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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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相默
일본식 성명 :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 重光國夫, 重光邦雄)
1915년 8월 13일 ~ 1984년[1] 1월 29일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중략)...나의 이 감격을 한 가지로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2]

1. 개요
2. 상세
2.1. 악랄한 친일파
3. 가족
4. 창작물
5. 같이 보기


1. 개요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영월(寧越).
그냥 먹고 살자고 친일한 수준이 아니다. 일본군에 스스로 지원하여 그 악명 높은 '''일본 헌병'''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랄한 케이스.

2. 상세


1915년 8월 13일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 용연리 69번지에서 아버지 신공집(辛珙集)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영길(金永吉)의 딸[3]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때 고향의 소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했다.#
졸업 후 1938년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소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하다가, 1940년 8월 초 교사를 그만두고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일본군 육군에 지원했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일본군장교도 아닌 하사관으로 지원한 셈이라 적지 않은 화제를 모았다. 훈련소 입소 직후 그는 『내가 지원병이 된 감상』이라는 글을 투고하면서 지원병이 된 동기를, '어떻게 하면 황국신민의 교육을 완전히 할 수 있을 것인가, 내선일체의 구현화(具現化)를 위해서는 어떠한 방책을 취하여야 할 것인가를 2년 동안이나 연구하여 오던 중, 마침내 이를 위해서는 군인정신을 체득함이 제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식청년이 솔선하여 모범을 일반인들에게 보임으로써 지원병의 수준을 높여야 된다는 결심 아래 용감하게 다른 사람을 권유하는데 앞장서서 교원복을 벗고 영예의 군문에 들어섰다'라고 표현했다.#
일본 제국은 교사에 대한 대우가 극진했다. 1930년대 중반 기준으로, 교사의 초봉은 조선 총독에게 사령장을 받는 판임관(判任官)과 같았다.[4] 더구나 조선인에게 병역 의무는 없었으나, 사범학교 졸업생은 일정 기간 근무를 마치면 예비역 육군 하사관으로 자동편입되었다. 그런 마당에 굳이 교사를 때려치고, 최말단 하사관을 지원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극도의 군국주의 국가였던 일본 제국이니 만큼, 박정희처럼 출세하겠다고 장교를 지원했다면 또 모를까...[5]

정확한 이유야 신상묵 본인만이 알겠지만, 신상묵 본인은 문서 상단에 나온 것처럼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신상묵은 매일신보가 주최한 좌담회에 참석해 이렇게 지원 각오를 피력했고, <삼천리>에는 "나의 이 감격을 한 가지로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며 지원병제를 선전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일본 육군 헌병'''으로서 진해일본 해군 군용기 공장에서 근무하며, 오장(伍長, 일본군 하사)을 거쳐 조장(曹長, 일본군 상사)에 올랐다.[6] 조선인 출신 일본 헌병으로, 오장에서 조장까지 승진한 자는 신상묵이 유일하다. 이 때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항일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를 직접 고문한 혐의가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상묵은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를 사용했으며, 조직의 배후를 대라며 수십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신상묵은 1946년에 국립경찰 양성 1기로 미군정 경찰에 지원했다.[7] 이에 제8관구 경찰청 경위로 제8구(광주)경찰서에 근무하였으며, 1947년 제16구(진도)경찰서장, 나주경찰서장, 장성경찰서장 등을 거쳐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월배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일경찰서장 및 경상북도 경찰국 보안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1년에는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지리산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조선인민유격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공으로 1등 태극무공훈장과 금성화랑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부인 박금옥(朴金玉)[8]이 장자 신기철(辛基哲)을 출산하였다. 어쨌든 1953년에는 전라북도 경찰국장에 전보되었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정전 협정이 체결된 후 1954년 제주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9] 1956년 전라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고, 1957년 치안국 경비과장 및 강원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에는 충청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가 경찰직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1959년부터는 공무원으로 전직, 전라북도 산업국장(서기관)에 임명되었다.
1964년 그는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체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지리산 도벌사건[10]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으나, 이듬해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국유림 내 벌채 허가를 받은 기업들이 불법으로 나무를 베어낸 사건으로, 현직 공무원도 연루되어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84년 1월 29일 사망했다. 묘는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 안천마을에 있다.

2.1. 악랄한 친일파


본디 신상묵의 이력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에 경찰을 지냈다는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둘러싸고 진상 규명에 적극적인 입장의 열린우리당과 반대하는 입장[11]한나라당이 대치하던 중,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에 의해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의 아버지 신상묵의 이력이 드러났다. 처음 폭로가 나왔을 때, 신기남은 신상묵이 일제강점기에 교사로만 재직했다고 주장 했다. 거짓 해명 논란이 인 끝에 신기남은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했다. 신기남 뿐 아니라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의 아버지도 일제강점기 '''일본 헌병''' 오장으로 복무한 사실이 폭로되는 등, 기세 좋게 한나라당을 몰아붙이던 당시 열린우리당은 자충수를 둔 셈이었다. 덕분에 법안 발의도 흐지부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신상묵이 포함되었으며, 2009년 11월 최종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3. 가족


열린우리당 출신 국회의원인 아들 신기남이 아버지 신상묵의 이 친일 행적 때문에 많이 비판받았다. 자기 부친의 행적도 모르고 부정하다 친일 단죄를 주장했기 때문에 더더욱 욕을 먹었다. 훗날 2020년, 손자인 신인선미스터트롯에 출연했을 때 준수한 실력임에도 많이 비판받는 이유가 이것 때문. 더구나 신인선은 이런 문제가 언급되었을 때, "모든 루머와 잘못된 사실들을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기 위해 나왔다"며 모호하게 해명했으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조부의 행적을 묻는 댓글을 삭제하는 행동을 보였다. #

4. 창작물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나온 친일 경찰 스즈키의 모델이 신상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등계 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고문하고, 해방 이후에 다시 경찰로 컴백, 전쟁때 빨지산 토벌에 나선 것 등등 비슷한 면이 많아서일 듯.

5. 같이 보기


  • 친일반민족행위자
  • 박정희[12]
  • 신기남
  • 이미경
  • 신인선

[1] 2004년 8월 25일 한겨레21 기사.[2] 잡지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지원병 일기>를 기고하며 일본군에 참여하라고 선동하는 글 중 일부. 삼천리 잡지에 소개.[3] 출처: 《영산영월신씨족보》 신공집편.[4] 보통 전문학교를 나와 총독부 기수가 되거나 일반문관시험에 합격한 정식 관료가 판임관이거나 판임관 대우였으니, 지금 식으로 하면 7급 공무원 정도로 초임 교사를 대우해줬다고 보면 된다.[5] 박정희의 경우 "요오시 토벌이다~"라는 낭설과는 달리 만주군 장교 시절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거나 밀고한 적은 없다. 소속 부대가 항일 활동을 하던 팔로군을 토벌한 적은 있지만, 이 때도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6] 사실, 신상묵이 해방 전 일본군 헌병 조장을 지냈다는 것은 1960년 3월 국회공론사에서 편찬한 대한민국행정간부전모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당시 정치인이나 관료들 가운데 알만한 사람들은 으레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7] 일제강점기 민중을 가장 가까이에서 악랄하게 착취하던 것은 말단 경찰들과 헌병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적지 않게 다시 경찰에 투신했고, 일본군 경력자라도 별다른 전투 경험도 없이 끽해야 위관급으로 채워진 대한민국 국군과 달리 친일파 소굴로 손가락질 받았다. 실제로 한국전쟁 직전까지 경찰과 국군은 서로 앙숙이었으며, 상호간 총격전(!!!)도 빈번했다.[8] 본관은 밀양 박씨며, 1924년 5월 15일에 태어났다.[9] 6.25 전쟁 때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이었고 1954년 제주도 경찰국장을 역임한 경력때문인지 지리산한라산에는 신상묵의 기념비가 남아있다.[10] '''토'''벌이 아니라 '''도'''벌이다. 盜伐. 국유림의 나무를 몰래 베어내 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11] 당시 한나라당이 마냥 반대한 건 아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특별법안이 통과될 때는 찬성하였다.[12] 신상묵과 같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