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말디니

 

'''파올로 말디니의 역임 직책'''
'''AC 밀란 역대 주장'''
프랑코 바레시
(1982~1997)

'''파올로 말디니'''
'''(1997~2009)'''

마시모 암브로시니
(2009~2013)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프랑코 바레시
(1991~1994)

'''파올로 말디니'''
'''(1994~2002)'''

파비오 칸나바로
(2002~2010)

'''파올로 말디니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2003 · 2005
1989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2003[50]
1994-95 · 1995-96· 1999-00· 2002-03
'''UEFA 유로 역대 베스트 XI'''[51]



'''1995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조지 웨아
2위
'''파올로 말디니'''
3위
위르겐 클린스만
<color=#373a3c> '''1994 Ballond'or'''
수상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2위
로베르토 바조
3위
'''파올로 말디니'''
<color=#373a3c> '''2003 Ballond'or'''
수상
파벨 네드베드
2위
티에리 앙리
3위
'''파올로 말디니'''

'''파올로 말디니의 기타 정보'''
''' No. 3 '''





'''Associazione Calcio Milan S.p.A.'''
''' 이름 '''
'''파올로 말디니''' ''' UOMRI'''
'''Paolo Maldini UOMRI[1]'''
''' 출생 '''
1968년 6월 26일 (55세)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 광역시
''' 국적 '''
이탈리아
''' 신체 '''
186cm|체중 86kg
''' 주발 '''
오른발 (양발)[2]
''' 직업 '''
축구선수 (레프트백[3] / 은퇴)
테니스 선수 (은퇴)
축구경영인
''' 소속 '''
<colbgcolor=#000000> ''' 선수 '''
AC 밀란 (1978~1985 / 유스)
'''AC 밀란 (1984~2009)'''
''' 기타 '''
마이애미 FC (2015~ / 구단주)
AC 밀란 (2018~ /스포츠 전략 개발 디렉터)
''' 국가대표 '''
126경기[4] 7골 (이탈리아 / 1988~2002)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 번호 '''
3번(AC 밀란)[52]
''' 가족 '''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
장남 크리스티안 말디니
차남 다니엘 말디니

1. 소개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기타
6.1. 부전자전
7. 이모저모
8. 말디니에 대한 말, 말, 말

[clearfix]

1. 소개


[image]
이탈리아축구선수 출신 축구경영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레프트백이다.[5] 후반기에는 팀의 노쇠화에 따라 센터백으로도 뛰었다. 2015년부터 마이애미 FC 구단주를, 2018년부터 AC 밀란 스포츠 전략 개발 디렉터를 맡고 있다.
AC 밀란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설적인 수비수이자 축구 역사에 빠질수 없는 레프트백이다.[6] 1960년대 초중반 밀란의 주장이었던 체사레 말디니의 아들이기도 하며, 부자가 모두 밀란의 전설로 남았다. 이후 아들 다니엘 말디니도 밀란에서 경기를 치루며 3대가 AC 밀란에서 선수로 뛰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최고 수준의 기량을 보여준 축구계의 산 증인. 그와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수많은 선수들은 세월에 못 이겨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오로지 말디니만은 20여 년의 세월동안 산시로와 밀란을 굳건히 지켰다.[7]

2. 선수 경력


[image]

2.1. 클럽 경력


[image]
1985년 1월 20일, AC 밀란 vs 우디네세. 세르지오 바티스티니의 부상으로 교체된 말디니, 이 때 나이 고작 16세. 더 놀라운 건 '''17세'''의 나이일 때 AC 밀란의 주전이 되었고, 마우로 타소티-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와 수비 라인을 결성한데 이어 1987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가 결성되었고 카를로 안첼로티, 로베르토 도나도니,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등 중원과 공격라인도 막강했다. 이들은 밀란 제너레이션이라 불리며 아리고 사키가 지휘하는 압박 축구는 잘 가동되었다. 그렇게 그 시즌에 14골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첫 스쿠데토를 들어올린다. 다음 시즌에는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잡고 20년만에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한데 이어, 그 다음 시즌에도 SL 벤피카를 상대로 유러피언컵 2연패를 성공하며 승승장구한다. 사키가 떠나고 카펠로가 온 밀란은 계속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1991-92 시즌에는 아예 무패 우승을 달성했다.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드림팀' FC 바르셀로나를 4-0으로 학살해 버리며 빅 이어을 들어올렸다. 거기에 같은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명서 더블을 기록한다. 그리고 같은 해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준우승과 겹쳐 말디니 본인도 1994년 발롱도르 3위,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위를 차지한다.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 2연속으로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AFC 아약스에서 0:1으로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말디니 본인도 1995년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카펠로가 떠난 후 사키가 다시 부임했지만, 리그 11위를 하는등 부진했고 카펠로가 또 다시 오지만 그래도 팀은 점점 기량이 하락하고 있었다.
밀란 제너레이션 1기 세대가 끝나며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렇다한 성적 하나 내지 못했다. 굳이 뽑자면 스쿠데토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2000-01시즌에 카를로 안첼로티가 감독으로 부임한다. 이때 말디니는 저주가 걸렸던(…) 산시로 구장에서 그만 부상을 당해 15경기를 뛰는 데 그쳤고,[8] 무관에 그치지만 다음 시즌에 후이 코스타, 알레산드로 네스타, 카푸 등의 영입이 이어지며 2002-03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찬 말디니의 밀란이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말디니는 발롱도르 3위에 등극한다.[9]
[image]
2004-05 시즌부터는 안드레아 피를로,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젠나로 가투소 등이 제대로 활약하며 밀란에도 점점 따듯한 바람이 부는듯 했다. 또 야프 스탐이 오면서 말네스카 라인을 형성하지만 사실 이 수비라인이 제대로 가동된 시간은 한 시즌 정도도 밖에 없었다. 말디니와 카푸는 이미 30줄을 타고 있었고 네스타는 부상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했다. 리그 최저 실점도 리그 우승과 함께 유벤투스 FC에게 내줬다. 때문에 2004-05 시즌에 남은건 챔피언스 리그뿐이었고 결국에는 결승까지 진출한다. 결승전은 리버풀 FC와의 경기였는데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말디니의 챔스 최단 시간골, 이 후 쐐기를 박는 2골로 전반전이 끝나며 빅 이어를 드는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후반전 스티븐 제라드의 헤딩골과 함께 3골을 내리 먹히며 승부차기로 갔고 결국 패배하고만다. 이것이 바로 이스탄불의 기적. 이후 풀백으로서는 예전같은 모습이 안나오자 말디니는 이 때부터 아예 센터백으로 주 포지션을 변경했다.
[image]
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설욕에 성공해,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이후 2006-07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예정이었고, 재계약을 시도하던 밀란과의 협상도 연봉 문제로 진전이 안 되었지만, 5위로 그치면서 체면을 제대로 구긴 밀란이 안타까웠는지 2008년까지 더 뛰겠다고 발표를 했다.
2007-08 시즌에는 웬만한 젊은 수비수보다도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아스날전에선 평점이 제일 높았다. 사실 그 경기를 보면서 가장 혀를 찼던 것은, 상대 팀 아스날의 주장이라는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말디니가 프로 데뷔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새파란 것이었으니[10] 그리고 또 한 시즌 더 뛰겠다고 했다.
은퇴 시즌인 2008-09 시즌 말기에는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키엘리니한테 빡쳐서 키엘리니의 멱살잡는 평소 말디니답지 않은 거친 행동을 보이면서[11][12] 경고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홈 경기에서는 밀란 팬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다. 밀란 팬들은 말디니를 존중하지만, 우리의 캡틴은 영원히 바레시라고 했는데, 이는 예전 2004-05 시즌에 이스탄불에서 벌어졌던 챔스 결승전에서 밀란 팬들이 밀란의 드라마틱한 패배에 분노하여 비난하자 말디니가 역으로 팬들을 비난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것과 밀란 보드진의 막장 경영 때문에 애꿎은 말디니가 희생되었다는 것.
어쨌든 이 일은 유럽 축구계의 저명한 선수, 인사들 모두가 '희대의 병신짓'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희대의 병크였다.[13]
이후 2009년에 40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말디니는 밀란에서만 24년동안 902경기나 뛰며,[14] 7개의 스쿠데토와 5개의 빅 이어[15]를 들어올렸다.
마라도나부터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호나우두, 지단, 피구, 호날두, 를 모두 상대해본 유일무이한 수비수. 이것만으로도 말디니의 위엄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국대에선 매우 뛰어난 활약을 했음에도 클럽과는 다르게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말디니는 4번의 월드컵[16]와 3번의 유로[17]에 출전했는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3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 이어 UEFA 유로 2000 결승전에서도 다비드 트레제게에게 통한의 골든 골을 먹고 준우승에 그쳤다.[18] 따라서 국대에서는 무관의 제왕.
일단 국가대표 데뷔는 1988년 이었는데 확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 답게, 1988년에 데뷔하자마자 그해 유로와 올림픽에 참가한다. 유로 4강, 올림픽 4위로 그 한해를 마무리 한다. 특히 이제 막 국가대표에 데뷔한 선수로서 UEFA 유로 1988 베스트 11에 선정되면서 이미 완성된 슈퍼 수비수임을 보여줬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당시 개최국 이탈리아는 말디니-바레시-페리-베르고미[19]로 이어지는 월드컵 단일 대회 역사상 최강의 수비 라인과 골키퍼 발테르 쳉가가 버티고 있었고, 살바토레 스킬라치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월드컵 단일 대회 최장 시간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지만, 아르헨티나와의 4강전에서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무실점 기록은 517분으로 막을 내렸고, 승부차기 끝에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이후 3·4위 전에서 잉글랜드를 격파해 3위를 차지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조별예선으로 부상 아웃된 프랑코 바레시 대신, 4강전까지 임시 주장을 맡았는데, 말디니를 앞세운 강력한 수비진[20]로베르토 바조의 대활약으로 이탈리아는 결승전에 진출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브라질과의 혈전 끝에 바조의 실축으로 승부차기 패배로 준우승에 그쳤다... 그래도 말디니 본인은 대회내내 좋은 활약을 펼쳐 1994년 발롱도르 3위,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위를 차지한다.
UEFA 유로 1996에서는 바레시의 은퇴, 그리고 바조아리고 사키와의 불화로 국대에서 탈락했으며 아주리 자체의 경기력이 내려온 상황이었고, 결과도 조별예선 탈락이었다. 그랬는데도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말디니는 여전히 훌륭했으나, 아쉽게 8강에서 개최국 프랑스와의 치열한 중원다툼, 수비싸움에서 아주리레블뢰는 승부의 결말을 짓지 못했고, 결국 승부차기로 프랑스가 4강을 올라간다. 이때를 기점으로 말디니의 후배 세대에서 리자라쥐, 카를로스같은 역사에 남을왼쪽 수비수들이 등장했다.
UEFA 유로 2000에서 아주리의 스쿼드와 디노 조프 감독의 전술이 맞아 떨어지면서 아주리는 승승장구했다. 부폰과 비에리가 부상으로 아웃되긴 했지만, 델피에로인자기, 토티 등이 있었고, 알베르티니, 디 비아조, 피오레, 콘테 등등 미들진도 훌륭했다. 당시 디노 조프 감독은 율리아노-네스타-칸나바로로 3백을 형성한 후에 말디니와 잠브로타를 윙백, 나아가서 측면 미드필더로 썼는데, 베테랑과 중진 그리고 신예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강력한 모습으로 4강까지 진출했다. 4강전 개최국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그 재밌다는 유로 2000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경기인데, 잠브로타가 경기 시작한지 극초반에 퇴장하면서 아주리의 수비라인은 즉각적으로 말디니-네스타-율리아노-칸나바로 포백으로 변환, 알베르티니와 디 비아조도 중원 싸움보다는 수비에 집중하게 된다.[21][22] 여기서 말디니는 네덜란드의 오베르마스, 또 젠덴과 공방을 저지했다. 당시 말그대로 절정의 스쿼드를 가지고 있었던 네덜란드였기 때문에 아주리는 말그대로 막는 것에 총력을 했는데, 여기서 말디니는 세도로프의 슈팅 타이밍을 잠시 놓치자 손을 내리고[23] 말그대로 몸을 던진다. 그야말로 말디니 수비의 처절한 명장면.[24] 경기는 대혈전 끝에 아주리의 극적인 승부차기 승리였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에서 왕조를 이루려하는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말디니는 앙리를 완전히 억제하면서 왼쪽을 장악했지만, 결국 통한의 역전패로 준우승의 분루를 다시 한 번 삼키게 된다. 물론 이 대회에서 말디니의 역량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당연히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의 축구 경력 최초로 장기 부상을 끊으면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평상시 보다 떨어진 경기력도 있었고, 지역예선에서 3백을 쓰면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승장구했던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갑자기 본 대회에서에서는 4백으로 포메이션을 전환하면서 아주리의 플레이 자체가 불협화음이 심했다. 거기다 네스타의 부상 아웃, 칸나바로의 경고 누적 등 악재가 겹치면서 16강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말디니를 센터백으로 기용했는데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후반 종료 직전 설기현에게 동점골을 허용했고, 연장 후반 말디니는 안정환의 헤딩을 제대로 커버 못하면서 부폰골든 골을 허용하여 결국 패하고 만다. 참고로 말디니가 국가 대항전이나 국제 메이저 대회에서 커맨더 센터백으로 선 경기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25]
더군다나 이 경기에서 이천수에게 뒤통수를 까이는(...)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6] 그래서 그런지 2002년 월드컵은 안 좋은 기억 밖에 없는 생애 최악의 대회라고 한다. 이 경기만 이겼으면 로타어 마테우스를 제치고 월드컵 최다 경기 출전[27]에 오를 수 있었으나 무산.
마르첼로 리피는 파올로 말디니에게 2006년 월드컵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했고, 그 전에는 트라파토니가 말디니에게 2004년 유로 대회를 같이 하자고 제의를 했지만, 말디니는 두 제의 모두 거절.
'''근데 이탈리아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안습. 더구나 이 때 충분히 주전으로 뛸만한 기량이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28]
말디니가 은퇴한 직후 2010년 초에 마르첼로 리피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 측에 요청하여 이탈리아 vs 북아일랜드 경기를 말디니의 국대 마지막 경기로 정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거절되었다.

3. 은퇴 후


은퇴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과 함께 첼시로 간다는 루머가 있었고, 실제로 안첼로티가 말디니에게 코치직을 제의했었다. 그러나 말디니는 이를 거절했고, 밀란 유스팀의 코치를 맡는다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다.
2015년 5월 20일 북미 축구리그(NASL)[29]의 12번째 팀 마이애미 FC 구단주로 취임하였다. 해당 링크
밀란이 최근 들어서는 폭망한 상황인데 지금 개판 5분전인 밀란을 보는 말디니의 심정은 어떨까... [30]
이후 망해가는 밀란에게 쓴 소리좀 하시다가 뜬금없이 스페인 라리가의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원클럽맨 트로피를 받게 되었다. 물론 말디니는 밀란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빌바오와 엮일 일이 전무하지만 빌바오의 특성을 볼때 끝까지 클럽을 지킨 파올로 말디니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을 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밀란 팬들은 클럽 최고의 레전드가 다른 팀에서 더 대우받는 모습을 보고 씁쓸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31]
2017년 6월, 프로 테니스 ATP 챌린저 투어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저 정도 운동신경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강골은 강골이다.
2018년 8월, '''드디어 밀란에 복귀했다.''' 직책은 스포츠분야 전략개발담당자
2019년에는 팀의 향후 노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벌이다 사임한 레오나르두 아라우주의 후임으로 스포츠디렉터가 되었다. 스포츠 디렉터로써 첫 행보는 테오 에르난데스의 영입 아들 다니엘레 말디니를 유스로 넣었다.
그러나 2020년에는 이탈리아 전역을 강타한 COVID-19 바이러스를 말디니 부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완치 후에도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해당링크

4. 플레이 스타일


[image]
말디니는 오른발잡이였고, 그래서 유스 팀 때는 라이트백이었다. 하지만 밀란에는 이미 마우로 타소티라는 걸출한 라이트백이 있었기에 성인 무대에서는 레프트백으로 데뷔했다. 그 후로도 레프트백 포지션에 주로 기용될 것이 확실시되자, 웬만큼 다 큰 나이에 왼발을 오른발처럼 잘 쓰기 위해 죽도록 연습했다고 한다. 연습을 정말 많이 한 덕에 프리킥과 같은 데드볼 상황에서도 오른발 대신 왼발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양발잡이로 거듭났다. 대표적으로 유로 2000 4강 네덜란드전에서는 승부차기에서 왼발로 킥을 했다. 비록 결과는 실축이었지만.
풀백뿐만 아니라 센터백으로도 얼마든지 뛸 수 있었다.[32] 즉, 수비 진영의 모든 포지션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워낙 수비력이 훌륭해서 말디니의 플레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축구팬들은 말디니가 공격력까지 좋은 풀백이라는 점을 잘 모른다. 사실 말디니가 뛰던 시기에 공격력이 좋은 풀백하면 대부분은 호베르투 카를루스를 먼저 떠오르기 때문. 그러나 하단에 호나우지뉴, 안드리 셰브첸코, 루드 굴리트가 언급했듯이 말디니는 '''공격력도 훌륭한''' 풀백이었다.
일단 개인 기술을 매우 훌륭한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다. 공격수의 압박이 들어오면 스텝 오버, 마르세유 룰렛 등의 다양한 개인기로 공격수를 농락하고 과감하게 드리블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흔히 말디니의 플레이를 '우아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개인 능력의 진수가 가장 잘 발휘된 장면은 이탈리아가 3백을 쓰고 윙백으로 말디니가 나선 유로 2000인데, 특히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말디니가 측면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양발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격 진영에 올라간 상태에서 어느 발로든 양질의 크로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슈팅 테크닉이 아주 훌륭해서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슈팅 동작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며, 중거리 슛도 잘 했다. 세트 피스 상황에서 보여주는 헤더 슈팅도 매우 위력적이었다.
말디니의 수비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한국에서는 아예 '''수비의 교과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태클, 인터셉트, 몸싸움, 제공권, 주력, 지구력, 침착성, 리더십 등 수비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출중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약점이 없는 수비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능력은 상대의 공격 방향을 예측하여 페널티 박스로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구석으로 몰아 가는 능력이다. 이러한 수비 능력으로 수없이 많은 공격수를 묶어냈고, 그 중에서도 말디니가 가장 돋보였던 경기는 유로 2000 4강 네덜란드전이다. 이 경기 초반에 잔루카 잠브로타가 퇴장당했고, 이탈리아는 수적 열세에 놓였다. 말디니는 이런 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스피드 윙어인 오버르마르스를 완전히 꽁꽁 묶어버렸고 단 한 번의 돌파도 허용하지 않으며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지켜냈다.[33]
더 놀라운 사실은 20년이 넘는 커리어 중, 퇴장당한 건 단 두 번뿐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은 말디니가 파울을 얼마나 영악하게 했는지 잘 알려준다. 굉장히 적극적이면서 거친 태도로 공격수를 다루면서도 카드 받을 만한 반칙들은 하지 않으며 공격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는 말이다. 이런 영악한 수비 능력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말디니와의 대결을 어려워했다. 호나우두디에고 마라도나를 비롯해 지네딘 지단,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호나우지뉴, 루이스 피구, 아드리아누 등 수많은 선수들은 자신의 선수 생활 동안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수비수로 말디니를 선정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3위: 1994, 2003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FIFA 올해의 선수 2위: 1995
  • FIFA 100: 2004
  • FIFA FIFPro 월드 XI: 2005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0, 1994
  • UEFA 올해의 수비수: 2006-07
  • UEFA 올해의 팀: 2003, 2005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8, 1996, 2000
  • UEFA 유로 올타임 XI: 2016
  •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3
  • UEFA 챔피언스 리그 공로상: 2009
  •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 2003-04
  • 세리에 A 역대 베스트 XI: 2017
  • UEFA 회장상: 2003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18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4
  • FIFA 공로 훈장: 2008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94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엘 파이스 유럽 올해의 선수: 1994
  • ESM 올해의 팀: 1994-95, 1995-96, 1999-2000, 2002-03
  • FIFA XI: 2002
  • 브라보 상: 1989
  • 마르카 레전드: 2008
  • 옹즈 드 옹즈: 1989,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2003
  • 프레미오 인테르나치오날레 자친토 파케티: 2008
  • 원 클럽 맨 상: 2016
  • 가제타 스포츠 상 - 레전드: 2018
  • Premio Nazionale Carriera Esemplare "Gaetano Scirea": 2002
  • 돈 발론 2000년대 베스트 XI: 2010
  • 스포르키다 UCL 역대 베스트 XI: 2016

5.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유럽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4/85
AC 밀란
세리에 A
1
0
0
0
0
0
1985/86
AC 밀란
세리에 A
27
0
6
0
6
0
1986/87
AC 밀란
세리에 A
29
1
7
0
-
-
1987/88
AC 밀란
세리에 A
26
2
1
0
2
0
1988/89
AC 밀란
세리에 A
26
0
7
0
7
0
1989/90
AC 밀란
세리에 A
30
1
6
0
8
0
1990/91
AC 밀란
세리에 A
26
4
3
0
4
0
1991/92
AC 밀란
세리에 A
31
3
7
1
-
-
1992/93
AC 밀란
세리에 A
31
2
8
0
10
1
1993/94
AC 밀란
세리에 A
30
1
2
0
4
0
1994/95
AC 밀란
세리에 A
29
2
1
0
11
0
1995/96
AC 밀란
세리에 A
30
0
3
0
8
0
1996/97
AC 밀란
세리에 A
31
1
3
0
6
0
1997/98
AC 밀란
세리에 A
30
0
7
0
-
-
1998/99
AC 밀란
세리에 A
31
1
2
0
-
-
1999/00
AC 밀란
세리에 A
27
1
4
0
6
0
2000/01
AC 밀란
세리에 A
31
1
4
0
14
0
2001/02
AC 밀란
세리에 A
15
0
0
0
4
0
2002/03
AC 밀란
세리에 A
29
2
1
0
19
0
2003/04
AC 밀란
세리에 A
30
0
0
0
9
0
2004/05
AC 밀란
세리에 A
33
0
0
0
13
1
2005/06
AC 밀란
세리에 A
14
2
0
0
9
0
2006/07
AC 밀란
세리에 A
18
1
0
0
9
0
2007/08
AC 밀란
세리에 A
17
1
0
0
4
0
2008/09
AC 밀란
세리에 A
30
0
0
0
2
0

6. 기타


풋볼 매니저에서 기묘하게 부상을 당한 짤방이 돌기도 했다.[34]
  • 축구잡지 포포투에 실렸던 안드리 솁첸코의 인터뷰에 의하면 걸어다닐 때마다 멋이 뚝뚝 흘러 넘치는 패셔니스타들이 즐비한 밀란에서도 말디니의 패션감각은 군계일학 수준으로 단연 최고였다고 한다.
  • 여담으로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와 함께 부자가 같이 한국에 온 적이 있다. 다름 아닌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아버지는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아들은 아주리 군단 주장으로 참가한 것. 알다시피 아주리 군단은 당시 16강에서 한국에게 패배해 짐을 싸야만 했고 파라과이 또한 16강에서 독일에게 패배해 탈락한다.[35]
  • 25년간 밀란에서 선수 생활을 보내며 각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들[36]과 공식경기에서 모두 상대해 본, 혹은 동료로 같이 뛴 유일한 선수다.[37][38][39]
  • 말디니는 호나우두가 밀란으로 이적할 때 "호나우두는 여지껏 내가 마크했던 공격수 중 두 번째로 막기 힘든 선수"라며 극찬했다. 첫 번째는 디에고 마라도나. 처음 디에고 마라도나와 붙었을 때 "에이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뭐 다를 게 있겠어?"라고 생각하고 마라도나와 경기에서 부딪혔고 당연히 그 경기에서 몇 번의 신체적인 충돌이 있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허벅지가 쑤셔서 보니 멍이 나 있었다고...
  • 피파 온라인 3에서 월드 레전드로 나왔으며, 평가는 가히 루드 굴리트의 수비수 버전. 피지컬도 무진장 센데다 오버롤도 93으로 매우 높아 얼티메이트 레전드로도 뚫기가 어렵다. 다만 보직이 센터백으로 나와서 영 안맞는다는 느낌이나 레프트백으로 놔도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 피파 온라인 4에서는 NHD, TC, HOT, LH 클래스로 출시되었다. 본 포지션인 레프트백이 아닌 센터백으로 주로 기용되며 라파엘 바란, 버질 판데이크, 리오 퍼디난드 등과 함께 적폐 센터백으로 꼽힌다.[40]
  • PES 시리즈에도 수록되어있다. 레전드와 아이코닉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아이코닉버전 만랩은 95이며 팀버프를 받을시 97까지 올라가는 역대급 수비수로 나온다 왼쪽 오른쪽 중앙 수비를 모두 볼수있으며 수비력과 공격력 모두 적폐급 센터백이다. 기술추가로 고난도 걷어내기 기술을 붙인다면 대체불가 선수로 평가받는다.
  • 필리포 인자기가 처음 국가대표에 왔을 때 상당히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자기의 테크닉이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계속 득점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갸우뚱 했다고...[41]
  • 2020년 4월 24일 한국의 승리를 비꼬았다는 기사가 나와 축구팬들이 조소를 했으나, 세리에매니아에서 대화 해석본이 나오자 생각보다 빠르게 논란이 종결됐다. 기자 를 욕하는 건 덤. 아래는 한일월드컵 관련 대화 번역본. 22분부터 시청하면 된다.
  • 【 말디니와 비에리의 인스타그램 대화 번역본 】

    ||<table align=center>||

    '''말디니''' : 25년의 커리어동안 우승 많이 했고, 밀란을 떠날 생각 없었다. 나는 밀라니스타다. 트로피 들어올린 것? 나는 역사적으로 많이 패배했던 선수다. 우승도 많이 했지만, 3번의 챔스 결승에서 패배했고, 슈퍼컵에서 한차례 패배했고, 3번의 인터콘티넨탈컵에서 패배했고, 월드컵 결승에서 한번, 유로 결승에서 한번 패했고, 월드컵 4강에서도 한번 패했다. 운좋게 우승도 많이했지만, 결승에서 패배도 많이 했다. 그것들은 경기에 일부분이다. 받아들인다. 아마도 최악의 순간은 마르세유와의 경기였다. 우리는 이길만 했고, 그렇게 된 것은 공정하지 않다. 대표팀에서 나는 훌륭한 팀에 있었고, 기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승부차기에서 계속 패배했다. 반면 2006년 대표팀은 승부차기에서 우승했다. 리피가 2006년에 불렀지만, 트랍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거절했다. 이탈리아가 베를린에서 프랑스를 꺾고 우승한 순간 기뻤지만, 한편으로 '나는 운이 없어'라고 생각했다. 월드컵에 4번 참가했고, 출전 시간 기록도 세웠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인생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비에리''' : 우리는 98 월드컵에서 아버지와 함께 했을 때 승부차기에서 패했고, 2002년에 한국에게 패했다.

    '''말디니''' : 나의 마지막 월드컵은 2002년 한국에서였다. 많은 기억들이 있는데...(갑자기 뭔가 생각난듯이) 경기장 못들어간 적이 있었다. 너는 기억 못할테지만

    '''비에리''' : 응? 기억안나는데?

    '''말디니''' : 패스(출입증)를 안가지고 와서 경비원들이 막아서 못들어갔었다. ㅋㅋㅋㅋㅋ

    '''비에리''' : ㅋㅋㅋㅋㅋ 난 큰 줄기말고는 기억 안난다.

    '''말디니''' : 어쨌든 깜빡했었지만 경기했었고, 그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비에리''' : 어느 경우든, 항상 좋은 경험이 된다. 심지어 패배한 경기들에서도. 항상 필드에서 뛰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말디니''' : 보보, 진실되게 축구는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줬다.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아이들을 축구를 하도록 했다. 여러명이서 조직을 이루고 활동하는 것은 사회적 능력 형성에도 좋기 때문이다. 규칙을 지키고 목표를 향하면서 희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운좋게 최상위 레벨까지 올라갔다. 나는 두 아들들에게 항상 모든 프로페셔널들은 자기 인생에서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캄피오네와 중간 레벨 선수의 차이는 더 많은 희생이다.

'''말디니''' : 보보, 진실되게 축구는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줬다.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아이들을 축구를 하도록 했다. 여러명이서 조직을 이루고 활동하는 것은 사회적 능력 형성에도 좋기 때문이다. 규칙을 지키고 목표를 향하면서 희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운좋게 최상위 레벨까지 올라갔다. 나는 두 아들들에게 항상 모든 프로페셔널들은 자기 인생에서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캄피오네와 중간 레벨 선수의 차이는 더 많은 희생이다.}}}


6.1. 부전자전


[image]
자신의 아버지인 체사레 말디니와 함께 AC 밀란 최고의 레전드로 인정받고 있다.[42]
그의 등번호인 3번은 영구 결번 되었으며, 말디니는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이 나중에 성인 팀에 데뷔를 할때 그 번호를 물려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파올로(말디니)의 등 번호 3번 역시 아버지였던 체사레 말디니의 3번을 물려받은 것이니, 어쩌면 등 번호마저 3대가 이어서 달게 될 지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꼭 영입하고 싶었던 선수라고 직접 밝힌 적이 있다.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인 체사레 말디니를 경기장에서 만나 자신이 얼마나 그를 영입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자 체사레 말디니는 미소지으며 "제 할아버지도, 제 아버지도, 저도 AC 밀란에서 뛰었습니다. 제 아들도 그리 해야지요."라고 답했고 퍼거슨 감독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고. [43]
아무튼 크면 얼마나 잘해줄지 기대가 되는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유스 레벨에서도 파올로의 두 아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명성을 잇기엔 너무도 평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큰 아들이 2013-14 시즌 겨울 이적 시장 때에는 1군에 올라와서 훈련 기회를 받고, 2014-15 시즌부터 프리마베라의 주전 자리를 얻었나 결국 일말의 성장도 보여주지 못하고 3, 4부 리그에서 뛰고 있다. 일부의 말에 의하면 축구선수를 은퇴하고 다른 직종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2016년 현재 둘째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한다.# 다만 포지션이 다르기에 3번을 그대로 물려받을지는 미지수.
2020년 현재는 둘째가 잘 성장하여 AC 밀란 1군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담이 된다며 3번을 달지는 않고 98번을 달았다.

7. 이모저모


  • FIFA 100에 선정
  • 월드 사커에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바 있다. 이는 월드 사커 사상 수비수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 통산 성인 경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한 선수이다. [44]
  • 2004/05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말디니의 골로 2개의 기록이 갱신되었다. 하나는 결승전 최단 시간 골 기록, 또 하나는 결승전 최고령 득점 기록이다.
  • AC 밀란에서는 902번의 경기를 가졌다.
  • 인터콘티넨털컵에 5회 진출. 이는 코스타쿠르타와 같은 기록이다.
  •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선 8번의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최다 우승 기록자인 프란시스코 헨토(레알 마드리드)와 동일한 기록이다.
  • 부자가 챔스 우승을 경험하였다.[45] 파올로의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는 주장으로서 처음으로 밀란에게 빅 이어를 안겨준 바 있다.[46] 현재 밀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장식한 알파가 체사레라면 오메가는 파올로라고 볼 수 있다.
  • 월드컵에선 23경기를 뛰었다. [47]
  • 월드컵에서 뛰었던 23경기는 모두 풀 타임 출장이다.
  • 월드컵에서 무려 2217분을 뛰면서 최다 기록을 가지고 있다. [48].
  • 세리에 A에서 58경기 무패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1991년 ~ 1993년)
  • 22세에 26개의 타이틀을 얻었다.
  • 월드 사커에서 1999년에 선정한 20세기 역대 최고의 선수 21위(말디니 이상의 순위에서 이름을 올린 수비수는 베켄바워와 무어, 그리고 바레시. 각각 순위는 베켄바워는 4위, 무어는 14위, 바레시는 19위). 해당 링크
  • 월드 사커에서 2013년에 선정한 역대 베스트 11에서 당당히 왼쪽 풀백을 차지했다. 참고로 월드 사커에서 뽑은 역대 베스트 11 수비 라인은 말디니-베켄바워-바비 무어-카푸. 말디니는 이 수비 라인에서 유일하게 월드컵 우승 경험이 없지만 당당하게 왼쪽을 차지한 것을 보면 말디니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랑스 풋볼지 선정 지난 60년간 최고의 선수, 수비수부문 1위에 선정되었다. 이건 꽤나 괄목할 것인데 어떤 조사기관을 찾아봐도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뽑히는 베켄바워를 제치고 1위에 선정된 것이다. [49]


8. 말디니에 대한 말, 말, 말


[image]

'''현 시대를 생각해 봤을 때 리오넬 메시가 최고 레벨이다. 내 숨을 멎게 할 플레이는 아니었지만 카카도 인상적이었고, 지단도 정말 뛰어났다. 하지만 나에게 누가 최고냐고 묻는다면 난 파올로 말디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엄청난 존재감, 투쟁심 있는 영혼,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기술적으로 세계 최고가 아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밀란의 모든 것에 영향을 준 남자이다.'''

- 알렉스 퍼거슨

'''클럽에서 선수로서 모든 것을 이룬 훌륭한 수비수.'''

- 프란츠 베켄바워

'''말디니는 내 우상이자 롤 모델이다. 어린 시절 세비야에서 살 때 아버지와 형제들이 말디니의 비디오를 보여 주며 배우라고 했었다. 말디니는 아마 모든 축구 선수들의 귀감일 것이다. 그는 전설이다. 내 이름도 말디니처럼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세르히오 라모스

'''말디니는 39살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운동 선수이고, 철저하게 프로페셔널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선수와 월드클래스 선수와의 차이는 말디니에서 볼 수 있다.'''

- 프랑코 바레시

'''말디니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다. 당연히 나의 우상이기도 하다.'''

- 카를레스 푸욜

'''안첼로티에게 몇 번이나 파올로 말디니에 대해,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어떻게 하였는지, 그리고 선수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했는지 물어봤다.'''

- 존 테리

'''내가 본 선수들 가운데 가장 열심히 노력하던 선수였다. 그가 수비에 있을 때는 정말 믿음직스러웠고, 공격에 있어서는 창의적이었다. 말디니는 진정한 리더십을 갖춘 훌륭한 올라운드 축구 선수이다.'''

- 안드리 셰브첸코

'''말디니는 축구에서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고 있다.'''

- 다비드 비야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뛰면서 말디니와 몇 차례 맞붙었다. 나는 그가 상대 윙어에게 따돌려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테디 셰링엄

'''그는 스타일리쉬한 센터백과 풀백이었다. 말디니의 경기를 읽는 능력, 태클 타이밍, 그리고 경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그를 다른 선수들과 구분시켜 줬다.'''

- 데니스 어윈

'''말디니는 내가 상대한 수비수들 중 가장 까다로운 수비수였다. 그는 강했고, 똑똑했고, 훌륭한 맨마커였다. 그는 완벽한 수비수이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그는 챔피언스 리그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수비수이다. 그에 대해서 정말 놀라웠던 것은, 그가 공을 가졌을 때는 수비수가 아닌 정말 클래스 있는 미드필더와 같은 플레이를 펼쳤다는 것이다.'''

- 호나우지뉴

'''바레시 옆에 서 있던 말디니는 내 선수 생활에서 본 수비수들 중 최고였다. 흔히 1980년대 후반 AC 밀란굴리트반 바스텐의 공격을 중심으로 한 팀으로 기억하는데, 그 팀은 말디니를 중심으로 한 단단한 수비로 구성된 팀이었다.'''

- 마르셀 드사이

'''말디니는 밀란의 상징이다. 그는 구 세대와 현 세대를 모두 대표하기도 하며 두 시대의 연속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 지아니 리베라

'''파올로 말디니는 축구의 상징이다. 그가 앞으로도 축구계에 머물길 바라고 우리들은 모두 그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새로운 플라티니가 될 수 있다. 그가 앞으로 회장직에 대해 공부하길 바란다. 그는 언제나 충성심, 공정함, 투명함의 대명사와 같았던 인물이다.'''

- 루이지 리바

'''내가 상대해 본 최고의 수비수는 파올로 말디니였다.'''

- 라울 곤살레스

'''내가 밀란에 도착했을 때 그는 30대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클래스와 평정심은 여전했다. 지능적인 수비수였고 누구보다 게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 히바우두

'''말디니는 공격, 수비 둘 다 월드 클래스였다. 그는 18세 때의 기량을 39세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루드 굴리트

'''1994년, AC 밀란바르셀로나를 무너뜨린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기억하나? 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 누적으로 나오지 못했을 때, 센터백으로 출전한 말디니는 일생 동안 거기서 뛴 것마냥 우월했다.'''

- 로날드 쿠만

'''밀란에서 경험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말디니의 커리어 일부분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는 위대한 선수, 위대한 캡틴, 위대한 남자다. 전에는 그와 상대편으로만 만났지만, 6개월간 그의 곁에서 플레이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멋졌다.'''

- 데이비드 베컴

'''말디니는 밀란의 역사이자 상징 그 자체다. 이탈리아 밖에서도 밀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반드시 말디니가 언급될 것이다. 파올로를 밀란으로 복귀시킨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 카카

'''훌륭한 선수들이 있고,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경지를 뛰어넘는 지배자가 있다. 말디니가 그 예다. 그는 밀란의 상징이다.'''

-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파올로 말디니는 내가 상대했던 수비수들 중 단연 최고이다.'''

- 호나우두

'''말디니는 내게 있어서 아이돌이다. 그를 뛰어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머리가 매우 좋은 선수이며, 팀을 조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것은 말디니밖에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내 꿈 중 하나는 그를 추월하는 것이었다.'''

- 호베르투 카를루스

'''수비수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아이들은 말디니의 비디오를 봐야 한다.'''

- 잔루이지 부폰

'''그보다 더 뛰어난 풀백이 있었던가?'''

- 데니스 베르캄프

'''그는 모든 스포츠 스타들에게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 릴리앙 튀랑

'''나에게 있어서 말디니는 본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 알레산드로 네스타

'''그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였다.'''

- 클라렌스 세도르프

'''우리 팀이스탄불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말디니가 발롱도르의 주인공이 됐을 것이다.'''

- 안드리 셰브첸코

'''그가 그 나이에 이룬 것들은 정말 엄청난 것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위대한 선수이고, 그의 분야에서 최고다. 그는 5개의 유러피언 컵을 포함해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룬 남자다. 그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 제이미 캐러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고 생각한다. 그는 밀란의 위대한 힘이며, 모범이 되는 선수이다. 그와 같은 선수는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마시모 암브로시니

'''브라질이 펠레를 잃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말디니를 잃어야 한다.'''

- 지아니 리베라

'''진정한 수비수. 그와 맞대결을 해 봤는데 정말 환상적인 선수다.'''

- 스티브 맥마나만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 위대한 충성심과 진정성. 밀라노 더비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 하비에르 사네티

'''아마도 존 테리와 말디니가 상대하기 가장 어려웠던 수비수 같다.'''

- 웨인 루니

'''이탈리아의 수비 전통이 배출한 놀라운 능력의 선수다. 경기장에서 대단히 우아하게 경기를 펼쳤다. 요즘 수비수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선수다.'''

- 게오르게 하지

'''순수하게 기술적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호나우두가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수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파올로 말디니가 최고다. 진정한 수비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비수, 앞으로도 최고일 수비수.'''

- 안드레아 피를로

'''말디니는 20년 이상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나는 그에게 정중히 모자를 벗으며 정말 잘 했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를 상대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두려웠다. 그는 최고이자 완벽한 수비수고, 모든 것을 갖춘 수비수였다.'''

- 다비드 트레제게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 AC 밀란이탈리아의 영웅.'''

- 치아구 시우바

'''어린 시절 우상? 쉬운 질문이군. 파올로 말디니, 그를 존경해서 등번호 3번을 쓰고 있다.'''

- 조르조 키엘리니

'''어린 시절 우상? 말디니와 리트바트스키.'''

- 필립 람

'''말디니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말디니의 경력을 잘 알고 있고, 언제나 최고라고 인정한다.'''

- 마테오 다르미안

'''내가 만나 본 가장 뛰어난 선수는 파올로 말디니다. 우리는 AC 밀란과 1995년 유러피안 슈퍼컵에서 만났는데 말디니는 나를 마크했고, 나는 경기 내내 공 한 번도 차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믿을 수 없었다.'''

- 폴 머슨

'''말디니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박수를 보내길 바란다. 그는 이탈리아와 세계 축구의 얼굴이다. 그는 발롱도르를 한 번도 받지 못했지만 나라면 100개라도 주겠다.'''

- 필립 멕세

'''풀백으로 뛰면서 그는 왼쪽 측면을 아예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쉽게 해냈다.'''

- 필리포 갈리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수비수가 누구였냐는 질문에) '''파올로 말디니.'''

- 디에고 마라도나

[1] 2000년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장교장 Ufficiale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2] 레프트백에 주로 기용될 것이 확실시되자 웬만큼 다 큰 나이에 왼발을 오른발과 같이 쓰기 위해 죽도록 연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양발의 밸런스가 보통이 아니다. 말디니가 정말 대단한 것은 죽도록 연습한 덕분에 프리킥과 같은 데드볼 상황에서도 왼발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리 양발을 잘 사용하더라도 데드 볼 상황에서는 주로 자신있는 발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 시대에도 데드볼 상황에까지 필요에 따라 양발을 모두 쓰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의 연습량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알 수 있다.[3] 라이트백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레프트백으로 전향하여 전성기를 맞이했고 30대 중반에 신체능력이 떨어지자 센터백으로 주 포지션을 옮겼다. 물론 전성기(레프트백 시절)에도 팀 상황에 따라 센터백, 라이트백 등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국가대표에서는 그로소와 잠브로타가 양측백으로 기용되면서 네스타와 중앙 수비수를 맡기도 했다.[4]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출전 3위.[5] 수비 진영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가장 많이 뛴 위치는 레프트백이다.[6] 2020년 프랑스 풋볼 선정 발롱도르 드림팀에 압도적인 표차이로 1군 주전 레프트백으로 선정되었다.(대부분의 매체가 선정하는 올타임 베스트에서의 경쟁자는 같은 이탈리아의 대선배인 지아친토 파케티, 브라질의 전설 니우통 산투스, 또 다른 브라질의 전설 호베르투 카를로스 정도이다.) 타 매체의 올타임 베스트 엔트리에서도 거의 부동의 레프트백 멤버로 선정된다.[7] 밀란 제너레이션의 1,2기를 모두 주전으로 뛴 선수는 말디니가 유일하다.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또한 1, 2기 모두 활약했으나 1기는 주전으로 2기는 주로 교체 멤버로 뛰었다. 말디니는 카를로 안첼로티가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밀란에서 선수로 뛸 때는 물론이고, 2001년에 밀란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에도 여전히 1군 선수였다.[8] 그래서 데려온게 '''칼라제'''다.[9] 여담이지만 네드베드의 수상으로 끝난 03년도 발롱도르 시상 당시 이탈리아 축구계는 전폭적으로 말디니의 수상을 지지했다.(유벤투스 라인은 차마 네드베드와 말디니 둘 중에 하나를 지지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러운 중립을 유지) 네드베드 수상 이후에 이탈리안 축구인들의 반응이 의외로 코믹하다. 특히 가투소와 토티. 해당 링크 [10] 파브레가스 87년생, 말디니 1군 데뷔 85년...[11] 카카와의 공중 볼 경합 중에 키엘리니가 손으로 카카의 얼굴을 쳤는데 그걸 본 말디니가 "너 이 새끼 왜 우리 카카 때려"하면서 멱살을 잡은 것.[12] 이 일로 키엘리니는 완전 상처를 받았는데, 다름 아닌 키엘리니의 우상이 바로 말디니이기 때문. 키엘리니는 프로 데뷔 시절부터 레프트 백과 센터 백을 오갈 수 있는 차세대 말디니로 각광받기도 했고, 본인도 말디니를 따르다 못해 본인은 그에 비하면 미천한 몸이라고까지 하며 하악댔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시 장면을 보면 멱살은 잡혔으나 싸우거나 화를 내기는 커녕 말디니에게 하소연하는 키엘리니의 모습에서 억울함과 서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실제로 나중에 울었다... 안습. 결국 말디니가 추후에 사과했다. 경기내내 너무 거친스타일로 카카를 괴롭히는 키엘리니를 보고 참다가 터진...[13] 심지어 상대였던 로마의 감독 루치아노 스팔레티도 격분하였다. 그래서일까, 바르샤의 과르디올라 감독은 08-09 챔스 우승 이후 우승의 영광을 말디니에게 돌리는 등 그에 대한 존경심을 전했다.[14] 밀란 역사상 최다출장 기록이다.[15]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횟수가 7회라는 점으로 볼 때 클럽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태반 이상의 공적을 세운 셈.[16] 1990 월드컵, 1994 월드컵, 1998 월드컵, 2002 월드컵[17] UEFA 유로 1988, UEFA 유로 1996, UEFA 유로 2000[18] 트레제게는 이때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해온다.[19] 페리와 베르고미는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징을 보여주었다. 일단은 페리는 센터백.[20] 베레시의 부상과 타소티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루이스 엔리케의 코뼈를 부러뜨리면서 대회 아웃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주리 수비라인 포메이션은 정말 유동적으로 바뀌었었는데, 말디니는 이 대회에서 왼쪽 풀백, 왼쪽 윙백, 왼쪽 센터백, 즉 왼쪽 수비에 관한 모든 보직을 다 맡았다. 말디니의 수비능력을 압축해서 보고 싶다면, 94년 월드컵을 추천한다. 의도적으로 포메이션 체인징이 있었던 90년 대회에 비해서 말 그대로 부상과 퇴장에 따른 임기응변이 필요했던 대회였기 때문에 그의 수비능력이 더더욱 빛을 발했다. 그리고 대회 내내 포지션 변화에 따른 말디니의 수비 스타일 변화를 볼 수 있다.[21] 이때 조프는 공격을 말그대로 알아서 하게 냅뒀다. 피오레나 델피에로 같은 흔들기 명인들이나 인자기 같은 한방이 있는 선수들의 자율적인 플레이를 디노 조프 답지 않게 용인했는데, 특히 델피에로 같은 경우는 드리블만으로도 네덜란드를 압박하는 장면을 꽤나 만들었다. 이후 후반에 교체로 투입된 토티도 특유의 배짱과 다이나믹함으로 네덜란드의 파상공세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고, 역시 교체 투입된 델 베키오도 높이로 네덜란드 수비진을 압박했다.[22] 수비 포메이션은 이후 페소토가 알베르티니와 교체되면서 3백에 2명의 윙백을 쓰는게 아니라 철저히 수비를 염두한 5백으로 전환된다.[23] 핸드볼 파울을 피하기 위해서[24] 아쉽게도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영상에서는 이 부분이 짤려있다.[25] 보통 말디니가 센터백에서 뛸때는 전문 센터백인 파트너의 커맨드를 받으며 보조를 맞췄다. 바레시, 코스타쿠르타, 네스타 등.[26] 이천수JTBC 뉴스룸에서 밝힌 바로는 '''일부러 깠다고 했다.'''[27] 이미 최장 시간 출전 기록자였다.[28] 사실 이것은 운이 없다기보단 말디니 스스로 들어온 복을 찬 것에 보는 것이 더 가깝다. 출전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출전을 거부한 것이다. 아마 말디니가 출전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국가대표 커리어에 월드컵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29]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부리그로 2부리그 개념이지만 별도의 승강제는 없다.[30] 말디니가 건재하던 시절의 밀란은 챔스 진출은 기본으로 깔고, 심지어는 결승 진출만 8회라는 정신나간 전적을 자랑해서 강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팀이었는데 지금은... '''유로파리그 진출도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당연히, 폭망한 밀란에 대해 지적을 한 적이 있다.[31] 지금 밀란이 망란화되면서 최근까지 클럽을 지탱하던 모든 레전드와 척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다 레전드 대우를 형편없이 한 밀란 보드진, 그리고 베 총리 때문이다.[32] 1993-9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각각 옐로카드 누적과 4강전에서의 퇴장으로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말디니가 센터백으로 출전해서 무실점 승리를 거뒀고, 1994 미국 월드컵 때도 말디니는 레프트백이 아닌 코스타쿠르타와 함께 센터백을 보았다. 한일 월드컵에서도 한국과의 경기에서 센터백으로 출장했다.[33] 오버르마르스는 세계 축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엄청난 준족이다. 100m 최고기록이 10초6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말디니의 나이는 32세였다.''' 참고로 당시 오버르마르스의 나이는 한창 팔팔한 27살... 저 나이에도 그런 미친 스피드를 탑재한 상태라는 것이다....... 애초에 테크닉이 아무리 좋아도 못따라 잡으면 무슨 소용인가? 지금도 '말디니 오버르마르스' 라고 치면 그날 경기에서 말디니와 오버르마르스의 1대 1 경합 동영상이 있다.[34] 자세히 보면 첫 문장에서 팀 닥터와 말디니의 이름이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35] 사실 올리버 칸이 없었으면 독일이 절대로 못 이겼을 경기였다. 졸전을 펼치다가 올리버 뇌빌이 겨우 한 골을 넣어 1:0으로 이겼기 때문. 독일빠인 차범근마저 독일답지 않았다며 매우 혹평했던 경기로 유명하다.[36] 미셸 플라티니, 디에고 마라도나, 프랑코 바레시, 마르코 판바스턴, 로타어 마테우스, 로베르토 바조,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조지 웨아, 마티아스 자머, 데니스 베르캄프, 히바우두,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올리버 칸,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데이비드 베컴, 라울 곤살레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프란체스코 토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호베르투 카를루스, 카푸, 릴리앙 튀랑, 안드리 솁첸코, 티에리 앙리,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카를레스 푸욜, 잔루이지 부폰, 호나우지뉴, 카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7] 선수 생활을 한 년도로만 따지면 1982년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가에타노 시레아, 마르코 타르델리, 파올로 로시, 울리 슈틸리케까지도 겹친다.[38] 말디니의 1군 데뷔 때 호날두는 이 세상에 없었다... 말디니의 1군 데뷔 1985년 1월 20일, 호날두 출생 1985년 2월 5일. 심지어 21살이나 어린 알레샨드리 파투와도 경기를 같이 뛴 적이 있으며, 말디니가 88/89시즌 유러피언컵(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결승전에 출전하여 우승의 영광을 누렸을 때 파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39] 이론상(?)으로는 15살 연상의 1953년생 지쿠와 19살 연하의 1987년생 메시와도 대결해볼 수 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말디니의 세리에 A 데뷔전은 지쿠가 뛰던 우디네세 칼초였지만 이 경기에서 지쿠는 출전하지 않았고, 바르셀로나와는 05/06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만났지만 메시는 그때 부상으로 16강전에서 아웃당했다.[40] 피온 4는 GR 클래스 출시 이전까지는 TT 클래스 외의 워낙 다른 센터백들의 성능이 느리고 구려서 TT 클래스 이전에는 본래 레프트백인 NHD 말디니와 본래 미드필더인 NHD 비에이라, TKI 이정수, 홍명보 등의 조합이 가장 많이 쓰였다. 그래서 피온4는 엄청나게 욕을 먹는중. 그래도 말디니는 레프트백에 놔도 단연 최고라 할 만 하다. 레프트백에 두기엔 재능 및 급여 낭비라는 얘기를 들을 뿐... TC시즌 말디니는 아예 CB로 표기돼서 나왔는데, 94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당시 활약을 기반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때 말디니는 센터백이었으니 어찌 보면 적절한 고증. 이후 HOT, LH시즌으로도 출시되어 현역으로 기용 중이다.[41] 리그나 국가 대항전에서 호나우두, 디에고 마라도나, 하비에르 사네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로베르토 바조같은 강적들을 상대하고 밀란에서는 프랑크 레이카르트,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같은 레전드들과 훈련했던 말디니 입장에서는 납득이 안갈 거 같다.[42] 사실 파올로의 우상은 미셸 플라티니로 그를 동경하여 유벤투스 FC에 가고 싶어했지만 부친 체사레는 아들이 라이벌팀에서 뛰는걸 탐탁치 않아하여 결국 밀란에서 활약한다.[43] 체사레 말디니는 1932년생이다. 말디니의 증조할아버지 시대에는 선수 생명이 길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도 대충 1870년대생이면 AC 밀란에서 뛸 수 있고, 가능성은 충분하다.[44] 이 기록을 달성한 또 다른 선수로는 라이언 긱스, 하비에르 사네티 등 몇명 되지 않는다.[45] 이런 사례는 말디니 부자를 포함하여 딱 세 번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마누엘 산치스 마르티네스와 그의 아들 마누엘 산치스 온티유엘로(마누엘 "마놀로" 산치스 온티유엘로). 바르셀로나의 카를레스와 그의 아들 세르히오 부스케츠. 신기하게도 모두 부자가 같은 팀이었다.[46] 결승 상대는 당시 벨라 구트만의 저주를 첫타로 맞은 에우제비우SL 벤피카였다.[47] 이 기록을 넘는 선수는 로타어 마테우스(25번)밖에 없다. A매치 150경기를 뛴 괴물인 것은 덤. 최근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24번째 경기를 뛰며 말디니의 기록을 넘은 또 하나의 인물이 되었다.물론 모든 경기가 풀타임은 아니었기에 말디니보다 플레이 시간은 적다.[48] 2위는 2052 분을 뛴 마테우스[49] 말디니는 이미 20대 말 30대 초반이었던 20세기 말, 21세기 초반에도 역사상 최고의 선수 20위권에 랭크 되는 리빙 레전드였다.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더 뛰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추가하면서 꾸준한 클래스를 과시하면서 선수 평가가 더욱 올라갔고, 요즘은 역사상 최고의 선수 가끔씩 10걸에도 랭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