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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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시대 일본이 이룩한 산업혁명의 유적을 묶어 지정한 세계유산 항목. 무려 8개 현에 걸쳐 있다. 항목 부제는 철강, 조선, 탄광 산업(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2009년 잠정목록 등재 당시에는 '규슈와 야마구치의 근대화산업유산군'이었다. 실제로 규슈와 야마구치에 대부분의 유적이 몰려 있고 동일본의 시즈오카와 이와테에는 각각 한 군데씩 뿐이다. 세계유산 항목 이름만 보면 모두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유산들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야마구치의 하기 반사로나 가고시마의 구 집성관은 막부 말기에 세워진 것이다. 두 지역이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유신을 주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 그런데도 굳이 항목명에서 메이지를 강조한 것은 메이지 유신의 임팩트를 고려한 듯.
이 항목은 1869년의 메이지 덴노 즉위 이전과 메이지 20년인 1887년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일본이 서구의 것들을 받아들이던 시기임은 같지만 중간의 근 20년간의 유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메이지 후기의 유적들은 국가 주도의 중공업 발전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쿠오카의 관영 야하타제철소를 비롯, 각각 미쓰이와 미쓰비시가 운영했던 미이케 탄광과 나가사키조선소가 그것.
'''이 가운데 여러 군데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된 조선인이 일했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의 씨앗이 되었다.''' 해당 장소에는 '''†''' 표시.
2. 등재를 둘러싼 논란
일본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대상 중 몇몇 시설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의 강제 징용 사실이 있었다는 문제로 인해 등재를 놓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마찰이 있었다.
강제 징용 사실은 누락한 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던 일본 정부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이 강제 징용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문헌에 반영하지 않으면 등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로 인해 등재 결정이 하루 연기되기도 했다. 결국 막바지 양국 정부간에 극적인 합의가 이뤄져 일본 측에서 강제 징용 사실을 인정하고 등재가 결정.
한국측과 일본측의 타결협상안을 보면 강제노동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강제노역이 포함된 사실을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수용한 것을 알 수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시킨 주체를 누구인지는 표기하진 않았으며. 그 주체가 당시 일본 정부에 있다고는 볼 수 있다고는 하나 확정적으로 표기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협상안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은 하되,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여 여러모로 강제성이 거의 없다시피한 타결이라 후에 일본이 태도변화가 있더라도 유네스코의 이행권고만 있을 뿐 강제성이 없다.
일단은 이번 사례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 징용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번째 사례로 볼 수 있다. 단순한 사실 인정 뿐만 아니라 2017년 12월까지 이러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후속조치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보고서로 작성하여 제출하게끔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양국 과거사 문제의 해결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가 주목되고 있다.
다만 이 결과에 대해서 한일 양국 국민들은 모두 불만인 모양. 한국인 입장에서는 같은 역사를 다루더라도 너무나 다른 해석을 하는 일본의 몇몇 사례 때문에 아예 등재 자체를 못하게 막거나 확실한 강제력을 가지게 되도록 표기해야 했었다는 의견이 대다수고, 일본에서는 타결 난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에 굴복한 모양새로 보였기 때문에 역시 못마땅하게 받아들이고 있다[3] .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15년 하시마(군함도)·다카시마·미이케 등 탄광과 야하타 제철소 등 메이지유신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리면서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는 정보센터 설치 등 후속 조치를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현재까지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대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산업혁명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약속한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는 후속 조치 이행에 대해 “충실히 지켜보고 있다”고 입장을 밝힌 상황이다. 日, 세계유산 내 강제징용 표시 안해…유네스코 “지켜보고 있다”
모두 23곳의 유적이 8개 현에 위치해 있다.
3. 등재 지역
3.1.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구 슈세이칸(旧集成館)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는 현재의 가고시마시 요시노초 일대에 공장을 짓고 군사력 강화를 꾀했는데 이것이 슈세이칸(集成館) 사업이다. 사쓰에이 전쟁, 서남전쟁 등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1910년대까지 운영되었다.
- 구 슈세이칸 기계공장(旧集成館機械工場)
- 구 가고시마 방적소 기사관(旧鹿児島紡績所技師館)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가 방적소를 지으면서 설계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영국인 기술자들을 초빙해 그들의 숙소 용도로 지은 건물. 이인관(異人館)이라고도 불린다.
- 데라야마 숯가마터(寺山炭窯跡)
슈세이칸 사업에 쓸 목탄을 생산하기 위해 운영했던 가마터.
- 세키요시의 소수구(関吉の疎水溝)
슈세이칸 사업에서 사용할 수차의 동력을 얻기 위해 상류에 있는 시모타초의 이나리강의 수원지로부터 슈세이칸 사업구역까지 이은 수로시설. 현재도 시설의 일부를 사용 중이다.
3.2.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 구 글로버 주택(旧グラバー住宅)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개항과 함께 나가사키에 와서 무역에 종사한 토마스 글로버가 살던 집으로 1863년에 지었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서양식 주택이다. 글로버는 사카모토 료마부터 이토 히로부미(!)까지 새 문물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이런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을 정도. 애니메이션 물드는 세계의 내일로부터에서도 등장하기도 했다.
- 나가사키 조선소(長崎造船所) †[4] - 조선소가 아닌, 조선소 내의 옛 시설 5곳이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 제 3선거(第三船渠)
나가사키 조선소는 1905년에 건설된 당시 동양 최대의 조선소로 3개의 대형 도크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남아있는 하나를 미쓰비시 중공업이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다.
- 나가사키 조선소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1909년에 영국에서 구입해 설치한 대형 캔틸레버 크레인으로 100년이 넘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 나가사키 조선소 구 목형장(旧木型場)
1898년에 지어진 나가사키 조선소내 거푸집 공장으로 조선소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나가사키 조선소 센쇼가쿠(占勝閣)
1904년에 지어졌으며 원래는 조선소 소장의 저택으로 지어졌는데 정작 저택으로는 이용되지 않고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코스게 선박수리장 유적(小菅修船場跡)
1868년에 지어진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도크. 코마츠 타테와키, 고다이 토모아츠, 토마스 글로버 등이 주도하여 만들어졌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식 건축물이다.
- 타카시마 탄광(高島炭鉱) †[5]
나가사키 반도 옆에 있는 섬으로 에도 막부 중반기에 발견된 탄광인데 증기기관 등의 보급으로 석탄 수요가 높아지자 개발이 시작되어 일본 최초의 근대식 탄광 공법을 사용된 장소이다. 처음에는 사가 번과 글로버 상회가 공동 소유했다가 훗날 미쓰비시그룹으로 소유권이 넘어간다. 하시마 섬 못지않게 조선인 희생자들이 많이 나온 곳으로 한국인들에게 아픔이 있는 현장이기도 한다. 타카시마 탄광 여행기 참조
위의 타카시마 아래에 있는 섬으로, 우리에게는 군함도로도 잘 알려진 그 곳이다.
3.3. 후쿠오카현
3.3.1. 기타큐슈시
- 야하타 제철소(八幡製鐵所) †[7]
기타큐슈시 토바타구, 야하타니시구, 코쿠라키타구에 소재한 이 제철소는 1901년부터 조업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세운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관영 제철소로 출발했다가 1934년에 민간 업체와 합쳐 일본제철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철강 생산량 중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제철소였는데 패전 이후인 1950년, 해체되어 야와타제철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다 1970년에 업계 2위 후지제철과 합병하여 신일본제철로 사명을 바꾸고 이후로도 크고 작은 합병을 거치면서 사명이 신일철주금으로 바뀌었다가 최근에는 일본제철로 사명을 바꾸면서 결과적으로 70년 전의 사명으로 다시 돌아갔다.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사건으로 한일관계를 격랑에 빠뜨린 바로 그 회사의 모태가 되는 제철소.
- 구 본사무소(旧本事務所)
1899년에 지어진 벽돌식 건물로 영국식과 일본식이 혼합되어 지어졌다.
- 수선공장(修繕工場)
1900년에 지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골조 건물. 현재도 같은 용도로 사용 중이다.
- 구 단야공장(旧鍛冶工場)
1900년에 지어진 건물로 현재는 자료실로 사용 중.
- 온가강 수원지 펌프실(遠賀川水源地ポンプ室)
야하타 제철소에 필요한 공업용수를 취수하기 위해 온가강 상류에 지은 펌프실. 증기펌프에서 전기펌프로 바뀌는 등 내부 시설은 달라졌지만 현재도 같은 용도로 사용 중이다.
3.3.2. 오무타시, 아라오시
- 미이케 탄광(三池炭鉱) †[8]
오무타시와 아라오시에 걸쳐있는 이 탄광은 에도 시대에 채굴이 시작된 역사가 오래된 탄광이다. 또한 일본 노동사(史)에서 상당히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의미가 큰 곳인데 미이케 투쟁(三池闘争)이라 불리는 노동쟁의(1차 53년, 2차 59~60년)가 발생한 곳이다. 특히 2차 미이케 투쟁은 <총 자본대 총 노동의 대결(総資本対総労働の対決)>라 불리는 역사적 규모의 대규모 노동쟁의였다. 당시 사측은 폭력단을 동원하여 진압을 시도했고, 이 과중에 노동자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한국어 위키백과 항목 게다가 탄광 사고가 많았지만 희생자들을 위한 보상도 없고 관계자들도 처벌이 없기 때문에 일부 일본인들에게도 아픈 역사이다. 미이케 탄광 여행기 참조. 상당히 오래 운영되었는데 1997년에서야 폐광되었다. 2020년에 폭우로 인해 붕괴되었다고 한다.
- 미야하라 갱(宮原坑)
- 만다 갱(万田坑)
- 전용철도유적(専用鉄道敷跡)
미이케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각지로 연결한 철도 시설로 1891년 처음 개통됐고 나중에는 미이케 항까지 연장되었다. 현재도 미쓰이화학의 공장이 당시 철도 시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
- 미이케 항(三池港)
3.4. 구마모토현 우키시
- 미스미니시 항(三角西港)
1887년 개항된 항구로 네덜란드인이 설계하였다. 메이지 시대에 건설된 항구들 중 유일하게 당시 시설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는데 철도가 동쪽에 있는 항구로 연결되면서 이 항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미이케 항이 정비되기 전에는 미이케 탄광의 석탄을 선적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3.5. 사가현 사가시
- 미에츠 해군기지 유적(三重津海軍所跡)
쿠로후네 사건 즈음, 에도 막부가 대형 선박 건조 금지령을 해제하자 그 직후 사가 번에서 건설하여 운영하였던 조선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이 도크가 남아있다. 1865년에는 이 곳에서 일본 최초의 실용 증기선인 료후마루(凌風丸)가 건조됐다.
3.6. 야마구치현 하기시
- 하기 조카마치(萩城下町)
- 쇼카손주쿠(松下村塾)
-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유적(恵美須ヶ鼻造船所跡)
쿠로후네 사건 즈음, 에도 막부가 대형 선박 건조 금지령을 해제하자 그 직후 조슈 번에서 건설하여 운영하였던 조선소.
- 하기 반사로(萩反射炉)
철제 대포를 만들기 위해 조슈 번에서 만든 실험적인 반사로로 실제 생산은 하지 못했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2개의 반사로 중 하나.
- 오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 유적(大板山たたら製鉄遺跡)
위의 에비스가하나 조선소와 연계하여 운영되었던 제철소.
3.7.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 니라야마 반사로(韮山反射炉)
오다이바에 배치할 철제 대포를 만들기 위하여 에도 막부에서 만든 반사로로,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2개의 반사로 중 하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실제 대포를 만들어냈던 실용 반사로이다. 이즈하코네 철도 슨즈선 이즈나가오카역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3.8. 이와테현 카마이시시
- 하시노 철광산(橋野鉄鉱山)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고로의 터로 모리오카 번의 번주 오오시마 다카토(大島高任)가 반사로에 사용할 주철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건설했다. 1858년에는 실제로 일본에서 최초로 주철의 연속적인 제조에 성공했다.
4. 관련항목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다만 양국이 합의하도록 지시한 것은 위원회의 결정이고, 한국과 일본이 강경한 반대/찬성을 외쳤다면 사안이 표결로 넘어가버려 결국 위원회의 중재안을 차버린 것이 되기에 외교면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4] 약 4,7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5] 약 40,0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6] 약 6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7] 약 3,4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8] 약 9,2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