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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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0월 7일 ~ 2006년 6월 2일 (향년 81세)
1. 소개
柳致松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아호는 '만취(晩翠)'(...)이다.
2. 일생
2.1. 청년기
1924년 10월 7일 경기도 진위군 평택면 비전리(현 평택시 비전동)#에서 태어났다. 평택성동초등학교, 경기고등학교, 1952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현재는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2.2. 정치 활동
2.2.1. 제1공화국 ~ 제2공화국
1948년 국회의장 신익희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권 때 민주국민당, 민주당 등의 정당에 소속되어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2.2.2.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1961년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 창당된 민정당[1] 의 청년부장을 맡으며 정치에 복귀하였다. 1963년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평택군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 5월 민정당과 민주당[2] 이 합당하여 민중당(民衆黨)이 창당되자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 출신 정치인들이 창당한 신민당에 참가하여 조직국장, 사무차장 등을 맡았다. 같은 해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윤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3]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영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기도 평택군-안성군-용인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서상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역시 민주공화당 서상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골수 유진산계였으며, 1974년 4월 유진산이 별세한 이후 이민우와 함께 견지동우회라는 유진산계 계보를 이끌었다. 단, 이민우는 김영삼 쪽으로 기운 반면 유치송은 이철승 쪽으로 기울었다.
2.2.3. 제5공화국
제5공화국이 출범할 때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민주한국당의 총재가 되었다.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7.7%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어서 1981년 3월에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평택군-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자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민한당에서 나름 온건파를 대변했기에 "사쿠라"로 낙인이 찍혔다. 짐작이 어느정도는 되는 이야기지만 유치송의 이런 바지총재 자리는 신상우 사무총장 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공천권도 전혀 없이 무력했다. 그러나 훗날 드러난 것은 정작 민한당의 공천을 좌지우지하던 신상우도 기실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방준필 서울분실장)에 휘둘리는 페이크 보스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송탄시-평택군-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자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5선). 그러나 신한민주당 돌풍에 민주한국당이 참패를 당하자 그 해 3월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그 사이 총재직은 조윤형이 잠깐 대신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9월 다시 총재로 추대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평택시-송탄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권달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민주한국당이 당선자를 내지 못하여 등록취소되면서 정계를 은퇴하였다.
2.3. 정계 은퇴 이후
이후로는 대한민국 헌정회 12대 회장과 원로회의 의장, 통일원 고문,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회 회장, 민주한국당 동우회 회장, 학교법인 동북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역사의 기로에 서서》, 《해공신익희일대기》, 《민주화의 과제》 등의 저서가 있다.
2006년 6월 2일 오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유족
그의 아들인 유일호는 18대, 19대 국회의원(한나라당-새누리당),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었다.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1] 제5공화국 때 창당된 민주정의당이 아니라, 민주당의 구파인 윤보선, 유진산, 김영삼 등이 주축이 되어 창당된 정당이다.[2] 1963년 민주당 신파 계열의 정치인인 박순천, 김대중 등이 창당한 정당이다.[3] 여담으로 이 때 그의 표를 깎아먹은 후보가 자유당 집권기에 정치깡패로 유명했던 김동진이었다.[4] 대한국민당과 신설 합당[5] 민주당에 흡수 합당[6] 민주당과 신설 합당[7] 신한당과 신설 합당[8] 민주공화당 서상린 후보와 동반 당선[9] 민주공화당 서상린 후보와 동반 당선[10] 민주정의당 이자헌 후보와 동반 당선[11] 민주정의당 이자헌 후보와 동반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