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시마 타케오
아리시마 다케오
有島 武郎(1878-1923).
1. 개요
일본의 작가. 1878년 3월 4일 도쿄 출생.
2. 생애
아리시마 다케오는 1878년에 도쿄에서 구 사츠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 향사에서 대장성 관료와 사업가로 변신했던 아리시마 다케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일본역사에서 메이지 11년으로 세이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 이후 정치와 사회의 혼란이 격화되어가던 그 시기에 아리시마 다케시의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성공적인 변신을 했다. 어머니는 야마우치 사치코, 네살때 아버지가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요코하마로 옮긴 뒤에 아버지 아리시마 다케시의 교육방침에 의해 미국인 목사의 가정에서 생활했고 그후 요코하마영화학교(현재의 요코하마에이와가쿠인)를 다녔다. 이 시절의 경험들이 훗날 한 떨기 포도라는 작품에 남겨진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외국인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인 가정에서 자라며 영어를 배웠던 아리시마 다케오는 열살때 당시 귀족 명문 자제들만 다니는 가쿠슈인에 들어가서 19세에 가쿠슈인 과정을 졸업한다.
가쿠슈인 시절의 다케오는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그 때문에 그는 당시 왕세자였던 다이쇼 덴노의 놀이친구로 선택되었다.[1]
졸업 후 농학자가 되고자 삿포로농학교(현재의 홋카이도대학)에 진학하였다. 다케오의 부친이 다케오의 삿포로 행을 허락한 것은 삿포로농학교 교수로 있던 니토베 이나조 때문이었다. 그는 다케오의 어머니와 같은 모리오카 출신이었고 니토베 이나조의 양아버지의 주례로 두 사람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친척 같은 그에게 아들을 맡기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삿포로농학교의 교장 우치무라 칸조의 사상에 감화를 받아 1901년 삿포로 독립 기도교회에 입회했고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졸업 후 군대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해버포드 대학교 및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에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휘트먼과 입센 등 서양 문학, 베르그송, 니체 등의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점차 범신론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유럽을 돌아보고 1907년에 귀국했다. 이 무렵에 그는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고 기독교를 떠났다.
귀국 후에는 다시 예비 견습 사관과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현, 홋카이도대학) 영어 강사로 지냈다. 그때 동생 아리시마 이쿠마(일본의 화가)를 통해 시가 나오야, 무샤노코지를 만나 동인지 시라카바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소설과 평론분야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인지 『시라카바(白樺)』 창간에 참가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많은 소설과 평론을 발표해 시라카바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2]
1916년에 아내 야스코가 폐결핵으로 죽고[3] , 아버지마저 죽자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해서 카인의 후예, 태어나는 고통, 미로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작가로서의 양심선언이라 할 만한 ‘선언 하나’라는 글을 발표함과 동시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당시 홋카이도 니세코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을 토지 공동소유형태로 소작인들에게 무상 증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도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런 농원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반드시 자본가에 의해 탕진되고 말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리고 운명의 1923년, 그는 부인공론이라는 잡지의 기자였던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1894-1923)와의 만남이 그의 삶을 비극적인 결말로 이끌게 되는데 그녀와의 만남이 그렇게 된 것은 그녀가 유부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인 기자로 유명했다. 그녀의 출신지는 공식적으로 확인된바 없으나,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도쿄 신바시의 게이샤의 딸이었다고 한다. 아오야마가쿠인(현재의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18세때 15세 연상의 남자와 결혼했다.
하타노 아키코와 아리시마 다케오가 처음 만난 것은 '빈사의 백조'라는 공연을 함께 본뒤였다고 한다. 이 만남 이후 아키코의 편지가 전해졌고 몇 차례의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아내의 죽음 이후 아리시마는 독신 생활을 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아키코와의 관계에서는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키코의 적극적인 구애로 인해 애인 관계로 발전했다.
아키코는 앞서 설명했던대로 아오야마가쿠인 여학교 시절에 15세 연상의 하타노 하루후사를 만났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버지 없이 자랐던 아키코는 연상의 남자에게 아버지를 보았고 그에게 응석을 부리듯이 행동했다. 결국 아내와 이혼을 한 하타노 하루후사는 18세의 아키코와 결혼을 했고 어린 여자에게 약해서 아키코가 학교를 졸업하고 부인공론의 기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4] 즉 아키코는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이었고 그녀 자신은 새장 속의 새처럼 고이 보살펴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리시마를 만나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간통죄가 존재했던 시절이라 두 사람의 사랑이 세상의 용서를 받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알게 된 남편 하루후사는 아리시마에게 1만엔이라는 돈을 요구했다. 간통죄로 처벌하려 하면 오히려 그의 명성이 더 올라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간통죄로 감옥에 가야 한다면 가겠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돈으로 바꿀수는 없다며 아리시마는 거절했다. 이 때쯤에 아리시마는 친구에게 감옥에 갈거야 라고 아키코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며 두 사람이 함께 죽을 거라는 생각을 알렸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1923년 6월 4일 치바 후나바시의 여관에서 자고 5일 뒤인 6월 9일 오전 2시이후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그 전날 친구는 아리시마를 설득했지만 두 사람은 도쿄 신바시역에서 가나자와시로 가는 특급열차를 탔고, 비가 내리는 늦은 밤에 가루이자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별장에서 마지막 사랑을 나눈 뒤, 대들보에 목을 맸다.[5] 두 사람의 사체는 7월 7일에서야 발견되었고 장마철의 시기에 거의 한달 동안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상당히 부패가 진행되어 유서로 본인을 확인했다.
전도유망한 작가와 당시로서는 드문 미모의 여기자의 정사(情死), 이것은 당시 일본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기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위대한 작가를 농락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으로 아키코를 비난했지만 이후 다케오와 아키코의 삶을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들의 정사가 반드시 아키코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
당시 이 동반자살 사건이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던 탓에, 아리시마의 스승이었던 문학가 겸 성서학자 우치무라 간조도 "만약 내 지인들 중에 아리시마의 자살을 칭송하거나 옹호하는 자가 있다면 그와 교류를 끊겠다"라고 천명했을 정도.
3. 여담
- 이 정사에 영향을 받아, 3년 뒤, 오사카에서 <사의 찬미>를 녹음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른 살의 윤심덕과 김우진이 현해탄에 함께 몸을 던진다. 아리시마와 하타노의 동반자살는 이처럼 두 나라를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 아리시마 다케오가 조선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단지 이 자살 사건뿐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두 한국 작가가 있는데, 한국 근대문학의 기둥이던 김동인과 염상섭으로, 이들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1910~20년대는 아리시마 다케오가 가장 활발히 창작 활동을 했던 시기다. 염상섭의 초기작에는 아리시마의 <다시 태어나는 고통> <돌에 짓눌린 잡초>의 흔적이 엿보이며, 김동인의 <붉은 산>은 홋카이도 농민들의 혹독한 삶을 그린 <카인의 후예>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아마카스 사건의 피해자였던 오스기 사카에와 은근히 교류가 있었다.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아나키스트 모임에 참가하려던 오스기에게 몰래 여행경비를 전달하기도 했었는데 개방적인 성격이던 아리시마는 '나는 오스기 군과 사상적으로 다른 입장이지만 저렇게 개방적이고 대단한 인물을 일본에만 두는 것은 아쉽다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을 기자에게 남겼다.
4. 저서
- 선언
- 카인의 후예
- 클라라의 출가
- 미로
- 탄생의 고뇌
- 어떤 여인
-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
- 내 어린 아이들에게
5. 기타
- 그가 죽기 반년 전 부터 아키코와 주고 받은 편지 3통이 2009년 7월에 삿포로시 홋카이도립문학관에서 공개되었다.
- 니세코역에서 걸어서 30분쯤 떨어진 곳에는 아리시마 기념관이 있다.
- 문호와 알케미스트에서도 등장한다. 아리시마 타케오(문호와 알케미스트) 참조.
-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단편 <향수 동반자살>을 보면 도도로키 경부가 카루이자와는 동반자살의 명소라면서[6] 오래 전 여기서 고명한 문사가 동반자살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리시마와 아키코의 동반자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 장남은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1954)에서 다카미네 히데코와도 연기한 유명 영화배우 모리 마사유키(본명 아리시마 유키미츠.1911~1973)이다. 당대의 미남 남자배우로 꼽혔으며 라쇼몽 영화판의 무사 역으로도 유명하다.
- 뱀을 엄청나게 무서워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하타노 아키코는 뱀을 좋아해서 뱀 모양의 반지를 상시 착용하고 다녔다. 하지만 뱀을 무서워하던 아리시마와의 교제하게 되면서 더는 그 반지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고 훗날 발견된 두 사람의 시신에서는 반지가 없는 아키코의 손가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 한편, 다케오의 부친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 또한 두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내성적인 다케오를 심하게 훈육했고, 이런 숨막힐듯한 집안 환경을 견디지 못한 다케오는 탈출구로 삿포로농학교를 선택했다.[2] 시라카바파 작가 인원 대부분은 가쿠슈인 고등과의 원장이던 노기 마레스케의 무사도 정신이나 완고함, 군국주의에 대해 반발심을 가진 가쿠슈인 출신 인원들이었고 개중 아리시마의 나이가 가장 많았기에 당시에 맏형 포지션이었다.[3] 그녀는 세명의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27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사인은 당시 치명적인 질환이었던 폐결핵이었다. 아리시마가 부인 사후 남겨진 자식들에게 바치는 글인 '내 어린 것들에게'가 유명하다.[4] 그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여기자, 게다가 미모까지 있었던 아키코에 대한 소문은 문단 전체에 퍼져나갔다.[5] 가루이자와의 별장인 죠겟츠안(浄月荘. 정월장), 아리시마는 1916년부터 여름철이면 이 별장에서 지내며 집필을 했다고 한다.[6] 작중 배경이 카루이자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