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청운
1. 개요
한국의 前 농구선수. 고교, 대학시절까진 주로 센터로 뛰었고, KBL에서는 3-4번 포지션을 오가는 식스맨으로 총 10시즌을 뛰었다.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 시절
대경상업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센터로 활약했고, 고3때 이종호(180cm,G), 황문용(191cm,F) 등과 함께 뛴 대통령기 결승에서, 고교농구계의 슈퍼스타 현주엽이 있던 휘문고등학교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고, 현주엽과 매치업 상대이자 대회 MVP에 오른 변청운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건국대 진학후에도 1학년때부터 주전으로 뛰며 정진영(184cm,G), 김용식(187cm,G) 등 선배들을 도와 건국대를 1994-95 농구대잔치까지 진출시켰으며, 3,4학년때인 1996, 1997년 2년 동안 건국대가 중앙대, 한양대 등을 제치고 연세-고려-경희대에 이어 대학농구 4강권에 안착하는데 1등 공신이기도 했다.
장신자가 적은 팀 사정상 비교적 단신임에도 대학 시절 내내 4, 5번 자리를 소화해야 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현주엽과 대등한 수준의 파워에 정교한 3점 슛까지 갖춘 만능 포워드로 거듭났고, 덕분에 건국대 입학 당시보다도 주가가 크게 오르며 1998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라는 높은 순위로 광주 나산 플라망스의 유니폼을 입게된다.[1]
2.2. 프로 시절
데뷔 시즌에는 광주 나산이 빅맨 듀오 워렌 로즈그린(190cm,F)-아킬리 잭슨(201cm,C)을 외인으로 뽑는 바람에 백업 파워 포워드 변청운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99-00 시즌 광주 골드뱅크로 바뀐 팀이 에릭 이버츠(198cm,F/C)-키이스 그레이(183cm,G/F)의 장단신 조합의 외인을 뽑으면서 시즌 초부터 변청운이 주전 4번으로 낙점, 신인 조상현 등과 함께 팀을 이끌었지만 팀은 크리스마스까지 7승 11패에 그쳤다. 이후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빅딜"로 조상현 대신 현주엽이 영입되면서 빅맨 수비의 부담을 덜게 된 변청운은, 그간 숨겨왔던 3점 능력을 폭발시키며(경기당 1.4개, 성공률 41%)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도 문제없이 뛸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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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에 다녀온 뒤 02-03 시즌 여수 코리아텐더로 복귀한 변청운은 3-4번 포지션을 아우르는 준주전급 식스맨으로 뛰었고, 루키 진경석(191cm,F)의 백업이자 외국인 선수가 1명만 뛸수 있던 2쿼터에 에릭 이버츠-안드레 페리 콤비에게 휴식을 주며 02-03 시즌 여수 코리아텐더 팀의 4강 신화에 기여한다. 특히 서울 삼성과의 6강 플레이오프부터는 아예 주전 3번으로 출전, 1,2차전에서 각각 '''3점 6개(6/8)''', '''4개(4/6)'''를 꽂는 고감도 슛감을 자랑하며, 주희정-서장훈 콤비가 부상에서 복귀한 서울삼성을 2:0으로 격파하는 최고 이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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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KCC 이지스 시절 같은 2쿼터의 사나이였던 안양 SBS 윤영필과의 매치업.
다음 시즌 현주엽이 제대하면서 다소 출장시간이 줄어든 변청운은 03-04 시즌 종료 후 석명준(189cm,F)와 1:1 트레이드로 전주 KCC로 옮기게 되지만, 03-04 시즌 챔프전 우승팀이던 전주 KCC의 포워드 라인에는 추승균-찰스 민렌드에 최고의 식스맨 정재근까지 있었고 변청운은 2쿼터에조차 출장기회를 잡기 힘들어졌다. 2005년 정재근이 은퇴하면서 변청운은 2쿼터에서 3년차 포워드 손준영(193cm)과 번갈아가며 출장했지만, 서장훈, 김주성 등 넘사벽 토종빅맨은 물론 현주엽, 송영진 등을 상대로도 속수무책 털리며 전주 KCC의 2쿼터 전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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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시즌 조성원의 은퇴와 이상민의 잦은 부상, 찰스 민렌드의 이탈로 무너져가던 전주 KCC의 허재 감독은 급기야 리빌딩을 선언하고, 원주 동부의 장신 스윙맨 정훈을 영입하기 위해 변청운과 백업가드 표명일이 포함된 3:3 트레이드를 실시한다.[2] 06-07 시즌 중반 합류한 변청운은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복귀 후 체력 방전 및 부상에 시달리던 김주성의 자리를 메우며 평균 24분의 출장시간을 가져갔지만, 전주 KCC에서 벤치를 너무 오래 지킨데다 장점이던 3점슛감까지 완전히 잃어버린 탓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이후 이광재, 윤호영 등 신예가 대거 가세하면서 자리를 잃고 09-10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모교 대경중학교 농구부 코치를 맡았으나, 2012년 팀이 해체되고 말았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배재고등학교 농구부 감독을 역임했다.
4. 관련 문서
[1] 다만 이때는 KBL이 겨우 두시즌만을 치른 직후라, 대부분의 감독들이 자기 팀들 가드와 슈터들은 괜찮은데 4번 포지션의 신장이 모자라는게 약점이라고 착각하던 시절이었다. 이바람에 1998년 2월에 열린 KBL 최초의 신인드래프트에선 1순위부터 5순위까지 모두 빅맨(1순위: 현주엽, 2순위: 윤영필, 3순위: 김택훈, 4순위: 변청운, 5순위: 이은호)이었고, 대학 최고의 포인트 가드이자 향후 국가대표팀에 KBL MVP까지 먹게 되는 신기성이 무려 7순위까지 밀리고 말았다.[2] 원주 동부 get: 표명일, 변청운, 백주익 ↔ 전주 KCC get: 정훈, 김영만, 배길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