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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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단 eSTRO의 前 감독. AMD 드림팀 - 헥사트론 드림팀 - 이네이쳐 탑 - eSTRO 순으로 이어지는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단을 이끌었으며,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기욤 패트리와 베르트랑 등의 외국인 프로게이머들이 한국에서 활약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인물. 1975년 2월 18일 생으로, 어린시절 미국에 입양되어 성인이 될때까지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 이름은 대니어 리. 감독으로 활동하던 초기에는 대니어 리, 혹은 이 대니어 등으로 불리웠고, 본인도 대니어 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후에 한국 본명인 이지호 명의로 활동했다.
2. e스포츠판에 뛰어들기까지
본래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 부모님을 찾기 위해, 모국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둔 듯하다. 그리고 90년대 말 한국에서 어학원 강사일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국어가 굉장히 서툴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입양전 어린시절 배웠던 한국어에 대한 기억이 깨어나기 시작했던 듯. 현재는 입양아 출신임을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나 억양이 완벽에 가깝다.
e스포츠 업계에 들어온 케이스가 조금 특이하다. 원래는 그저 스타크래프트등의 게임을 즐기는 어학원 강사였는데, 우연한 계기로 2000년 7월 경, 배틀넷에서 기욤 패트리와 빅터 마틴을 만나게 된다. 두 선수는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계속 활동을 이어가고자 했는데[1] , 아직 한국어에도 서툰데다 한국에서 정착을 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인맥도 딱히 없어서 프로팀을 소개받는다거나, 스폰서를 구한다거나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이지호 감독이 강사일을 하면서도 알음알음 여러 회사에 제안서를 넣어 주면서 기욤 패트리를 한게임과 스폰서 계약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후에 한게임과 계약이 만료되자 AMD와의 스폰을 맺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AMD측으로부터 기욤 패트리를 전담하는 매니져가 되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학원 일과 기욤의 여러 활동을 도와주는 일을 병행하는것에 부담을 느꼈던 그는 아예 기욤 패트리의 전담 매니져가 됨과 동시에 e스포츠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한다.[2]
3. 팀을 창단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욤 패트리의 매니져였지만, 당시에는 스타리그에서 크게 활약하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아직 무소속이거나, 클랜 수준의 팀명을 달고 활동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이에 몇몇 선수들은 한계를 느끼고, 안정적인 팀에 소속되기를 원했고, 이 과정에서 이지호 감독과 연결이 된 것이 조정현, 장진남, 장진수등 국내 프로게이머와, WCG 2001 대회에서 스타크래프트 부문 2위를 차지한 프랑스 출신의 베르트랑. 이지호 감독은 조정현과 베르트랑에게는 아이벤처컴이라는 회사와, 장진남, 장진수 형제에게는 하나웹이라는 회사와 스폰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후 본인도 프로게임팀을 꾸리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져 이 네명의 선수와 기욤 패트리를 묶어 새 프로게임단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기욤 패트리의 스폰서였던 AMD와 계속 협상을 벌인 끝에 AMD 드림팀이 창단된다.
4. 고난의 시작
AMD 드림팀으로 첫 창단을 하던 2002~2003년 당시에는 임요환, 홍진호, 이윤열등 스타급 프로게이머들도 비스폰팀과 스폰팀을 오가기도 하는등 열악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AMD라는 글로벌 화사가 메인 스폰서였던 덕분에 선수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생활했다.[3]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팀명 그대로 드림팀이 되어서, 입단을 꿈꾸는 연습생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하지만 이지호 감독은 주축이 되는 기욤 패트리, 베르트랑, 조정현, 장진남, 장진수등의 다섯명의 선수만 너무 믿었던탓에 찾아온 연습생을 거두어들이거나, 새로운 선수들을 발굴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는 곧 주축 선수들의 부진과 함께 팀의 성적이 하락하는데 큰 영향을 주고 만다.
처음에 이들이 팀에 정식으로 합류한 시점만 보더라도, 기욤 패트리는 스타리그 우승자에, 스타리그 8강권을 가볍게 넘보는 선수였고, 베르트랑은 합류 직후 스타리그 4강과, 온게임넷 워크래프트 3 리그 4강을 동시에 진출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으며(심지어 C&C도 하고 있었다), 스타리그 준우승자 출신 장진남과, 그의 쌍둥이 동생 장진수 역시 스타리그나 MSL등에서 활약하는 중이었었다. 그리고 조정현 선수는 스타리그 3위에 입상하기도 했고, 왕중왕전에서 준우승을 하고 차기 스타리그 시드를 받는등, 상위권 실력자의 테란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처음 이 멤버로 프로리그에 출전했을때만해도 충분히 상위권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4]
그리고 2003년 프로리그 시즌에서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으나, 이후에 주축 5인방이 하나둘씩 연이어 은퇴를 하고 기량이 눈에 띄게 하락하면서 점차 성적도 곤두박질 쳤다. 새로운 선수 발굴의 지지부진함과 동시에 2004년에는 AMD의 계약마저 종료되면서 팀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한다.
5. 스폰서의 귀재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린시절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학연이나 지연 등의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이지호 감독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여러 회사들과 접촉하며 필사적으로 스폰서를 구하기 시작한다.[5] 주변에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었기에, 감독 본인이 스폰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면 팀이 바로 해체되는 상황이 벌어질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노력 덕분에 아무리 성적이 나쁘더라도, 스타 플레이어가 없어도, 공식적으로 비스폰이었던 적은 없었다.[6][7] 다만 스폰서가 있어도 팀의 사정이 여유롭지는 못했는데, 주로 PC방 프렌차이즈 업체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AMD와 스폰이 만료되자 바로 계약을 한 것은 헥사트론이라는 PC방 프렌차이즈 업체였고, 이후 역시 PC방 프렌차이즈 업체였던 이네이쳐와 계약을 맺어 이네이쳐 탑팀이라는 이름으로 팀을 꾸려나갔다.
규모는 작더라도 어떻게든 스폰서와 계약을 맺는 능력 덕분에, 이네이쳐 시절에는 유니폼에 홍보 로고를 박는 식의 네이밍 스폰 제의도 엄청났었다고 한다.[8] 당시 용산에 숙소를 차리고 있었는데, 이지호 감독의 여러 노력이 빛을 발해서였는지 용산에 입주한 여러 중소기업들이 네이밍 스폰서를 하고 싶다며 많은 제안이 있었던 모양. 어느 정도였냐면, 대부분 카메라에 광고가 잘 나타나도록 의상의 팔 부분에 로고를 박는데, 너무 많은 회사들의 요청을 해와서 로고를 박을 공간이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사업 수완 만큼은 대단할 따름. 그리고 이 같은 스폰서를 구하는 능력 만큼은 타팀 팬들로부터도, 그리고 이스포츠 관계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의미로 큰 지지를 받았다. 그도 그럴게 어쨌든 이런 스폰서를 따냄으로 해서 선수들에게 (타팀과 금액의 차이는 크겠지만) 정해진 급여 같은건 다 챙겨줬고, 최소한 밥 굶기는 일은 없었기 때문.[9][10]
이후 타 구단들이 SK그룹, CJ그룹 등의 대기업들과 계약을 맺고 하나둘씩 창단을 하는 가운데, 이스포츠 중계권 사업을 하는 IEG(international E-sports Group)라는 업체[11] 와 계약을 맺고 eSTRO로 팀을 재창단 시키는데 성공한다.[12]
6. 감독으로서
선수들과 특별히 트러블이 있었던 적도 없고, 선수들을 위해 헌신하는 착한 감독 이미지가 있었다.[13] 실제로 조용성 선수가 2008년 1월 초에 은퇴를 할때는, 은퇴 경기를 빛내주기 위해 온게임넷 경기장에서 중계진의 마이크까지 빌리고서 막춤을 선사했었을 정도.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낸 적은 딱히 없었고[14] , 특출나게 스타급 선수들을 육성하거나 배출해내지도 못했다.[15] 2000년대 중반에 개최되었던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서는, 11개 팀이라는 이유로 최하위 팀을 다음 라운드에서 아예 출전조차 못하게 하는 단두대 매치를 하곤 했는데, 늘상 화승 오즈[16] 와 이 단두대 매치를 했었다. 과거 팀리그에서는 프로리그와는 다르게 예선을 통과한 적도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다른 팀에서 김현진, 이재항, 이병민 등을 영입하기도 했지만, 김현진, 이병민 같은 경우에는 누가 봐도 뚜렷한 하락세의 시점에서 영입을 한 상황이라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둘 다 1년도 못 버티고 은퇴를 했다. 이재항은 영입된지 오래 못가 결혼과 함께 다시 원 소속이었던 팬택 EX(위메이드 폭스)으로 팀을 옮겼다.
미국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거쳐갔었다. 하지만 베르트랑 그로스펠리에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식 스파르타 연습 환경에 익숙해지지 않아 짧은 기간 활동을 거친 후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곤 했다.[17] 그래도 피터 같은 선수는 프로리그에서 임요환, 서지훈을 꺾기도 했고, 마이너리그에도 진출하는 등, 점차 명맥이 끊겨가는 외국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영입되는 유일한 팀이었던 덕분에, 팀의 주목도를 올리는테 큰 도움을 되기는 했다.
여하튼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들이 발굴되었고 늘 다음 시즌이 기대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팀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상 최하위권에서 맴도는 성적을 기록했다. 아무리 과정이 좋아도 결과가 패배로 이어진다면 당연히 팀 성적이 올라 갈 수가 없었다. 이러한 흐름이 몇시즌간 계속되자 이지호 감독 본인도 심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던 듯, 결국 2008년 6월 자진 사퇴를 하고 만다.
7. 이후 근황
이스트로 모기업 IEG에서 일하기도 했고, 곰티비에서 스타크래프트 영어 해설을 맡기도 했다. 이후 경제적으로 힘이 들때 조규남 감독을 찾아갔는데, 이지호 감독을 믿는다며 학비를 지원해줬다고 한다.[18] 이지호 감독이 감독을 할때는 냉정하게 조언을 해 주었고,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고 하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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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보험 관련일을 하다가 현재는 PC방을 영업중인 것으로 보인다[19] .
[1] 이미 두 선수는 온게임넷이라던지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러 리그에서 활약했었다[2] 안타깝게도 빅터 마틴은 스폰서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다가 모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벙커링을 개발하는 등, 스타크래프트 전략의 상당부분 영향을 준 게이머였지만, 기량 하락이 매우 빨라서 한국에 왔을때는 이미 스타리그 본선 진출도 다소 어려운 실력이었다. 후에 킹덤 언더 파이어 게이머로 전향하여 한국 무대에서 활약하고자 노력했으나,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아 모국으로 돌아 간 후 은퇴를 하게 된다.[3] 조정현선수가 2002~2003년경에 5000만원정도의 연봉으로 알려져 있었다[4] 당시 프로리그는 팀플 경기가 반드시 들어가 있었는데, 장진남, 장진수형제는 팀플로도 명성이 드높아, 개인전과 팀플 실력이 이미 검증된 멤버들로 구성된 팀으로 꼽히곤 했다. 다만, 당시 프로리그에서는 팀플에서 동족전으로 조합하는 것을 금지했고, 저그+저그조합으로 이름을 날리던 장브라더스는 그 역량을 팀플에서 제대로 발휘할수 없게 되면서 소수정예 멤버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었다.[5] 그리고 이 시기에 타 팀에서 여러 사정으로 방출되거나, 새로운 부활을 꿈꾸던 올드 게이머등을 영입한다. 서기수, 이재항, 김갑용, 이기석, 김현진등이 대표적.[6]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하다. 대부분의 팀들은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거나, 높은 프로리그 성적을 기록하는등의 결과물을 가지고 기업들과 접촉해 스폰서를 따내곤 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당연한 방법이었고 대안은 딱히 없었다. 주훈 감독이 SKT T1으로 창단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임요환과 최연성, 박용욱등의 스타플레이어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화승 오즈가 창단하는 과정도 살펴보면, 결국 조정웅 감독이 오영종의 스타리그 우승자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어떻게든 오영종을 스타리그 우승 후에도 팀 선수로 데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MBC GAME HERO도 박성준과 박지호 등의 역량을 키운 다음 이들이 스타 플레이어들이 되었고 또한 이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단이 가능했고, 위메이드 폭스와 그 전신인 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도 이윤열이라는 스타 플레이어의 존재 덕분에 창단이 가능했고, 하이트 스파키즈의 전신인 온게임넷 스파키즈도 전태규, 차재욱 등의 기존의 스타 플레이어들과 당시 엄청나게 떠올랐던 한동욱이라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보유했기 때문에 창단이 가능했다. CJ 엔투스 같은 경우도 서지훈 등의 스타 플레이어가 끝까지 남아있지 않았다면 창단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지호 감독은 큰 규모가 아닐지라도 어떻게든 스폰서 계약을 성사시켰다.[7] 이스트로 창단 당시 e스포츠팬들이 남겼던 댓글 대다수가 이지호 감독은 사막 한가운데에 갇혀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사람이라는 그의 협상능력을 칭찬하는 댓글이었다.[8] 요즘으로 따지면 프로야구팀 키움 히어로즈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듯하다[9] 당시 몇몇 감독들은 팀 선수의 개인 리그 우승 상금을 일부 착복했네 어쨌네하는 등의 뒷소문이 흉흉했던 탓에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얼던 점도 있을듯. 그가 나간 이후 이스트로의 선수들이 돈을 못받았네 밥을 제대로 못먹네하는 말이 나왔다는걸 보면 더더욱.[10] 하지만 이때문에 선수들이 홍보로 불려가는 등 기량에 지장이 가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스동갤 7대관문 중 하나인 젠가 CF같은 것.[11] 에이클라 엔터테인먼트 산하의 회사이며, 이후 모기업은 팀 해체 후에 SPOTV GAMES를 개국한다.[12] 프로리그 우승 경력이 있던 KOR팀보다 먼저 창단했다. 참고로 KOR은 비스폰 팀들 중 가장 늦게 스폰서를 얻은 팀이기도 했다.[13] 굳이 트러블이라고 하면 조정현선수와 마찰이 있었던 정도인데, 당시 조정현 선수가 이지호 감독과 상의하지않고 은퇴 결정을 내리면서 갈등을 빚었었다고 한다.[14] 가끔씩 뜬금없는 도박 엔트리를 선사하기도 했는데, 빛을 본적은 없다. 예를들면 에이스 결정전에 방송 경기 기록이 전혀 없는 신인 선수를 내보낸다던가 한다음 허무하게 진다던지...[15] 초기에 데리고 있던 기욤 패트리, 베르트랑, 조정현, 장진남, 장진수와 같은 경우는 스타 플레이어가 맞긴 하지만, 이지호 감독 본인이 발굴해서 육성한 케이스가 아니다. 스타리그와 MSL에 꾸준히 올라가던 이 있'''었'''지만....[16] 당시에는 화승 오즈도 비스폰팀으로 무척 가난했으며, 플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플러스는 오영종도 발굴되기 전이었으며 그 때 당시 오영종이 팀플, 개인전 모두 패배하는 바람에 탈락 원흉이 되었다.[17] 사실 베르트랑 이후로 국내 개인리그 및 프로리그, 팀리그에서 큰 활약을 했던 외국인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18] 이지호 감독은 크게 감동해서 이날 집에서 부인과 엄청 울었다고 한다.[19] 게임단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PC방 프렌차이즈 업체들과 스폰서 계약등을 맺으면서 알게된 인맥이 PC방 창업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