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성
1. 소개
前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외야수로 '''KBO리그의 대표적인 저니맨'''. 現 ㈜저니맨스포츠그룹 대표 겸 저니맨 외인구단의 구단주 겸 한국독립야구연맹 사무총장.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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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경주고등학교와 계명대학교 사회체육학과(1990학번)를 졸업하고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방위 복무를 마치고 이듬해 백인천 감독을 만나 기량이 한층 성장하게 되는데, 1997년 .296/.394/.494의 3-4-5를 아깝게 못찍은 비율스텟에 22홈런 33도루로 20-20 클럽에 가입하며 부동의 리드오프로 자리매김했다.[3][4] 2승 2패로 맞선 1997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기선을 제압하는 선두타자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5]
1998년에도 13홈런을 기록했었지만 그 중에 절반 가까이가 1회 선두타자 홈런이었다. 강동우와 번갈아가며 출전하였지만, 1998년에 새로 부임한 서정환 감독과의 궁합이 문제였다. 1998년 서정환 감독이 부임한 후 신인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 기회를 조금씩 잃어 가면서 저니맨 인생이 시작되었다. 훗날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서정환과 궁합이 전혀 맞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정환은 2군 코치이던 시절 최익성에게 특유의 타격폼을 놓고 대놓고 악담을 퍼부었고 백인천 쉴드가 없어지자 트레이드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6]
1998 시즌 종료 뒤 노장진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됐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한화 이글스 사장이 과감한 팀 컬러의 변경 목적으로 진행시킨 것이었는데, 1998 시즌 도중 임명된 이희수 감독은 현장에 대한 프런트의 월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결과 초반 이영우의 부상으로 최익성이 활약했지만 이희수 감독이 고집한 의견인 '''"트레이드를 실패시켜야 현장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익성은 대타 아니면 2군으로 한정된다. '''이 때부터 선수 인생이 꼬인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주전으로 활약해 팀의 우승에 기여하는 등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1차전에서 역전 결승홈런을 쳐 시리즈 전체 분위기를 한화가 주도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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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시절.
하지만 1999 시즌 종료 후 선수협 결성에 적극 동참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구단에 의해 투수 송유석, 내야수 신국환과 맞바꾸는 형태로 LG 트윈스에 트레이드 됐다.
2000 시즌 종료 후에는 홍현우의 FA 이적에 따른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그냥 잠깐 스쳐지나간 이적생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타이거즈에서 굵직굵직한 이정표를 많이 남긴 선수이다. 일단 2001년 7월 29일에 벌어진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2번 타자'''이다.[7] 또한 2001년 8월 2일에 벌어진 첫 KIA의 경기에서는 인천 SK전에서 '''KIA 타이거즈 역사상 1호 홈런'''을 친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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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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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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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시절.
2002 시즌 도중에는 장정석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됐다가 2003년에 방출됐다. 2004 시즌을 앞두고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가 방출됐고, 2005 시즌을 앞두고는 SK 와이번스로 이적하는 등 '''쌍방울, 롯데, 두산 유니폼만 빼고 다 입어 봤다.'''[8][9] 그리고 2005 시즌 후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당했다.
방출 당한 후에는 마이너리그 입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실패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SK 와이번스의 입단테스트를 받았지만[10] 실제로 입단하지는 못했고 결국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강남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MBC 주말 드라마 2009 외인구단에 출연했으며, 2010년 3월 자신의 자서전격인 저니맨이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미국, 일본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 참고로 저 책을 출판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자, 스스로 출판사를 세웠다.
현재는 IPTV 스포츠채널인 IPSN/I Golf(둘다 같은 계열채널임)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중. 그리고 대놓고 편파중계라는 채널의 특성상 삼성 라이온즈를 위한 편파해설 작렬! 그러나 IPTV다 보니 해설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지못미.
2011년 9월 14일 맞선 프로그램 짝에 출연했다.
2012년 9월부터 이숭용 XTM 해설위원, 재활전문가 어은실 박사와 함께 프로야구에서 방출됐거나 입단에 실패한 선수들을 위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저니맨 야구 육성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숭용과 최익성은 친구이다.[11]
압구정에서 소주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름이 <꼬추>다.
여담으로 2009년에 사사방과의 인터뷰에서 서정환을 공개디스한 적이 있다. 아예 직접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돌직구를 꽂고 있는데, 그만큼 서정환에게 원한이 많았던 것 같다.
2015년 12월부터 김용민과 함께 지식라디오 김용민, 최익성의 스포츠인물평전을 진행하고 있다. 링크
1편은 최익성 본인의 이야기이고 2편인 12월15일자 방송에서는 스승이었던 백인천이 출연해서 최익성과 서정환과의 불화를 증언, 확인시켜 주었다.
2016년 5월 독립구단인 저니맨 외인구단 창단을 발표했다. 연천 미라클의 운영 모델을 따라갈 것이라고 밝혔으며, 2017년 4월 24일 한국독립야구리그가 창설되면서 이에 참여하였다.
2017년 12월 20일 한국독립야구연맹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임됐다.
4. 논란
독립야구단 창설 계기와 다르게 말이 바뀐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본인의 페이스북에 저니맨에 있는 선수 가족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이러한 댓글이 달기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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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해 동안 고작 삼성 라이온즈 한 군데만 테스트 받았고 그것도 알고 보니 그 쪽에는 이미 합격자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들러리 하러 애들을 먼 곳까지 보냈냐는 질타가 나왔고 테스트를 제대로 준비할 환경조차 조성되지 않으면서 독립야구단만 유지에 급급하느냐는 비판적인 여론이 점점 조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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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글을 쓴 댓글자에게 최익성 대표의 응답은 독립야구단은 프로구단 테스트 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며 반박한다. 하지만 어느 분이 최익성 대표는 처음 선수를 모집할 때 이렇게 홍보를 했었다면서 선수 모집 때 쓴 글을 가지고 반박하면서 더욱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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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9년에 연천 미라클과 파주 챌린저스가 경기도독립야구연맹리그로 옮겨 버리고 의정부 신한대학교 피닉스마저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경기도리그에 참가하면서 저니맨 외인구단과 경기를 갖지 않는 등 한국독립야구연맹과 KIBA 드림 리그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최익성 자신은 침묵 중이다.
5. 평가
수차례의 부상을 이겨낸 호타준족형이자 장종훈 못지않은 연습벌레 스타일로 그 성장이 기대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가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일찍 떠나야 했던 비운의 선수. 다만 '''한 시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사라진 선수는 정말 많고 뛰어나다고 평가 받았지만 재능을 온전히 터트린 경우도 많지 않긴 하다.''' 최익성은 그런 선수를 대표할 수 있는 예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A급 시즌을 한차례 보냈고 잠재력은 인정 받았지만 자리잡지 못하고 각 구단을 떠돌게 된.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당시 삼성 코치였던 서정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98년 서정환이 감독이 되자 잠깐 1번타자로 뛰더니 여지없이 신인 강동우에게 1번타자를 내주었다.[12] 그리고는 1998 시즌 후 바로 노장진과 트레이드. 한화 시절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인해 만년 유망주에 머물렀던 노장진도 이적 직후 1999년 15승을 찍으며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고 2002년에는 중무리 투수로 뛰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하긴 했지만 이후 음주와 숙소 이탈 등으로 인해 롯데로 트레이드되었으나 다시는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그래도 1999년 한화에서 우승반지는 한 번 껴봤다. 그리고 1차전 사직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홈런을 때리면서 한국시리즈 역사상 4번째 대타 홈런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다만 현대 시절이었던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에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자신의 야구관이 확고하고,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연습하고 고민하며 해결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인지 처세술은 그닥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간 상황에서 최고의 1번타자로 2할대 중후반의 타율에 15-20개 이상의 홈런과 25개 이상의 도루는 계속 할 수 있는 기량임에도 늘 어떤 이유에선지 보이지 않았다. 부상이 잦기도 했고. 해태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의 기대[13] 에도 그 성적을 못 낸 게 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여담
- 2002 시즌 도중 KIA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하도 갑자기 된 트레이드여서 최익성을 본 KIA 선수들이 너 왜 현대 유니폼 입고 있냐? 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 때 당시 KIA 감독이었던 김성한과 마찰이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다.[14]
- 선수들 사이에서도 몸짱으로 유명했다. 밴드테라피 관련 책을 발간한 적도 있다.관련기사
- 마구마구에서는 97년에 엘리트가 하나 있는데 전력포인트가 1495로, 이 수치가 같은 타자로는 96 양준혁[15] , 83 장효조[16] 정도이다. 상당히 많이 좋은 카드로 재조명한 것.[17]
7. 연도별 성적
8. 관련 문서
[1] 사회체육학과 (1990학번)[2] 외야 전 포지션이 가능하지만, 주포지션은 중견수.[3] 그 덕에 마구마구에서는 최익성이 배영섭이 등장하기 전 무려 6~7년 간 부동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4] 그와 한시즌에 가장 비슷한 성적을 올린선수는 1992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이순철.(.309/.389/.494 21홈런 44도루)[5] 그러나 삼성은 투수층이 얇아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6] 그러나 이후 홍현우의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자 하필이면 그 당시 2군 코치도 서정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 사실 해태의 마지막 예정경기는 그해 7월31일 인천 sk전이었으나 우천으로 취소되면서 마지막 선발 2번타자가 되었다.[8] 두산은 원래부터 화수분 야구로 외부 선수 영입이 적었고, 롯데는 알다시피 비밀번호 찍느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롯데로 갈 뻔하긴 했는데 본인 자서전에 따르면 KIA에서 현대로 트레이드 되지않았다면 삼성 시절 감독이었던 당시 롯데 감독 백인천이 트레이드해 오려고 했다고 한다.[9] 키움 히어로즈와 NC 다이노스, kt wiz는 애시당초 최익성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인 2008년, 2011년, 2013년에 창단됐기 때문에 예외다. 최익성이 뛴 구단 중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단을 비롯한 인적 자원을 물려받은 키움 히어로즈는 말 그대로 인적 자원만 물려받았을 뿐, 계보나 우승 기록 같은 건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엄연히 다른 구단이다.[10] 이 당시 베테랑을 선호하는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직후라서 테스트를 받아 현역연장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11] 90학번, 94 프로 입단[12] 97년의 최익성과 98년의 강동우를 비교하자면 그동안 (보통 수비부담 때문에 8~9번을 맡는 포지션인)유격수 류중일이 1번을 맡아야 했을 만큼 1번타자 기근에 시달리던 삼성이 확실하게 얻은 1번타자이면서 호타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익성과 강동우 모두 1990년대 말 포스트 이종범을 노릴정도로 장타력과 정확도, 도루능력과 수비능력 모두 갖춘 1번타자였다. 타팀이 보기에는 매우 복에 겨운 케이스였다. 특히 비슷한 타율(.296 vs .300)에 누적스텟은 최익성의 우세였다. 게다가 최익성의 1998년 성적은 주전이 아닌 대타, 대주자, 대수비 등등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62에 13홈런 20도루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강동우가 펜스에 부딪혀 다리 골절상을 입은 뒤 다시는 신인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후 박한이를 1번 리드오프로 내세웠지만 출루에 강점을 갖는 타입의 유형이 다른 리드오프였다. 이후 삼성에서 스피드를 내세우는 유형의 리드오프는 2011년 배영섭이 등장하기 전까지 없다시피 했다. [13] 김성한 감독은 해태-KIA 감독 시절 장타력이 있는 타자들을 많이 영입했던 바 있다. 한 때 두산 김동주를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려고 시도한 바 있고 신동주, 이동수에 최익성까지.[14] 근데 마찰이 있었다고 무조건 맹신할 수 없는 게 LG에서 최익성을 데려오는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김성한 본인이었다.[15] 타격왕, 최다 안타왕, 장타율왕을 달성한 시절. 그 외에도 3루타와 도루를 제외하고 모든 기록에서 순위권에 들어온 시절.[16] 첫 해에 타격왕, 출루율왕으로 골글을 찍었던 시절.[17] 또, 퀵스랑 스피드안정감이 있어서 수비가 망할일이 없고, 엘리트이기 때문에 베테랑으로 어느 덱에도 갈 수 있기에 삼성덱이면 대부분 들어가있는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