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사다 사건

 



1. 개요
2. 상세
3. 사건의 여파
4. 체포 후
5. 그 후의 아베 사다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


阿部定事件
1936년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 아베 사다라는 여성이 내연남과 성관계 도중 내연남을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성기를 절단하여 지니고 다녔다가 체포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현재 사회의 기준으로 봐도 매우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영화 감각의 제국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다. 사건 이후 여신으로 떠받들어지거나 하는 등 남자가 범인이었던 나고야 목없는 처녀 살인사건에 비하면 매우 다른 여파를 드러낸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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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사다의 실제 사진.
범인 아베 사다(阿部定)는 1905년생으로, 도쿄 칸다에서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서깊은 다다미 상점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는지, 부모와 제대로 대화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모친의 권유로 샤미센과 토키와즈[1]를 배우게 된 사다는 타고난 미모까지 더해져 '사가미야[2]의 오사다짱'으로 알려져 인근에 평판이 자자했는데, 부모가 정규 교육보다는 기녀들처럼 노래와 춤, 샤미센 등을 우선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사다는 다니던 소학교의 선생으로부터 여러 차례 주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렇듯 일찍부터 기녀처럼 키워진 탓인지, 나이가 10살이 되던 무렵 벌써 남녀의 정사#s-4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한다.
이후 고등여학교에 진학했으나 15세가 되던 해 자퇴했다. 이때 우연히 알게 된 대학생과 어울려 놀던 와중에 그만 그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본인이 말하기를, "내가 더이상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이런 사실을 숨기고 시집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다 털어놓고 시집가기는 더욱 싫다. 더는 아무데도 시집 못 가는 몸이라 생각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고. 그 사건 이후로 사다는 불량소녀가 되어 여러 남자들과 복잡하게 관계를 맺는 등 방탕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다를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게 도리어 사다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후 그녀의 부친과 오빠가 공모하여 그녀를 창녀로 팔았다. 그렇게 팔려간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카페 여급으로 일하는 한편 부업으로 게이샤나 고급 창부 노릇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며 살다가, 상업학교 교장 나가미야(長宮)의 소개로 도쿄 나카노에 있던 음식점 '요시다야'의 여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3] 그리고 이곳에서 요시다야의 주인 이시다 키치조[4]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끌린 끝에 내연관계가 되었다.[5]
불륜관계가 된 두 사람은 이후 각지를 돌며 함께 지내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정상적인 성적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는지(...), 성관계 도중 사다가 이시다의 검열삭제에 나이프를 올려놓고 "이제 다시는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 말 것"이라고 위협(...)했으나 이시다는 오히려 재미있어하며 웃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틀 밤 연속으로(!!) 관계를 가지면서 사다가 이시다의 목을 조르기도 했는데, 이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목을 조르는 행위가 쾌감을 더해준다고 했다고.
그러던 1936년 5월 18일, 사다는 허리띠로 이시다의 목을 2차례 졸라 숨지게 했다. 그리고 그의 숨이 끊어지자, 부엌칼로 성기를 절단했다.[6] 성기를 도려낸 후에는 피로 이불과 이시다의 허벅지에 '사다, 이시다 키치 단 둘이서', 이시다의 왼팔에는 자신의 이름 '사다'를 써넣었다.
이시다 키치조를 살해한 이틀 뒤인 5월 20일, 사다는 가명으로 시나가와의 한 여관에 묵고 있다 그 날 오후 체포되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묵고 있던 방에 찾아온 경찰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아베 사다를 찾는 거죠? 내가 바로 당신들이 찾는 그 아베 사다랍니다."라고 너무도 태연하게 말한 뒤 그대로 순순히 붙잡혀서 경찰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체포된 후 그녀는 "난 그(이시다)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의 전부를 원했다. 우린 정식 부부가 아니었기에, 이시다는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안을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죽여버리면 다른 어떤 여자도 그를 두 번 다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이시다의 성기를 절단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머리나 몸 중 하나와 함께 하고 싶었다. 늘 그와 함께 하고 싶어서 그걸 가져가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3. 사건의 여파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아베 사다가 수배되었을 때 대중들이 보였던 엄청난 반향이 '아베 사다 패닉'이라고 불렸을 정도.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들은 아베 사다를 당시 일어난 2.26 사건으로 어두워진 사회 분위기를 밝혀주는 여신 같은 존재로 떠받들기까지 했다고. 그리고 당시 최고의 유명인이 되어 사건이 일어난 '만사키'와 '시나가와관'은 매일같이 최고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7]
또한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각 언론사들은 아베 사다가 잘라낸 이시다의 성기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이 사건의 중심이 되는 소재(...)라 보도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해도 당시 시대상 노골적인 표현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심 끝에 각 언론사들은 '국부', '하복부'라는 대체 표현을 사용해서 기사를 내보냈고, 이후 국부라는 단어가 성기 부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정착했다고 한다.

4. 체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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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사다가 체포된 직후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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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사다가 체포된 직후의 사진(컬러 복원판).
도저히 살인범 체포 상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도 알 수 있듯이, 아베 사다 사건은 일종의 가십거리 취급을 받았고, 전술했듯이 아베 사다를 일종의 여신처럼 떠받들고 로맨틱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다.[8] 제1공판에서는 방청하려는 사람들이 그 전날부터 줄을 섰다.
조사 과정에서 아베 사다는 사디즘도착증 등의 정신병 판정을 받았고, 법원에서도 단순 치정극임을 이유로 징역 6년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이에 대한 항소는 없었다. 1936년부터 복역하여, 1941년에 쇼와 덴노의 특별사면으로 출소하게 되었고, 이전 애인인 아키바 마사요시[9]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5. 그 후의 아베 사다


죗값을 치르고 나왔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아베 사다를 주목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녀를 주제로 한 저속한 소설들까지 출판되자 명예훼손으로 그들을 고소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이 계속되었다. 출소 뒤 가명을 쓰고 결혼도 했으나 남편이 정체를 알고 이혼했다.[10]
1940년대 후반에 아베 사다를 주제로 한 소설들이 다수 발표되고, 이를 통해 아베 사다는 단순한 엽기살인범에서 팜므파탈로 그려지게 되었고, 아베 사다도 자신을 주제로 한 연극에서 본인 역할을 직접 연기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엽기여자범죄사>에서는 실제 인터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1956년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아키바 마사요시가 죽고, 1968년에는 아키바의 처인 하나도 사망한 후, 아베 사다는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아키바 부부는 아베 사다가 조그마한 가게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고, 출소 후부터 줄곧 그녀를 돌봐주기도 한 부모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11]
1970년에는 그녀가 운영하던 가게 사정도 어려워지고, 심지어 아베 사다의 내연남이 돈을 들고 튀어버리는 바람에 가게를 접고 잠시 모습을 감추게 된다.

6. 바람처럼 사라지다


1971년 1월, 아베 사다의 오랜 단골이었던 시마다는 아사쿠사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아베 사다를 만나게 된다. 연극에 나가게 된다면서 들떠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년 6월, 류머티즘 질환을 치료한다며 온천에 다녀오겠다는 쪽지만을 남긴 채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의 나이 66세였다.
1974년 즈음에 목격담들이 들려오긴 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들은 없었고, 결국 그녀가 이후로 얼마나 더 살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한 여인은, 마치 애초에 현실 세계에 없었던 사람인 것 마냥 모습을 감추었다.
일단 일본에서는 1987년부터 키치조의 묘에 꽃다발이 오지 않았던 걸 보면 그쯤 사망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만약 정말로 1986년에 사망한 것이 맞다면, 향년 81세였을 것이다.

7. 대중매체에서


워낙 충격적이고 아베 사다의 일생이 파란만장하다보니 이 사건을 모티브로 수많은 영화소설들이 제작되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서는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낙원'이 가장 유명하며,[12] 영화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1976년작 '사랑의 코리다(감각의 제국)'[13]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영화인 감각의 제국 파이널이라는 괴작이 있는데, 아베 사다 사건을 대충 써서 만든 그냥 에로물이다. 국내에서도 달랑 서울관객 10명을 기록했는데, 1개 상영관에서 1회 상영하고 IPTV 유료 방영 홍보 겸 개봉했던 거였다. 이외 오바야시 노부히코도 SADA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암살교실에서 아카바네 카르마시오타 나기사에게 연극/역할을 추천해줬다.
신영명이십팔중구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묘사한 그림이 있다.
[1] 일본 전통 인형극 조루리에 사용되던 노래[2] 아베 사다의 부모님이 운영한 다다미 상점 이름[3] 이 당시에는 '다나카 카요'라는 가명을 썼다.[4] 영화에서는 키치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마이니치 신문 보도자료에서는 길(吉) 자를 훈독으로 읽은 이시다 요시조라는 이름으로 나온다.[5] 이시다는 이때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었다.[6] 이렇게 잘라낸 성기는 고환과 함께 체포되기 전까지 무려 3일 동안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7] 출처:체페슈의 공포가든[8]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가부키 등에서 유녀나 게이샤와의 사랑을 일종의 성적 판타지로 표현해왔던 일본 문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조금은 될 것이다.[9] 위에 언급한 아베 사다의 부친과 오빠가 아베 사다를 팔았을 때 처음 산 사람이다. 아베 사다와 헤어진 이후 결혼하였고, 출소한 아베 사다를 거둬줄 당시 보험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10] 자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자녀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실제로 아베 사다는 아키바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12] 1997년 이 소설을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13] 제목의 '코리다'는 스페인어로 '투우'를 뜻하는 'Corrida de toros'에서 따왔다고 하며, 2000년에 무삭제 완전판이 '사랑의 코리다 2000'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