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덕판 스트리트 파이터 2

 

1. 개요
2. 상세
2.1. 한계와 쇠퇴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1992년 처음 등장하여 PC통신을 기반으로 배포된 스트리트 파이터 2IBM PC(MS-DOS) 이식작. 정식으로 이식된 버전은 아니며 일종의 오픈 소스 동인 게임이다. '정영덕판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타이틀은 실제 사용된 타이틀이 아니라 본 문서에서 최초 개발자의 이름을 따서 편의상 호칭하는 이름이다.

2. 상세


최초 개발자는 하이텔의 '''정영덕'''(wd40@hitel.net)이라는 유저였다. 하이텔 개오동[1]에 본 게임의 소스가 처음 업로드된 시점은 하이텔이 폐쇄된 현 시점에 직접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증언에 따르면 대략 1992년 6~7월경이었다고 하는데, 슈퍼 패미컴 버전의 발매가 92년 6월 10일이었으므로 상당히 발빠르게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핵심 엔진부의 개발은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튜버 호감게임TV의 리뷰.
프로그램은 개발자 정영덕이 C언어로 완전히 자작한 것이고 그래픽 소스는 슈퍼 패미컴 버전의 그래픽을 비디오 블래스터[2]를 이용하여 캡처하고 편집해서 만든 것으로, 지금 보면 캡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화질, 색상 열화가 크게 눈에 띈다. 위의 동영상이 바로 그 비디오 블래스터로 캡처해서 만든 초기 버전. 이러한 리버스 엔지니어링에 가까웠던 고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에는 에뮬레이터 같은 것이 없었고 그에 따라 덤프된 롬 이미지도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3] 아케이드나 슈퍼 패미컴의 그래픽 데이터를 당시 일반 유저가 PC로 옮길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식 라이선스 버전인 U.S. GOLD 버전을 만들었던 리처드 알핀(Richard Alpin)도 '''직접''' 롬 리더를 제작해서 스트리트 파이터 2 CPS1 기판에서 그래픽 데이터를 추출해내는 고행을 했던 시절이었다.
최초에 공개된 버전은 만을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이었다. 소스까지 공개했었기 때문에 개오동, 게제동(GMA) 등을 중심으로 여러 개발자들이 뛰어들어 다양한 개선/변형판을 만들게 되었다. 최초 개발자인 정영덕 역시 꾸준히 업데이트를 한 끝에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레귤러 8인 전원, 최종적으로는 대시의 12인을 전부 추가하여 외견상이나마 제법 원조와 흡사한 모습을 갖췄다. 국내 개발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모든 메시지가 한글로 출력되는 점도 당시 유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오픈 소스였기 때문에 VGA 외에도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를 지원하여 SIMCGA 같은 것 없이 네이티브로 돌아가게 개량되기도 하였다. 본작이 나왔던 1992년경에는 이미 시장의 큰 추세는 VGA로 옮겨가고 있었지만 아직 1989~90년경에 대량 보급된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를 장착한 PC XT/AT 호환기가 제법 시장에 잔존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버전도 나왔던 것.

1994년 무렵부터는 그래픽마저 비디오 블래스터로 캡처한 열악한 화면에서 비교적 아케이드판에 가깝게 개선된 버전도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괴작으로 유명한 U.S GOLD의 스트리트 파이터 2 PC판이 큰 역할을 했다. U.S GOLD 버전은 당시에 그래픽만 빼면 엉망진창인 게임성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라이선스판이었고 아케이드판의 그래픽 데이터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는데[4] 이 그래픽 데이터를 뜯어다가 정영덕판에 적용을 했더니 U.S GOLD판 보다는 훨씬 나은 물건이 나와버렸다(...). 그래서 올드 게이머들은 이 U.S GOLD판의 가장 큰 의의는 정영덕판에 그래픽 데이터를 제공한 것(...)이라는 회고를 하기도. 다만 U.S.GOLD판은 무인판 스트리트 파이터 2였기 때문에 나중에 정영덕판이 스트리트 파이터 2 대쉬, 스트리트 파이터 2 대쉬 터보 기반으로 버전업을 했을 때도 캐릭터의 포트레이트나 스프라이트는 별 수 없이 무인판의 것이어서 류와 가일은 여전히 V라인 턱을 자랑하고 있었고(...) 바이슨은 빠진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는 등 대시에서 멋지게 변모한 포트레이트가 적용되지 못한 게 아쉬운 점. 대시에서 추가된 모션을 사용하는 바이슨의 헤드버트(잡기) 같은 기술은 U.S.GOLD판에 아예 모션 자체가 없기 때문에 보디블로(중K 모션) 연타로 대체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땜빵이 된 부분도 있다.

1995년 무렵의 후기 버전에 이르면 U.S GOLD의 그래픽 데이터와 일부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데이터까지 뜯어와 사용한 버전도 나왔다. 여전히 스프라이트 데이터는 U.S GOLD판 기반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U.S GOLD판에 없는 슈퍼 스파 2의 추가 캐릭터는 넣을 수 없어서 캐미 화이트페이롱 같은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출신의 캐릭터들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짜 슈퍼 스파 2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기분은 낼 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꽤 호평이었다. 일부 배경이 슈퍼 스파 2의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어디서 뜯어왔는지 류의 작열파동권이나 바이슨의 대시 그라운드 스트레이트(!) 같은 모션도 이식되어 있는 버전도 있었다. 강룡 같은 해적판들의 영향을 받아 온갖 해괴한 기술들을 사용하도록 개조된 버전들도 나왔는데 위의 동영상도 그런 버전 중 하나.

2.1. 한계와 쇠퇴


우선 캡콤의 라이선스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업 게임을 컨버팅한 것이므로 엄밀히 따지면 '''해적판'''이다. 근본적으로는 CONY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이미테이션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상업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트리트 파이터 2에 대한 팬심과 개발자로서의 학구열이 낳은 결과물이라 상업성을 추구한 CONY 스트리트 파이터 2와 약간 경우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위법한 부분은 있다. 이 덕분에 혐한들이 유튜브나 니코동 같은 곳에서 이 게임의 동영상을 올려놓고 역시 한국은 파쿠리의 나라라면서 신나게 까댄다(...)
퀄리티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마추어 개발의 한계로 인해 비슷한 것은 외견 뿐이고 실제 게임 감각은 비슷하지도 않을 정도로 아케이드와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이 부분은 당시의 여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컸다. 아마추어 개발자 입장에서 원본 스트리트 파이터 2의 프레임 데이터나 판정박스 같이 밸런스와 게임 감각에 영향을 주는 내부 데이터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당시에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모션이나 판정 같은 것은 눈대중으로 대강 비슷하게 때려 맞출 수 밖에 없었다. 대전 액션 게임을 만들어본 노하우도 딱히 없었던[5] 아마추어 개발자들이 데이터도 없이 눈대중만으로 아케이드의 감각을 재현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플레이를 해보면 그다지 좋은 이식작이라는 평가를 할 수 없으며, 냉정하게 말하면 대전 액션 게임으로서는 '''쿠소게'''에 가까운 게임성을 지니고 있지만 당시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2(와 비슷한 무언가)를 집에서 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감지덕지했던 환경이었다는 점과 최초 개발자의 오픈된 마인드와 더불어 유저들의 노가다와 협업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이 게임의 소스를 보고 개발에 참여하면서 게임 개발의 노하우를 익힌 초창기 개발자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U.S GOLD판보다는 100만 배쯤 나은 물건'''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하드웨어 성능도 당시의 AT~386급 PC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지만[6] 이 점은 슈퍼 패미컴 버전처럼 개발자의 역량에 따라 센스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전술한 개발 여건 문제에 비해 큰 걸림돌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영덕판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초창기 한국 게임 개발사에서 여러가지로 큰 의의를 가진 작품이고 나름대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아케이드판이나 슈퍼 패미컴판 스트리트 파이터 2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거나 할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악한 완성도로 인해 그저 'PC로도 스파2가 나왔구나' 하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것[7]이 가장 큰 이유였고 이 게임이 정식 유통망을 거쳐 나온 게 아니라 PC 통신을 통해 전파되는 동인게임의 형태였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PC 통신은 오늘날의 인터넷과 달리 보편적인 IT 문화라기보다는 좀 하드코어한 PC 매니아들이 접하는 문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PC로도 삼국지 무장쟁패 시리즈 같은 완성도를 갖춘 격투게임을 비롯하여 다양한 재미를 갖춘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기에 마개조에 맛들린 일부 유저들을 제외한 일반 플레이어들에게 정영덕판 스파2의 인기가 계속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한편으로 아케이드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타이틀 자체가 한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1993~4년경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타고 있던 것도 쇠퇴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강룡을 필두로 한 온갖 개조판 스파2의 난립으로 한국 유저들은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타이틀에 식상해하고 있었으며 그 대안으로 아랑전설 스페셜, 용호의 권 2, 진 사무라이 스피리츠 같은 SNK의 작품들로 대세가 이동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3 on 3를 내세운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4'''의 등장으로 스파2는 한순간에 오락실에서 '낡은 게임'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세가버추어 파이터남코철권이 3D 그래픽스라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대전 액션 게임 팬들을 사로잡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그 덕분에 일본에서는 롱런한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X는 한국에서는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8] 1995년에 GameTek에서 MS-DOS로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X를 이식했지만 제법 준수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고 쌍용에서 정발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시장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원인에는 높은 요구 사양도 있었지만 국내의 스파 붐 쇠퇴라는 원인이 더 컸다. 오락실에서 원조가 내리막길을 타면서 정영덕판 역시 인기의 동력을 많이 상실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치명타를 꽂은 것은 에뮬레이터였다. 윈도우 환경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1998년 무렵에 이르러선 아예 CPS1 에뮬레이터인 'Callus'라는 걸출한 물건을 사용하여 '''아케이드 기판 그 자체'''를 가상화하여 PC로 돌려버리는 시대가 와버린 것이다. 이쯤 되어서는 PC로 굳이 정영덕판 스트리트 파이터2를 해야 할 이유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2.2. 마개조


처음부터 오픈 소스로 소스 코드를 비롯, 모든 리소스가 PC 통신 상에 공개되었고 나중에는 손쉽게 모딩을 할 수 있는 개조 툴 같은 것 까지 나와 쉽게 게임 내용에 손을 댈 수 있었기 때문에 마개조 버전이 꽤나 나왔다. 그 덕에 날이 갈 수록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M.U.G.E.N.으로 변해가던(?) 기괴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었다. 어떻게 보면 M.U.G.E.N.의 조상뻘일지도.
처음에는 아랑전설 시리즈용호의 권 시리즈, 혹은 대만 게임인 쾌타지존 등의 다른 작품에서 가져온 캐릭터를 넣어 스트리트 파이터의 캐릭터들과 대결을 펼칠 수 있는 모딩이 중심이었다. 그 덕에 당시에 꼬꼬마들 사이에서 '스트리트 파이터랑 용호의 권이 합쳐진 게임이 나왔대!'라는 소문이 돌게 한 원흉(...)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유명했던 것은 쾌타지존의 캐릭터를 뜯어와서 이 게임의 엔진으로 이식해놓은 '스트리트 카운트 2+'(일명 쾌타지존2+). 패왕상후권을 사용하는 Mr.HAN이 나오는 버전을 해봤다면 그게 이 버전이다. BGM으로 이스 2드래곤 퀘스트 II, 그라디우스 II, 몽환전사 바리스, 실피드, 라이덴 2, 닌자 워리어즈 등의 온갖 당대 유명 게임들의 BGM이 나오는 것[9]이 과연 해적판스럽다.
나중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짝퉁 게임들이 이 엔진을 통해 이식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전개를 보여주었다. 특히 어떤 버전은 랜덤 파이터(?)라고 모든 셀렉트칸이 랜덤 셀랙트로 되어있는 버전이 있었다. 이 버전에서는 뜬금없이 캐릭터 선택창의 포트레이트가 울펜슈타인 3DB.J. 블라즈코윅즈얼굴(정확히는 거기에 검은색 바로 눈을 가린것)로 도배되어있었다(...)

3. 기타


이 게임을 만들었던 제작자 정영덕 씨는 훗날 책도 내게 된다. 원래도 개오동, 게제동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이고,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노하우를 모아 책까지 집필하게 된 모양. 제목이 "(SF-2 제작자와 함께하는) 게임 만들기"# 인데, 이 때문에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영덕이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만들었다'고 혼동하는 일도 실제로 있었던 모양. 어디까지나 정영덕 씨는 '동인 버전의 '''최초''' 제작자'이며 오픈 소스였기 때문에 한 사람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의 협업으로 완성된 것이다.

4. 관련 문서



[1] '''개'''털 '''오'''락 '''동'''호회. 하이텔에 존재했던 게임 동호회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개털은 하이텔의 전신인 케텔(KETEL)의 애칭(?)이었다.[2] 사운드 블래스터 시리즈로 유명한 크리에이티브 랩스가 제작한 영상 편집용 캡처보드. 외부 비디오 신호를 입력받아 PC로 저장할 수 있는 장비였다.[3] 물론 이런 게 있었으면 처음부터 정영덕 버전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UFO라는 신박한 물건이 나와서 슈퍼 패미컴 롬 덤프 자체는 가능해졌다.[4] 전술했듯이 캡콤이 데이터를 제공한 것은 아니고, 개발자가 직접 롬 리더를 제작해서 기판에서 덤프하는 고행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였다. 다만 해상도가 384*224로 320*200의 256색 VGA 모드보다 고해상도인 CPS1의 데이터를 편집 없이 그대로 VGA 화면 위에 얹어놔서 캐릭터가 아케이드판보다 큰 흠이 있었는데, 이 특징은 나중에 GameTek이 만든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X MS-DOS 버전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5] '노하우'라는 것은 프로그래밍 개발 능력 같은 것과는 별개로 중요한 부분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만들었던 니시타니 아키라딤프스스트리트 파이터 4에서 2D 판정 박스를 사용해서 3D 화면으로 2D 게임의 감각을 재현해내는 노하우를 보고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딤프스 입장에서는 더 럼블피쉬 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축적을 통해서 구축한 노하우였다.[6] 아케이드판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한 GameTek 버전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X의 경우 원활하게 플레이하려면 i486DX4@100MHz 정도의 스펙은 필요했다.[7] 아미가, 아타리 ST, MS-DOS로 나온 U.S GOLD 버전 스트리트 파이터가 슈퍼 패미컴판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아무리 가장 핫한 아케이드 작품을 이식했다쳐도 완성도가 밑바닥이니 잠깐 반짝 하고 관심을 가져도 실상을 알게 되면 금방 그 관심은 식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8] 따지자면 1993년에 나왔던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부터 일선 매장에 보급률이 확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복제방지가 빡세게 걸려있는 CPS2 기판의 특성상 복제 버전이 나돌지 않아 비싼 정품 기판을 구입해야했던 탓도 있겠지만 업주들 입장에서는 국내에서 스파2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았기에 들여올 생각 자체를 안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인컴만 보장되었다면 정품 CPS2라도 얼마든지 들여놓았을 것이다. 더 비싼 버추어 파이터의 MODEL1 기판도 잘만 들어왔으니.[9] PC 통신상에 돌아다니는 AdLib용 음악파일인 *.ROL, *.IMS 파일을 가져다 써서 그렇다. 아마추어 개발자가 직접 작곡까지 한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긴 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