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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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우리들로 하여금 형식을 깨뜨리고 본질에 도달하게 하며 환상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작가, 교수, 서예가. 쇠귀라는 호로도 유명하며, '''시대의 스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학자이다.'''도끼날의 향기'''
2. 생애
1963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1] 를 취득하였다. 이후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교관을 지내왔고 숙명여대 교수를 지내던 중 1968년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공산혁명이 목적인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구속되었다가 전향서를 쓰고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20년 20일만에 출소하였으며 옥중의 시절을 경험하여 써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하였다.
1998년 월간 말 인터뷰에서 전향서를 쓰긴 했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고 향후로도 양심에 따라 통혁당 가담 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활동하겠다는 의견을 밝힌 바가 있다.# 신영복의 경우는 통일혁명당이라는 지하 정당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엮여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신영복 본인의 주장 외에는 검증할 길이 없다. 다만 신영복이 북한에 다녀왔다고 언급한 중앙정보부 수사기록의 부분은 당시 육군사관학교의 문서(출강기록)와 상반되는 점이 있어 중정측이 조작한 것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저 당시 청맥이란 잡지가 합법적인 간행물이었던 것도 사실이므로 잡지사에서 주최한 모임의 실체를 모르고 참석했다는 것도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북한에 다녀왔다는 부분이 조작되었다고 해서 김질락 등의 간첩과 북한 조선로동당이 위 단체와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실이 변할 수는 없으며, 또한 모든 수사 기록이 중정측으로부터 조작되었거나 중정수사내용과 상반된 연루자들의 증언이 모두 진실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통혁당 사건에서 선고받은 인물들의 형이 재심되어 무죄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영복은 통일혁명단사건에서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 썼다는 '주장'은 충분히 할 수 있겠으나, '무고하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영복이 '무고'하다라고 주장한 김삼웅, 한홍구(신영복과 성공회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하였다.)의 '주장'과 상반된 '주장' 역시(신영복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혁명당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존재(통일혁명당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형이 집행된 김질락의 옥중수기<어느 지식인의 죽음>)하기 때문에 신영복이 실제로 무고했는지에 대한 것은 향후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성공회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2006년[2] 까지 재직하였으며,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암 판정을 받게 되어서 흑색종 투병으로 요양 중 2016년 1월 15일 밤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의 자택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3. 저서
- 더불어 숲[3]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4]
-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 나무야 나무야
- 변방을 찾아서
- 느티아래 강의실
-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5]
- 처음처럼(책)[6]
- 청구회 추억
- 한강(조정래 저서, 표지 글씨)
4. 정치인들과의 인연
진보 진영의 지식인으로 오래 활동하여 정치인들과도 꽤 인연이 있다. 대표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주요 정치인인 노무현 대통령이나[7] 문재인, 안희정을 비롯해 정청래, 손혜원 그리고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의 주요한 정치인인 심상정, 노회찬이나[8] 기타 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 이 중 몇몇 정치인들은 신영복을 존경하는 지식인으로 뽑고 있어, 생전 선거에 나갈 때 신영복에게 조언을 구하러 자주 방문하였다.
반면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쪽에서는 과거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첩 혹은 종북주의자로 보는 경우가 많으나, 그래도 사회에서 높은 위치의 지식인임은 부인하지 않는다. 일례로 신영복의 대학교 11년 후배인 김문수[9] 는 신영복을 거론할 때마다 '''김일성주의자'''라고 부르면서도, 훌륭한 문학가이자 나오기 힘든 천재라는 말도 붙이면서 그의 지위는 부정하지 않는다.[10]
5. 신영복체
일반인에게는 서예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의 모필 서한에서 느껴지는 서민적 체취와 정서를 독특한 서풍에 담아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소설가 조정래의 '한강' 표지에 친필을 담았으며, 소주 처음처럼 포장지와, 교보문고 신용호[11] 회장의 어록인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사람이 먼저다' 라는 슬로건,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문구에 주로 그의 글씨체가 쓰였다.[12] 그의 서화 작품은 신영복아카이브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처음처럼은 본래 그가 쓴 책의 제호로 사용된 작품이었는데, 나중에 두산주류BG(현 롯데주류)에서 동명의 소주를 출시하면서 그의 글씨를 상표로 사용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사용된 드문 사례이기는 한데, 서민의 술인 소주에 자신의 작품이 사용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하면서 저작권료 대신 성공회대에 장학금 1억원을 기부하였다고. 처음처럼을 디자인한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신영복 선생이 받은 금액은 5천만원이었다. 손의원이 신영복 선생이 1억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본인이 두산으로부터 받은 금액 중 5천만원을 신영복 선생에게 주었지만 신영복 선생은 이 금액 모두를 기부하였다고 한다. 손의원은 신영복 선생이 지나치게 돈 욕심이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또한 제자 윤도현과의 인연으로 YB 8집 <공존>과 15주년 기념 앨범 <나는 나비>에 각각 '共存', '나는 나비' 글씨를 써서 주기도 했다.[13]
굳이 말하자면 민체를 즐겨 쓴다고 할 수 있는데, 쇠귀체, 어깨동무체, 연대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신영복체라는 이름으로 폰트가 개발되어 유료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그의 타계 1주기를 앞둔 2016년 12월 21일부터, 많은 사람과 글씨를 나누고 싶어했던 그의 유지를 받들어, 개인사용자에 한하여 무상으로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직지소프트
이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글씨를 남에게 써주는 데에 인색함이 없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사회 온갖 곳곳에서 신영복 선생의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숭문고등학교 도서관에도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걸려있었고(적어도 16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서울시립대학교 학생회관 근처 학생운동탑에 쓰여진 글씨도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14]
2017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를 신영복 선생이 친필로 남긴 족자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청와대 집무실에 걸리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노무현 재단에 기증하게 될 예정.
신 교수가 생전 마지막으로 대중에 공개한 필체는 2014년 10월 세월호 희생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쓴 '''"아이들을 구하라!"''' 였다.
6. 약력
- 1941년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유곡국민학교[15] 교장 사택에서 태어남.# 그후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16] 에서 자람.
-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
- 1966년 6월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 1989년 3월: 성공회신학대학 경제학과 강사
-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 1998년 5월 ~ 2006년 6월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 1999년 12월 성공회대학교 교육대학원 원장
- 2002년 2월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대표
- 2003년 3월 성공회대학교 민주사회교육원 원장
- 2004년 3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원장
- 2006년 8월 정년퇴임
- 2006년 ~ 2014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7. 여담
- 사후에도 성공회대학교의 정신적 지주로 대접받고 있다. 학교 로고 부터가 신영복체로 되어 있고, 캠퍼스 뒤편에 신영복선생 추모공원이 있으며, 신입생들에게 신영복 관련 기념품까지 배포하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게이오기주쿠대학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위치.
8. 바깥 고리
[1] 논문 제목은 '봉건사회의 해체에 관한 고찰: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을 중심으로'[2] 정년퇴임. 강의 자체는 2014년까지 나갔으나 암 진단을 받게되면서 그해 가을 마지막 강의를 준비했고 이를 바탕으로 "담론"을 냈다.[3] 여기의 '더불어'는 추후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의 모티프가 된다.[4] 출소 후 첫 작품이다.[5] 고인의 유작[6] 이 '처음처럼' 에서 신영복 교수가 쓴 글씨는 몇년 후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에도 쓰였다.[7] 취임 초기와 말년 두 번 청와대를 찾아 각각 '춘풍추상(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 '우공이산' 등의 글씨를 선물하였다. 노 전 대통령은 우공이산이라는 글씨를 좋아해 퇴임 후 자신의 웹사이트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신의 아이디를 여기서 따온 '노공이산' 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새겨져있는 어록도 신영복이 직접 썼으며, 서거 2년 후인 2011년 12월 봉하마을 찾아 문재인 당시 이사장을 만나고 권양숙 여사도 만났다. 생전 마지막 방문이었다.[8] 노회찬이 사망한 이후 창립된 노회찬재단 역시 신영복의 글씨가 쓰였다. 물론 신영복은 노회찬보다 2년 일찍 사망해서 직접 글씨를 쓰지는 못했고, 배포된 신영복체를 사용하였다. 신영복 재단에 사용비를 내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9] 소방서 장난전화건 그 한나라당 출신 전 경기도지사 김문수 맞다.[10] 본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김문수TV에서 한 말이다.[11] 독립운동가 집안이다.[12]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의 글귀도 신영복 선생의 작품이며, 무엇보다 노 대통령의 묘역에 새겨져있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역시 신영복의 글씨이다.[13] 윤도현과는 2003년 윤도현이 김제동과 함께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편입으로 입학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었고, 위에 공존과 나는 나비 이외에도 여러 서예 글씨를 자주 선물해주었다고 한다.[14] 시대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15] 교사였던 아버지 신학상(申鶴祥)의 근무지[16]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