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안

 



조선의 영의정
《第 53 代》
世宗 7年~
中宗 8年

제53대
1513.4.2~
1513.7.27

成希顔 (1461년 ~ 1513년)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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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우옹, 호는 인재, 시호는 충정.

2. 상세


고조부인 성사달은 고려 때의 인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김용의 난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워 공신에 임명되고 창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증조부의 이름은 성부, 조부는 성효연, 부친은 성찬이며 모친은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딸이다. 어머니가 성희안을 낳을 때 속에서 노인지팡이를 내밀며 '이것을 짚어라. 너의 집안에 복록이 흥창하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148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경연에 참여하여 성종의 눈에 들었다. 연산군 때에는 종2품인 이조참판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시를 써서 바치게 했을 때 풍자적인 내용의 시를 올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당하였다. 이후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정 등과 모의하여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중종을 즉위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됨으로서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삼대장이라 불리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된다. 중종이 즉위한 후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으며 박원종과 유순정이 죽은 뒤인 중종 8년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그해 사망하였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삼대장 졸기 중 사관의 평가가 가장 후한 것이 성희안의 졸기다. 우선 삼대장 중 유일하게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보복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잘 받은 듯하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뒤 자잘자잘한 친인척들까지 죄다 공신에 포함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여 그 빛이 조금 바랜 감이 있다.
이렇게 성희안은 최고 권력에 오른 뒤에도 아주 깨끗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국왕을 낮춰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집과 밥상이 국왕의 것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뇌물을 많이 받고 연산군의 창기들 중 마음에 드는 창기들을 골라 으로 삼고 따로 별실까지 지어 살게 하는 등 부패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된 박원종, 성격이 우유부단해 과단성이 없었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말년에는 여색을 밝혀 독한 약을 먹다가 시력까지 잃었다고 기록된 유순정에 비하면 자기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3. 한국 사극에서


  • 조선왕조 오백년 풍란 - 나영진
  • 장녹수 - 한정국
  • 조광조 - 신종섭
  • 왕과 비 - 신동일
  • 여인천하 - 허현호
  • 대장금 - 홍민우
  • 왕의 남자 - 윤주상[1]
  • 왕과 나 - 맹봉학
  • 7일의 왕비 - 이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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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조판서로 언급된다.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다가 파직되었다가 반정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