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침

 




'''孫綝
손침'''

'''작위'''
영녕후(永寧侯)
'''최종직위'''
승상(丞相) 겸 형주목(荊州牧)
'''성씨'''
(孫) / 고(故)
''''''
(綝)
''''''
자통(子通)
'''생몰연도'''
231년 ~ 258년12월 8일
'''고향'''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승상 재임기간'''
258년 10월 21일 ~ 258년 12월 8일
가족관계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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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부'''
효의왕 손종(孝懿王 孫鍾)
'''종증조부'''
시조 무열황제 손견(始祖 武烈皇帝 孫堅)
'''재종조부'''
태조 대황제 손권(太祖 大皇帝 孫權)
'''재종조부'''
장사환왕 손책(長沙桓王 孫策)
'''재종숙'''
폐제 손량(廢帝 孫亮)
'''재종숙'''
경황제 손휴(景皇帝 孫休)
'''증조부'''
손정(孫靜)
'''조부'''
손고(孫暠)
'''아버지'''
손작(孫綽)[7]
'''작은아버지'''
손공(孫恭)
'''종형'''
손준(孫峻)
<:> '''형제''' ||<(><bgcolor=#fff> [[손거|{{{#000 손거(孫據)
]], 손은(孫恩), 손간(孫幹), 손개(孫闓)
}}}}}}
1. 개요
2. 생애
2.1. 막장
2.2. 최후
3. 평가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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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나라의 황족으로 자는 자통(子通).
손견의 아우인 손정의 증손자며 손준의 사촌 동생으로 손은의 형이다. 할아버지는 손호, 아버지는 손작이다.[1]

2. 생애




2.1. 막장


후사가 없던 손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편장군으로 임명되었다가 손준이 죽자 그에게 뒷일을 부탁받아 시중, 무위장군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총괄했다. 손준을 대신해 조정의 정사를 주관했는데 여거는 이를 듣고 분하고 두려워하여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했으며 등윤과 함께 손침을 폐출하려 했다. 손침은 손준의 북정군을 되돌려 여거를 공격해 자살하게 했으며 등윤과 여거의 삼족을 멸했다.
그 후, 대장군에 임명되고 가절을 받았으며 영녕후에 봉해졌는데 손침은 자신의 존귀함에 의지하여 매우 오만했으며 항상 무례하게 행동했다. 손준의 당제이자 제갈각을 죽이는 음모에 가담한 손려는 손침 집권 후 대우가 얕아지자 장군 왕돈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의 진동대장군 제갈탄사마소 정권에 대항하여 거병하고 오나라에 투항을 청하자 손침은 문흠, 당자, 전단, 전역, 주이 등에게 병사 3만 명을 주어 구원하게 했으나, 이들이 오히려 참패하여 손침은 큰 원망을 샀다.
손침은 황제 손량이 정무를 본 이래로 많은 힐문을 받게 되어 두려워했다. 당시 손량은 큰누나 손노반, 장인 전상과 그의 아들 전기, 장군 유승과 함께 손침을 죽일 모의를 세웠는데 전상은 손침의 사촌 누나였던 자신의 부인에게 이 음모를 알렸다. 전상의 부인은 손침에게 알렸고 손침은 결국 손량을 폐출하고 반대하는 신하는 죽이고 일족은 유배보냈으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 낭야왕 손휴(孫休)를 황제로 세웠다.
득의양양해진 손침은 오자서의 사당을 불태우고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참수했다. 손침의 네 아우가 모두 후작에 임명되었고 모두 근위군을 관장하여 손침 집안의 권력은 천자를 기울게 할 지경이었다.

2.2. 최후


손침의 권력은 대단했으나 손침과 손휴는 서로 두려워하게 되어 손침은 무창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손휴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장군 위막이 손침이 밖에 있으면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으며 무위사 시삭은 손침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했다.
마침내 영안 원년 12월 8일, 건업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손휴는 정봉, 장포 등과 함께 계획했는데 이날 왠지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모래가 날리자 손침은 불안하여 병을 핑계삼아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손휴가 사자 10여 명을 보내자 황제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나섰는데 심복들이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손침은 사양할 수 없다면서 미리 군대를 정비하고 관소에 불을 질러 신호하라고 일렀다. 손침이 궁궐에 온지 얼마 안되어 관소에 불이 나자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손휴는 밖에 군사들이 많은데 왜 나서냐고 말렸지만 손침은 기어이 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정봉과 장포는 곁에 있는 자에게 눈짓하여 손침을 사로잡게 했고 묶었다. 이 때 손휴와 손침의 대화가 걸작이다.

손침: "원컨대 저를 교주로 유배보내 주십시오."

손휴: "경은 어찌하여 등윤과 여거를 유배보내지 않았는가?"

손침: "그럼 원컨대 저를 관가의 노비로 만들어 주십시오."

손휴: "경은 어찌하여 등윤과 여거를 관가의 노비로 만들지 않았는가?"

손휴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침의 목을 베고 그의 삼족을 멸했으며 손준의 무덤을 파헤쳐 인수를 빼앗아 관을 부쉈다가 다시 묻었다.[2] 이는 손노육 등을 죽인 죗값으로 그 외에 손준과 손침에게 죽은 제갈각, 등윤, 여거 등은 모두 사면되어 이장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 제갈각 등의 무리로서 유배갔던 이들도 다시 불러들이면서 손준과 손침이 같은 황족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황실 족보에서 삭제해 그들에게 손씨 성을 없애 (故)를 붙여 고준(故峻), 고침(故綝)이라 불렀다.

3. 평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오서 제갈등이손복양전〉 끝에 손준과 손침에 대해 '''흉악한 행실이 가득해 본래부터 논할 가치도 없는 자'''라고 깠다.[3] 아예 고침(故綝)이라고 해서 손씨 가문 족보에서 빼버린 수준인데 난신적자로 날뛴 손준에 이어서 손침은 아예 '''멀쩡한 황제까지 폐위시켜 버렸다.''' 손휴가 괜히 손침을 거꾸러 뜨린 후 역률에 준하는 죄로 죽여버렸겠는가?
어찌나 수치스러웠는지 손준, 손침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손휴 입장에선 황실의 수치로서 이들의 악행을 묻어버렸다. 정적제거 밖에 않았다고는 하나, 정적제거도 합당한 이유로 손준, 손침 형제가 진행했나? 그리고 이 형제들과 손노반의 존재 자체가 이궁의 변에서 살아남은 손패파의 횡포를 상징하는 것이니만큼 그녀와 붙어먹은 손준, 손침 형제들이 욕을 먹는것은 당연하다. 즉 이들의 횡포는 이궁의 변의 연장 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갈각이 섭정하던 시절 동흥제 전투로 한창 나라의 권위가 잡히던 시절을 제외하면, 이들 형제의 시대를 거처, 손휴, 손호 시대까지 손오는 내정적으로는 항상 엉망인 상태가 진행되었는데 당연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이 형제들의 열전을 왜 '제갈등이손복양전'으로 넣고 그들이 제거한 제갈각이나 손휴 시절의 난신 복양흥과 같이 넣었는지 생각해보자, 제갈각도 합비 신성에서 20만 꼴아박기 전에는 제정신이었다. 손준, 손침도 근본적으로 다를게 없다.
손준과 달리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세등등하던 손침이 스스로 손휴 곁을 떠나 무창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주지육림이라도 만들어보고 싶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이미 국정을 농단한 쿠데타 세력인데도 멍청하게 본인 스스로 황제의 곁을 떠났다는 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손침과 손휴가 서로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손침 입장에선 신변의 안전 문제가 가장 와 닿는 화두였던 듯 싶지만 애초에 손휴는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내세운 얼굴마담 정도였다. 실권을 장악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바지사장 손휴가 무서워 곁을 떠난 걸 보면 천성이 겁이 많고 지능도 많이 떨어지는 인물로 보인다. 자신의 권력이 황제를 겁박하는 데서 나온다는 단순한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막장이긴 하지만 손준이 일신의 무용[4]과 일정 수준의 지능, 최소한의 정치 센스는 갖춰 적어도 생전엔 자신이 거머진 권력을 어찌어지 유지했다는 점을 보자면 손침은 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
집권했을 때 만 25세, 죽었을 때 만 28세[5]로, 단명이 많던 오나라에도 꽤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권력을 휘둘렀다. 손책처럼 건국단계도 아닌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시점에서 이런 인간이 날뛸 수 있었던 건 역시 이궁의 변으로 인재들이 거의 바닥났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오나라는 이런 놈이 실권을 장악할 정도로 정치구조가 부실한 상황이었는지라 결국 손호의 대에 가서는 곽마가 건업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더 킹 오브 변방인 무려 '''일남'''[6]이라는 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바로 멸망해버린 것이다.

4.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11
[image]
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능력치는 백하팔인 수준까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매우 낮은 능력치를 가지고 나온다. 다른 건 다 백하팔인 수준으로 바닥인데 지력만은 그래도 60대를 찍는 정도. 사촌 형 손준과 마찬가지로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9/무력 40/지력 59/정치력 8로 처참하지만 투함 하나는 해전에 유용하다.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모략계 병법인 혼란, 책략계 병법인 매도를 가지고 있다. 의리가 0이라서 다른 손씨보다 아군으로 만들기 쉽기도 하다. 문제는 야망도 15라서 배신이고 독립이고 뭐든지 무시무시할 만큼 잘 한다는 거...9에서 딱 4명(손침, 공손연, 동탁, 원술)뿐인 독보적인 수치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5/무력 40/지력 65/정치력 8/매력 6으로 총합이 144밖에 안된다. 특기가 4개로 상업, 혼란, 위압, 간첩인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느낌이다. 특히 정치력이 8밖에 안 돼서 상업 특기가 의미가 없다.
삼국지 11에서도 능력치가 안 좋다. 가장 높은 지력이 65에 능력치 합이 141. 손준은 그래도 가장 높은 무력이 70이라도 되는 반면 손침은 그야말로 답이 없고 처형당할 때의 대사도 답이 없다.

기, 기다려, 부탁이다! 이제 두번 다시는 저항하지 않겠다. 기, 기다려........으악!

삼국지 12에 나온 그의 일러스트는 매우 간사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손을 턱에 올리고 있다. 손준과 더불어 일러스트에서도 대우가 좋지 않은 편. 근데 전법이 쓸만한 '''전공성강화'''이다. 지력도 65이라서 약간이나마 쓸 만하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8/무력 55/지력 65/정치력 17. 특기는 수영 4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수영으로 전법은 창병수비진이다. 사촌 형과 마찬가지로 관리 음성으로 들리는데 거슬린다면 PK를 할 때 난폭 음성으로 변경해주자.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28, 무력 46, 지력 65, 정치 17, 매력 6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3배, 무력이 9 하락했다. 개성은 징세, 공명, 악명, 탐욕, 주의는 아도, 정책은 지세연구 Lv 2, 진형은 봉시, 전법은 도발, 구축,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등윤, 손일, 여거, 왕돈, 주거다.
삼국전투기에선 사촌형인 손준이 폭주형제 렛츠&고의 세이바 레츠로 나와서 동생인 세이바 고로 나왔다. 덤으로 손준과 손침이 세이바 형제로 패러디된 건 폭주를 했기 때문으로 즉 막 나갔기 때문이다. 손휴가 손침을 주살한 후 역사대로 손준과 손침을 고씨로 개명시키지만 그냥 고씨라고만 나와 단순히 원래 있던 고(高)씨로 개명시킨건지, 아니면 원래대로 고()씨로 개명시킨건지 이 만화만 봐서는 알 수 없다.

[1] 손준의 아버지는 손공.[2] 삼국지연의에서는 부관참시를 해서 목을 베었다.[3] '제갈등이손복양전'은 위서의 '왕관구제갈등종전'과 촉서의 '유팽요이류위양전'처럼 뒤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을 한데 묶은 열전들이다.[4] 손침과 더불어 개판 정치로 손오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막장이긴 하지만 사서에 "어려서부터 궁마에 뛰어났고 예리하고 용감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고, 또 제갈각을 주살할 때 본인이 직접 칼을 들고 실행에 옮긴 걸 보면, 그것도 제갈각을 호위하던 제갈각의 측근 장약에게 칼까지 맞고도 제갈각과 장약 둘 다 손수 참살에 성공한 걸 보면 일신의 무용은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선 손침의 제갈각, 장약 살해는 일기토 기록일지도...[5] 죽은 날이 양력으로 259년 1월 18일이다.[6] 여기가 무려 현재의 베트남 중부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