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역사
1. 삼국시대-후삼국시대
전주의 옛 이름인 '''온고을'''이란 단어는 먼저 마한시대 호남지방의 규모가 큰 읍인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온'은 일백(一白)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언어의 의미 확대가 일어나면서 '완전하다, 완벽하다'는 뜻이 된다. 원(圓) 역시 온의 음차였으며 후에 백제는 원산성을 '완산(完山)'이라고 불렀다. 완산이란 지명은 현재 전주시 하위 행정구역인 완산구와, 옛 전주군에서 시가지를 제외하고 군으로 분리된 완주군의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1]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부가 지배하다 나당전쟁 과정에서 신라 땅이 되었고 9주 5소경 중 전주(또는 완산주)의 주치(州治)가 이곳에 두어진다. 현대의 전북도청 소재지 기능은 이미 신라 때 완성된 것. 통일신라 756년(경덕왕 15)에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완(完)을 의역해 현재의 이름인 '전주(全州)'라고 고치게 된다.
이후 신라가 서서히 국가 막장 테크를 타자 900년(효공왕 4)에 신라의 장수였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36년간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옛 신라의 완산주 관청이 있던 현재의 시내 지역을 벗어나 새로 전주성을 쌓았는데, 이 전주성은 동고산(승암산, 치명자산)을 왕궁으로 삼아 북서쪽으로 뻗어나간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 규모는 현재의 오목대 길 건너편으로 해서 전주고 부근까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다만 고려왕조가 철저히 파괴해서 그런지 후백제 도성의 흔적이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2. 고려
- 983년: 전주목 설치
- 1005년: 전주에 절도사를 둠
- 1018년: 안남도호부 재설치
- 1022년: 전주목 설치
- 1182년: 관노비와 군인이 합세해서 폭동을 일으킴
- 1355년: 원의 사신을 잡아 가둔 죄로 부곡으로 강등
- 1366년: 전주목으로 환원
- 1388년: 전주부성 축성
3. 조선
- 1392년: 완산유수부 설치
- 1403년: 전주부로 개칭
- 1895년: 23부제 실시로 전주부 전주군으로 개편
- 1896년: 13도제 실시로 새로 설치된 전라북도의 도청을 전주에 둠
태종시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고려시기에 관할하던 속현과 향, 소, 부곡들이 전주에 모조리 통합됐는데, 이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대규모의 비입지를 관할하고 있었다. 1906년 행정구역 정리가 있기 전까지 전주가 비입지로써 관할하고 있던 지역은 다음과 같다.
- 옛 양량소: 현재 논산시 양촌면 일부
- 옛 옥야현: 현재 익산시 동 지역 대부분과 오산면 일부
- 옛 이성현[7] 및 관하의 몇몇 향, 소: 현재 김제시 공덕면, 청하면 일대
- 옛 이성현[8] : 현재의 완주군 이서면 및 전주시 동산동, 조촌동, 효자4동의 이서면과의 접경지 부분
- 옛 우주현: 현재의 완주군 삼례읍, 봉동읍, 익산시 왕궁면의 각 일부분. 이 중 왕궁면 부분인 우북면 지역은 조선시대 익산군과 고산군의 경계에 끼어들어가 두입지[9] 를 형성하고 있었다.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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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현 전주시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 1914년 : 전주군과 고산군을 통합하여 전주군으로 개편
- 하위 면 : 전주면, 이동면, 이서면, 우림면, 난전면, 구이면, 상관면, 소양면, 용진면, 초포면, 조촌면, 삼례면, 봉동면, 고산면, 삼기면, 비봉면, 운선면, 화산면, 동상면, 운동하면
- 1930년 : 이동면 9개 리(노송리, 인후리, 중산리, 화산리 등)를 전주면에 편입
- 1931년 : 전주면을 전주읍으로 승격
- 1935년 :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전주군의 잔여지역을 완주군으로 개칭. 우림면·난전면을 우전면으로, 삼기면을 고산면·화산면에, 운선면·운동하면을 화산면·운주면에 합면. 우림면 청도리를 김제군 금산면에 편입[10]
- 1940년 : 완주군 이동면(홍산리는 우전면으로 이관), 조촌면 일부를 전주부에 편입
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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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 당시 전주부와 완주군의 행정구역 상황.
- 1949년 : 전주부를 전주시로 개칭
1957년 전주시 확장 당시 행정구역 상황.
- 1957년 : 완주군 초포면(하리는 삼례면에, 상운리는 용진면으로 이관), 우전면(중인리, 용복리, 석구리, 원당리는 구이면으로 이관) 및 조촌면·용진면 일부를 전주시에 편입[11][12]
- 1983년 :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색장리, (1973년에 일부가 편입되었던) 용진면 산정리를 전주시에 편입
1987년 완주군 조촌읍 편입 당시 행정구역 상황.
- 1987년 : 완주군 조촌읍을 전주시에 편입
- 1988년 : 전주시에 완산출장소와 덕진출장소가 설치됨
- 1989년 :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 금상리와 구이면[13] 중인리, 용복리[14] , 석구리, 원당리를 전주시에 편입, 완산출장소와 덕진출장소가 각각 완산구, 덕진구로 승격
- 1990년 :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 중리를 전주시에 편입
- 1994년 : 김제군 백구면 강흥리, 도덕리, 도도리, 남정리를 전주시에 편입
- 1995년 : 완산구에 효자출장소 설치
- 1998년 : 효자출장소 폐지#
[1] 하지만 온고을이란 말 자체가 현대에 들어서 복원해본 옛 이름이라는 것이지 삼국시대에도 온고을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온~어쩌구 이런 식의 발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다.[2] 이 시기 한옥마을, 풍남문 등이 있는 현재의 시내 지역은 전주천이 흐르는 습지대였다는 주장도 있다.[3] 이 때 전주를 피해 가자고 주장한 신하의 논리는 '전주는 태조께서 싫어하셨던 곳이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였다. 훈요 10조가 위작되었다는 설과 별개로 왕건은 전북 지역(후백제 중심지역)을 싫어했다는 증거이다.[4] 태조 이성계는 고려 장수시절에도 스스로 자신은 고려인이자 전주사람이라고 자처했다. 물론 이는 이성계의 태생적 고향인 함길도가 당시엔 반쯤 오랑캐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5] 엄밀히 말하면, 전주는 전라감영 소재지라 전라도관찰사가 전주부윤도 겸임했다.[6]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온 것까지 세면 한성, 평양, 경주부 세 개가 더 있어 전체 순서로는 네 번째가 된다.[7] 利城縣,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본래 발음은 리성현이나 두음법칙에 의해서 이성현이 된 거다.[8] 伊城縣,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위의 이성현과는 다르게 두음법칙과 상관 없이 본래 발음이 이성현이다.[9] 견아상입지라고도 하는, 타 군현과의 경계에서 비정상적으로 깊게 돌출된 부분.[10] 위의 지도에서, 금산면 시가지(원평) 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곳.[11] 이 시기에 편입된 리들은 특이하게 외곽 지역이면서도 법정리들을 묶어 XX동n가 방식으로 되어있다. 원래 리마다 이름이 따로 있었으나 여러 리들을 한 이름으로 통일한 다음 숫자를 붙였다.[12] 위에 말한 것도 그렇고, 시기 상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으로 보인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대구시, 광주시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다만 위에서 말한 대구와 광주의 사례의 경우 이때 편입된 지역 중 일부가 나중에 인근 군으로 환원되다.[13] 해당 지역들은 1957년 대부분 전주시에 편입된 우전면의 잔여 지역이다.[14] 위의 지도에서 보이듯 이서면 이성리와 살짝 이어져 있었는데, 여기가 전주시로 넘어가면서 이서면은 완주군의 다른 지역과 완전히 분리된 월경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