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개헌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뒷이야기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6. 관련 문서


1. 개요


拔萃改憲
1952년 7월 2일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임시수도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의 헌법 개정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번째 친위 쿠데타'''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의 안과, 의원내각제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의 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 개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당과 야당의 각 안 중에서 좋은 것들만을 발췌하여 절충한 개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승만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며, 헌법을 위반한 개헌이었다.

2. 배경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지지 세력이 대거 탈락하자, 이승만은 당시의 국회 간선제에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게다가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국민들과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정부를 믿지 않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고[1]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헌법 개정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지만 1952년 1월 18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표결은 찬성 14,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고, 이승만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함을 깨닫게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맞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였고, 반 이승만 성향의 의원들이 다수였던 국회 의석 구조로 인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이승만은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국회 해산에 대한 여론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정부에 의해 동원된 민족자결단, 백골단 등의 폭력 조직 등 어용 시위대가 연일 부산 거리를 누비면서 국회의장 신익희의 집이 포위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빨치산 남도부 부대가 부산에 잠입했다며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3. 경과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승만은 1952년 5월 26일에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들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2]를 동원하여 강제 연행하는 압제를 저질렀으며, 10명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하였다.[3]
이에 국회에서 구속 의원 석방과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부통령이던 김성수가 사표를 냈으며, UN 한국위원단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하고 있던 국가인 미국, 영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내와 국외에서의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6월 20일에 '''이시영, 김성수, 김창숙''' 등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려고 했으나, 정치 깡패들의 난입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6월 25일에는 김시현이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회의원들이 억류되어 있는 동안, 7월 2일 밤 국회는 '''기립표결'''[4]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빨치산을 계엄의 명분으로 들었던 것과 달리 개헌이 끝나자마자 7월 말에 계엄이 바로 해제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다.[5]
사실 이승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부산에 배치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종찬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병력 배치를 거부했고 더 나아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했다. 헌병대를 동원한 것도 이종찬이 거부하자 원용덕 헌병사령관[6]에게 따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졌고, 결국 이종찬이 총장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종찬을 사형 시키려고 했지만 당시 육군참모차장인 유재흥의 설득으로 철회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4. 뒷이야기


제2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면 정치 파동이 일어난 부산에서 멀어질수록 이승만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경남 지역에서는 이승만의 득표율이 간신히 50%를 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거나(전북, 전남) 경남과 인접한(경북) 지역에서는 65~75% 정도였다. 부산에서 먼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제주에서는 압승(82~92%)을 거뒀다. 당시엔 부산이 임시 수도였으니 여촌야도가 부산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부산정치파동 과정을 간략히 그려냈다.


6. 관련 문서



[1] 이전까지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다.[2] 現 군사경찰[3] 이를 부산 정치 파동이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국회 프락치사건과 일맥상통한다.[4] 많은 위키니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의회에서의 표결제도는 일반적으로 기립 표결, 아니면 거수 표결, 가끔 점호 표결을 한다. 매번 투표용지를 만드는 것보다 효율적이므로.[5] 경과 문단 초반부터 읽어보면 헌정 사상의 최초의 친위 쿠데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로 다음과 같다. 친위쿠데타의 설명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권력을 쥐고 있는 측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인데 당시 상황에 맞게 대입하면 '이승만이 헌병대를 동원하여 야당 국회의원을 강제 연행하고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성공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이다. 즉 친위 쿠데타의 설명과 비교해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6] 現 군사경찰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