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종

 

'''前 스타크래프트 1 프로게이머'''
'''프로필'''
'''이름'''
오영종(吳泳鍾)
'''생년월일'''
1986년 10월 18일 (37세)
'''키/몸무게'''
172cm, 67kg
'''국적/출신지'''
대한민국/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혈액형'''
O형
'''형제자매'''
1남 2녀 중 셋째
'''가족'''
아내
'''본관'''
해주 오씨
'''종교'''
불교
'''학력'''
살레시오고등학교
군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 휴학
'''종족'''
프로토스
'''ID'''
'''AnyTime'''
'''별명'''
'''사신 토스''', 질럿 공장장, 제로벨,
체어맨, 전어, 르토[1]
'''데뷔'''
2004년 Plus 입단
'''SNS'''

1. 경력
2. 주요 경력
3. 전적
4. 개요
5. 르까프 시절
6. 공군 입대와 활약상
7. 공군 전역 후
8. 주요 별명
9. 기타 사항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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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력





2. 주요 경력


  • 2005년 SKY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 개인전 다승왕(공동)
  • 2006년 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 3위
  • 2007년 제5회 CJ 슈퍼 파이트 우승 (프로토스팀)
  • 2007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준우승
  • 2008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정규리그 MVP
  • 2008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개인전 다승왕
  • 2008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우승
  • 2008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결승전 MVP
  • 2008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통합 챔피언전 우승
  • 2008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통합 챔피언전 MVP
  • 2011년 신한은행 위너스 리그 10-11 3위

3. 전적


'''오영종의 스타1 양대 개인리그 A매치 통산 전적'''
방송사
온게임넷 A매치 총 전적
MBC게임 A매치 총 전적
'''양대 개인리그 합산 전적'''
vs 테란
43전 22승 21패 (51.2%)
14전 5승 9패 (35.7%)
57전 27승 30패 (47.4%)
vs 저그
18전 10승 8패 (55.6%)
11전 5승 6패 (45.5%)
29전 15승 14패 (51.7%)
vs 프로토스
11전 7승 4패 (63.6%)
6전 3승 3패 (50.0%)
17전 10승 7패 (58.8%)
총 전적
72전 39승 33패 (54.2%)
31전 13승 18패 (41.9%)
103전 52승 51패 (50.5%)

4. 개요


[image]

'''오영종의 승리! 반짝반짝 빛나는 순금 로얄로더를 가져온 오영종! 플러스[2]

팀이 언제 이렇게 우승을 차지했습니까? 오영종부터 플러스 팀은 다시 살아납니다. 누가 오영종이 8강을 4강을 결승을 우승을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So1 스타리그 2005 결승전 직후 전용준 캐스터 멘트

[image]
[3]
대한민국의 前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5. 르까프 시절


개인리그에서의 활약이 2005 ~ 2006 정도로 매우 짧기에 삼대토스육룡#s-2 등의 A급 이상의 프로토스 게이머들과 비교하면 개인리그에서 내세울 커리어가 상대적으로 꾸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임팩트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개인리그 커리어가 꾸준하지 못했을 뿐 김동수, 삼대토스 이후 최초로 양대 개인리그에서 2회 결승 진출에 성공한 프로토스 게이머이며, 양대리그 1회 우승, 1회 준우승을 넘어선 프로토스도 결코 많지 않다.[4] 거기에 프로리그 정규리그 MVP, 다승왕, 결승전 MVP, 그랜드파이널 MVP를 합하면 절대 저들에 대해서도 뒤쳐진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올드 프로토스(2000년대 초반)와 뉴 프로토스(2000년대 후반)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줬다고 볼 수 있다. 신개념 다크 템플러와 같은 초반 다크 템플러의 활용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다.[5]
테프전에서의 패스트 다크 템플러 흔들기 이후 물량전으로 유명해진 프로게이머. 데뷔 당시에는 별로 뚜렷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으나, 2004년 6월에 있었던 투싼배 MBC GAME 팀리그에서 당시 최강의 테란으로 불리우던 이윤열을 물량전으로 이겨 그 이름을 크게 알렸다. #1, #2 이후 2004년 12월 온게임넷 챌린지 리그의 예선을 통과하면서 팀리그에서도 그 당시 약체였던 소속팀 Plus의 투톱(박지호 - 오영종)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박지호의 이적에 팀 프로리그 승률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자 화승 OZ(당시 Plus)의 감독 조정웅은 오영종의 우승을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 시작한다.[6]
해를 넘겨 2005년 온게임넷 스타리그 듀얼 토너먼트에서 나도현이재훈을 물리치고 듀얼 토너먼드 2라운드에 진출하였고 이어 듀얼 토너먼트 시드 결정전(각 조 1위를 모아 토너먼트전, 우승 시 온게임넷 스타리그 4번 시드 배정)에서 안기효를 3:2로 꺾고 본선에 직행하여 본격적으로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후 So1 스타리그 2005 16강에서는 김준영, 홍진호를 꺾고 최연성에게 져 2승 1패로 8강 진출했다. 특히 홍진호와의 경기에서는 오로지 다크 템플러만으로 레어스포닝 풀까지 깨며 경기를 끝냈다. 해당 경기 영상. 이 경기를 통해 오영종은 자신의 프로게이머 인생을 내내 따라다닐 '''사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7][8]
8강에서는 서지훈을 2:1로 이겨 4강까지 진출하였다. 4강전은 당시 질 것 같지 않은 포스를 뿜고 있던 괴물 최연성과의 승부였다. 오영종 역시 '질럿 공장장'이라 불릴 정도로 물량의 대가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규모 물량전을 예상했지만, 오영종은 최연성의 허를 완벽하게 찔렀다.
1경기는 전진 게이트에 이은 패스트 다크 템플러. 말 그대로 드라군 1기 없는 다크 템플러 러쉬!, 2경기는 전진 팩토리로 복수하려던 최연성의 의도를 미리 파악하고 차단하여 압승, 3경기는 패했으나 4경기 815에서는 2 로보틱스에 이은 4개의 셔틀에 3리버와 드라군을 태워 경기를 단 한 방에 끝내버렸다. 오영종의 다전제 판짜기 능력이 가장 빛나는 경기 중 하나였다. 결국 오영종은 이렇게 3:1로 최연성을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키면서 결승에 진출했다.[9]
이후 박지호를 이기고 결승에 올라온 임요환을 상대로 3:2까지 가는 접전을 펼쳐 임요환마저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첫 두 경기를 내리 승리하며 우승을 앞둔 것 같았지만 위기의 순간에도 황제는 침착했다. 3, 4경기를 다시 내리 임요환이 따내며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에서 맞붙은 운명의 5세트, 임요환은 특유의 고질적인 저축 테란[10]을 선보이며 GG를 선언했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가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꺾고 챌린지 리그 우승으로 4번 시드를 획득, 가을의 전설로얄로더의 꿈을 동시에 이룬 예는 지금까지도 실로 유일하며,[11] 동시에 아직까지도 최고의 리그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스폰서인 So1은 망했다. 몇몇 사람들은 에스오일이 스폰한 줄 알고 있다.(...)
이후에는 우승자 징크스에 빠진 듯 급격한 기량 하락을 보여 팬들을 우려케 했으나, 곧 부활하여 2006년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 2에서도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역시 가을 시즌이었기에 이번에도 가을의 전설이 이루어질 것인가는 모든 이들의 관심사였다. 당시 가장 주목받았던 프로토스는 듀얼에서 임요환을 꺾고 올라온 김택용. 오영종은 상대적으로 당시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24강에서 전 대회 우승자인 한동욱, '투신' 박성준을 잡고 전상욱에게 패하는 2승 1패의 호성적으로 16강 진출. 16강에서는 대인 김준영을 만나 2:1로 승리, 8강에서는 마술사 박태민을 만나 또 2:1로 승리했다. 스코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오영종은 정말 매 경기마다 간신히 상대를 제압했다. 또 상대한 선수들이 전부 저프전 스폐셜리스트 급의 선수들에다 전상욱 빼고 전부 그 당시에도 날고 기던 우승자 출신이었다.[12] 김준영의 경우는 저그를 질럿 물량으로 때려잡는 기이한 경기를 선보였고, 박태민과의 3경기 in 신 백두대간 경기는 그 긴박함, 긴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둘 다 명경기 급이다.
4강 상대는 당시 테란들 중 최강의 토스전을 자랑했던 전상욱. 당시 전상욱의 대 테프전 승률은 70%를 상회할 정도로 프로토스전이 상당히 강력하였다.
1경기 아카디아 2에서는 특유의 다크 템플러-물량 폭발 스타일로 전상욱을 잡아내지만, 2경기 알카노이드에서 워낙 약한 모습을 보였었던 오영종은 그대로 패. 게다가 3경기에서는 전상욱의 토스전 스타일에 그대로 말려버리며 지상군 전투에서 대패하며 GG를 선언한다.
4경기 신 백두대간에서는 오영종의 긴박함이 그대로 엿보였다. 초반 다크 템플러도 통하지 않고, 플릿 비콘을 2개를 짓는 실수를 하다 하나를 취소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역시나 가을은 그의 계절. 전상욱은 캐리어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오영종에게 시간을 내줬고[13], 캐리어가 4기를 넘겨버린 오영종은 지상군과 함께 전상욱을 제압.
5경기는 다시 아카디아 2. 전상욱은 가장 자신다운 빌드인 원팩 더블을 하는데... 오영종은 3게이트 옵드라, 소위 FD테란 잡는 불독토스를 시전하며 전상욱의 본진을 그대로 밀어버린다.
매 경기마다 스토리가 뚜렷하고 엄청난 명경기들이 나와서, 당시 김캐리는 흥분하여 "역대 최고 수준의 준결승전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후의 결승전도 그랬지만, 여러가지로 경기 내,외적으로 드라마틱한 면이 많았던 준결승전이었다. 5경기 막판 오영종의 드라군에 뚫리자 패배를 직감한 듯 아쉬움의 탄성을 내뱉는 전상욱의 모습, 경기가 끝나고 부스를 나온 오영종과 조정웅 감독의 (So1 결승 때를 생각나게 하는) 진한 포옹, 특히 5경기가 끝나고 오영종의 승리에 흥분한 남성 토스빠 스덕들의 굵직찬 목소리로 외쳐진 '오영종! 오영종!' 콜...[14]
이윤열과의 결승전은 소위 '천사록'이라 불리며, 온게임넷은 '천재 테란와 사신 토스의 대결'이라는 콘셉트으로 데스노트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광고를 했다. 당시 결승전은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개최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대 흥행.
1경기 타우 크로스에서, 오영종은 전상욱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효율적인 아비터 사용과 경기 중후반까지 계속되던 리버 견제 등, 이윤열도 엄청나게 잘 싸웠으나 결국 패한다. 오영종이 1경기 선취.
2경기는 신 백두대간. 전략 준비했는데, 걸려서 실패... 결국 무난히 패한다.
3경기 알카노이드에서는 이윤열의 운영에 막혀 이렇다 할 뭔가를 해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 이윤열의 선공에 한방 먹은 후, 첫 역공에서 마인 하나를 너무 제대로 밞은 것도 컸다... 그런 면에서 운이 안 따른 면도 있었던... 이렇게 순식간에 벼랑 끝에 몰려 버렸다.
4경기 아카디아 2, 오영종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트리플 넥서스를 시전하며 대규모 물량으로 테란의 자리 잡은 진형을 그대로 뚫어버리는 시원함을 보여주며 승리한다. 4경기를 통하여 벼랑 끝에서 살아난 뒤 이제 마지막 남은 5경기를 통하여 최종 승부 결과가 가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5경기에서 초반부터 이윤열의 회심의 벌처 드랍 전략에 휘둘렸고, 그 후 멀티 더 안 먹고 캐리어 가는것까지 걸리면서 이윤열의 타이밍 러쉬에 그대로 패하며 가을의 전설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이 경기에서 이윤열이 준비한 벌처 드랍 전략의 관점에서 이윤열이 자리 운이 따랐고, 반면에 오영종은 자리 운이 안 따랐다.
하지만 이 시즌에서도 지난 So1때 못지않은, 간지 절정의 경기들을 보여주었다. 16강부터 매 경기마다 해설자들은 오영종의 패배를 예상했지만, 그걸 모두 뚫고 매 경기마다 드라마를 썼다. 결승에서는 패하고 나서도 이윤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등 대인배적인 행동을 보였다.[15]
이 시즌이 끝나고 나서부터 개인리그에서는 16강을 넘어선(정확히는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바가 없다. 그러나 그 힘을 모두 프로리그에 쏟아부어 프로리그에서는 그야말로 언제나 가을인가 싶을 정도의 활약을 보인다. 특히 06년 후기리그에서는 만년 약체 신세였던 르까프 오즈를 포스트시즌까지 끌어올렸고, 그 다음 해에는 07년 전기리그에서는 준우승, 07년 후기리그에서는 팀이 아예 꿈에 그리던 우승까지 해 버린다. 이후 그랜드파이널에서도 우승하면서 2007년은 그야말로 르까프의 한 해가 된다. 동시에 오영종 - 이제동의 원투펀치는 가히 경이로운 수준의 성적도 올렸다.[16]
테프전프프전에 능하며, 특히 초반 리버다크 템플러 드랍을 통해 상대 테란을 괴롭히면서 확장을 가져가고 물량을 뽑는 프테전의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저프전은 So1배 16강 vs 홍진호 경기에서 다크 템플러만 뽑는 기행을 통해 이긴 명 경기를 제외하면 평범한 편이지만, 가끔 막장 경기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2007년에는 대 저프전 80%가 넘는 미칠듯한 승률을 보인 바가 있다.[17]
일명 가을의 전설의 힘을 독차지했다고 평가되며, 만년 전어가 아닌 빙어로 탈바꿈했다.
소위 본좌급으로 일컬어지는 임이최 , 그리고 본좌를 노리는 여러 게이머들에 비해 활약상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에 속하지만, 우승한 So1 스타리그 2005와 준우승했던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 2가 워낙 드라마틱하고, 또 수려한 외모를 갖추고 있어서 인기도 많은 편이다.
왠지 모르게 성우 이시다 아키라를 닮은것 같다. 동시에 야구 해설가 현재윤을 닮은 것 같기도...
그러나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에서는 프로리그[18]고 개인리그[19]고 전년도들과 비교하면 다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지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감독과의 불화[20][21]로 인하여 동년 여름, 공군 ACE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합격. 전역 후의 행보가 스타판에 영향을 줄 듯했다.

6. 공군 입대와 활약상


2008년 가을, 공군 ACE박정석, 한동욱과 같이 입대하게 된다. 세 명 모두 개인리그 우승자 출신이라는 것이 특징.
아비터를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아비터는 '''빵비터'''라 불리며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공군 입대 후에도 50% 정도의 승률을 보이며 박정석과 함께 공군 ACE의 주력 프로토스 자리를 맡았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1라운드를 마쳐갈 때인 2009년 11월 29일, 프로리그에서 웅진 스타즈에 맞서 에결에서 윤용태와 맞붙어 공군의 2승을 일궈냈다. 그리고 공군은 그 성적과 더불어서 다음날 삼성전자 칸이 MBC게임한테 패배를 당해서 꼴찌로 1라운드를 마친 행운 덕에 1라운드에서 꼴찌를 하지 않았다[22].
또한 위너스 리그 기간 말기이던 2010년 3월 6일, 정명훈을 상대로 물량 캐리어를 보여주며 3킬을 한 박영민과 함께 팀의 T1전 첫 승리와 첫 2연승을 일궈냈다.
그 후에는 저그를 씹어먹으며 저그전 4연승도 기록하였다.
2010년 5월 27일, 빅파일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PSL#s-1을 통과한 유일한 공군 ACE 소속에, 올드 게이머로써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거라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그리고... 2010년 6월 12일, 포모스에서 작성한 오늘의 매치업에서 승률이 1526.3%라고 오타를 집어넣는 바람에 개캐가 됐었다...
2010년 6월 28일, 친정팀 화승 OZ와의 대결에서 2대1 상황에서 박준오와 맞붙게 되었는데, (박준오를) 제압하고 경기를 마무리, 공군 ACE 창단 최초 3연승을 기록한다.
그리고 7월 4일, STX SouL김구현을 잡으며 자신의 프로리그 100승과 팀의 4연승 그리고 최초 단일 시즌 두자리 수 승리 기록에 일조했다!
공군에서의 마지막 경기 날이자 공군의 09-10 시즌 마지막 경기 날이었던 7월 11일에는 CJ 엔투스장윤철과 2세트에서 맞붙었는데, 결과는 패배. 참고로, 이 날에는 동기들인 한동욱, 박정석 등도 오영종과 함께 공군에서의 고별전을 치렀는데[23], 그들도 모두 각각 변형태정조작에게 패하면서 팀도 3대0 패배로 시즌을 마치고, 본인들도 고별전을 패배들로 씁쓸하게 장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상하게 공군 에이스에서 잘했던 선수들로 이주영, 민찬기, 이성은, 김경모 정도만을 기억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래봬도 오영종 역시 공군 에이스 역대 다승/승률 순위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한 선수였다.
트위터를 시작했는데, 주소가 'kongggajima'.

7. 공군 전역 후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중이던 2010년 10월 29일 전역. 원소속팀인 kt 롤스터로 복귀한 동기 박정석처럼 이 쪽도 이전 소속팀인 화승으로 복귀했다[24]. 조정웅 감독이 없어서인가? 팀에서도 오영종 복귀에 매우 긍정적이었다는 후문이 돌기도... 화승토스의 구세주가 될 지 기대되었다. 팀에 복귀하면서 이제동이 맡고 있던 주장 자리도 오영종에게 넘어왔다. 하지만 공군 ACE 전역자들 중 제대로 활약도 못 하고 은퇴를 한 선수가 전부이기 때문에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트위터에서 밝힌 근황에 따르면 공군에서 떨어진 폼을 회복하기 위해 맹 트레이닝 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2010년 11월 28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2라운드 1주차 2경기로 벌어진 화승과 공군의 경기에서 1세트에 출전, '''군 전역 후 첫 승리, 나아가 화승(르까프) 소속으로 2008년 5월 27일에 이재호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로 907일만에 승리를 기록'''했다!!! 상대는 '흑운장' 이성은. 동시에 팀도 승리.
이후 몇 번 더 나와 패배했으나 12월 20일, '''염보성을 잡고 그날 팀 유일한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앞 3패와 이제동이 시간이 부족했는지 성급한 1가스 러커 승부를 이재호에게 걸어 막힘으로써 4:1로 패배.(...)
2011년 3월 3일에 열린 ABC마트 MSL 서바이버 예선에서 정영재를 2:1로 이겼으나 조일장에게 0:2로 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5월 3일, kt 롤스터와의 경기에서 1세트에 나와, '''박정석'''과 붙어 오랜만에 올드 매치가 성사되었다! 결과는 사신이 영웅을 꺾었다. 팀은 그 기세를 몰아 KT를 셧아웃시켰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맨땅에 스톰을 뿌리는 등 영 좋기만 한 건 아니어서...(...)
6월 4일에 CJ 엔투스와의 경기에서 2세트에 출전, 조병세를 잡았지만 팀은 6세트까지 간 끝에 지고 말았다.
6월 13일에는 공군과의 경기에서 고인규를 잡았고 팀도 이겼지만[25], 18일 엠겜과의 경기에서는 버뮤다에게 졌다. 그나마 18일 경기에서는 팀은 승리.
그래도 당시 시점에서, 지금까지 공군 ACE를 전역하고 현역 프로게이머로 복귀했던 모든 선수들 중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2011년 기준으로 당시 오영종은 26세로, 연습량만 받쳐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 동안 제대한 선수들의 경우 나이가 20대 후반이 돼서 한계에 봉착했거나 혹은 선수 생활 연장에 의지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지만, 오영종의 경우는 그들과 달리 아직 해볼 만한 나이이고 선수 생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점이 희망적이었다. 게다가 화승토스가 워낙 개막장의 끝을 달리고 있던지라 오영종이 5할 승률을 찍어줘서 프로토스 에이스 취급까지 받고 있었으니 상황이 좋았던 셈.[26] 오죽하면 팬들도 "화승 토스가 아니라 르까프 토스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을 정도다.[27]
6월 17일에 열린 마이 스타리그(tving 스타리그 2012) 프로 - 아마 예선전에서 임홍규에게 0:2로 패하여 탈락하였다.
6월 21일 웅진 스타즈와의 경기에서 김명운에게 초반 질럿 러쉬를 시도했으나 침착하게 대처한 김명운에게 패배했다. 더불어서 팀도 패배.
6월 28일 STX 소울과의 경기에서는 이신형에게 패하였고, 팀도 패하였다. 참고로, 이 경기가 오영종의 마지막 공식전 경기.
6월 30일에 열린 2011 MSL 시즌 2 서바이버 예선에서 채규승을 2:1로 이겼으나 김현우에게 0:2로 패하여 탈락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팀은 끝끝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게다가 10-11 시즌을 끝으로 위메이드, MBC GAME과 더불어서 해체되었고, 이후 시즌 종료와 팀 해체가 한참 지난 이후인 11월 10일, 같은 팀의 손주흥, 백승혁과 더불어 은퇴 수순을 밟았다. #
그런데 포모스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자신의 은퇴 사실을 협회의 공지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은퇴 후인 11월 29일, 전 팀 동료 구성훈처럼 아프리카 방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황신을 소환시켰다'''. 공군에서 많이 친해진 듯. 후에 홍진호가 여러 방송에서 공군 시절 썰을 풀기를 선임중에 오영종이 제일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홍진호 경우 선임중에 게이머 시절 후배/동생들이 많아서 설움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심적 위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역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2012년 2월 19일, BJ 철구가 개최하는 BJ 스타리그에서 결승전에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개자식에게 0:4로 패배하였다. 포모스 인터뷰에서 직접 '아프리카에서도 BJ들끼리 대회를 할 때가 많은데 어떤 상황에서도 등과 게임을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28]
2012년 7월 3일, 이윤열과의 이벤트'전 레전드 매치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스갤에서는 이윤열 은퇴식에 파트너로 부른 놈이 와서 스카웃 관광까지 하며 탈탈 털어버렸다고 간만에 예전 스타'판 팬덤 악질력 넘버원을 달렸던 벼멸구들이 대거 창궐해 오영종을 까대기도 했다. 이 날 오영종은 게임 중 승기를 잡으며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 2의 복수다'라는 투의 채팅을 날리며 이윤열을 신나게 털었고 지켜보는 오영종의 팬들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심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즐거워 했었고, 이렇게 매치까지의 분위기는 참 훈훈하고 좋았으나... 이후 이윤열의 은퇴식으로 인해 경기 끝나고 오영종은 완전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다.[29] 이윤열도 레전드 매치에 급하게 은퇴식을 열어주는 바람에 다른 레전드 선수들과는 달리 깔끔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떠났으니 오영종은 오영종대로 이윤열은 이윤열대로 끝마무리가 아쉽게 됐다. '온겜의 판단 미스였다'는 평가.
여담이지만, 현역 시절 청순했던 외모와는 달리, 이 날의 방송에서는 매우 수척해진 외모를 선보여 팬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2012년 9월 경부터 방송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자동차에어컨 제조 전문 회사인 한라공조에 취직을 하면서 잘 지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언젠가 퇴사했다는 카더라가 지인들의 소문이라며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정확히는 평택시 쪽의 한라공조에서 일하고 있었다가 퇴사[30]하고 공부 중이라고 하는데, 이게 2014년에 나온 이야기. 그 이후의 정확한 근황은 알 수 없다.
정확한 근황이 없는 상태에서 크게 2가지 '카더라'가 돌고 있는데, 한라공조 퇴사 후 대기업 쪽에 취직했다는 카더라, 그리고 모 빵집 프랜차이즈 체인 중 한 곳을운영하고 있다는 카더라가 돌고 있다. 둘 다 카더라 수준이긴 하지만, 후자의 경우 오영종의 별명중 '빵'과 관련된 별명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냥 그 별명과 연관지은 개드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카더라'일 뿐 확실한 것은 없다.
최근에 홍진호의 인스타그램에 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돋는 인맥. 이 기사의 사진만 보면 3년전 이윤열과의 레전드 매치때의 모습에 비해 그나마 리즈 시절의 청순한 외모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김윤환의 형이자 과거 팀 동료였던 김정환결혼식에도 참석하였다.
최근 강민, 홍진호, 박태민의 합방에서 짤막하게 근황이 다시금 언급되었는데, 잘 살고 있다는 말로 봤을 때 다시 취직을 한 걸로 보인다.
2020년, 김경모가 건강 악화로 잠시 개인방송을 쉬기 전에 한 방송 중에서 영종이형 결혼식에 간다고 말하며 오영종이 여자친구와 결혼했음을 전했다.

8. 주요 별명


  • 질럿 공장장 - 데뷔 직후 생산력이 뛰어나 붙은 별명.
  • 사신 토스 - 2005년 So1배 16강에서 다크 템플러만 뽑아 신기에 가까운 컨트롤로 오버로드디텍터 지원을 받는 다수의 저글링들을 몰살시키고, 정면 승부로 홍진호를 물리친 이후, 그가 펼친 수 많은 경기에서 다크 템플러가 활약하여 붙은 별명. 오영종의 가장 대표적인 별명으로, 이윤열과의 라이벌리는 천사록[31]이라고도 불린다.
  • 전어토스 또는 그냥 전어 - 가을에만 대활약한다고 붙은 별명.
  • 제로벨 - 영+종.
  • 오빵종 - 영->빵.
  • 가을이 - 전어와 같은 맥락.
  • 영뎡이 or 엉덩이 - 스갤러 귀리가 '울희 영뎡이는 귀여운 아비터네혀@^^@' 라는 꾸준글을 밀어서 각인된 별명. '영뎡이가 엉덩이같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그만 꾸준글을 접고 말았다. 안습.
  • 신 3대토스 - 3대토스였던 박용욱, 박정석, 강민을 이은 3명의 토스인 오영종 - 박지호 - 송병구를 일컫는 말.
그 외에도 여성 팬들에 의해 청순 토스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청순 토스의 별명은 이경민한테 넘어갔다.

9. 기타 사항


'''T1빠의 상당수는''' 오영종을 싫어하는데, 이유는 사실 별 거 없고, 그냥 오영종이 현재 티원에 있는 혹은 과거 티원에 있었던 인기 선수들을 중요한 경기에서 잡아버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34]
역대 프로토스 중 다전제 판짜기 능력으로 거의 최상급에 꼽히는 프로토스이다. 1회 우승, 1회 준우승의 실적을 보유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만난 상대들이 쟁쟁한 프로게이머들이고, 그들을 상대로 뛰어난 전략과 빌드 선택, 판짜기를 통해 승리하고 결승까지 올라갔기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결승에 두번이상 진출한 선수중 김동수와 함께 8강진출시 결승전 진출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몸이 예쁜 것으로 해설진들 사이에서도 유명. 원래는 전형적으로 배 나온 게이머 체형이었는데 So1 스타리그 2005 우승 후 스타덤에 오르고 화승의 스타 메이킹 정책에 따른 규칙적인 관리로 인해 늘씬한 근육질 몸으로 재탄생, 아레나 MSL 오프닝에서는 아예 대놓고 상의 탈의를 하고 단독샷을 찍었다. 자신감 상승 덕분인지 상의 탈의를 선보인 적 있는데 이 때문에 그보다 조금 앞서 상의 탈의 세리머니를 펼쳤던 송병구의 게이머스러운 몸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 송병구운동을 통해 거듭난다. 서로 경쟁이라도 붙은 것인지, 한 때 '''프로토스으로 말한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토스 게이머들은 몸이 좋은 것으로 유명.[35]
팬들이 박용욱의 붉은 두건 아이템에서 착안한 검은색 두건 응원이 특징적. 검은색 두건에 흰색으로[36] 오영종의 별명인 死神이 적혀있는 두건으로 팬들이 선수들의 경기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응원하기 위한 도구. So1 리그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당시는 경기장 규모가 꽤 커져있던 시기라 어두운 조명과 두건의 검은 색깔까지 합하여져 선수 본인에게는 별로 어필되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MSL과는 인연이 없는 엠막이었다가 곰TV MSL 시즌4에 진출하게 되면서 데뷔 4년 차이던 2008년에야 첫 MSL 리거가 되었으며, 곧바로 16강 진출. 역대 최초로 양대리그 로얄로더를 노리고 있었으나, 결국 이윤열에게 패배하여 실패했다. 다음 MSL인 아레나 MSL에도 본선에 진출하지만, 허영무, 박영민, 윤용태와 함께 4토스조에 배치된 후 허영무, 박영민에게 연달아 패해 광탈한다. 이후 MSL은 물론 양대리그 모두에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고 만다.
제일 후회되는 경기는 온게임넷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 2 이윤열과의 결승전 5세트라고 밝혔다. 자신의 경기 동영상 중에 유일하게 소장하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그 경기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자다가도 이불을 발로 찬다고(...)...[37]
황현필광주살레시오고등학교 재직 시절, 오영종의 고3 담임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프로게이머로 나가려는 오영종에게 '넌 공부보단 게임이 맞겠다.'라며 조퇴까지 시켜주며 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스카이에듀로 가면서 우승 당시 동영상을 홍보용으로 사용했다고...
의 말로는 자신의 후배(화승 토스)들에게 테프전에서 드라군을 많이 뽑으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유는 자신이 드라군을 좋아해서라고 한다.
박지호가 개인방송에서 오영종의 프로입단 비화를 풀었는데, 당시 팀원 중 한 명이 공방에서 물량미친 토스가 한명있다고 추천을 해서 만났는데, 감독이 생긴 것도 괜찮고해서 연습생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물량이 미쳤다는 리플을 받아봤더니 앞마당 자원이 5만인 사기맵... 을 썻다고 한다.

10. 둘러보기



[1] '''르'''까프 '''토'''스. 일반적인 화승 토스와 다르게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토'와 구분하기 위해 생긴 별명. 노장임에도 군대 전역 후, 팀 내의 토스 에이스였다(...).[2] 당시 오영종의 프로팀. 화승 오즈의 전신이다.[3] 10-11 신한은행 프로리그 올스타전에서 페널티를 안고 3:3 릴레이를 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오영종이 스스로 2개의 페널티를 적용(...)하고 게임에 들어간 모습이다.[4] 강민 2우승 2준우승, 김택용 3우승 1준우승, 송병구 1우승 4준우승, 허영무 2우승 2준우승, 김동수 2우승, 박정석 1우승 3준우승 박용욱은 1우승 1준우승. 저 목록에 있는 선수들은 오영종을 포함 전원 e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 있다.[5] 오히려 이런 세대교체의 과도기에 위치해 있었던 부분이 오영종의 저평가에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개인 팬이 아닌 특정 종족의 팬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올드 선수들이 은퇴하거나 본선에도 올라오지 못하는 수준까지 노쇠화가 되지 않는 한 신인급 선수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올드 선수를 응원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당장 질레트 스타리그에서 박성준이 우승했을 때 저그빠들의 반응과 김택용이 4강에서 강민을 꺾고 성전 결승을 이루지 못하게 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해 보자. 오영종의 전성기 시절은 하필 옆동네인 MSL에서 강민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시기인데다 마서스와의 성전이라는 확실한 흥행 카드가 있다 보니 프로토스빠들의 주목도는 강민에게 쏠려 있던 시기였다. 첫 개인리그 우승부터 준우승, 프로리그 MVP를 싹쓸이하던 시기까지를 전성기라고 본다면 오영종의 전성기는 3년으로서 3년은 결코 짧은 시기가 아니였고, 또한 그 3년간은 충분히 A급 이상의 프로토스라고 불릴 만했었다.[6] 아마도 POS를 벤치 마킹했던 것으로 보인다. POS도 박성준을 우승시킨 후 박지호를 영입, 이어 염보성을 육성해내며 2006년 즈음해서는 나름 강팀으로 거듭난 바가 있다.[7] 2011년 1월 기준으로 이 두 선수의 공식전은 이 때가 유일하다. 고로 공식전 전적에서 1:0 오영종 우위.[8] 아쉽게도 이후로는 같은 전략을 선보인 적이 없다. 다만, 방송경기에서 배틀넷 유저를 상대로 이 전략을 내놓아 똑같이 썰어버린 적이 있다. [9] 여담으로 박지호와 3/4위전을 하던 최연성은 4강 패배의 충격으로 그 날 경기 내내 기분이 나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며 박지호를 꺾고 스타리그 시드권을 받아도 분이 가시질 않았는지 열이 바짝 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준결승에서 최연성의 병력은 오영종 진영의 본진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으니...[10] 한타 싸움에서 병력 괴멸 당시 개인 화면이 나왔는데 잔여 미네랄이 '''3000'''(...).[11] 김택용이 로열로더긴 하지만, 그는 3월 3일에 우승했다.[12] 단, 김준영은 그 당시는 아니고 1년 후우승. 물론 그 당시에도 프로리그에서는 70%대의 승률에 다승 2위를 찍는 등 맹활약했다.[13] 당시는 이름이 붙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리버 캐리어 전략이었고, 정말 힘겹게 약간의 시간을 벌며 캐리어로 넘어가는데 성공했다.[14] 실제 이때 오영종과 전상욱의 매 세트 시작전 팬들의 화이팅 콜에서 오영종의 경우 전상욱에 비해 남성 팬들의 굵은 목소리가...[15] 엄옹이 나중에 이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왜 졌는데 웃냐고'''... 당시 결승 상대였던 이윤열이 오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수월한 상대를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것에 비해 오영종의 대진운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기 때문에 이윤열이 아닌 오영종이 우승하길 바라는 팬들도 많았고, 이후에도 이때 오영종이 우승했어야 하는데... 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상대는 스타판에서 가장 팬 지분이 많은 게이머 중 하나였던 이윤열이었기에 결국 묻혀졌다. 우승 이후 이윤열이 인터뷰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윤열은 우승 이후 골든 마우스 획득에 성공하였다.[16] 당시 프로리그에서만큼은 르까프 최고 에이스는 오영종이었다.[17] 당시에는 김택용의 전성기였다.[18] 5승 4패를 기록하였는데, 이런 성적은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에서 기록한 18승 5패에 다승왕까지 먹은 것과 대조해 보면 확실히 좋은 성적은 아니다.[19] 스타리그에서는 EVER 스타리그 2008에서는 1차 본선에서 김동건박성균에게 연속으로 털리며 2연패로 광탈, MSL에서는 Arena MSL 2008에서 조별리그에서 허영무박영민에게 역시 연속으로 털리며 2연패로 광탈하였다. 이후로 오영종은 은퇴할 때까지 스타리그고 MSL이고 어느 개인리그에고 진출하지 못하였다.[20] 조정웅의 결혼식에 불참한 것과 리그 후반부부터 경기장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 등이 결정적 증거들이라는 말이 있다.[21] 09-10 프로리그 시절(당시 공군 소속) VS 화승전에 대한 평가는 딱 하나. '''조정웅을 무너뜨리려 작정하고 필사적으로 덤비는 살기 그 자체'''.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화승과의 경기에서 전승하고 공군이 화승 상대로 4승 1패를 거두는 것으로 화승의 탈락에 기여했다. 덕분에 오영종은 전역 후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는 말(최악의 경우 '''한동욱 사건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까지 생겼으나, 전역 이전 조정웅이 감독을 그만두어서 그런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친정 팀 화승 오즈로 복귀한다.[22] 그 대신 삼성전자가 공군한테도 밀렸다면서 엄청나게 까였다.[23] 전자는 1세트에서, 후자는 3세트에서...[24] 하지만 이들과 동기인 한동욱은 몸이 좋지 않은 모친의 병간호를 위하여 위메이드로 복귀하지 않고 은퇴 선언을 하였다.[25] 참고로, 이 경기가 오영종의 마지막 공식전 승리다.[26] 사실 공군에서 전역한 선수가 은퇴하는 이유 중 하나가 '기량 하락으로 인해 신인들에게 밀려 출전 기회를 못 잡아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지훈이나 이재훈 같은 경우는 선수 생활을 지속할 의지가 충분히 있었으나, 프런트의 설득에 의해 코치로 이동했다.[27] 오영종이 군대에 가기 전에는 화승 오즈의 팀 이름이 르까프 오즈였다. 이 시절 오영종은 프로리그 다승왕, MVP 등을 차지하는 등 빼어난 활약을 올렸다.[28]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 당시의 현실은 아프리카에서 마레기#s-2.2와 완전히 거리를 두고는 스타크래프트 BJ로서 성공하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대회 참가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선 사실상 필수 불가결이라…. 그래도 팬들이 오영종에 대해 그나마 배신감이 덜 드는 이유는 이런 대회 등에서 만나는 것을 빼면 되도록 마레기와 엮이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 이와 반대되는 케이스인 박지호는 까임 지분을 쌓았다.[29] 원래 자리에 참석한 이제동도 오영종을 응원하러 온 것이었다.[30] 부적응 때문에 퇴사했다는 설이 있다.[31] 천재 이윤열 vs 사신 오영종. 두 선수의 별명에서 앞글자만 따왔다.[32] 이때 이후 다시는 박태민은 스타리그 8강, 전상욱은 개인리그 4강 이상을 밟지 못하게 된다.[33] 이때 이후 김택용의 별명 중 하나가 '코떡용'이 됨.[34] So1 스타리그 2005 당시 최연성을 스타리그 4강에서 무너뜨리고, 이어서 임요환골든 마우스 수상까지 좌절시켰으며, 박태민전상욱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 2 8강, 4강에서 무너뜨렸다.[32] 그리고 엠히 시절 이야기긴 하지만, 나중에 티원의 에이스가 되는 김택용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플레이오프에서 명경기 끝에 무너뜨리고 승리는 누워서 떡먹기라는 듯 을 먹는 세리머니를 하기도 했다.[33] 다만, 김택용의 경우 그보다 이전에 스카이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 플레이오프 때 에이스 결정전에서 오영종을 꺾은 적이 있다. 거기다 오영종이 승리했을 때는 르까프가 결승에 올라가서 삼성 칸에게 4:0으로 스윕당한 반면 김택용의 경우 팀을 결승에 진출시키고 그 뒤 팀이 후기리그 우승, 그랜드 파이널 우승까지 쓸어담았으니 사실 오영종 쪽이 더 분해해야 맞는데... 어찌 보면 2007 전기리그 플레이오프 때의 승리는 오영종 입장에선 설욕전이었던 셈.[35] 사실 이 말은 스타성이 뛰어난 박정석의 등이 유명한 것과 더불어, 강민, 박지호, 오영종 등의 게이머들이 스타리그나 프로리그 인트로에 뒷모습이나 돌아보는 모습을 많이 찍힌 것에서 유래.[36] 엄밀히 말하면 이후에 검정 바탕에 빨간색 글씨로 제작된 버전도 있다. 대부분의 팬들은 빨간색 글씨가 더 익숙할지도.[37] 사실 이 경기 자체도 팬들이 보다가 뒷목잡고 쓰러질 정도의 안타까운 경기다. 하물며 당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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