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image]
9대

10대

11대
파크루딘 아메드

셰이크 하시나

현직
'''방글라데시 제10대 총리
The Honourable
শেখ হাসিনা'''
'''শেখ হাসিনা ওয়াজেদ
Sheikh Hasina Wazed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

<colbgcolor=#7c0312> '''출생일'''
1947년 9월 28일
'''출생지'''
파키스탄 자치령 동벵골 다카지방 고팔간 현 Tungipara [image]
'''국적'''
방글라데시 [image]
'''학력'''
아짐푸르 여자고등학교[1] (졸업) (-1965년)
다카 대학교 (B.A) (-1973년)
'''가족'''
父: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2]
母: 셰이크 파질라투네사 무집
배우자: M A 와제드 미아 (1968년 결혼)
슬하: 1남 1녀
'''약력'''
아와이 연맹 지도자 (1981년 – )
야당 지도자
'''방글라데시 제10대 총리'''
'''정당'''
'''아와미 연맹''']] (1980년-)
'''지역구'''
고팔라간지 3구[3]
'''의원 선수'''
8
'''재임기간'''
1996년 6월 23일2001년 7월 15일
2009년 1월 6일 – '''현재'''
'''직업'''
정치인
'''종교'''
이슬람교
'''SNS'''

1. 개요
2. 생애
3. 정치 활동
4. 총리 재임
4.1. 1기 (1996년 ~ 2001년)
4.2. 2~3기 (2009년 ~ 현재)
5. 독재
6. 가족 관계


1. 개요


[image]
방글라데시여성 정치인. 8선 의회 의원이며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이후 2009년 이래 다시 총리로 집권하고 있는 '''독재자'''.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 독재자이다.[4]
여러모로 박근혜와 공통점이 많은데 한때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후광을 업어 집권했다는 점, 20대에 부친과 모친이 살해당한 점, 여성 지도자라는 점, 부녀 지도자라는 점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옆나라의 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역시 여성 지도자에 부녀 지도자인 점, 아버지가 해당 모국에서 독립운동가에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점,아버지 후광으로 집권한 점, 독재자인 점도 비슷하다.
শেখ(Sheikh)는 아랍어 "شيخ"에서 유래한 어휘로서 아랍어로는 방언에 따라 '시흐' , '셰흐', '셰이흐', '샤이흐' 등으로 발음되지만 벵골어발음은 '셰크'이다. 하지만 '셰이크'라는 발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문서의 제목도 '셰이크 하시나'가 되었다.

2. 생애


1947년 9월 28일 수도 다카 인근의 툰기파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대 및 4대 대통령이자 2대 총리였던 방글라데시의 국부이자 독재자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고 어머니는 한때 영부인이었던 셰이크 파질라툰네사 무집이었다.
출생 당시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이라고 하여 파키스탄의 일부였으나 언어, 민족, 문화 등에서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서파키스탄과 심하게 대립했다. 서파키스탄에 있던 중앙정부는 동파키스탄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탄압했는데, 이 때 아버지 무지부르는 이러한 서파키스탄 정권의 탄압에 분노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하시나의 젊은 시절은 언제나 공포 그 자체였다. 애초에 파키스탄 자체가 예전부터 상황이 막장이었고 그러한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방글라데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게 있어서 인구가 너무나도 많았던 동파키스탄은 상당한 골치거리였는데 그러던 1970년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아 유리했던 동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당시 아버지가 이끌던)이 승리하자 중앙정부는 즉각 무효를 선포하고, 이후 독립을 위한 긴 내전이 시작된다. 하시나는 이 때 할머니댁으로 보내졌고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다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학생운동에 동참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이룩하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버지 무지부르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반대파들과 반정부세력들의 내란, 난동이 끝없었고 이에 무지부르는 헌법을 개악하여 독재자가 된다. 하지만 반대파들의 반발은 끝없었고 결국 1975년 쿠데타가 일어나 아내인 파질라툰네사와 아들들과 함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서 죽는다. 하시나와 여동생은 당시 서독(후에는 인도)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은 건졌지만, 28세라는 혈기왕성한 나이에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겪은 것이다.

3. 정치 활동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하시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1981년 방글라데시로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아와미 연맹의 총재로 선출되었는데 36년이 지난 2017년 현재까지도 총재로 재직 중이다.
그러나 바로 정치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의 실책 등이 문제가 되면서 처음에는 '''가택 연금''' 그 자체였다. 더더욱이나 당시에는 철저한 군사독재 시절이었는데, 같은 시기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비슷했다. 군사정권은 무지부르의 세력들을 "적폐"로 규정하고 노골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부르의 딸인 하시나 또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러던 와중 지아우르 라흐만 전 대통령의 미망인인 칼레다 지아가 총재로 있었던 국민당이 하시나에게 손을 뻗었는데 이후 둘은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웃긴 것은 지아우르는 '''무지부르를 쫓아낸 주역'''이라는 점이다(...).
1986년 대통령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는 일부 야당에 대한 해금령을 내리고 국민당과 아와미 연맹은 곧바로 동년의 총선에 참가한다. 당시 총선은 말이 많았는데 애초부터 '''계엄령''' 하에 치러진 총선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뻔할 뻔자이고, 칼레다 지아의 국민당은 이러한 총선에 아예 보이콧을 선언함으로서 총선은 매우 불안한 양상으로 치닫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선전하기는 했으나, 에르샤드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견제를 못 이기고 '''이 따위 국회의원 안 해!'''라며, 1년 만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 의회는 곧바로 해산되었다. 그 후 1991년 제대로 된 총선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르샤드 정권을 향한 민심은 폭발하였고, 1990년부터 전국적으로 에르샤드를 축출하기 위한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에르샤드는 연말에 사임하였고, 이듬해 총선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한데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아와미 연맹은 제1야당이라는 기록을 이루게 된다. 비록 이것이 국민의 승리였지만, 이를 계기로 칼레다 지아와 셰이크 하시나는 기필코 틀어지고 만다. 이후 둘은 서로를 적대하기에 이르렀고, 1994년 마구라 선거구 의원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보궐선거에 한번 도전해 보지만, 국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국민당 정권은 기대가 높아진 민심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민주화 또한 별다른 전진을 보지 못하면서 차후 아와미 연맹의 승리가 유력해졌다. 아와미 연맹은 칼레다 지아 총리의 전적인 사퇴와 임시정부 구성을 요했으나, 정부는 이를 쿨하게 씹었다. 그러자 아와미 연맹은 사상 유례 없는 대투쟁을 열었고, 결국 칼레다 지아는 무하마드 하비부르 라흐만을 필두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사임한다. 드디어 1996년 2월 15일 치러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압승했으며, 이로서 하시나는 총리로 오르게 된다.

4. 총리 재임



4.1. 1기 (1996년 ~ 2001년)


총리에 오른 하시나는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자, 국가를 반역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사형시킨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일명 '보상법'을 곧바로 폐지한다. 인도갠지스 강의 물을 30년 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협약에도 서명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관영 중심의 텔레콤 사업을 민영으로 전환하는 등 개혁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외국계 회사들이 100% 자회사를 운영하는 것 또한 허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하락하였고, 결국 2001년 총선에서 또다시 국민당에게 정권을 탈환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칼레다 지아가 여전히 국민당 총재였기에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4.2. 2~3기 (2009년 ~ 현재)


그러나 칼레다 지아의 2기 또한 실책으로 가득했으며, 2004년에는 전국 동시다발 테러 사건[5]이 발생하는 등 치안은 막장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노린 아와미 연맹은 2005년 다카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며 다시금 지지율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칼레다 지아는 2006년 말 사임한다. 그러나 이후 국민당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한 채 권한대행들만 선출하는 상황에 놓였고, 시위는 끝을 볼 줄 모르게 된다. 이 와중에 40명이 사망하면서 국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진다.
이 와중이던 2007년 경찰에 의해 강요죄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국민당 정권은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2008년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석방되었으나, 이미 민심은 국민당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2008년 총선에서 재집권하면서 권력을 탈환한다.

5. 독재


한국에서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 자체가 썩 알려진 편도 아니며 이 나라의 정세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서 다들 모르지만, 이 사람의 행보를 보면 독재자가 맞다. 한때는 방글라데시 민주화를 이끌다 못해 정치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에 뛰어든 주역 중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되려 독재자가 되었기에 정확히는 독재자가 된 여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선 이웃나라인 인도인디라 간디와도 비슷하다.
1991년 민주화 이래 방글라데시는 헌법 등에 독소 조항을 명시하는 나라가 아니며, 공식적인 정치범수용소라던가 반대파 탄압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는 대신에 궐석 재판을 열어서 정적을 사형에 처하는 일이 잦고 사형을 언도받은 '''정적을 공공연히 암살'''하는 등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6]
이 글을 읽어보면 하시나 정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매일매일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던 사람이 실종되었는데 나중에 발견되었을 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거나 하는 등 민주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2014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압승하면서 총리직을 연임하게 되었는데 방글라데시 역사상 이렇게 총리가 연임하는 일은 그닥 없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부정선거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을 정도.
물론 위에서 언급한 링크에서처럼 하시나를 히틀러스탈린 등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최소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대놓고 독재를 선포하면서 경직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몰래몰래 정적을 살해하는 것은 독재의 종류가 어떻든 간에 '''독재는 독재'''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할 뿐이다.
허나 하시나가 이러한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다음 총선에서 심판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장 2014년의 방글라데시 총선을 보면 아와미 연맹이 234석을 얻어 기존의 230석보다 오히려 4석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압도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정작 강한 상대였던 에르샤드 국민당은 고작 34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어쩌면 방글라데시에서 하시나의 지지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정작 하시나를 견제할 상대인 칼레다 지아의 국민당은 이번 선거에 '''보이콧'''했다. 애초에 선거 결과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었으며, 칼레다 지아가 이를 이유로 보이콧하면서 가장 인지도가 높던 제1야당이 사라졌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아와미 연맹을 뽑는 '''차악'''의 선택을 했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더더욱이나 언급했다시피 하시나는 명백한 '''독재자'''이다. 애초에 독재자가 한번 집권하면 이를 끌어내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가능하며, 사람들은 독재자를 두려워하며 그냥 입 다물고 사는 것이 바로 독재정권이다. 혹시나 도전했다가는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곳이 바로 독재국가이다. 이러니 사람들은 독재정권에 항의하지 않고 그냥 입 다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사실상 '''방글라데시 최악의 독재자'''라고 봐도 무관한 하시나 정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망이다. 더군다나 이 사람의 아버지가 방글라데시에서 사용하는 지폐의 인물이니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하시나는 지난 총선의 논란을 간주하더라도 인기가 꽤나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셰이크 하시나가 집권한 2010년 이후 방글라데시는 연 6~7%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으며, 제조업 비중도 30%대로 꽤 높은 편이며, 주기적으로 외환위기에 허덕이는 파키스탄하고 비교해봐도 경제 상황이 꽤 건실한 편이다. 만약에 인기가 없었더라면 '''234석'''을 차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칼레다 지아는 총리 재임 중 배임 혐의로 기소된 상태이며 2018년 2월 1심에서 5년형이 선고되었다. 이로써 하시나와 이와미 연맹의 지위는 좀 더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6. 가족 관계


1968년 핵과학자인 M. A. 와제드 미아와 결혼하여 슬하 1남 1녀를 두고 있다. 와제드가 2009년 사망함으로서 하시나는 미망인이 되었다. 자식들은 미국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영국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인 튤립 시디크(Tulip Siddiq)를 조카로 두고 있다. 하시나 총리가 시디크 의원의 이모이다.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이었지만 군사 쿠데타로 인해 사형당했으며 사후 2012년 권종에서 방글라데시 타카의 모든 권종의 모델이 되었다.

[1] Azimpur Girls High School.[2] 현행 방글라데시 타카 권종 전권의 모델이다.[3] 다카 주 고팔라간지 구 위치[4] 장칭이나 이멜다 마르코스엘레나 차우셰스쿠권력을 누린 여성 독재자들은 많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남성 권력자의 후광을 받아 호사와 권세를 누렸다. 반면 하시나처럼 당당히 최고통수권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독재를 하는 여성 정치가는 드물다.[5] 2004년 8월 17일 오전 수도 다카를 비롯한 전국 456개 지역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졌다.[6] 박근혜처럼 아버지를 잃은 탓에 권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