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C. 요크
1. 개요
미국의 군인.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한 미군들 중에서 존 조지프 퍼싱 원수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2. 생애
2.1. 전쟁 이전
1887년 12월 13일에 미국의 테네시 주에서 11명의 형제 중 세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요크는 어려서부터 대장장이로 일을 하며 가족을 위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학교란 곳을 9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것도 '''초.중.고''' 다 합해서! 대학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러다 1911년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두 명의 친형들은 결혼을 해 가족을 떠나자 사망한 부친을 대신해서 모친을 도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목수, 노동자, 대장장이 등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29살이 되던 1917년 미합중국 육군에 징병되는 걸 거부하였다. 요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걸 원치 않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요크는 강제로 육군에 징집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숙부가 대신 돌봐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요크도 안심하고 입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1917년 무렵에 조지아 주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요크는 징병된 후 1918년 1월, 프랑스 아미앵에 도착하였다. 1918년 9월, 요크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협상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뫼즈-아르곤 공세의 전초전 격인 생미엘 전투에 소총수로 참가하였고, 1918년 10월 8일,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당시 그의 분대장이였던 버나드 얼리 병장의 지휘 아래, 당시 상등병이였던 요크를 포함한 4명의 상병들과 13명의 일, 이병들은 참호들을 넘어가 샤텔세에리(Chatel-Chéhéry) 북쪽 223고지에 있는 독일군의 기관총(MG08) 진지를 파괴하란 명령을 받았다. 요크와 병사들은 적의 기관총 진지를 급습하여 기관총 사수를 죽이고 기관총을 빼앗았고, 진지 내에 있던 다수의 부사수들을 포획했다. 요크와 병사들이 임무가 순조롭게 풀리나 싶었지만 그 때, 갑자기 반대편 언덕 위에서 또 다른 기관총(MG08)이 요크와 병사들을 향해 불을 뿜어오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분대장 얼리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기 때문에 얼리 다음으로 계급이 높고 경력이 많았던 요크가 임시 분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적의 이 갑작스런 급습에 요크의 휘하에는 고작 7명의 '''이등병'''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요크는 남아있던 7명의 이병들에게 포획한 포로들의 감시를 맡기고, '''혼자서'''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러 간다. 운 좋게도 요크가 언덕 밑에 자리 잡았을 때, 마침 일전의 공격이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주었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잠시 사격을 중지하였는데, 그 순간 요크가 자리를 잡고 기관총 진지 내의 독일군들을 자신의 소총(M1917)으로 하나하나 사살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독일군이 사살되고 요크의 탄약도 다 떨어져갈 무렵에서야 집요한 저격에 견디다 못한 상대측 지휘관이 저격수 소탕에 나서, 6명의 독일 병사들이 요크를 향해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에 요크는 자신의 권총(M1911)을 뽑아들고 돌격해오던 독일군들을 하나 하나 침착하게 맞춰 사살하였는데, 이 순간조차도 그의 빛나는 기지가 발휘되었다. 일반적으론 당연히 제일 앞장서서 근접해오는 적군부터 없애려 하게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맨앞의 적이 쓰러지며 뒤따라오던 적군들이 주춤하여 돌격을 멈추고 응사해 올 것이라 판단하여 반대로 '''가장 뒤에 있던 적군부터 차례대로 쏴 죽였다.'''
요크가 혼자서 권총 한 자루로 고군분투하던 사이, 기관총 진지의 독일군을 지휘하던 독일군 중위 파울 위르겐 폴머가 요크의 뒤쪽으로 우회해서 다가와 요크에게 권총 사격을 해왔지만 사격실력이 꽝이었는지 몽땅 빗나갔고, 요크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지도 못 한 채 자신의 권총에 있던 탄약마저 다 떨어지자 자신의 부대가 입은 피해상황을 고려하여 영어로 항복의사를 전달해왔다. 앨빈도 이를 받아들여, 홀홀단신으로 132명의 독일군을 포획하게 되었다. 중대규모의 병력이 고작 병사 한 명에게 항복해온 것이다. 그렇게 요크는 '''132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당히 본부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군 제328보병연대는 프랑스 샤텔셰에리 지역 북쪽에 위치한 철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전투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M1911 문서 참고.
앨빈 요크는 이 전투에서 '''혼자서''' 총 32정의 중기관총(MG08)을 파괴하거나 노획했고, 28명의 적군을 죽였으며, 132명의 포로를 만들었다. 이 공으로 요크 상병은 병장으로 진급하였고, 국가는 그에게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하였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연합군 총사령관이 친히 그에게 프랑스의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고, 영국과 이탈리아도 그에게 훈장을 보내왔다.이 전투로 요크는 총 50여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병 출신 군인이 되었다.
2.3. 전후 생활
그는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자 바로 제대하였고, 전쟁 영웅으로서 쌓은 재산을 이용하고자 1920년에 알빈 컬럼 요크 재단을 만들어 테네시 주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을 했다. 그렇게 평범한 민간인으로 생활을 하다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군대로 재입대 할 것을 희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미 국방부는 요크의 고령의 나이(당시 54세)와 요크가 당시 앓고 있던 비만[1] , 당뇨병 등 건강상의 이유로 요크의 재입대를 거부했고[2] 대신 그가 살던 지역의 지역징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전쟁 내내 본토에서 병무업무를 수행했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일선에서 활약하지 못했지만 1차대전 당시 미군 참전 용사 들을 만나고, 2차대전 당시 미 장성들 과도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면서 편안한 노후 생활을 보내다가 196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2.4. 평가
미 육군의 전설이다. 요크는 자신의 M1917 엔필드 소총과 M1911, M1917 참호용 단검만으로 Gew98과 MG08, MP18로 무장했던 독일 제국군과 싸웠다. 그리고 무려 28명을 죽이기까지 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볼트 액션 소총에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한 혈혈 단신으로 다수의 소총과 기관총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100여 명의 적에게 대등하게 맞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니, 그냥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요크 이 사람은 이러한 상식을 거침없이 뒤집어 엎은 것이다.아직까지도 미군 내에는 앨빈 요크와 맞먹는 전설을 가진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3]
더군다나 M1911로 6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을 때에는 요크의 무공이 더욱 돋보이는데 당시에는 제대로 된 권총사격 교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기본 교리인 두손 사격은 가르치지도 않았고 쓰지도 않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권총 사격 = 한손 사격이 기본이었단 얘기이다. 또 M1911의 탄창 용량은 7발, 약실을 포함하면 8발이기 때문에 즉, 요크는 ''' M1911을 한 손으로 잡은 후 돌격해오는 병사들을 맨 뒤의 병사부터 차례대로 원샷 원킬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일은 M1911의 무시무시한 성능, 특히 신뢰성과 강력한 대인 저지력을 잘 보여준다. M1911의 그 셀 수 없는 실전 사례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사례다.
1980년대에 미 육군이 개발했다가 실패한 M247 서전트 요크 자주대공포도 앨빈 요크에게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2.5. 대중매체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42년, 미국에서 하워드 혹스가 '요크 상사(Sergeant York)'라는 영화를 제작한다. 목적은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싸우고 있던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였다. 실제 존재했던 영웅의 일대기를 보여주면서 사기를 북돋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상영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병장이 아닌 상사로 번역되어서 개봉되었다. 참고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Sergeant 계급은 하위 부사관을 지칭하는 계급이었고 현대 미 육군에서는 행정보급관과 원사를 제외한 모든 부사관 계급의 호칭은 Sergeant로 동일하다. 상사로 번역한 것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 국군에서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병장으로 번역했다면 완전한 오역이다.
미드 더 퍼시픽 1화 상륙 전 식사 씬에서, 등장인물들간 대화 중 혼자 일본군을 쓸어버린다고 떠벌리는 처클러에게 레키가 요크 상사라고 지칭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해병대에 입대한 청년들이 위의 영화를 보았다고 추측 가능한 부분.
2019년 발매된 스웨덴 파워메탈 밴드 Sabaton의 앨범 "The Great War" 곡 중 "82nd All The Way"에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요크가 223고지에서 쓴 전설이 가사로 담겼다.
[1] 이 시기의 요크 상사의 사진을 보면 체중이 꽤 불어난것을 볼 수 있다.[2]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36세 이상은 징집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1942년, 그러니까 하와이 진주만에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당한 뒤 당시 미국인들이 일본 제국에게 가졌던 분노와 혐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진주만 공습 이후로 순식간에 '''600만명'''이 넘는 20~30대 젊은 남성들이 군에 자원하여 징집병과 합쳐서 1943년 기준으로 '''1024만명'''이 미군에 편성됐다. 심지어 나이가 미달인 고등학생들은 '''공문서를 위조 해서라도 참전하고 싶어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상황이 저러다 보니 40세 이상의 인원은 타자사, 수리공 등 기술 병과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가고 싶어도 받지 않았다.[3] 2차 세계대전때 어디 머피가 많은 훈장을 탔지만, 요크보다는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