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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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문재인 정부'''
''재신설''[11]

''' 초대
장하성 '''

2대
김수현


''' 제13대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장하성
張夏成 | Jang Ha-Seong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본관'''
인동 장씨[1]
'''출생'''
1953년 9월 19일 (71세)
전라남도 광주시
(현 광주광역시)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 / 학사)
뉴욕주립대학교 (경제학 / 석사)
펜실베니아 대학교 (경영학 / 박사)
'''병역'''
면제(요추궁결손 후유증)
'''가족'''
3남 2녀 중 장남(둘째)
부인, 슬하 2남
장하진 (누나), 장하준/장하석 (사촌)
'''현직'''
주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약력'''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장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한국재무학회장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정책네트워크 내일 소장
한국금융학회장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1. 개요
2. 집안 내력
3. 생애
3.1. 장하성 펀드
3.2. 청와대 정책실장
3.2.1. 관련 문서
3.3. 정책실장 퇴임 이후
4. 논란
5. 여담
6. 저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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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무직공무원, 전 대학교수.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출신으로, 2017년 5월 21일부터 2018년 11월 9일까지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역임했다.
주요 활동분야는 대기업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즉 소수 재벌가의 경영권 독점 해소다. 지난 1997년 삼성 주주총회에서 주목을 받았고, 같은 대학교의 이필상 교수와 함께 대표적인 재벌기업 비판론자로 유명하다. 소액주주 운동으로 인해 본인의 재산 대부분이 대기업 주식이 되었다.[2]

2. 집안 내력


[image]
그의 증조부 장진섭(張鎭燮)은 인동 장씨 함평파로 구한말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도 일대 염전과 논밭을 가진 만석꾼 부호였다. 1915년쯤 육지로 나와 광주에 자리를 잡았고,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자식들을 외지로 유학 보냈다. 그의 조부 장병상(張柄祥)은 장진섭의 둘째 아들로 서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국내에서 철도공무원을 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형과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다 수차례 일본 경찰에 끌려다녀야 했다.해방 후에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다가 테러를 당해 후유증으로 일찍 죽고 말았다.
장하성 교수의 아버지 장충식(張忠植)은 장병상의 둘째 아들로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다니다가 전남 도의원, 후지필름 사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장충식은 서울대 공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국군으로 참전하여 인민군과 싸웠다고 한다. 아버지 장병상이 "전쟁 났으니 나가 싸워라"하고 자식들에게 엄명을 내렸다고... 결국 압록강 전투에서 중공군 기관총에 어깨 관통상을 입어 상이용사가 되었다고 한다.
장하성의 나이 여덟 살 때에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그때 장하성의 아버지 장충식과 어머니 민난식(閔蘭植)[3]은 데모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고 한다.[4]
할아버지 장병상(1899 ~ 1958)의 형제들 (장하성의 작은할아버지/큰할아버지들)은 다음과 같다.
  • 장진섭의 장남 장병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법과를 중퇴하였다.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 측근으로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었다.
  • 3남 장홍재는 광주서중 재학시절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해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막내 장홍염 씨는 서울 휘문학교와 중국 베이징국민대학을 다녔다.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독립군에 몸담았다.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 검사와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들이 장씨 집안의 1세대다. 해방 되어 국내에 들어온 백범이 광주 계림동에 있던 장병상의 집에 들러 찍은 사진을 보면, 장병준, 장병상, 장홍염과 그의 아들들이 백범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 장충식의 형제들 (장하성의 숙부들)은 다음과 같다.
  • 장정식(張定植) (1926 ~ 2008, 큰아버지): 전남대 의대 교수를 역임했다.[5]
  • 장영식(張榮植) (1932년생, 장병상의 3남):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장면 정부에서 경제비서관을 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때 두 번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한국전력 사장과 뉴욕대 교수를 역임했다.
  • 장재식 (1935년생, 장병상의 4남):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국세청 차장과 주택은행장을 지냈으며, 그 후 김대중에 의해 발탁되어 새정치국민회의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 역임했다.
장하성의 형제들은 다음과 같다.
  • 장하진 (1951년생): 충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거쳐 여성가족부장관이 된다. 남편은 김홍명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 장하용(張夏容) (1955년생): 일본어학원 서울지사장이다.
  • 장하경(張夏慶) (1957년생): 광주대학교 가정학과 교수다. 남편 김대원은 조선대학교 회화과 교수다.
  • 장하원(張夏元) (1959년생):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이다.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하나금융 경영연구소장, 열린우리당 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다.
사촌 장하준은 10살, 장하준의 친동생인 장하석은 14살 어리다.

3. 생애


1953년 9월 19일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에서 아버지 장충식과 어머니 여흥 민씨 민난식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3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978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뉴욕주립대 올버니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6년~1990년에는 미국 휴스턴대학교 재무학과 교수로 일했고, 1990년 귀국하여 모교인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면서 소액주주운동과 장하성 펀드 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한국증권학회 이사, 고려대 경영대학장 겸 경영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18대 대선에서 안철수를 지지하며 정책네트워크 내일 소장으로 활동했다. 정책 전반을 관리하는 등 안철수의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 대선이 끝난 후,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제안했으나 정치를 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강남좌파의 대표적 예시로 꼽힌다. 상술했지만 명문가 태생으로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로 밝혀진 재산이 104억으로 문재인 행정부 1등이다.[6]

3.1. 장하성 펀드


장하성이 가장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장하성 펀드탓이었다. 2000년 중후반 대한민국을 강타한 펀드중에 하나였다.
애초 소액주주의 권리 보호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유명한 학자였다. 자신의 신념을 따라 대기업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인물이었는데 행동으로 그러한 신념을 옮긴 결과물이 장하성 펀드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태광그룹 계열의 태광산업에 소액주주로서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합의에 이르는 등의 성과[7]도 일부 있었으나 태광 측 돌변으로 주주대표 소송에 착수하는 충돌이 이어졌다. 장하성 펀드의 사례로 태광그룹을 택한 것은 나름의 선견지명이었던 것이 '''"재벌 총수의 황제 보석 사건"'''과 '''"태광산업 방폐물 불법 보관 사건"''', '''"총수 일가 김치 강매 사건"''' 등 근래에도 문제적 대기업으로 눈총을 받았다.
물론 장하성 펀드가 유야무야된 현재는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만 당시의 반응은 이랬다. "청렴결백한 학자가 대한민국의 뿌리부터 썩은 기업구조를 뜯어고치기 위해 나섰다."라고.. 다만 펀드를 운영하기 위해 운용사로 선정된 곳이 미국의 '''헤지펀드'''인 라자드였다. 사실 국내의 펀드운용사들에서 이러한 대기업들을 적으로 돌리는 말도 안되는 펀드를 하자는 제안을 넣어봤자 안 할 것이 뻔하여 헤지펀드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였고 이는 매우 타당한 설명이었다. 다만 헤지펀드라는 것의 목적이 돈만 벌면 발을 빼는 게 일반적인 관행인 가운데 장하성 본인은 라자드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 투자할 것이라면서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지만, 10년 갓 지난 지금 라자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당시 이름은 라자드 한국기업 지배구조 개선 펀드였지만 속칭 '장하성 펀드'라고 하면 잘 알려졌었다.
여하튼 그 당시에 장하성은 장하성 펀드의 펀드 기금의 운용고문을 가장한 실질적인 펀드매니저로 활동했고, 언론과의 대화도 꺼리낌 없었다. 저평가된 기업을 찾아내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작업을 통해 착실히 수익률을 올리겠다는 이상적인 펀드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장하성 펀드가 샀다하는 소문이 나면 일제히 주식가격이 폭등했다. 덕택에 장하성 펀드에 투자한 사람 중에는 정말 순수한 신념을 따라 '소액주주의 권리 보호 및 지배구조 개선에 나도 한몫 하겠다는 마음'으로 투자한 투자자들도 미쳐 날뛰어 수익률에 눈이 먼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경쟁적으로 펀드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펀드의 덩치는 불어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장하성이라는 이름의 약빨이 줄어들면서 수익률이 낮아지고 유야무야 펀드 가입기간이 만료된 사람들이 나가고 지배구조 개선이 불가능한[8] 종목에 투자하는 등 기대했던 방향과 매우 다르게 나아갔다.
라자드에서는 사실상 펀드매니저를 장하성으로 인정해놓고 장하성 펀드가 도덕성 논란에 휩싸이자 '그의 조언을 받았지만 투자종목을 정하는 것은 펀드 운용 매니저들의 전적인 권한'이라고 하였고 장하성 역시 '펀드에 편입된 모든 종목을 내가 동의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펀드의 운용자체 어드바이저인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로 발을 뺐다.
결국 이후 말한 대로 장하성 펀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현재 라자드는 대한민국에 투자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사실, 이는 본질적으로 칼 아이칸이나 앨리엇 매니지먼트 같은 행동주의 펀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들은 주로 지배구조가 약한 기업의 지분을 일정 수준 이상 매입한 뒤, 주주 이익 확대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배당을 높이거나 주가를 부양하라는 등의 요구를 하는 등 약탈적 투자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게 주 목적인 펀드다. 기업 본연의 성장인 매출과 순이익 증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분명히, 한국의 재벌 중심 구조는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오너들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기업의 위상을 이용해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게 문제일 뿐, 순환출자든 지주회사든 이사회와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하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다만, 자신들이 경영하는 그룹에 대한 오너들의 지분이 미미하지만 이들을 대체해서 기업 경영의 주도권을 쥘 만한 국내자본이 미약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들에게 준법 경영 등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차등의결권을 부여하는 식의 딜이 필요한데, 이걸 시도하는 정치세력들은 반대파들에게 '재벌과 결탁한다.'라는 공격을 당하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고 있다. 결국, 정치권의 역량이 문제의 근원이자 답인 셈.

3.2. 청와대 정책실장


2017년 5월 21일, 문재인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으로 임명된 공직으로, 안철수 측의 인물을 끌어안음으로 통합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분석도 있다. 청와대 측은 인선 배경으로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유능한 경제학자"라며 "해박한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력 집중 완화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운동을 해 온 경험과 경륜 높이 평가"했다. 정책실장은 경제부총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고용노동부장관, 금융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국토교통부장관이 갖지 못하는 경제정책 간언권과 경제계 인사권을 가져 같은 장관급이라도 권한이 크다. 즉 대통령의 지근에 위치하는, 경제, 노동, 사회 부문의 실세라고 할 수 있다.
인선 발표 당시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는 깊은 인연이 없었다며, 세 차례 전화 통화 끝에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특히, 정부 출범 이후의 인사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고,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와 대통령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소회를 밝혔다.
2017년 5월 25일, 원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옆자리가 부담스러워 자리를 옮기려다 실패했다. 대체적으로 청와대에선 대부분 대통령 옆자리는 부담스러워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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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일 한미정상회담에 관하여 청와대에서 자세한 논의과정을 공개하였는데, 장하성 실장이 회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양측에서 FTA에 관하여 구체적 수치를 언급하며 격렬한 설전을 벌이면서 분위기가 경색되자, 장 실장이 직접 영어를 사용하며 설명을 했고, 이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장 실장은 와튼 스쿨을 나온 동문이라며 아주 현명하신 분이라고 농담을 던지면서 분위기가 풀렸다는 것. 1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도 장하성과 김현종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자신의 누나인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장관도 문재인 정부에서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청와대 경제팀 인사들 중에서 가장 파워가 센 사람으로 꼽힌다. 한국경제신문이 경제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큰 인사에 대해 질문했더니 전문가 140명 중 62명이 장하성 실장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응답했다. 2위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으로, 24명이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응답했다. 그에 비해 장 실장의 직무수행 평가는 경제팀 10명 중 5위에 불과했다. #
시중에서는 2018년 7월, 8월 취업자 수 증가폭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5000명, 3000명에 불과[9]하는 등 월평균 취업자수가 예년 대비 1/100 이하인 참사 수준으로 악화된 경제 상황에 대해서 김영주 고용노동부장관과 더불어 경제 상황에 책임이 가장 큰 사람으로 지적하고 있다.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장하성 정책실장과 김영주 장관의 경질을 요구했다. 실제로 무분별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들의 경영난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10]
2018년 11월 9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은 김수현 사회수석이 맡게 되었다.

3.2.1. 관련 문서



3.3. 정책실장 퇴임 이후


2019년 2월 26일 고려대학교 LG-포스코 경영관에서 정년 퇴임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저는 이상주의자"고 고백했다. 사실상 자신이 주도한 소득주도 성장론이 이상주의적인 정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앞으로 현실 정치와 선을 긋고 살겠다며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3.4. 주중대사


2019년 3월 1일 주중대사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존 주중대사였던 노영민은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어서 공석인 상태이다. 외교 전문가가 아닌 경영학자 출신이 주중대사로 유력한 것을 두고 북한,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해당 인사를 둘러싸고 중국 관련 전문성 및 청와대의 인사 돌려막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19년 3월 29일, 주중대사에 정식으로 임명됐다.
2020년 1월 신종 코로나가 중국에서 발생하자 주중대사로 현지를 총지휘해야 할 책임이 있으나 어떠한 공식적인 일정이나 입장 표명이 없어 부실 대응으로 중국 교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2020년 2월 16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관련 "중국의 어려움은 한국의 어려움"이라고 인민일보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보냈다. 반면 2월말, 우리나라에 예상외로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중국이 한국인의 입국을 제한한 것에 대해 2월27일 현재 이렇다할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물론 청와대의 의중이 반영되어 아무 언급도 못했을 수도 있으나 외교부 장관인 강경화 장관이 2020년 2월26일 밤 중국의 왕이외교부장에게 유감을 표시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
4월 20일에 장하성 대사는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우한(!)에서 한중교류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7월 27일에 장하성 대사는 중국이 유학생과 취업자, 유효한 거류증이 있는 교민 등 3개 그룹에 8월부터 비자를 발급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4. 논란




5. 여담


  • 2018년 6월 16일 아침에 장하성 정책실장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경향신문 기사가 올라왔는데 청와대가 이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청와대는 이를 장하성이 짤리기를 바라는 모든 기자들의 총공격이라고 생각했는지 JTBC 뉴스룸,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에 장하성 실장이 출연하며 언론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 김성식 전 의원과 친분이 있다. 그래서 20대 총선을 앞두고 김성식을 유세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김성식과 같은 바른미래당이었던 채이배 당시 의원은 장하성이 아끼던 제자로 자신 대신에 비례대표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6. 저서


  • <한국 자본주의: 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헤이북스, 2014년 9월 25일
  • 공저, <생각 수업: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알키, 2015년 6월 25일
  • <왜 분노해야 하는가: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 헤이북스, 2015년 12월 5일

7. 둘러보기




[1] 상장군 금용(金用)계 함평파 25세 하(夏) 항렬. 인동 장씨 30세.#[2] 총재산이 100억에 가깝고 이 중 절반은 대기업 주식이다. 문재인 내각에서 가장 자산이 많다.[3] 전라남도지사를 지낸 민영남의 딸이다.[4] 그 때문인지 그의 어머니 민난식은 지금 4·19묘지에 묻혀 있다.[5] 기존 편집본에 경성의전(서울의대의 전신 중 하나)을 나왔다는 서술이 있으나 오류이다. 서울대의 전신 학교 졸업생까지 모두 확인 가능한 서울대인명록에 이름 없음을 확인함.[6] 2등은 윤석열 검사로 64억 7195만 원. 3등은 조국 민정수석의 43억 8981만. 하지만, 본인은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돈 자랑하고 집안 자랑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집안 얘기 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7] 태광그룹, 장하성펀드와 지배구조 개선에 합의[8] 이미 대주주가 50%넘는 지분을 장악하고 있어서 뭔 짓거리를 해도 불가능한...[9] 이마저도 통계청에서 2500명을 반올림하여 3000명으로 발표했다. #[10] 물론 요식업종 폐업률은 정권과 관계없이 매년 90%에 육박한다는 통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