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야구)
1. 소개
90년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보낸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좌완 투수이다.
2. 선수 시절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뒤 1989년 MBC 청룡의 1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외야수 노찬엽[3] 등과 더불어 입단했다.
국가대표 좌완 에이스로서 기대를 받았다. 신인이던 1989년 OB 베어스와의 개막전에 선발로 등판, 장호연과 맞대결을 펼치면서 5:1로 완투승을 기록했다. MBC 청룡 최후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서 팀의 개막전 연패 행진을 끊는데 공헌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이는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데뷔전을 완투승으로 장식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의 청룡은 막장의 극한을 달리던 팀이라[4] 시즌 내내 7승에 그쳤다.
어쨌든 김건우의 교통사고로 에이스를 잃고, 정삼흠은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항명 사태를 일으켜 무기한 2군행 처분을 받는 등 투수진이 와해 직전이던 청룡에 간만에 등장한 쓸 만한 신인 투수로 주목을 받고 성장이 기대되었으나, 팀이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어 LG 트윈스로 바뀐 첫 해에는 시즌 개막 직전에 싸움을 일으켜 부상을 입고 새로 부임한 백인천 감독의 눈밖에 나서 고생했다. 결국 그 해 5승에 그쳤지만, 1990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삼성 라이온즈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 승리 투수가 되면서 우승에 공헌했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김용수, 정삼흠과 더불어 12승을 거두며 생애 첫 시즌 10승을 올렸고, 1992년, 1993년에는 방위 복무로 인해 홈 경기 한정으로 등판 회수가 제한되면서 8승, 9승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았다. 그러나 1994년에 또 다시 부상으로 3승에 그쳤고, 김기범의 공백은 갑툭튀한 신인 인현배가 메웠다. 그러나 이 해에도 1994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구원으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면서 묘하게도 팀이 우승한 두 해 모두 한국시리즈 3차전 승리 투수가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5][6]
1995년에는 13승으로 개인 최다승을 거두며 야구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으나 팀은 시즌 막판 침몰로 정규시즌 2위로 밀려났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롯데에게 덜미를 잡히며 탈락했다. 묘하게 우승을 한 해에는 부상 등으로 큰 활약을 못하고 그 다음해에는 10승 투수가 되지만 팀은 우승에 실패하는 등 팀과 박자가 잘 안 맞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6년부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력 저하와 어깨 부상 등으로 기량이 저하되었고, 천보성 감독이 세대교체를 진행하자[7]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1998년에는 무려 76경기에 등판하면서 필승조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선수협 사태'''가 벌어진 후 구단과 생각이 틀어졌고, 구단에서는 그의 은퇴를 말렸지만 결국 2000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8][9] 통산 성적은 391경기 62승 61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3.52다. 시즌 10승대는 단 2번이었는데 2점대 방어율을 4차례나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으니 최창호 못지 않게 묘하게 승운이 안 따라 준 편이다. 공교롭게도 팀이 우승을 하면서 잘 나가던 해에는 부상으로 부진했고 전성기였어야 할 시절을 방위 복무로 보내면서 등판회수가 제한되는 등 커리어 동안 불운이 따른 탓도 있다.
신인 지명 당시 주사위에서 승리한 OB 베어스의 지명을 받을 것으로 생각됐으나 정작 OB 베어스에서는 "현재의 실적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겠다"면서 자신을 거르고 당시 듣보잡이었던 좌완투수 이진을 지명한 반발심 때문인지 커리어 내내 OB 베어스에게 강세를 보이면서 1990년 당시 OB 베어스 팬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당연히 "곰 사냥꾼"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3. 은퇴 후
[image]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 애틀랜타에서 사업을 하면서 정착한 모양. 현지의 한인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하면서 야구와의 연을 끊지는 않은 듯하다. 은퇴 후의 행적은 미국 현지에서 천하무적 야구단을 시청한 본인이 천하무적 야구단에 자신의 사연과 더불어 꿈의 구장 건립기금을 기부하면서 야구 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일 코치로 복귀하고 싶다면 자신이 몸담은 LG 트윈스로 복귀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10] 그리고 2군 코치가 자신의 적성에 맞을 거 같다고 했다. 미국으로 떠났어도 마음은 여전히 잠실에 있다는 것은 덤.#1#2
[1] 1999년에 찍힌 사진이다. 뒤에 있는 선수는 손혁.[2] 1988 서울 올림픽 참가를 위해 1년 간 실업리그의 한국화장품 야구단에서 뛰었다. 당시 국제대회에 참여하려면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송진우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3] 1987년 1차 1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 야구 팀 농협에 입단했다. 당시는 프로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뛸 수 없었기 때문이다.[4] 정삼흠이 시즌 중에 배성서 감독에게 항명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으며 김재박, 이광은 등의 고참선수와 코칭스태프 간의 갈등이 있었다.[5] 사실 1990년과 1994년 한국시리즈는 선발, 구원, 마무리의 차이는 있었지만 1차전 승리 투수 김용수, 2차전 승리 투수 정삼흠, 3차전 승리 투수 김기범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6] 해태 문희수도 우승때마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승리투수 기록이 있다.[7] 정삼흠, 김태원, 김영직, 노찬엽이 은퇴하는 게 이 무렵이다.[8] 참고로 LG는 베테랑 선수들을 2000 시즌이 끝나고 줄줄이 은퇴시켰는데 김용수, 김기범, 김선진, 김상호가 모두 유니폼을 벗었다.[9] 비슷한 일이 2012 시즌이 끝나고 일어나는데 이 때 경헌호, 손인호, 박명환, 이대환 등이 줄줄이 방출되거나 은퇴의 길로 들어선다.[10] 이상훈 못지않게 LG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