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가
Amiga
1. 개요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에서 개발한 16비트/32비트 컴퓨터 시리즈이다. 1985년부터 1996년까지 판매되었다.
계보로 보자면 코모도어의 전작인 8비트 컴퓨터 코모도어 64의 직계 후손이며 코모도어 128의 발전형이지만 호환성은 없다. 코모도어 64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업계에서 전설로 남은 기종. 서구권 쪽에는 아직도 매니아층이 존재하는 클래식 컴퓨터라는 점에서는 코모도어 64나 MSX와 비슷한 데가 있다.
아미가(Amig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아미고(Amigo, 친구)라는 뜻의 여성형이다. girl friend는 아니고 female friend, 여자사람친구 라는 뜻이라고.
2. 사양
아미가 500 기준
- CPU: 모토로라 68000 7.16MHz
- 메모리: 코모도어 아미가 칩 램 512KB 66MHz(패스트램을 증설해 9MB까지 확장 가능)
- 보조 프로세서: 코모도어 OCS(Original Chip Set)
- 해상도(NTSC): 320×200, 640×200(순차 주사 방식), 320×400, 640×400(비월 주사 방식)
- 발색 수: 4096색 중 32색(저해상도 모드), 16색(고해상도 모드)
- HAM(Hold-And-Modify) mode: 4096색 동시 발색 모드. 그러나 인접 픽셀의 색상 값이 제한됨. 저해상도 모드에만 가능. 움직이는 영상에 부적합. 주로 시범 영상 모드나 사진 감상 등에 쓰임.
- EHB(Extra Half-Bright) mode: 32색 발색 모드에서 밝기를 조절해(절반으로 낮춤) 64색으로 발색할 수 있는 꼼수가 있었다.
- 애그너스, 데니즈, 폴라로 구성
- 애그너스: 블리터(비트맵 이미지 처리 장치), 코퍼(MOVE-WAIT-SKIP 상태로 동작하는 프로그램 가능한 유한 상태 기계(Finite State Machine) 처리 장치), DMA 콘트롤러, 메모리 콘트롤러 등으로 구성
- 데니즈: 프로그램 가능한 색상 순람(Color Lookup) 기능, 스프라이트 처리(스캔라인 당 4색(그중 하나는 투명) 8개의 16픽셀), I/O 콘트롤러 등으로 구성
- 폴라: 플로피 디스크 콘트롤러, 오디오 콘트롤러, 직렬 포트 콘트롤러 등으로 구성
- 사운드: 8비트 28KHz 스테레오 PCM, 최대 4채널, 64단계 볼륨 조절
- 저장 장치: 3.5인치 단면 플로피 디스크(880KB)
3. 역사
원래 아미가는 '''차세대 게임기'''로 개발하던 물건이었다. 아미가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에서 아타리의 자금 지원을 받아 게임기용으로 그래픽과 사운드를 처리할 전용 칩셋들을 만들고 있었는데 아타리 쇼크가 터지는 바람에 게임기 시장이 곤두박질치자 만들고 있던 하드웨어를 게임기 대신 범용 컴퓨터쪽으로 방향을 돌려 재설계했다. 나중에 코모도어가 아미가 코퍼레이션을 인수하면서 '코모도어 아미가 1000'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리즈의 첫 작은 1985년에 만들어진 아미가 1000으로 1285달러로 발매되었다. 이 컴퓨터가 유명한 건 당대의 모든 16비트 컴퓨터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던 멀티미디어 성능 때문이다. CPU 등의 일반적인 하드웨어 사양은 매킨토시, 아타리 ST 등 당대의 경쟁 상대들과 비슷했지만, [2] 특별히 디자인된 커스텀 칩들이 CPU와 별도로 작동하며 그래픽과 사운드 및 I/O를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미가 1000이 나온 지 2년 후인 1987년 발매된 매킨토시 II의 256색 표현이 가능한 모델 가격이 7000달러가 넘었던 것을 보면, 게임이나 비디오, 모션 그래픽 분야에서 아미가의 가성비는 압도적이었던 것. 심지어 멀티미디어라는 단어가 현재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다. 동시대에 견줄 만한 멀티미디어 성능을 지닌 개인용 컴퓨터라면 일본의 X68000 정도밖에 없을 수준이었는데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2년 늦은 1987년에 나왔다.
1985년 여름 처음 선보인 아미가 1000은 4096색의 팔레트 범위 안에서 스크린 모드에 따라 16, 32, 64, 4096색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픽 성능에 4채널 PCM 스테레오 사운드 지원이라는 당대 최고의 하드웨어 사양에 개인용 컴퓨터로는 최초로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구현했다. 당시 IBM PC 호환기종의 운영 체제는 MS-DOS였고 매킨토시에서도 1987년에 System Software 5 운영 체제에 멀티파인더가 등장해서야 협력형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던 시절에, 아미가는 그 시절부터 이미 진일보한 선점형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를 탑재했던 것이다. 게다가 무려 1985년에 마이크로 커널 개념을 도입하였다.[3] 단순히 동시 발색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 스크롤, 스프라이트, 다중 배경화면, 스테레오 PCM 사운드, 고속으로 그래픽과 사운드 데이터를 처리하는 커스텀 칩, Plug & Play에 해당하는 Autoconfig 기능 등 모든 면에서 아득하게 시대를 초월한 기종. IBM PC는 EGA가 겨우 64색 팔레트 중 16색을 동시 표시하는 게 고작이었고, 대부분의 컴퓨터가 16색, 혹은 256색을 표현하며 1비트의 비프 스피커에 사운드를 출력하던 시절에 실감나는 사운드와 함께 매끄러운 수백 가지 색상의 애니메이션 구현이 가능한 아미가의 성능은 환상적인 수준이었던 셈이다. 덤으로 PC 컴퓨터를 끄기 전에 하드디스크 헤드를 '파킹' 해줘야 했는데 아미가에서는 펌웨어 레벨에서 자동으로 실행되었다.
운영 체제로는 그래픽과 멀티미디어 성능의 장점을 살린 GUI 운영 체제인 'Work bench'를 사용했다.[4] 물론 GUI 운영 체제만 있는건 아니고 CLI 방식이었던 아미가도스(AmigaDOS)도 있었다. 윈도나 macOS와 같이 GUI 운영 체제에 파워 셸이나 터미널을 내장한 형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아미가 500의 그래픽 데모 영상. 1980년대 당시에는 타 기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레벨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물건이었음에도 코모도어의 삽질[5] 때문에 큰 인기는 끌지 못하고 있다가 1987년 코모도어에서 아미가 1000 가격의 거의 절반으로 떨어뜨려 아타리 ST보다 100달러 저렴한 699달러로 아미가 500을 내놓으면서 유럽 시장에서 대박을 터트린다. 미국에서는 애플, IBM 등의 강자에게 밀리고 있었고 미국이나 일본 시장의 영향을 크게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급률이 매우 낮았지만 유럽의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아미가가 거의 평정했다.[6][7] 699달러의 아미가 500의 가격은 가성비로는 따라올 기종이 없었다. 심지어 가성비는 커녕 아미가가 제공하는 다양한 기능들을 다른 컴퓨터에서 누릴 수가 없을 정도로 아미가는 진보해 있었다.[8]
초기 기종인 아미가 1000, 500, 2000은 모토로라 68000을 사용한 16비트 컴퓨터였지만 3000 이후의 후기 기종들은 모토로라의 68020, 68030 계열 CPU를 장착하면서 32비트 컴퓨터로 발전했다.
3.1. 몰락
코모도어는 다른 모토로라 68000 계열 컴퓨터들의 말로가 그렇듯 1990년대부터 기술 진보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 소비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성공적이었던 모토로라 68000 후속 프로세서 모토로라 88000 시리즈의 실패가 컸다. 모토로라 88100은 1988년에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1년 전인 1987년 모토로라 68030에도 있었던 메모리 관리 유닛이 없어 모토로라 88200 칩을 따로 달아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매우 성능이 떨어져 컴퓨터 회사들이 사용하길 꺼렸다. 또한 모토로라 88100 프로세서는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모토로라 68000과 호환성이 없었던 것도 큰 단점이었다. 모토로라는 이를 반영해 원칩으로 만들고 멀티미디어 확장 명령어를 넣고 부동소수점 연산 성능까지 개선한 모토로라 88110도 1991년에 개발했지만, 애플과 NeXT,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까지 포기했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으며 이 시기에 모토로라마저 IBM의 PowerPC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IBM PC 호환기종 진영에서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술들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진보했다.
또한 코모도어의 삽질도 한몫했다. 아미가 500의 영광에 기대다가 부랴부랴 차세대 그래픽 칩셋인 아미가 AGA(Advanced Graphics Architecture)와 그것을 사용한 기종인 아미가 1200, 4000을 1992년에 내놓지만 때는 이미 늦어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IBM PC 호환 기종으로도 내놓기 시작했다. 게다가 단일 기업 대 거대하고 수많은 IBM 호환 기종 기업들간의 경쟁이라는 어려움도 있거니와 미국 시장에서의 부진도 한몫했다.
코모도어는 최후의 수로 1993년 '아미가 CD32'라는 코모도어 64의 C64 게임기처럼 32비트 게임기를 출시하였다. 아미가 CD32에 대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이후 코모도어는 1994년 4월 29일 파산하였고, 코모도어 파산 후 인수한 독일 기업 Escom에서 아미가 컴퓨터를 1년 정도 더 소량 생산했으나, Escom 마저 1996년 7월 15일에 파산하면서 아미가 시리즈는 단종했다.
4. 특징
4.1. 영상 분야
1990년대 당시 그래픽스 쪽에서 두각을 보인 한 축인 매킨토시가 출판(DTP)이나 시각 디자인 쪽에 특화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아미가는 주로 영상 분야에 특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1990년에는 뉴텍의 동영상 편집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인 비디오 토스터(Video Toaster)[9] 가 이 기종으로 나왔고, 요즘은 Autodesk의 Maya나 3ds Max에 밀려 위세가 예전 같지 않지만 한때 3D 그래픽스 툴로 유명했던 뉴텍의 LightWave 3D도 원래는 아미가용 소프트로 출발했다.
영상 분야에서는 표준 장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당시에 KBS나 MBC같은 주요 방송국에서도 영상 편집과 이펙트용으로 아미가를 사용했다.(#) 또한 당시 방송국에서 사용하던 한글 자막을 방송 화면에 추가하는 기능을 지닌 소프트웨어가 아미가용 소프트웨어였으며 위에 언급한 비디오 토스터와 함께 1990년대 후반까지도 사용하였다. 대학 중 방송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학과의 영상 기기 실습실에는 기본적으로 아미가 PC가 놓여져 있었다. 이런 영상 분야에서의 위상 덕에 코모도어 64가 한국에 그다지 알려지지 못한 데 비해 아미가는 당시 한국에서도 마이컴 같은 컴퓨터 잡지에서도 아미가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는 지면을 소량이나마 지속적으로 할애했을 정도였고, 1990년을 전후하여 한국 지사인 코모도어 코리아를 설립하면서 아미가 500, 2000을 한국에 정식으로 발매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아미가 500과 2000은 확장성을 제외하면 모든 사양이 동일하기에 비디오 토스터나 68030 가속 보드 등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2000보다는 500이 나은 선택이었다.
앤디 워홀이 아미가 1000을 작업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4.2. 음악 분야
샘플링 모듈 음악을 뜻하는 '아미가 음악'의 어원이기도 한데, 앞서 말했듯이 아미가의 사운드 성능은 상당히 뛰어나서 당시 음악을 샘플링 모듈 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아미가 컴퓨터밖에 없었다. 아미가는 4개의 8비트 PCM 샘플링 베이스의 스테레오 사운드 채널을 가지고 있어 당시의 PSG나 FM 사운드 칩셋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폭넓은 음색을 들려주었다. IBM PC에서 제대로 PCM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초반에 사운드 블라스터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아미가의 사운드 성능은 당시에는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IBM PC가 발전하면서 이후에 IBM에서도 모듈 음악을 만들 수 있었지만 이 분야의 원조가 아미가인 것도 있고 PC에 아미가에서 사용하던 기술을 이식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불리기는 여전히 아미가 음악이라고 불린다. 이런 아미가 음악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트랙커'(tracker)라고 한다.[10] 당시 아미가 게임들의 음악도 트래커로 작곡해서 동시대의 다른 컴퓨터에 비해 높은 음악 품질을 보여주었다.
아미가 OS로 제작한 트랜스.
트래커로 제작한 음악들.
일본의 아티스트 히라사와 스스무가 아미가를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그가 1980~1990년대에 제작한 뮤직 비디오는 아미가로 제작했다.(2D OR NOT 2D, Grid 등등) 1980년대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무려 2000년대 초까지 사용하였다. 현재는 아미가의 단종과 소프트웨어의 한계로 인해 macOS로 넘어간지 오래.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주요 개발자 중 하나인 마스다 준이치가 작곡에 사용했던 컴퓨터였다. 먼저 아미가로 곡의 데이터를 만들고 게임보이용으로 데이터를 변환하는 형태로 만들었다고. 인터뷰나 블로그 등을 보면 최소 포켓몬스터 금·은 때까지는 사용한 듯.
4.3. 게임
동시대의 컴퓨터들과 비교하기 힘든 그래픽과 사운드 성능은 당연히 게임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아미가가 발매된 1985년에는 가격적으로나 성능적으로나 아미가에 대적할 수 있는 게임 PC가 없었다. 한국에도 IBM PC 호환 기종 게임이 잘 해봐야 EGA를 지원하던 1989년 무렵부터 소수지만 아미가를 취급하는 매장이 생기면서 컴퓨터 잡지의 광고면 등에 아미가 게임의 스크린샷이 실리기 시작했는데 한눈에 봐도 PC와 차이가 크게 났다. 마치 동시대의 패미컴 같은 존재였다.
아미가의 하드웨어 성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게임이 등장하기까지는 아미가 출시 후 대략 3년 가량 걸렸지만 초기작이라고 해도 동시대의 IBM PC나 애플 IIGS 같은 경쟁기와는 기본 성능이 달랐다보니 PC 게임보다는 훨씬 품질이 좋다. 대체로 북미 지역에서는 보급률이 높았던 타 기종용으로 일단 게임을 만들고 팔레트를 늘려서 아미가용으로 컨버팅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미가의 보급률이 높았던 유럽 쪽에서는 아미가 버전을 베이스로 만들어 하드웨어의 성능을 제대로 살린 게임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990년대에 PC에서 VGA가 보급되며 널리 사용되었던 그래픽 도구인 디럭스 페인트도 원래 아미가의 256색 모드를 사용한 응용 프로그램이었다.
DOS와 아미가 게임을 비교한 영상이다. 이때 당시 아미가의 게임들은 4096색에서 보통 동시 32색을 사용하여 게임을 표시하였는데 여타 PC들은 대부분 16색이 고작이었다. 당연히 그래픽 차이가 엄청났으며 아미가는 여기서 음악은 물론이고 사람 음성까지 나오는 수준에 도달해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아미가의 성능이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널리 보급된 아미가 500 기종의 사양을 보면 알겠지만 CPU의 성능 자체는 메가 드라이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거기에 512KB의 기본 메모리 용량, 880KB의 플로피 디스크를 저장 장치로 사용한다는 점을 전제하면 오히려 메가 드라이브보다 더 불리한 조건 하에서 게임을 제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가성비 뛰어난 보급형 PC라는 근본적인 한계에, 각종 특수칩으로 이런 저런 기능을 붙여 조금 더 특출났을 뿐이었다. 스펙을 살펴보면 메가드라이브보다 성능이 뒤떨어지는 정도라고 볼 수도 있다. 이미 아미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계기가 된 500 모델이 나오는 1987년에 샤프전자의 X68000 이 나왔고[11] IBM에서도 VGA를 발표한다. 거기에 차세대 기종으로 이행하는데 실패하면서 1990년을 넘기며 IBM PC에 전세가 역전된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패미컴~메가드라이브 사이에 걸쳐져있는 스펙이다보니 아케이드 이식작은 작품에 따라 수준차가 다양하게 갈렸다. 원작 수준에 가까운 게임들부터[12] 좀 떨어지지만 그럭저럭 비슷하게 옮겨온 게임들,[13] 심각할 정도로 구린 게임들[14] 까지 천차만별이다. 그 외에 드래곤닌자같이 그래픽은 잘 뽑아놓고 특유의 1버튼 컨트롤로 조작감이 발목잡는 이식작도 있었다.
당시 컴덕이나 게이머 꼬꼬마들의 화제 중 하나가 잡지에 실린 '아미가 컴퓨터용 스트리트 파이터 2'였는데, 이식 시기도 아미가판이 게임기 최초 이식작인 슈퍼 패미컴판(1992년 6월)보다 앞섰기 때문에 해당 기사는 꼬꼬마들에게 환상을 불어넣기 충분했지만 실제 아미가 버전의 스트리트 파이터 2는 그런 동경의 나래를 펼치던 이들을 무참히 배신하는 품질이었다. 다행히(?)도 아미가 자체가 국내에선 방송/영상 계통에서나 사용되고 일반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은 기기라 그 실상이 알려지기는 어려웠다. PC 버전이 나오고 나서도 "아미가는 이렇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현실은 둘다 U.S. GOLD 버전이라 도긴개긴이다.
게다가 액션 게임은 다량의 스프라이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미가의 스프라이트 처리 성능은 생각보다 강력한 것은 아니어서, 주사선 당 8개[15] , 크기는 16픽셀×해당 스크린 해상도의 세로 높이로 색상도 스프라이트당 3개(+투명)의 제약이 있다. 게임 성능에서 아미가로 어떻게든 이식 가능한 한계점 쯤으로 여겨지는 CPS1 보드는 '''256개'''를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프라이트 기능은 의외로 뛰어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미가의 게이밍 성능은 스프라이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오브젝트는 대부분 스프라이트가 아닌 비트맵 데이터 고속 처리 장치 '블리터'를 주로 썼는데, 스프라이트보다 속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스프라이트 같은 색상, 크기, 개수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많은 제대로 된 아미가 게임은 필요에 따라 스프라이트와 블리터 오브젝트(BOB)을 혼용했다. 이는 시스템 설계 당시 GUI 운영 체제의 컴퓨터로는 스프라이트의 제약 사항이 부적합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금 느리더라도 제약이 없는 블리터 보조연산장치를 채용한 것이었다. 또한 간간히 있는 오해와 달리 알타입2 처럼 적극적으로 스프라이트를 사용한 작품도 많이 있었다.[16]
오히려 아케이드 게임의 아미가 이식작의 그래픽은 (게임성은 제외하고라도) 아케이드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X68000 과 FM TOWNS처럼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의 아케이드 게임을 완전이식에 가깝게 옮겨내는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그에 준하는 수준까지는 간다. 여러모로 그래픽이나 사운드 성능 만큼은 1980년대 기준으로는 당대 최강급.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게임 유저들도 아케이드 보드보다 게임기나 가정용 컴퓨터가 그래픽이나 사운드가 떨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하드웨어 성능 안에서 충실하게만 만들어졌다면 유저들은 그 격차에 얼마든지 눈을 감았다.[17] 아미가는 당대의 기기 중에서 가장 아케이드에 가까운 그래픽과 사운드를 보여줄 수 있었으므로, 아케이드 이식작이 욕 먹었던 이유는 겉보기보다는 플레이 감각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부 아케이드 이식 게임이 아미가를 비롯한 서구권 컴퓨터의 이식 수준이 게임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데는 스펙문제도 있지만[18] 어느 정도 시대적인 이유가 크다.
파이널 파이트의 경우 피격 시 무적 판정에 대한 자비가 없어서 적들에게 둘러싸이면 그냥 두들겨 맞고 죽는다. 이러한 작품들이 양산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의없는 사업 전개로 인한 열악한 개발 환경 속에 진행된 이식 작업이 원인이다. 원 개발사의 비협조와 아미가 이식을 담당한 회사의 제작 환경 둘 다 책임이 있다. 비유하자면 정영덕판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것이 캡콤의 라이선스'''만''' 받고 아무런 협조 없이 제작해 판매한 셈이다. 이런 현상은 아미가 뿐만 아니라 PC 쪽도 마찬가지[19] 였다. 아미가판 파이날 파이트의 경우가 그러했다. 퍼블리셔인 U.S. GOLD는 캡콤 USA로부터 라이선스를 따와서 Creative Materials에 개발 하청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캡콤이 관여한 것은 라이선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개발 회사라는 것이 말이 좋아 '회사'지 개발자 1명이 회사를 설립해 게임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인 경우가 숱하게 많았다. 파이널 파이트의 경우 리차드 알핀[20] 이라는 개발자가 혼자 작업했다. 그는 능력있는 프로그래머였지만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 슈퍼패미컴 이식 작업에 프로그래머만 5명이 투입되어 만든 것을, 그는 아무 자료 없이 4~6개월의 짧은 기간 안에 베껴 내야 했다.[21] 미국과 일본이라는 거리상의 이유도 있지만 같은 일본내 개발사라고 하더라도 그때는 이식을 한다면 그냥 허가만 해줄 뿐 대부분 기술 유출을 이유로 리소스나 소스코드를 제공하지 않았기에 '눈으로 보고 카피' 하는 것이 관례였다.[22] 믿기지 않겠지만 본인의 당시회고 그때는 프레임 캡쳐는 물론이고 캠코더나 캡쳐보드 같은 것도 꿈같은 장비였기 때문에 게임 개발사 조차도 CRT화면을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현상해서 사용해야 했다. 이런 조건만 놓고 생각해 봐도 왜 당시의 아케이드 이식작들이 그 모양으로 만들어졌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미가를 기반으로 한 아케이드 기판도 있었다. 아메리칸 레이저 게임(American Laser Games)에서 개발한 건슈팅 게임들 중 일부(추정)[23] 가 아미가와 레이저디스크를 이용해 아케이드 기판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그래픽의 대부분 레이저디스크에 녹화된 동영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전설의 막장 쿠소게로 유명한 '''소드 오브 소단'''의 원작도 아미가 버전이었다. 메가 드라이브판의 처참한 게임 품질로 유명한 게임이지만 원작인 아미가판은 '''멀쩡한''' 게임이다. 원작은 덴마크에서 만들었고, 이식을 미국에서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위의 사례와 비슷한 이유로 이식에 실패했을 것이다.[24] 그 외 로터스 터보 챌린지, 배틀 스쿼드론, 리스키 우즈(사신 드락소스) 등 아미가에서 메가 드라이브로 이식된 게임이 좀 더 있지만 다들 평가는 별로 좋지 않다.
5. 현재
대부분의 클래식 컴퓨터들과 마찬가지로 현역에서는 은퇴했다. IBM PC 호환기종과 매킨토시[25] 를 제외한 나머지 클래식 컴퓨터들의 공통적인 종착역이다. 그래도 한 때 잘 나갔던 컴퓨터라서 꽤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고,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레트로 PC' 취미 분야에서는 가장 잘 나가는 기종이라도 봐도 무방한 수준.
1994년 코모도어가 파산한 이후 코모도어의 자산들은 여러 회사에 팔려나갔는데, 그 중 아미가는 아미가, Inc로 법인화해 여러 회사에 팔려다녔다. 이 아미가, Inc의 라이선스를 받은 아이 테크에서 2002년 4월 아미가 컴퓨터의 후속작으로 프리스케일 PowerPC CPU 기반 컴퓨터 ''''아미가원'(AmigaOne)'''을 출시했다. 그러나 판매 부진으로 아이 테크는 3년만에 포기했고 현재는 에이큐브 시스템이나 A-eon Technology의 두 회사가 판매하고 있다.
아미가 OS 역시 코모도어가 파산한 이후에도 꾸준히 개발해 현재도 현역으로 가동 중이다. 현재는 아미가, Inc의 라이선스를 받아 하이페리온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한 PowerPC 기반의 4.1이 최신 버전이다.(공식 홈페이지) 아미가원 컴퓨터의 기본 OS로 구동하며, 680x0 기반의 클래식 아미가용 소프트웨어를 에뮬레이션으로 구동 가능하다. 같은 PowerPC 기반 하드웨어라고 매킨토시에 설치 시도한 사람들이 있으나 장치 드라이버 소프트웨어 문제 때문에 불안정하다고 한다. 그러나 하이페리온 엔터테인먼트는 2015년 파산했음이 알려졌다.
2012년, 아미가 Inc.는 클로안토에 아미가와 관련된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권리를 넘겼다# 현재 아미가 Inc.사이트로 접속하면 "Do you remember when Amiga meant friend? We do."라는 문구만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아미가 뿐만 아니라 코모도어 64에 대한 권리도 인수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시점에서 아미가의 공식 웹 사이트는 클로안토가 관리하고 있는 https://www.amigaforever.com/이다.
Minimig라는 오픈 소스 하드웨어도 있는데, FPGA 기술을 이용하여 클래식 아미가의 하드웨어를 원칩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원칩 MSX와 비슷한 발상의 물건.
에뮬레이터로는 윈도우 기반의 WINUAE라는 에뮬레이터가 가장 오래 됐고 유명하다. 멀티 플랫폼으로 제작하고 있는 FS-UAE라는 에뮬레이터도 있다.
만약 수집용으로 아미가를 사려고 한다면 아미가 500나 아미가 1200를 사는게 무난하다. 그중에서도 아미가 1200이 500보다 나은 CPU, 칩셋을 가지고 있어서 아미가 500 소프트웨어와 호환하고, 확장성도 좋은 편이라서 이더넷 카드로 인터넷을 하거나 하드디스크 대신 CF 카드를 쓸 수 있고, 확장 슬롯을 이용하여 CPU와 램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
당시 게임들은 플로피디스크로만 출시했고 하드디스크 인스톨을 하지 못했지만, 이후 WHDLoad라는 하드디스크 인스톨러가 나왔다.
PC-TASK라는 아미가용 가상 머신이 있었다.
6. 기타
매킨토시가 그랬던 것 처럼 IBM PC 호환기종이나 매킨토시의 소프트웨어를 구동시키기 위한 호환 보드가 있었다. 매킨토시는 아미가와 동일한 모토로라 680x0 계열의 CPU를 사용하고 있어 상호 호환이 수월했다. 매킨토시의 경우에는 호환 보드도 나왔지만 호환 보드 없이 단순히 전용 소프트웨어를 실행시키고 매킨토시 운영 체제를 포함한 플로피 디스크를 넣어 부팅하는 일종의 가상 머신 소프트웨어로도 나오기도 했다. 당시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던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용량이 매우 작아서 800 KB 3.5인치 플로피 디스켓 한 장에 충분히 들어가고 남을 정도였다. 반면 CPU가 아예 다른 IBM PC 호환 보드는 80x86 CPU를 때려 박아서(!) 상호 호환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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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 첼시 FC도 1993/94 시즌 당시 유니폼에 아미가 로고를 달고 뛴 바 있었다. 참고로 사진의 선수는 뉴캐슬, QPR 등에서 활약한 개빈 피콕으로, 첼시에서는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활약했다.
7. 발매 모델
- 아미가 1000(1985년 7월 23일)
- 아미가 2000/1500/2500(1987년 3월)
- 아미가 500/500 Plus(1987년 4월)
- 아미가 3000/3000T/3000UX(1990년 6월)
- 코모도어 CDTV(1991년 3월)
- 아미가 600(1992년 3월)
- 아미가 1200(1992년 10월 21일)
- 아미가 4000/4000T(1992년 10월)
- 아미가 CD32(1993년 9월 17일)
8. 외부 링크
- Amiga Forever: 아미가의 권리자인 클로안토가 관리하는 아미가 유료 에뮬레이터팩 배포 사이트이다. 공식사이트가 없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이 사이트가 공식이다.
- 아미가 Inc.(아카이브): 아미가의 권리를 관리했던 회사의 사이트 공식 트위터는 2017년 1월 이후 새 트윗이 없고 공식홈페이지는 2013년 이후로 새로 올라온 기사가 없다. 아카이브 스냅샷 상으로는 2017년까지는 홈페이지가 있었고 2018년 6월경부터 흰 페이지에 짧은 문구만 띄운 것으로 보인다.
- 아미가 뉴스: 아미가와 아미가 관련 회사의 근황을 볼 수 있는 사이트.
- amiga.org: 아미가 커뮤니티 사이트
- English Amiga Board
- Aminet: 아미가 소프트웨어 아카이브 사이트
- http://amigastore.eu/en/: 아미가 하드웨어 판매사이트
[1] CC-BY-2.5 — Attribution. You must give the original author credit.[2] 모토로라 68000 7 MHz[3] "개인용 컴퓨터" 에서 최초로 구현했다는 것이 크다는 의미이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이론적 토대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있었고 하다 못해 1970년 대에 만들어진 유닉스만 봐도 이미 그 정도는 지원하고 있었다.(당시에 컴퓨터란 메인프레임의 단말기에 불과했다.)[4] 현재의 아미가 OS. 워크 벤치가 아미가 OS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운영 체제 내 파일 관리자의 이름이 되었다.[5] 아미가 500에 CD-ROM 드라이브만 넣은 아미가 CDTV나, 아미가 500의 마이너 업그레이드 버전인 아미가 600을 출시한지 반 년만에 CPU, 칩셋 모두 아미가 600보다 크게 업그레이드한 아미가 1200 출시 등 코모도어의 삽질은 아미가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계속했다.[6] 사실상 보급한 아미가의 대부분은 500이었다. 그래서 2000, 3000 등 고성능 후계기들이 나온 뒤에도 대부분의 아미가 소프트웨어, 특히 게임은 500을 기준으로 제작했다. IBM PC에서도 80386 CPU와 VGA 자체는 1987년경에 나왔지만 1990년대 초까지 상당수의 소프트웨어가 XT와 CGA/EGA 환경을 상정하고 제작했던 것과 비슷하다.[7] 당시 유럽에서는 게임기 대신에 개인용 컴퓨터를 구매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인기 있던 유럽산 8비트 컴퓨터들을 압도하는 성능을 가진 아미가 500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8] 하지만 말이 좋아 699달러지 당시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20~30만원, 서울시내 사립대학 한학기 등록금이 50~60만 원, 개포동 주공아파트 11평형이 1200만 원이었다는것을 생각하면 결코 싼 물건은 아니었다. 그 당시 컴퓨터는 오늘날과 달리 대단히 비싸 극히 일부 계층만이 사용했다. 1988년 기준 대우전자의 MSX 기종인 CPC-400 시리즈가 RGB 모니터까지 80만 원이 훌쩍 넘어갔고 IBM PC XT 호환 기종이 신문 광고 기준으로 100만 원 대 중반이었다. 1989년 교육용 PC를 16비트 IBM PC 호환 기종으로 결정하고 세운상가표 IBM XT PC 호환 컴퓨터가 나온 다음에 본체와 단색 모니터 가격이 100만 원으로 내려갔다고 좋아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메인 보드용 램 1MB가 개당 8만원 했다. 그러니 8MB는 두 달치 월급이었다.[9] 카드와 소프트웨어로 구성. 당시 유일하게 3D 애니메이션, 24비트 그래픽, 비디오 저장과 편집, 디지털 효과 추가, 자막 추가 등이 가능했던 비디오 편집 하드웨어/소프트웨어였다. 덕분에 방송사에서 많이 사용했다. 비디오 토스터 홍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옛날 방송을 기억한다면 익숙한 효과들이 많을 것이다.[10] 프로 트랙커, 스크림 트랙커, 패스트 트랙커, 임펄스 트랙커, 모드플러그 트랙커 등.[11] X68000의 라이벌로 여겨지는 FM TOWNS는 1989년에야 나왔고 처음부터 32비트였기 때문에 아미가와 동시대/동급의 기기로 보기 어렵다. 당시의 기술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FM Towns는 한 세대 정도 차이가 있는 기기.[12] 알타입, 알카노이드, 골든 액스 등.[13] 버블보블, 미드나이트 레지스탕스 등.[14] 아웃런, 파워 드리프트, 스트리트 파이터 2 등.[15] 즉, 가로로 한 줄에 놓일 수 있는 스프라이트가 8개까지. MSX2나 패미컴과 동일한 레벨의 제약이다.[16] 상세한 아미가의 하드웨어 사양에 대해서는 Amiga Hardware Reference Manual#[17] 예를 들면 슈퍼 패미컴이나 메가 드라이브판 스트리트 파이터 2 시리즈는 크게 품질을 떨어뜨려 이식했지만 당시엔 거의 완전 이식인 것처럼 여겨졌을 정도였다. 그래픽과 사운드는 열악해졌지만 그래도 일단 '비슷하게'는 나왔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임 감각이 매우 잘 재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8] 보통 아케이드 기판과 가정용 게임기의 성능이 만나는 시점은 1990년대 중반의 SYSTEM 11 등의 플레이스테이션 호환 기판들이 나온 시점으로 본다. 이때 조차도 MODEL 3처럼 동시대 게임기 성능을 아득히 능가하는 고급 기판은 여전히 나오고 있었다.[19] 어차피 아미가 게임 만드는 그 회사가 똑같은 과정을 거쳐 PC판도 만들었으니까 당연하다.[20] 이 사람은 이전에 더블 드래곤 2를 아미가용으로 이식했었는데 그 버전은 꽤 평이 좋았다.[21] 직접 만든 롬 리더기로 기판에서 그래픽 데이터를 추출해서 사용했다고 하지만 여기에 개발기간을 많이 사용하고, 배경은 아티스트가 직접 그려냈다고 한다. 또한 게임기였다면 당연히 지원되는 기능조차 없어서 직접 만들어서 써야했고, 안그래도 블리터까지 사용해서 느린데 이런 연산으로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22] 마이컴 시대에는 이런식으로 불법 이식된 아케이드 게임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오락실에 가서 모눈종이에 그림을 그려다가 집에 와서 게임을 만드는 식으로.[23] 매드독 맥크리 1, 크라임 패트롤 1[24] 참고로 16비트 게임기 중, 특히 메가 드라이브는 CPU, 클럭 주파수, 동시 발색 수 등 게임을 위한 사양으로는 아미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아미가 vs 메가 드라이브는 아미가 팬들에게 꽤나 인기있는 토론 주제 중 하나.[25] 인텔 맥은 사실상 PC와 동일한 아키텍처고 독자 아키텍처로서의 매킨토시(68K맥, 파워맥)의 혈통은 IBM의 메인프레임이나 슈퍼컴퓨터 같은 곳에서나 이어지는 수준이고 개인용 하드웨어에서는 끊겼다고 생각한다면 매킨토시의 '하드웨어'가 살아남았다고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