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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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FFF><colcolor=#000000>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Poмaнoв)
'''출생'''
1904년 8월 12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테르고프궁
'''사망'''
1918년 7월 17일 (13세)
소비에트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에프 하우스
'''아버지'''
니콜라이 2세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형제'''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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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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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2.1.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
2.2. 병약한 신체와 혈우병
2.3. 화목한 가정과 OTMAA라고 불린 5남매
2.4. 라스푸틴의 등장
2.5. 2월의 러시아 혁명 이후
3. 유해 발굴, 그리고 음모론(생존설)
4. 가족관계
5. 대중 매체에서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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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족으로,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이며 마지막 황태자로 유명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에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사이의 1남 4녀 중 막내이자 고명아들로 태어났다. 적갈색 머리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였다고 한다.
이름의 모티브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로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가 지어준 이름이다.[1]

2. 생애



2.1.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


알렉세이는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황후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차르 부부는 딸만 내리 넷을 낳은 뒤에야 비로소 황위계승자가 될 고명아들을 낳은 거라[2] 알렉세이가 태어났을 때 니콜라이 2세 부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하며, 아들을 '햇님'이라고 칭할 정도로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2.2. 병약한 신체와 혈우병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혈우병 보인자였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할머니 영국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것.[3]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오빠, 즉 알렉세이 황태자의 작은 외삼촌인 프리드리히도 혈우병을 앓다가 죽었다. 안타깝게도 알렉세이 역시 혈우병 유전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 바람에 그토록 오래 기다려 얻은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세이의 혈우병로마노프 왕조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데 일조하게 된다.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렉세이는 "동화 속 왕자님"같은 미소년이었다고 하나, 혈우병 때문에 안색이 늘 창백했으며 잔병치레가 잦은 병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감기에 걸려 코를 세게 풀면 코 안의 점막이 헐어서 바로 피가 나왔기 때문에 알렉산드라 황후와 황녀들, 그리고 주변 시종들은 늘 그의 건강 때문에 노심초사했다고. 그 자신 또한 자신이 오래 살 수 없단 걸 알고 있어서 누나인 올가에게 자신이 언제 지금같은 생활을 누리지 못할지 알 수 없단 이야기도 했다.

2.3. 화목한 가정과 OTMAA라고 불린 5남매


이렇게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야외 활동에도 자연히 많은 제약이 따라서, 그가 남긴 일기를 보면 친구들과 직접 같이 놀지는 못하고 '''"친구들이 노는 것을 지켜 봤다"'''는 기록만 있다. 혈우병 때문에 몸이 늘 불편해서 신경질적인 모습도 자주 보였다. 실제로 알렉세이가 공식석상에서 아프다며 칭얼대자 첫째 누나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가 그러지 말라고 점잖게 만류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알렉세이는 도리어 더 신경질을 내며, 9살이나 위인 큰누나뺨을 때리는 무례한 짓을 하기도 했다. 당시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지만, 올가 황녀는 웃어 넘겨 상황을 무마시켰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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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알렉세이가 지병 때문에 종종 예민하게 굴긴 했어도 니콜라이 2세 일가는 대체로 화목한 가정이었고 알렉세이도 4명의 누나들과 친한 편이었다. 특히 친한 누나는 바로 위의 누나이자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녀'''로서 수많은 매체에서 다뤄진 그 유명한 아나스타시야 공주였다. 아나스타샤는 아파서 힘들어하는 알렉세이와 재밌게 놀아 주어 웃게 만들었으며, 늘 다정히 돌봐줬다고 한다. 장난기가 많았던지라 알렉세이와 내기를 해서 이긴 뒤 동생이 분해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기도 했지만, 일부러 져 주기도 했다고. 둘이서 암호를 만들어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누나들은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로 표현할 정도로 자매들끼리 서로 친했고,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혈우병 때문에 예민한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평소엔 조금 게으르긴 해도 사려깊고 인정있는 소년이였다고 한다. 밀리터리를 좋아했으며 그의 시종들은 지병을 앓기 때문인지 타인의 아픔에 민감했다고 회고했다.

2.4. 라스푸틴의 등장


한편 알렉산드라 황후는 외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종교적인 방법까지 시도했다. 그때 한 사람을 기용했는데, 그가 바로 떠돌이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었다. 신기하게도 라스푸틴이 알렉세이를 위해 기도해 주면 알렉세이가 차도를 보이는 등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데, 예전부터 악마의 힘이나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단순히 안정을 취하게 해 스스로 회복하게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5] 일설에 따르면 당시 막 상용화된 아스피린을 사용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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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병 때문에 단명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고,[6] 실제로 만약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다 (당시에는 그토록 해롭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지만)[7] 그 몸상태에 담배까지 피워댔으니 더 그렇다. 알렉세이 본인도 자신이 오래 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훌륭한 황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고 한다. 밀리터리 마니아라 제1차 세계대전에 군복을 입고 (후방이었겠지만) 병장으로 참전하기도 했다.[8]
'''그러나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질병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혁명이었다.'''

2.5. 2월의 러시아 혁명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난 이후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녀들과 황태자는 연금되었다. 임시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이들을 외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했으나, 연합국 어느 나라도 이들을 받아주기를 꺼려했다. 당시 차르의 삽질로 1차대전이 길어지면서 국민들이 떼죽음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그들을 받아줬다가는 반정부 운동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볼셰비키라고 해도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국민의 입장에서 봐도 처형당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는데 설마 죽이겠느냐는 생각도 있었다.[9]
이어 10월 혁명이 벌어져 볼셰비키가 집권하자 이들은 우랄 산맥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알렉세이는 혈우병이 도지는 바람에 다리를 아예 못 쓰게 돼서, '''니콜라이 2세가 아들을 직접 안고 이동해야 했다'''고 하니, 당시 황제 일가족이 겪은 비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18년 7월에 14번째 생일을 불과 1달쯤 앞두고,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해서 일가족 모두 피살당했다.
다음날에는 알렉세이의 이모인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살해되었다. 엘리자베타 대공비알렉산드라 황후의 둘째 언니로,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러시아 제국에 시집 와서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세르게이 대공[10]과 엘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엘리자베타 대공비는 자기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고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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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누나 올가 황녀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

3. 유해 발굴, 그리고 음모론(생존설)


그의 시신은 바로 위의 누나인 아나스타시야 공주처럼 오랫동안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남은 마지막 러시아 제국 황태자라고 주장하는 이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인 데다가 처형 당시에 몹시 허약해졌기 때문에 총상이나 총검에 찔려 자상을 입고도 살아남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라, 생존설을 반박하는 쪽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나타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실리 크세노폰트비치 필라토프(1907~1988)였다.
1907년에 태어난 그는 공식적으로 알렉세이보다 3살이 어렸다. 세례를 받았던 교회에 출생기록이 남아 있었으므로, 나이가 거짓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개 구두 제화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아코디언 등 여러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차이콥스키, 쇼팽 등 고전 음악과 러시아의 민속 음악, 오페라에도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의 역사, 특히 전쟁사에 박식해 아이들에게 항상 자세히 이야기 하곤 했으며,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등 6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또한 푸시킨, 체호프, 괴테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워킹 클래스로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상식적으로는 납득될 수 없는''' 매우 다방면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
그는 13세부터 22세까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이후엔 고등학교 지리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시점에 아나스타시야를 자기 누나라고 하면서, 자신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라 고백했다. 실제로 필라토프의 전체적인 골격과 얼굴 생김새 등이 알렉세이와 매우 유사했으며, DNA 검사 결과 자손들의 유전자와 로마노프 왕조의 유전자가 일부 일치했다. 관련 글 또한 필적이 같았다는 말도 있다.
비록 필라토프가 혈우병 증세를 보이진 않았어도[11]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일부 일치하는 것으로 나오자 이는 거의 결정적인 증거로 취급되었다. 사실 일부 학자들도 이렇게나 알렉세이와 일치하는 점이 많았던 필라토프를 알렉세이라고 '''믿고 싶어했었다.''' 실제로 1991년에 발굴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에서도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는 없었는데, 이것이 알렉세이 생존설의 한 증거이자 필라토프가 알렉세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도 했다.
물론 필라토프를 알렉세이로 보기 어려운 근거도 상당히 있었다. 필라토프는 혈액 관련 질병이 있긴 했으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생전에 병원도 거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고 유배 생활 중에 걷지도 못하게 되었던 알렉세이가 갑자기 건강체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필라토프는 "진짜 바실리 필라토프는 죽었고, 그 부모가 알렉세이 황태자였던 나를 거둬 자신들의 아들인 바실리 필라토프의 인생을 살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갓난아기도 아니고 열 몇 살 먹은 남자아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한데, 필라토프의 어린 시절 이웃들은 그런 사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2007년에 셋째 누나 마리아 공주와 함께 진짜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결국 필라토프는 진짜 알렉세이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여담이지만 2007년에 발굴된 시신 3구를 분석한 결과,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시신은 1991년에 이미 발굴됐던 9구의 시신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당시에 마리야로 판명됐던 시신이, 사실 아나스타샤의 시신이었던 것. 당시 처형에 가담했던 자들의 친척 등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 알렉세이와 마리야의 시신을 묻고 그 근처 다른 곳에 남은 시신들을 묻었기 때문에, 알렉세이와 마리야의 시신만 뒤늦게 발굴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알렉세이의 시신은 찾았지만, 바실리 필라토프가 왜 자신을 황태자라고 주장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했던 자들 태반은 가짜 아나스타시야처럼 돈과 명예를 얻어보려고 되도 않는 사기를 친 것이었지만 이 자는 그 어떤 가짜들보다도 파급력이 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도 평생 나서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아나스타시야까지 운운하며 자기가 알렉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DNA 검사 결과까지 일부 일치했던 바실리 필라토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DNA가 사람의 고유한 식별 정보이며 생판 남인 사람끼리 DNA 정보가 일치할 확률은 극히 희박한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보긴 힘들다. 그래서 일각에선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후손[12]이거나 혹은 니콜라이 2세의 혼외자녀가 아니겠냐는 주장이 있고, 혼외자녀라 일반 귀족으로 숨겨키워서 로마노프 왕조 숙청때 칼날을 피할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필라토프 본인도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의 사촌 또는 이복 동생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련 치하에서 자신의 친척들인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이 숙청당하는 것을 보고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13] 임종 직전에야 그걸 공개했는데, 노년에 기억에 혼선이 생겨 자신이 알렉세이 본인이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문점은 많지만 당사자인 필라토프 본인이 이미 사망했고, 자녀들도 부친의 임종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데다가, 이 사실을 알고도 그 후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서, 학계에서도 더이상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4.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Alexei Nikolaevich,
Tsarevich of Russia)

니콜라이 2세
(Nicholas II)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헤센 대공국의 공녀 마리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덴마크다그마 공주
(Princess Dagmar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세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 대공국의 공녀 알릭스
(Princess Alix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의 공자 카를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프러시아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14]
영국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5. 대중 매체에서


1986년에 방영한 TV영화 <아나스타샤>에서는 당시 12살이었던 아역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알렉세이를 연기했는데 이것이 그의 연기 데뷔작이었다. 극중에서 알렉세이는 유배 생활에 절망하다 계단에서 구르는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하는 바람에 크게 다쳐 다리를 못쓰게 되는 것으로 묘사됐다.
사무라 히로아키의 만화 춘풍의 스녜그로치카에서는 알렉세이 황태자가 사실은 생존해 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BLOOD+알렉세이는 이 인물이 모티브다.

6. 관련 문서



[1] 사실 알렉세이란 이름은 로마노프 가문에서 꺼려졌는데, 표트르 대제가 제거한 아들의 이름이 바로 알렉세이였기 때문.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를 존경했기에 아들에게 그의 이름을 붙여줬다.[2] 러시아 제국파벨 1세 이후 황자에게만 황위계승권을 인정하고 있었다.[3] 빅토리아 여왕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은 알렉세이뿐 아니라 여럿이었다. 보인자가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들이 유럽 각국의 왕실로 시집 가서 유럽 왕실마다 혈우병이 퍼진 것.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자손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해규모가 더욱 컸다. 자손들에 대해서는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4] 이렇게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는 장녀로서 병약한 남동생은 물론 여동생들과도 사이좋았고 문무가 모두 출중했기에, 병약한 알렉세이 황태자를 제치고 황위계승자 감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러시아에서는 황녀들에게 황위계승권이 없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안좋았던 아들 파벨 1세가 아버지를 폐위, 독살하고 황제가 된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즉위 후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기 때문.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니콜라이 2세는 여성의 제위계승을 인정하는 법안을 만드려고 했다고.[5] 생각해보면 의외로 단순하다. 안 그래도 병약해서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못해 우울하고 신경질적이던 알렉세이에게 있어선, 사무적이고 딱딱한 의사들의 처방보단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자상한 아저씨의 편안한 말 한마디'''가 더 마음에 안정을 줬을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 혈우병은 의사들도 손쓸 수 없는 병이었으니, 라스푸틴의 방법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었기도 했던 것...[6] 당시에 혈우병 환자들은 대개 젊은 나이에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등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알렉세이 황태자의 어머니의 외삼촌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막내아들) 또한 혈우병 환자였고 실족사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치명상은 아니었어서 상처가 잘 치료되었다면 살았을 것이나 혈우병으로 인해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었다고.[7] 엄밀히 말하면 담배의 해악성은 이미 그 전에 알려져 있었다. 다만 지금처럼 폐암의 원인이니 하는 수준이 아니라, 가래가 많이 끓고 이가 누래지는 등의 약소한 해악성만 알려진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는 상하류층 모두 기생충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담배의 유독성 때문에 기생충들이 죽거나 활동이 잠잠해지는 효과도 있었으니, 당시 알려진 부작용은 사소한 부작용으로 여겨져 무시될 정도였다[8] 1차 세계대전에선 아버지를 따라가 육군 본부에서 지냈고 보이스카우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하인들과 같이 병정놀이를 즐겨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황태자만을 위한 모신나강을 선물했을 정도.[9] 실제로 그나마 망명에 성공한 황족들은 모두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죽은 뒤에 도망다니다가 망명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나마도 남자들은 전부 자력으로 도망가고 황태후와 공주들만 받아줬다.[10] 니콜라이 2세의 숙부[11] 다만 군대는 혈액 관련 질병 때문에 면제받았다고 한다.[12] 가장 유력한 추측은 니콜라이 2세의 남동생 미하일 대공의 혼외자녀라는 설이다.[13] 적백내전 당시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이 소련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고, 스탈린의 죽음으로 끝난 대숙청을 무사히 넘겨도 좋은 대접은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소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14]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