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훈
1. 개요
한국의 전 농구선수.
고교시절 장신 가드로 주목받았으나, 연세대 진학 후 수비형 파워 포워드로 전업, 몸을 사리지 않는 거친 수비를 자랑하며 '''킬택훈'''이란 별명을 얻은 "파이터형 수비수".
2. 선수생활
2.1. 고교-대학시절
홍대부고 시절 193cm의 장신가드로 주목을 받으며 2학년때인 1992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U-18 선수권대회 대표로 선발되었고, 대표팀의 주전 가드로서 서장훈(휘문고 3), 현주엽(휘문고 2), 추승균(부산중앙고 3) 등 호화멤버를 리딩하며 대한민국을 준우승까지 이끌었다. U-18 대회 직전에 열린 추계연맹전에서도 홍대부고의 원맨 에이스나 다름없는 활약을 펼치며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결승전을 앞두고 대표팀에 불려나가는 바람에(;;;) 고교대회 첫 우승을 눈앞에서 놓치기도 했다. 고 3때 팀성적이 좋지 못한 바람에 가드 랭킹 1위의 타이틀을 송도고 신기성에게 내주긴 했지만 장신가드로서의 포텐셜은 대학강호들로부터 여전히 주목받았고, 치열한 스카웃경쟁 끝에 당시 대학 최강 연세대를 이끌던 홍대부고 선배 이상민의 후계자로 낙점받으면서 연세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택훈 입학 당시 연세대는 국가대표 포인트가드 이상민(91학번)이 건재한대다 청소년대표팀에서 같이 뛰었던 이종호(180cm,93학번, 대경상고 졸)까지 있었던 탓에, 대학무대 첫 대회였던 1994년 3월 MBC배 대회에서 신입생 김택훈은 스몰 포워드 포지션으로 주로 출전하게 되었다. 지난 농구대잔치 우승팀이었던 최강 연세대는 농대 우승 멤버중 문경은만 졸업했고 이상민-김훈-우지원-서장훈 등 나머지 주전들이 건재한 덕분에 예선전에서 가비지 차임이 속출했고, 김택훈을 비롯 구본근(197cm,C,대전고 졸), 김수환(191cm,PF,부산중앙고 졸) 등 신입생들도 출장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중 농구센스가 제일 뛰어났던 김택훈은 2,3,4번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신입생들 중 가장 많은 출전시간을 가져갔다. 비록 연세대가 최종 결승에서 라이벌 고려대에 대역전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3]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의 활약치곤 훌륭한 활약이었고, 소속팀 연세대는 졸업생 문경은보다 공격력은 떨어져도 수비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포워드를 보강했음에 만족했다.
서장훈과 이상민이 1994년 캐나다 세계선수권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차출된 연세대는 전력 약화를 우려하여 7월 1차 연맹전에 불참하지만, 농구대잔치 출전점수 때문에 두달후 열린 9월 2차연맹전엔 어쩔수없이 참가해야만 했다. 그래도 우지원, 김훈, 김택훈 등 주축 슈터들이 건재했고, 구본근, 석주일 등이 지키는 골밑[4] 도 고려대를 제외하면 그다지 밀리지 않는다는 평이라 어느정도 성적을 기대하긴 했는데, 이게 웬걸!! 예선에서 건국대, 한양대에 연패하며 예선탈락하는 수모를 겪고 만다. 대회를 앞두고 이상민의 후계자로 키우던 2학년 이종호(180cm,G)가 출장기회 부족에 불만을 품고 농구를 그만둔 것과, 에이스 우지원과 백업포워드 석주일의 부상 이탈 등이 원인으로 꼽혔으나, 가장 큰 원인은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김택훈 등 신입생들의 기량이 아직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5] 다행히 연세대가 서장훈, 이상민 복귀 후 3차 연맹전에서 우승하며 농구대잔치 출전 티켓을 따내긴 했지만, 고교시절 소속팀-청소년 대표팀에서 가드로 활약했던 김택훈은 최명도(경희대 4), 김희선(중앙대 3), 정진영(건국대 3), 조성훈(명지대 3), 신기성(고려대 1) 등 훌륭한 가드가 즐비했던 당시 대학농구레벨에 비빌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이때부터 김택훈의 다재다능함은 "분업농구" 신봉자 최희암 감독에 의해 오직 수비용 포워드로서만 발휘하도록 키워진다.
농구대잔치 들어 김택훈은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신입생답지 않은 활약을 펼치며 연세대의 2년연속 정규리그 전승(13승 무패)에 기여한다. 때로는 구본근과 번갈아가며 4번 포지션으로 출전, 국가대표 파워포워드 정재근을 전담 마크하기도 했고, 정규리그 막판 슈터 김훈이 부상당한 뒤엔 주전 2번으로 나와 퍼리미터 수비수 겸 3점 슈터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비록 연세대가 8강전에서 리그 8위팀 삼성전자에 업셋을 당하며 탈락하며 예상보다 일찍 짐을 싸긴 했지만, 신입생임에도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맹활약한 김택훈의 재발견은 1995년 시즌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농구대잔치 8강 3차전에서 선수생명을 위협당하는 목부상(상관타)을 입은 서장훈이 한국농구계에 염증을 느끼고 돌연 미국 산호세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가버린다. 거기에 같은 경기에서 센터 구본근마저 심장이상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연세대는 졸지에 센터가 한 명도 없는 팀이 되어버린다. 1995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를 맞아 최희암 감독은 궁여지책으로 팀내에서 가장 수비가 좋고 몸싸움이 되는 2학년 김택훈을 '''센터로 기용'''하는 파격 시도를 하는데, 김택훈은 최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연세대의 골밑을 혼자서 지켜냈고 팀을 MBC배 결승까지 이끌었다. 라이벌 고려대와 2년연속 만난 결승전에서 "센터" 김택훈은 상대팀의 4학년 센터 전희철의 안면을 후려갈기는 등 터프한 수비(;;)를 보여주며 분전하지만, 어쩔수없는 전력차로 인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문다. 이후 2차대회부터는 심장질환에서 복귀한 구본근과 번갈아가며, 때로는 더블포스트를 이루어 골밑을 지키게 되는데, 이들의 헌신 덕분에 1995년 당시 시즌 전관왕(5관왕)을 달성한 헝그리베스트 5[6] 고려대의 독주속에 연세대가 다른팀들을 제치고 2위권을 수성할 수 있었다.
1995-96 농구대잔치에 들어서도 연세대는 김택훈-구본근이 골밑에서 최대한 비벼주고 외곽에서 우지원-김훈-조상현-조동현 등 3점슈터들로 승부보는 전략을 내세우며 돌풍을 일으켰고, 전승의 고려대, 이상민, 문경은 등 호화멤버의 상무에 이어 리그 최종순위 3위에 오른다. 슈터들은 물론 포인트가드 황성인에다 빅맨 김택훈, 구본근까지 주야장천 3점을 쏴대는 탓에 당일 슛 컨디션에 따라 경기력이 엄청나게 오락가락했는데, 대회 개막전에서 전대회 우승팀 기아자동차를 꺾은데다 리그 2위 상무도 이기고 리그 전승팀 고려대를 연장까지 물고늘어졌던 반면, 주전 대부분이 30줄인 최약체 한국은행에 골밑을 장악당하며 패했고 기업은행에게는 상대 센터 박상욱에게 더블더블을 허용하며 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시즌보다 훨씬 약화된 전력임에도 농구대잔치 4강까지 오르는데는 대학 최고수준의 빅맨으로 완벽히 변신한 김택훈의 활약이 매우 컸고, 덕분에 농구대잔치 올스타 대학선발로 뽑혀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1996년 시즌 서장훈이 미국에서 돌아오면서[7] 연세대의 전력이 급상승하게 되고 1, 2차 연맹전을 모두 석권하며 대학농구 최강자의 지위를 탈환한다. 3학년 동기 구본근을 제치고 팀의 주전 파워 포워드를 차지한 김택훈은 미국에서 공격력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서장훈의 파트너로서 좀더 블루워커 역할에 집중했고, 지난해보다도 더욱 거칠어진 수비를 바탕으로 연세대의 골밑을 사수했다. 9월 2차연맹전에서는 대회 도중 부친상을 당하며 빠졌다가 결선리그 막판에 복귀해 뛰었는데, 팀이 우승하면서 대회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일약 대학농구에서 손꼽히는 빅맨이 된 김택훈은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 U-22 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고 현주엽, 서장훈의 백업 빅맨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첫 우승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12월 개막한 마지막 농구대잔치에서 김택훈은 농구팬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을만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되는데...
KBL의 개막을 목전에 두고, 실업팀과 대학팀이 함께 참가하는 마지막 농구대잔치로서 열린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황성인-조동현-조상현-김택훈-서장훈의 막강 베스트 5가 이끄는 연세대는 거칠것이 없었고, 대학부 예선에서 8전 전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 4강에 직행한다.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에서 실업부 2위팀 현대전자를 격파하고 올라온 "자줏빛 군단" 경희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이미 팀 창단이래 최고성적을 거둔 경희대의 삼각편대(강혁-김성철-윤영필)는 4강전에서 대학 최강 연세대에 더욱 거세게 도전해왔다. 1차전 초반부터 경희대가 특유의 활동량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압박하자, 김택훈이 에이스 킬러를 자처하며 '''상대팀 주전센터 윤영필의 안면을 팔꿈치로 가격, 윤영필의 앞니 3개를 날려버렸고''' 윤영필은 경기도중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다. 주전센터를 잃고 1차전을 내준 경희대는 2차전에선 강혁이 주도하는 속공 농구로 다시한번 승부를 걸었고, 경기내내 업치락뒤치락 접전을 벌였지만, 어느 일본 만화를 연상케하는 '''김택훈의 팔꿈치가 경희대 에이스 강혁을 향해 한번더 휘둘러졌고''', 주전센터에 이어 팀 에이스마저 잃은 경희대는 맥없이 2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경기장에 몰린 15,000여명의 관중 대부분 스타군단 연세대를 응원하는 팬이었으나, 김택훈의 연이은 악의적 반칙탓에 오히려 연세대가 야유를 받는 형국이 되기도 했다. 결승전에서도 김택훈은 특유의 거친 수비에 공격에서도 맹활약하며, 소속팀에 사상 두번째 농구대잔치 우승컵을 안긴다.
1997년, 93학번 서장훈과 함께 졸업반이 된 94학번 김택훈은 팀 전력이 워낙 탄탄한 덕분에 KBL 데뷔를 앞두고 공격에서도 적극성을 띄기 시작했다. 지난 농구대잔치 우승멤버가 그대로인 연세대를 막을 팀은 아예 없다시피했고, 연세대는 MBC배, 대학농구연맹전[8] , 전국체전에 1997-98 농구대잔치까지 석권하며 사상 첫 시즌 전관왕(4개 대회)에 올랐다. 게다가 김택훈은 부산에서 열린 제 2회 동아시안 게임[9] 대표팀에 뽑히며 경희대 김성철과 함께 유이한 대학생 국가대표로서 생애 첫 성인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10] 하지만 대표팀에서의 비중은 미미했고, 이후 열린 메이저 대회 1997 리야드 아시아선수권 때는 대표팀에서 빠지고 만다.
대학 시절 마지막을 시즌 전관왕으로 마친 김택훈은 현주엽에 이어 대학 No.2 파워포워드로 손꼽히며 "현주엽 드래프트"로 불린 1998년 KBL 신인드래프트에서 유력한 전체 2순위 후보가 된다. 당시 대부분의 KBL 팀들은 소속팀의 가드진의 기량은 괜찮은데 4번 포지션을 맡아줄 빅맨이 부족한 게 약점이라고 "착각"하던 시절이었고,[11] 덕분에 김택훈은 경희대 윤영필, 중앙대 이은호와 2순위를 놓고 경쟁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런데 드래프트를 며칠 앞두고 김택훈은 10개 구단 관계자를 대상으로 느닷없는 "양심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본인의 발목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시절 포지션 변경 후 매 경기마다 상대팀 빅맨과 몸싸움을 해야 했고,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출전하며 반복되는 발목부상을 치료할 틈도 없이 혹사당한 탓에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대부분 끊어진 상태'''라는 충격고백이었다. KBL 출범 이래 첫 드래프트에서 선수 본인의 값어치를 하락시킬 수 있을만한 이야기였고 실제로 당시 김택훈의 발목 상태를 사전 확인한 안양 SBS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전체 2순위로 경희대 윤영필을 뽑았다. 하지만 전체 3순위를 뽑은 수원 삼성 썬더스는 부상보다 김택훈의 다재다능함을 더 높이 샀고, 수술 및 재활로 시즌 초반을 날려야 함에도 주저없이 김택훈을 선발한다.
2.2. 프로 시절
1998년 신인드래프트는 97-98 시즌이 한창이던 3월 9일에 열렸고, 이때 뽑힌 루키들은 다음시즌부터 뛸수 있었다. 덕분에 발목상태가 심각했던 김택훈은 수술과 재활을 모두 마친 뒤 98-99 시즌 개막 후 2라운드 중반쯤부터 데뷔할수 있었다. 데뷔후 세번째 경기인 광주 나산 플라망스 전에서 주전 파워포워드로 뛰면서 18득점 4리바를 기록, 또한명의 엘리트 토종 빅맨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가 싶었으나 이는 정말 깜짝 활약이었고(;;) 바로 다음경기부터 부상으로 이탈해버린다. 복귀한 이후에도 그저 그런 활약만 하다가 이창수(196cm,C), 박상관(200cm,C), 강양택(190cm,PF) 등과 로테이션으로 기용되는 파울전문 빅맨이 되어버렸고,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는 베테랑들에 밀려 출장시간이 더욱 줄어든다. 99-00 시즌 재계약한 센터 버넬 싱글턴(200cm)의 활약속에 팀은 정규리그 3위에 오르지만, 김동광 감독은 싱글턴의 파트너로 베테랑 이창수에게 좀더 기회를 주었고, 김택훈은 여전히 파울전문 수비수로만 뛰다가 시즌 종료 후 상무에 입대한다.
입대 첫해엔 악연의 드래프트 동기 윤영필과 골밑 파트너를 이루며 상무를 2000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이끌지만, 결승에서 송영진-김주성 트윈타워의 중앙대에 골밑을 유린당하며 대패, 준우승에 그친다. 이듬해 2001-02 농구대잔치에선 마침내 우승하며 상무 농구단 사상 첫 우승의 일원이 되지만, 이때는 후임 현주엽이 입대한 바람에 출장기회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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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 시즌 서울 삼성 썬더스로 복귀한 김택훈은 FA계약으로 팀에 합류한 서장훈의 존재로 인해 연세대 신입생 시절 이후 약 8년만에 스몰포워드로 뛰게 되었으나, 8년의 세월은 고교시절 촉망받던 장신가드였던 김택훈을 필드골 40%대에 3점슛 능력이 사라진(시즌 3점슛률 16%;;) 슛고자 포워드로 만들어버렸고, 외인 1명만 뛰는 2쿼터에도, 경희대 백업센터 출신으로 3번 포지션으로 바꾼지 얼마되지 않은 2년차 포워드 박성훈에게 밀리며 벤치신세가 된다. 가끔 수비요원으로 출장할때는 NBA 메타 월드 피스, 브루스 보웬을 연상케 하는 하드파울들로 토종 빅맨과 외인 센터들을 가리지 않고 후려쳐대었고, 파울 후 덩치가 산만한 외인 센터들에게도 전혀 쫄지않고 달려드는 "파이터"이기도 했다.
발목 부상 및 체중 증가로 대학시절의 운동능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지만[12] 기본적인 대인수비력은 여전했던 덕분에 플레이오프 같은 중요한 게임에 상대팀 에이스 스타퍼로 출장하기도 했다. 03-04 시즌 서울 삼성과 인천 전자랜드의 플레이오프 6강전에서, 1차전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던 인천 전자랜드의 에이스 앨버트 화이트를 막기위해 2차전 선발로 깜짝 출전, 화이트를 8득점-6리바-4어시로 묶고 본인은 12점을 올리면서 서울 삼성이 2차전을 가져가는데 기여하기도 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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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시즌 종료 후 FA가 된 김택훈은 자유계약 외인들이 판치는 리그에 더이상 통하지 않는 토종 빅맨으로 FA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할 것으로 보였으나, 박수교 감독의 과감한 베팅을 통해 연봉 9천만원(전년도 대비 2천만원 상승;;;)에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로 이적한다. KBL 역대 최저승률 2위(05-06 시즌 8승 46패)를 찍은 팀에서도 출장기회를 잡지 못한 김택훈은 인천 전자랜드에서 두시즌을 뛰고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2011년 미국 NCAA 테네시 대학교 농구부에 코치 연수를 다녀오기도 하였으나, 엘리트 농구코치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잠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동호회 농구 코치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연예인 농구리그 경기 때 김훈 등과 함께 코치로 가끔씩 얼굴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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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해설자가 되어 KBS 지상파 중계에도 출연했고 KBS N SPORTS의 WKBL 해설도 맡았었지만 2019-20 시즌을 끝으로 모두 하차했다. 현재는 가끔씩 KUSF가 자체제작하는 대학농구리그 중계에 나서는 중.
4. 시즌별 성적
5. 여담
- 각 커뮤니티에서 "농구인 주먹순위"를 뽑을 때 이지승(188cm, F, 고려대 졸)과 함께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선수 중 하나다. 둘 다 대학 시절 거친 대인방어로 유명했던 선수들이라 이런 소문이 난 듯.
- 연세대 2학년 때, 연습코트에 1학년 학생이 구두를 신고 들어왔다고 폭행(!!)하며 교내에 대자보가 붙은 적이 있다. 대학에도 군기문화가 있던 1995년이라 일일이 고소까지 가진 않은 듯.
[1] 경주 김씨 상촌공파 23세손 '澤'자 항렬이다. 개그맨 김준호의 아들뻘, 개그맨 김기리의 손자뻘이다.[2] 족보없는 대회다 보니, 다른 대회 때는 상무-대학선발팀을 출전시켰으나, 홈에서 열렸던 이 때만 유일하게 성인 국가대표팀이 출전했다.[3] 경기 종료 4초전 동점상황에서 고려대 신입생 현주엽이 원맨 속공찬스를 잡고 그대로 올라갔는데, 김택훈이 이를 전속력으로 따라잡아 블록으로 저지했지만 파울 판정을 받고 만다. 결국 현주엽이 자유투 2개를 모두 넣으며 고려대 우승, 승부를 결정지은 두 신입생의 표정이 교차되며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4] 초반에 중용되었던 김수환은 이 시점에서 팀을 이탈한 상태였다.[5] 같은 멤버 그대로 출전한 정기 연고전에서도 대 고려대전 5년 연속 승리를 마감하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때도 양교는 서장훈과 이상민(이상 연세대), 현주엽, 전희철(이상 고려대)가 국가대표에 차출된 상태였으나, 고려대의 백업 수준이 훨씬 높았다.[6] 신기성-김병철-양희승-현주엽-전희철[7] 미국 유학 시 학적이 인정되지 않으면서 1년 휴학으로 처리, 김택훈, 구본근과 같은 3학년으로 복학했다.[8] 1997년에는 한번만 열렸다.[9] 1993년 상하이 대회를 시작으로 동아시아 총 9개국(한국, 중국, 일본, 북한, 대만, 몽골, 홍콩, 마카오, 괌)이 참가하던 일종의 권역별 종합경기대회. 2013년 톈진 대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10] 다른 동아시안게임에서 대부분 대학선발을 내보낸것과 달리, 홈(부산)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A대표팀이 출전했다. 방열 감독에 유재학 코치가 이끌던 당시 국가대표팀은 전희철-현주엽-서장훈을 3, 4, 5번으로 동시에 기용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장신 라인업을 들고나온 첫 사례였다. 예선에서 일본대표팀은 물론 약관의 왕즈즈(211cm)가 이끄는 중국 U-21팀까지 꺾으며 결승까지 무난히 진출했는데, 결승에서 단신 가드들의 3점이 폭발한 복병 타이완에 패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다.[11] 이는 농구대잔치 시절 실업팀들이 겪었던 트라우마 탓이기도 했다. KBL 원년시즌(1997)과 두번째시즌(97-98) 시즌을 뛴 각팀 토종빅맨들 중 대구 동양 전희철과 안양 SBS 정재근을 제외하곤(원주 나래 강병수, 수원 삼성 강양택, 대전 현대 정경호, 인천 대우 정재헌 등) 농구대잔치 시절 대학 선수들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선수들이다.[12] 연세대 시절 김택훈은 "이쁜 농구"만 한다는 연세대에서 서장훈, 구본근과 함께 몇 안 되는 인게임 덩커였다.[13] 하지만 서울 삼성은 3차전 연장접전끝에 역전패하며 2회연속 6강에서 탈락했고, 서장훈을 영입하고도 2년연속 6강밖에 못간 바람에 김동광 감독이 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