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벨

 


'''Alfred Nobel'''
<colbgcolor=#000034> '''본명'''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국적'''
스웨덴 [image]
'''출생'''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노르웨이 스톡홀름
'''사망'''
1896년 12월 10일 (63세)
이탈리아 왕국 산레모
'''직업'''
화학자, 발명가, 기술자, 기업인, 자선가
'''서명'''
[image]
1. 개요
3. 노벨상의 제정
4. 평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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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화학자, 발명가, 기술자, 기업인, 자선가.

2. 죽음의 상인


위인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폭약에 관심이 많아서, 깡통에 흑색화약을 꽉꽉 채워넣고 터트려서 '''대폭발'''을 일으키고 동네 난리나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노벨도 크게 다쳐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들보다 덜 유명하지만,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도 발명가로서 크림 전쟁 당시 기뢰지뢰를 개발, 러시아군에 납품한 인물이다. (동갑인 모리츠 폰 야코비와 같이 연구, 개발했음) 1855년 영국군이 이 수중 기뢰로 장난아닌 피해를 당했고, 한동안 영국군 함대가 무수히 불타고 터진 그 바다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 러시아 제국은 그에게 보상하지 않았고 승자인 연합군에게도 찍혀서 무기공장은 파산했다. 결국 노벨과 두 형, 아우들은 유럽 각지에서 온갖 일을 하며 돈을 모아 공부해야 했다.
나중에 러시아의(현재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유전을 두 형과 함께 개발하여 큰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쿠 유전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다 타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좀 많이 입었다고 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약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질을 제조하는 공장을 환영하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에 달군 쇠를 넣어 보이는[1] 등 안전성을 홍보했다고 하는데 그다지 믿지 않았던 듯.
그렇게 공장을 지어 잘 돌아가는 듯 했는데… 1866년 공장이 '''폭발해서 간부인 동생 에밀과 직원 4명 및 지나가던 사람 1명이 사망'''했고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으며 보상을 치룬 다음 할 수 없이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그곳에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에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장애인이 되었다가 1872년 세상을 떠났다.
노벨은 폭약을 안전하게 만드는 연구를 해야 했고, 결국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초반에 약간의 저작권 분쟁도 있었지만 폭발력이 뛰어나고, 안정성이 좋아서(?) 취급하기에도 편리하고, '''이름도 멋있는''' 다이너마이트[2] 광산업에 쓰이는 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쟁터에도 투입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보불전쟁 때로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 군을 신나게 날려버릴 때 참 많이 썼다.[3] 하지만 이 덕에 노벨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아이러니한 일.
그럼에도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가난하다고 반대하여 끝내 헤어진 적도 있다. 프랑스에서 여자를 만나 한 차례 사귄 적도 있으나 여인의 사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을 맺기도 했다. 그 밖에 너무나도 짝사랑하여 1년에 216통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고백했지만 상대는 노벨을 개무시했던 적도 있다. 우습게도 노벨이 죽고 나서 노벨상으로 유명해지자 그 편지를 팔아 돈을 벌던 그 여성은 노벨의 아내로서 그 막대한 재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뻥을 치다가 실컷 욕을 먹었고 말년에는 정신이상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 외에도 중년의 노벨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의 조언으로 베르타 킨스키(1843~1914)라는 이름의 여비서를 고용하였고, 서로 연인관계로 발전하나 싶더니 그녀는 첫사랑을 찾아 떠났고, 후에 주트너 남작부인이 되어 돌아온 그녀는 노벨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반전 문학가로 활동하여 <무기를 버려라>는 책을 쓰면서 인류가 총과 더 강한 무기에 집착하는 한, 평화는 없다라는 주장을 했고 이런 활동으로 1905년에 제5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여자로는 2번째(첫번째는 1903년 마리 퀴리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것)이자 여자 홀로 단독 수상이다. 또한 생전의 노벨을 직접 만나본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이다.

3. 노벨상의 제정


프랑스에서 18년 동안 살았으나 무연화약 발명을[4] 두고 특허권 분쟁으로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 시골에서 나머지 5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막대한 재산을 두고 친척들이 서로 차지하려 소송을 했으나 결국 그의 뜻대로 노벨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말년에는 후회하여 인류에 공헌을 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부하고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설과,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었을 때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고 오보를 낸 신문에 노벨이 '죽음의 상인'이라고 칭해진 것에 충격을 받고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4. 평가


  • 사실 다이너마이트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진짜 전쟁에 투입된 것은 콜로디온과 니트로글리세린을 배합한 발리스타이트.[5] 이는 노벨이 어떻게 하면 다이너마이트를 강력한 군사 무기로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다가 만들어진 대작이다. 그렇다고 노벨이 전쟁을 좋아해서 그랬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내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었으니 이제 다들 싸울 엄두를 못 내고 사이좋게 지내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핵폭탄 들고 있으니 못 건드리겠지?'와 비슷하다.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으로 개틀링을 발명한 리처드 조던 개틀링 박사가 있다. 허나 두 사람의 발명품은 모두 훌륭한 대량 살상 무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두 사람의 이상이 완전히 이루어진건 핵무기가 개발되어 상호확증파괴 개념이 성립한 이후다.
  • 노벨의 명성은 오히려 다이너마이트보다도 노벨상의 제정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안전한 폭탄을 만들었다는 정도로 백년 이상 이름을 기억해줄 만큼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당장 니트로글리세린의 합성자 이름(아스카니오 소브레로)을 세상이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 것[6]을 생각해보자. 물론, 괜히 그런게 아니라 니트로글리세린 합성을 해도 충격만 좀 줘도 폭발 위험성이 엄청나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크게 쓰지 못했다. 이걸 운송하던 마부들도 충격만 받으면 마차 째로 폭발해 죽기 일쑤였고 광산에서 쓰려고 가져가던 길에 죽던 사람도 쏟아지는 판국이었으니... 이걸 더 안전하게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대박을 거둔 것 여파도 있다. 소브레로 이름이 잊혀진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 노벨의 유명한 말인 "내 발명품이 평화 조약보다 더 빠른 평화를 불러올 것이다"는 주트너 남작부인[7]이 노벨에게 평화 회의 참석을 부탁했을 때 대꾸한 말로 유명하다. 노벨이 정말로 평화를 지향해서 그런 건지 그냥 비난을 피하기 위한 발언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자.[8]

5. 여담


  • 노벨 일생 동안 스웨덴에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유해지자 독일, 스코틀랜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집을 구해 돌아가면서 살았다. 빅토르 위고는 노벨을 "백만 달러를 가진 방랑자"라고 불렀을 정도. 다만 노벨의 공장은 에밀의 죽음 이후 스웨덴에서 재건되었고 이후 독일인의 투자로 독일로 옮겨가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다이너마이트 발명에 밀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그의 회사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근무 여건들을 생각할 때 매우 파격적으로 직원들의 급여와 복지 수준이 높았다. 말단 사원이나 공장 막노동자조차 다치게 되면 의무실로 가서 의사에게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이는 노벨 가 형제들 모두가 다 똑같았다.
우선, 알프레드 노벨의 큰 형인 로베르트 노벨은 본래 총기제작자였다가, 아제르바이잔을 여행하는 도중에 망해가던 석유 회사 한 곳을 견학하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석유 산업에 뛰어들은 바 있다. 문제는 석유의 수송을 위해 송유관을 설치하자, 기존에 석유 배럴을 실어나르는 업무를 하던 마차의 마부들이 실직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바람에 송유관에 대한 사보타주 시도까지 일어나는 등의 마찰이 있었는데, 로베르트는 이렇게 일어난 노사 갈등을 실직자 신세가 된 마부들 전원을 송유관을 경비하는 용역으로 재고용하는 것으로 원만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고용 조건을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데 노력하다가 병으로 쓰려진 바람에 회사를 그의 큰 남동생이자, 노벨 형제의 둘째인 루드비히 노벨에게 물려줬다. 루드비히는 직원들의 급여를 인상함은 물론, 주말을 보장해주고 직원용 기숙사를 설립하였으며, 직원들을 위한 테니스장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회사가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혹독한 기후로 인해 건강을 해친 형의 선례를 생각해서 회사 곳곳에 나무를 심는 등, 직원들에 대한 복지를 크게 증진시켰다. 그야말로 난형난제인 셈이다. 참고로 루드비히 노벨은 우리가 아는 유조선을 처음 구상하고 설계한 인물이기도 하다.
  • 그는 심장병이 있어서 니트로글리세린을 약으로 먹었는데 현대 의학에서도 협심증 및 심근경색 등 심장질환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한다.#

[1] 사실 노벨이 니트로글리세린의 특성을 잘 알아서 이런 곡예를 해보인 거라고 한다. '''절대로 따라하지 말자'''. 이런 거 별거 아니네 따라했다가 시체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죽은 사람이 해외에 여럿 있다...[2]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이 붙인 상품명이었다. 고로 상표의 보통명사화.[3] 노벨이 프랑스 군에게도 영업을 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거절했다는 썰도 있다.[4] 1887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니트로셀룰로오스를 이용한 신형 무연화약인 발리스타이트를 개발했다. 다만 노벨이 만든 발리스타이트가 인류 최초의 무연화약인 것은 아니고, 프랑스의 화학자 폴 비에유가 1884년에 만든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에테르화한 니트로셀룰로오스, 파라핀으로 만든 B화약(Poudre B)이 인류 최초의 무연화약이다.[5] 더블 베이스 무연화약의 일종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에 이의 채택을 제안했으나 프랑스 군부는 이미 폴 비에유의 싱글 배이스 무연화약인 B화약을 쓰고 있어서 이를 거부했고, 이에 노벨은 이탈리아에 공장을 세워 이탈리아에서 이를 생산했다.[6] 1812~1888.이탈리아 화학자. 그래도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로 큰 돈을 벌고나서 그를 잊지 않고 그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기도 하며 우대한 바 있다.[7] 1843~1914/ 소설가이자 평화운동가로 '사람은 무기를 버려야 한다!'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졌다. 공포의 균형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던 노벨과는 정반대의 이상을 갖고 있던 인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둘은 사적으로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노벨의 장례식에도 참여했으며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190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가 쓴 베스트셀러 소설 <무기를 버려라>(Die Waffen nieder!)는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8] 현대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벨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과거엔 독가스나 기관총이 평화를 만들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무기로 인한 표면적인 평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다이너마이트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였을법한 연발 화기들을 개발한 리처드 조던 개틀링이나 하이럼 맥심도 비슷한 말을 했으니 이런 생각이 1차대전 이전엔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