이다.[12] 사실 에도 막부 시절에 여자들도 상투를 틀기도 했었다.[13]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패션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특히 머리자르는걸 금기시하는 유학이 확고히 뿌리내리기 전에.[14] 비녀는 가늘고 긴 고정막대가 1개지만 동곳은 길이가 더 짧고, 굵은 고정막대가 1개거나 고정막대가 2개인 구조다.[15] 영화 무인 곽원갑에서도 중간에 순식간에 지나가긴 하지만 도사로 추정되는, 변발이 아닌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도 다른 남자들은 다 단발을 하고 있는데 도사인 듯 유독 혼자서 속발을 한 사람이 나와 뭐라뭐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비록 속발이 청에 의해 금지되고 일부 도사에게만 허용되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의외로 변발이 없어진 것보다 더 뒤일수도 있을 것이다.[16] 촌마게는 머리를 정기적으로 밀어 줘야 하므로 유지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17] 만화 세계 옛날 이야기의 한국 이야기 "은혜갚은 꿩" 편이 한 예시.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