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한(1601)

 

'''도정궁의 역대 주인'''
4대 응천군 이돈

'''5대 이정한'''

6대 이홍일

'''도정궁 4대 사손'''
'''이정한
李挺漢'''

'''본관'''
전주(全州)
'''이름'''
정한(挺漢)
'''초명'''
대승(大承)
''''''
수보(秀甫)
'''생부'''
응천군
'''생모'''
성산현부인 성주 이씨(星州 李氏)
'''부인'''
정부인[A] 파평 윤씨(坡平 尹氏)
정부인[A] 청송 심씨(靑松 沈氏)
'''자녀'''
1남 6녀[1]
'''생몰
기간
'''
'''음력'''
1601년 9월 25일 ~ 1671년 8월 30일
'''양력'''
1601년 10월 20일 ~ 1671년 10월 2일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가족과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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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출신 문신. 덕흥대원군의 현손자이고 도정궁 제4대 사손이자 제5대 주인이다.

2. 생애


1601년(선조 34년)[2] 9월 25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당은군 사저에서 응천부정 이돈과 성산부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른 종실 출신들처럼 음서로 관직에 나가 참봉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년) 아버지 응천도정을 잃고 덕흥대원군 사손이 되었다.
인조 즉위 직후인 1626년(인조 4년) 7월에 작은할아버지 진성군 이해령 등이 '덕흥대원군의 사손이지만 왕의 4대 후손 이후로는 종친 대우를 받지 못해 돈녕부 도정(都正)의 직을 세습하는 제도가 끊겼으니 이를 다시 복구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돈녕부는 임금왕비의 친인척을 예우하기 위한 부서였다.[3] '도정'은 돈녕부의 정3품 당상관 관직으로[4],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습하다가 이정한부터 왕족 지위를 잃으면서 제수받지 못했다. 이에 인조가, 덕흥대원군의 봉사손은 대대로 도정을 세습하라는 명을 내려 이정한은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제수받을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인 1640년(인조 18년) 1월에는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도총관(都摠管)이 되었고 이후 청나라 사신을 맞이 및 전송하는 관리직을 맡았다. 현종 즉위 후에는 1663년 2월에는 남구만의 건의로 파직당했다가[5] 그러다 같은 해 6월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 뒤 1665년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임명받았다.

3. 사망


1671년(현종 12년) 8월 30일에 향년 71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지금의 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 수락산 뒤편에 묻혔다. 봉분은 세 개로 만들었다. 흔치 않은 양식이다.

4. 가족과 자손


정실 부인이 두 명이었다. 정부인 파평 윤씨 사이에서 3녀를, 사별 후 재혼한 정부인 청송 심씨 사이에서 역시 3녀를 두었다. 심씨 부인 사이에서 난 장녀이자 이정한의 4녀는 송시열의 양아들 송기태와 혼인했고 이정한과 심씨 부인의 막내 딸은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동생 김석연과 혼인해 당대 유력 가문들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기 때문에 동생 이석한의 장남인 이홍일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이후 도정궁 가계는 이홍일(1640) 참조.

[A] A B 사후 추증.[1]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2] 선조는 이정한의 작은'''증조할아버지'''이다. 하지만 나이는 불과 49살 차이난다. 즉, 이정한은 효종과 같은 항렬이다.[3] 원래는 종친이 아닌 임금의 친족 및 외척을 관리하던 부서였다. 처음에는 친족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소속인원이 너무 많아지는 등 여러 폐단이 생겼다. 그래서 1437년(세종 19년)에 국성전주 이씨의 경우, 왕과 9촌 이상인 친족으로 범위를 정하였다.[4] 이외에도 종친부와 훈련원의 정3품 당상관도 도정이라 하였다.[5] 성리학적 교조주의가 극대화되어가던 17세기 조선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당시 예법에는 결혼하는 신부가 시부모에게 바치는 그릇 수(器數)까지 정해놓았다. 그런데 이정한이 왕실과 가까운 가문이면서 이를 어겼다고 파직을 요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