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임씨

 


'''조선 장조의 후궁
숙빈 임씨 | 肅嬪 林氏
'''
'''빈호'''
숙빈(肅嬪)
'''출생'''
미상
'''사망'''
1773년(영조 49년)
조선 한성부 중부 견평방 전동[1] 양제궁[2]
'''본관'''
부안(扶安)
'''본명'''
임유혜
'''부모'''
부친 임지번
모친 김해김씨
'''부군'''
조선 장조의황제
'''자녀'''
2남
(1남) 은언군
(1남) 은신군
[clearfix]
1. 개요
2. 생애
2.1. 축복받지 못한 임신
2.2. 은언군의 탄생
2.3. 세자의 후궁이 되다
2.4. 임오화변
3. 가계
4. 숙빈 임씨가 등장한 작품


1. 개요


조선 사도세자의 후궁. 아버지 통덕랑 임지번과 부인 김해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한중록》에 따르면 이름은 '유혜'이다.[3]
사도세자의 서출은언군은신군 두 아들의 어머니이며, 훗날 철종의 증조모가 된다.

2. 생애



2.1. 축복받지 못한 임신


《한중록》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임씨의 본명은 '유혜'로 1753년 간에 사도세자가 가까이 하여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러나 영조의 꾸중을 두려워한 사도세자는 아예 임씨가 임신한 자신의 아이를 낙태시키고자 하였지만 기어이 은언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한때 임씨를 가까이 했을 뿐 총애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삭이 되어가도록 챙겨주지도 않았다.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조차 임씨에 대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4] 거의 모든 왕실 인원들이 임씨를 외면하자 보다못한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가 어쩔 수 없이 임씨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2.2. 은언군의 탄생


결국 임씨에게서 사도세자의 서장남 은언군이 태어나자 영조는 무려 한 달이 넘게 사도세자를 꾸짖었다. 심지어 혜경궁 홍씨에게도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남들이 다 하는 투기도 아니한다"'''라며 꾸짖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영조는 사도세자가 여자를 가까이하는 일을 알리지 않고 임씨를 돌봐준 혜경궁 홍씨의 행동을 불충이라고 본 것이다.[5] 혜경궁 홍씨는 이때에 대해 "엄중한 하교가 그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사실 조선의 국왕뿐만 아니라 세자 역시 후궁을 들이는 건 흔한 일이였다. 조선 전기에 세종문종의 후궁을 간택하고, 세조의경세자의 후궁을 간택하는 등, 세자도 후궁을 둘 수 있었다. 또한 중종도 후사가 없는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걱정하여 그의 후궁을 간택하도록 한 적이 있다.[6] 하지만 세자가 후궁을 두는 건 자식을 많이 낳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임금과 조정이 판단해서 시행한 일이였지, 사도세자처럼 자의적으로 궁녀를 건드려 임신시킨 사례는 얼마 없다. 이렇게 학문을 가까이하지 않고 궁녀를 건드려 자식까지 본 사도세자가 영조 입장에서는 매우 못마땅했던 것. 그러나 사도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인원왕후의 침방에서 일하던 궁녀 빙애까지 건드려 청근옹주은전군을 얻는다.
은언군이 태어난 뒤에도 임씨에 대한 영조와 영빈 이씨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비록 은언군은 궁녀 소생의 서출이긴 하지만 영조와 영빈에겐 손자가 되는데도 두 사람은 은언군 모자를 냉대했다.

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경모궁께서는 겁만 내셔서 어찌할 줄 모르시니, 그 와중에 나까지 투기하면 경모궁께서 황겁하신 중 근심하셔서 병환이 몇 층이나 더하실 줄 알리오.

《한중록》[7]

뿐만 아니라, 은언군이 태어나자 탯줄을 태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는 안태(安胎) 의식을 해야 하는데 영조가 허락하지 않아 바로 할 수가 없었다.[8] 며칠 뒤에 관상감과 영의정 김재로가 다시 청하자 그제야 허락해주었다. 이러한 기록만 봐도 영조가 사도세자의 서자들은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낳은 자식들과 철저하게 차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2.3. 세자의 후궁이 되다


임씨는 두 아들을 낳은 후 세자 후궁으로서는 제일 높은 '양제'에 봉해져 양제 임씨라고 불렸다.

2.4. 임오화변


임오화변이 일어나면서 임씨도 양제의 작호를 빼앗기고, 폐출되어 쫓겨났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양제로 복위된다.[9]
한편 강화도에서 잊혀진 왕족으로 살다가 왕이 된 철종이 숙빈 임씨의 증손자(장남 은언군의 손자). 그리고 그녀는 고종 대에 숙빈으로 봉해진다.

3. 가계


남편 : 사도세자
  • 장남 : 은언군[10]
  • 차남 : 은신군

4. 숙빈 임씨가 등장한 작품


[image]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에 나온 숙빈 임씨
  • 1988년 MBC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 - 채유미[12]
작 중 이름은 동이. 사도세자(최수종 분) 사후에도 궁에 계속 남아있는 것으로 나오며 혜경궁 홍씨(최명길 분)와는 사이가 돈독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image]
《대왕의 길》에 나온 숙빈 임씨

[1] 전동(典洞) 또는 박동(磚洞)이라고 하며, 박석고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 1771년(영조 47) 은언군의 집을 탐문할 때 지명이 언급된다. [3] 한중록에 기록된 덕분에 이름이 전해지는 몇 안되는 후궁 중 한 명이다. [4] 영조가 사도세자의 후궁을 환영하지 않는 이상 영빈 이씨는 영조와 입장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다.[5] 조선 시대는 여자의 투기를 금기시 여겼지만, 반대로 너무 투기를 하지 않아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중종도 딸 효정옹주에게 "부녀자로서 투기가 없을 수가 없다" 라고 나무랐을 정도다. [6]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11월 16일 계유 3번째기사. # [7] 요약하자면 영조와 영빈, 사도세자가 은언군을 비롯한 사도세자의 서자들을 총애했다면 혜경궁도 질투를 했겠으나, 저 세 사람은 사도세자의 서자들을 총애하긴 커녕 외면하기만 했으니 혜경궁마저 사도세자의 후궁들과 서자들에게 동정심이 들었다는 내용이다.[8]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2월 5일 을유 3번째기사. # [9] 정조실록 2권, 정조 즉위년 8월 3일 임인 3번째기사. # [10] 철종의 친할아버지.[11] 비록 숙빈 임씨의 경우는 세자의 후궁이었지만.[12] 후속작 《대원군》에서는 증손자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로 출연했다. 《한중록》의 사도세자 역은 최수종이었는데 《대원군》에서 철종 역을 맡은 배우도 역시 최수종이라 두 번에 걸쳐 부부[11]로 만나는 배우 개그가 성립된다. 거기다 철종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의 증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