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우

 

'''조관우
趙寬友 | Jo Kwan-Woo
'''
'''본명'''
조광호
'''본관'''
김제 조씨
'''출생'''
1965년 8월 3일 (58세)
'''신체'''
172cm, 69kg, A형
'''가족'''
아들 조휘, 조현, 조환, 딸 조하은
아버지 조통달, 이모할머니 박초월, 누나 2명
'''학력'''
국악예술학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시스템 미술학과 (중퇴)
'''데뷔'''
1994년 1집 앨범 <My First Story>
'''사이트'''

'''소속사'''
Sogno Entertainment 01025780714
1. 개요
2. 상세
3. 가족
4. 배우
5.1. 경연곡
6. 디스코그래피
7. 여담

[clearfix]

1. 개요


한국가수이자 배우며 본명은 조광호다.
1994년 1집 앨범 'My First Story' 를 발표하여 데뷔했다. 사실 조관우의 실제 데뷔앨범은 1994년이 아닌 1992년이라고 볼 수 있다. 본명으로 낸 '조광호' 라는 앨범이 실제 그의 첫 앨범이다. 곡은 '이제는 너를' 이라는 곡인데 조관우의 진성 목소리와 일치한다. 2017년 여름에 네이버 측에서 이 앨범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사진을 보면 조관우임을 확인할 수 있다. 훗날 결혼하게 되는 장복신이 이 앨범에 작사가로 대부분의 곡을 써 주었다. 모노 앨범에 참여했던 조광호와는 동명이인. 링크 이 앨범은 음원 사이트에 따르면 2006년 발매로 되어있지만, 조관우 프로파일에는 없다.
[image]
데뷔 초 얼굴 없는 가수로 컨셉을 잡고 활동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토크쇼 놀러와 얼굴 없는 가수 특집에서 한 적이 있는데 소속사의 전략이었다고 한다. 자칭 '''눈 감고 듣는 가수'''. 외모와 목소리의 갭이 크다. 지금은 아저씨의 외모지만 젊었을 때는 항상 장발을 고수하고 선이 굵은 편이라 다소 느끼한 이미지를 갖고있어서 그런 것 같다. 얼굴 없는 가수 컨셉은 데뷔 초기 때만 그런 것이고 이후 음악 방송이나 콘서트를 활발하게 했다. 또한 유흥업소 출연을 하지 않고[1] MR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2]

2. 상세


기억하나요 우리사랑을

그땐 서로의 아픔을 함께 했었죠

이젠 무엇도 남아있진 않지만

하얀 눈내리던 그날의 입맞춤을 기억해요.

-2집 겨울이야기 중-

"가요계에서 나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명, 이승철과 조관우이다. 나는 범처럼, 이승철은 매처럼, 조관우는 뱀처럼 노래한다."

-임재범-

1965년 판소리의 대가인 조통달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통달의 집안은 예로부터 국악만을 해온 집안으로 조통달의 이모인 박초월 역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명창이다.[3] 가계의 영향인지 조관우 역시도 어렸을 적부터 판소리, 창 그리고 가야금에 재주를 보여 국악예술고등학교[4]에서 가야금을 전공한다. 하지만 조통달은 아들이 국악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국악을 하는 아들에게 크게 화를 내고 국악기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결국 국악은 접게 된다. 정확히는 조관우가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1등만 알아주는 세계이기에 말렸다고 한다. 오히려 재능에 있어서는 천재적이었는데 '''가야금 3년 커리큘럼을 일주일 만에 뗐다고'''한다.[5]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 음악을 접해 왔으며 국악을 그만둔 이후 완전히 미국 디스코/펑크 밴드들의 음악에 빠지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비 지스와 같은 가성 창법을 이용하는 록밴드[6]Earth, Wind & Fire 등 가성을 사용하는 흑인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감명받은 조관우는 자신만의 가성 창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은 이후 조관우의 특징이 된다.[7]
참고로 조관우의 전성기 가성이 6옥타브, 7옥타브라는 음역에 도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8] 그를 대표하는 곡인 '늪'이나 '꽃밭에서' 등을 들어봐도 '늪'은 4옥타브까지 올라가고, 8집 imprssion의 수록곡 '그랬죠'가 4옥타브 도♯이라고 한다. 그의 가성이 여자조차 누르는 음역대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9] 가성이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 조관우가 호평을 받은 것은 단순히 가성으로 노래해서가 아니라 가성을 아름답게 내고 유지할 수 있으며 진성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운터 테너와는 또 다른 특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성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겠지만 가성은 내는 것은 쉬워도 유지하기는 어렵고 특히 음역의 양극에 다다를 수록(즉 저음한계나 고음한계에 다다를수록) 음은 흩어지고 또 올바르게 내지 않을 경우 성대를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이것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50이 넘은 나이까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가성으로는 세계 제일로 평가받는 머라이어 캐리마저 나이를 먹으면서 목이 상당히 손상된 것에 비해서 독학으로 정석적인 카운터 테너가 아닌 팔세토 창법을 개발해서 그 성대를 유지한다는 것만 봐도 조관우가 그냥 날로 먹는 가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10]
1집은 발매 후 130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히트[11]를 치게 된다. 얼굴을 전면에 내세웠던 기존의 가수들과 달리 얼굴을 가린 사진을 수록하였으며 방송 출연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명 ''''얼굴 없는 가수''''로 불리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조관우 본인이 직접 밝힌 바가 있는데[12]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TV 출연을 해달라는 방송국과 소속사의 요청에 결국 수락했고 단 한 번 출연한 방송 직후 음반 판매량이 급락했다고 한다. 이 음반에 실린 "''''''" 이라는 곡은 이후 조관우의 대표곡으로 꼽히게 되며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의해 리메이크된다. 이 곡은 유부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곡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2011년 조관우가 엠넷의 MIC라는 프로에 출연해 밝히길 자위 행위를 묘사한 곡이었다고 한다.[13] 그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종교계 등에서 큰 지탄을 받기도 했으며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되기까지 한다, 당시 사람들이 자위에 관련된 내용인 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미지수지만...
이후 2집은 리메이크 앨범인 "Memory" 를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은 비공식 추산 320만 장, 공식 214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공식적으로는 3번째, 비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는 기록을 세우며 1집 이상의 엄청난 히트[14]를 기록하며 리메이크곡 "꽃밭에서" 는 "늪" 과 함께 조관우를 대표하는 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2집에 수록된 오리지날 곡 "겨울이야기" 는 CF 음악으로 삽입된 적이 있다.[15]
하지만 1, 2집이 연속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와의 불리한 계약으로 인해 조관우 본인은 지하 전셋방에 살며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16] 이런 상황은 1996년 3집 "My 3rd Story About" 을 발매하고 소속사를 옮긴 후에야 개선될 수 있었다.
이후 3집도 100만 장이 넘는 히트를 치지만 4집부터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특히 대중적인 노출을 꺼리는 그의 특성을 언론에서 선정적으로 비틀어서 여러 추측성 기사 및 루머를 양산했고 전 소속사와의 갈등의 골도 깊어졌으며 음악적으로도 매너리즘에 빠져 음반 판매량에서는 100만 장으로 선방했으나, 여러모로 다소 아쉬운 성과를 올리고 만다.[17] 5집의 타이틀곡 '실락원' 은 가사가 자살을 미화한다고 하여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고 그 결과 5집은 35만 장을 조금 웃도는 판매고를 올린다.[18]
이후 6집부터 다시 심기일전하여 좋은 평을 받게 된다. 6집의 수록곡인 '사랑했으므로' 는 초심을 되찾았다는 평을 받으며 조관우의 매니아층에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후 2002년부터 당시 유행하던 팝페라를 접목시킨 작품들을 발표하는데 이때 발표한 7집과 8집은 다시 예전 그의 명성을 되찾게 한다.
그러다가 7월 15일, 지인이 휘두른 흉기에 목 부위를 찔리는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문에 100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목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앨범 작업과 앞으로의 가수 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일단 성대는 문제 없다니 천만다행.
2013년 새로운 디지털 싱글 '화애'가 발매되었다. 이 시기 성대결절 수술을 받고 새로 낸 곡이라는데 다행히 수술이 잘돼 오히려 음역이 올라갔다고 한다.
2014년 EP앨범 'Friday Night' 가 발매되었다. 2014년 세월호 추모곡 '풍등'이 발매되었다. 뮤직비디오에 영화계, 가요계 인물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팝핀현준이 함께 출연했다.
2015년 신곡 '불꽃'이 발매되었다.
2016년 2월 14일에 복면가왕에 풍물패 컨셉의 인생 모 아니면 도라는 가명으로 참가해서 이상한 나라의 에이스장가가는 갑돌이를 이겼으며 작년에 왔던 각설이한테 패배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노래는 물론 더할 나위없이 잘불렀고, 그 외의 장면들에서 본인이 삘춤이라 주장한 이상한 춤을 춘다든가(...) 변조된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계속 투덜댄다든가(...) 아재개그를 한다든가(...) 하는 허당스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며 예능적으로도 본의 아니게 활약했다. 참가하게 된 계기는 두 아이에게 아빠가 가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였다고 말했다.
2016년 12월 23일, 겨울이야기 Part 2가 발매되었다. 특히 녹음실 촬영 당시에 노래에 깊이 몰입한 나머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 스태프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2018년 3월 17일 15년 만에 9집 정규앨범('다시 시작')을 발매했다.
2020년 10월 15일 사랑의 콜센타에 출연해 꽃밭에서, 찻집의 고독을 불렸다. 영상1 영상2

3. 가족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조통달이고, 이모할머니는 역시 판소리 명창이자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박초월이다[19] 형제관계는 1남 2녀 중 셋째로 누나 2명이 있다.
결혼을 두 번 했다. 첫 번째는 1993년 SBS 공채 탤런트 출신 장연우와 결혼하여 음반 작업을 함께 하는 등 소문난 잉꼬 부부로 세간에 알려졌었다.[20] 아들 조휘[21], 조현[22]을 낳았으나 2003년 성격 차이를 이유로 합의이혼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친구처럼 지낸다고 하며, 2005년에 발매한 조관우의 EP 앨범 "가을의 기적" 에서 다시 음반 작업을 함께 했다.
이 후 재혼을 했으나 10억이 넘는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바람에 다시 이혼하고 현재는 큰아들의 월세집에서 같이 산다고. #

4. 배우


불혹이 넘은 뒤 연기 포텐이 터졌다.
2011년 12월 5일 첫 방송한 종합편성채널 JTBC의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에서 첫 연기 도전을 했다. 부도난 연예기획사 사장 역할로 초반에는 거의 야바위꾼(...)에 가까운 이미지였으나, 식신 캐릭터로 점점 성격이 바뀌고 있다.
2012년 8월부터 2013년 2월까지 방송된 KBS의 일일 시트콤 <닥치고 패밀리>에 황신혜의 전 남편이자 박지윤, 다솜의 아버지로 출연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 출연했다. 여기서 그는 원래 전공하던 국악 실력을 발휘했다. 자세한 부분은 해당 영화 문서에서 있다. 연기력이 예상외로 엄청나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사실 대부분은 캐릭터의 갭과 연기력이 너무 절륜한 나머지 나중에서야 그 배역을 연기한 사람이 조관우라는걸 눈치챘다(...)
2018년 개봉한 박정민, 이병헌 주연의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 출연했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줄 만큼 큰 비중의 역할은 아니었으나, 맡은 바 역할에 맞게 과하게 꾸며내지 않고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보여 줬다. 되려 그 탓에 나온 줄 모르는 관객도 있다. 작은 역할을 맡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인상을 남겨보려 과도하게 꾸미다 그 어색함 때문에 연기를 망쳐 눈에 띄는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
2018년 7월에는 KBS의 2부작 드라마 To. Jenny앤씨아의 소속사 사장 역할로 나왔다.

5. 나는 가수다


소심, 투덜, 엄살, 예민, 징징, 귀여움 등등을 모두 합친 그동안 예능에서 볼 수 없었던 희귀 캐릭터. 인순이의 YTN 인터뷰에 의하면 나가수 내에서 조관우의 별명은 '엄살왕자' 라고 한다.
나는 가수다의 출연설이 돌았는데 건강 문제로 하차한 임재범을 대신해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으나 결국 하필이면 가장 논란이 심한 순간에 JK김동욱의 급작스런 하차로 SOS를 친 제작진에 의해 합류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출연 요청에 당황하긴 했지만 열심히 연습중이라고. 하지만 6월 19일 본방송에서 꼴찌인 공동 6위를 하면서 기대보다 성적이 안 나왔다는 평이 많다[23]
나가수 첫 출연에서 김범수와 함께 공동 6위에 떨어졌다. 무대가 무대라지만 인터뷰에선 궁지에 몰린 셈이라고 자신을 자학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국악과 자신의 창법을 합쳐 '하얀 나비' 를 부르는 것으로 완벽하게 돌파하며 2위를 차지했다. 2위라곤 하지만 이날 1위를 차지한 YB의 무대가 워낙 흥겹고 신난데다 퍼포먼스도 가득한 노래였기에 곡의 퀄리티에 대한 호평은 조관우에게 쏟아지고 있다. 조관우의 '하얀나비'는 임재범의 '여러분', 인순이의 '아버지'에 이어 제작진 선정 감동무대 3위에 오르기도 하며 나가수가 끝난 이후에도 전문가와 청중들 모두에게 역대급 무대로 호평받고 있다.
퍼포먼스 무대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나가수에서도 진성을 섞은 <남행열차>를 불러내며 유일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가수. 실제 순위도 '하얀 나비' 를 제외하고는 4~6위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이소라의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음원에서의 높은 퀄리티가 경연 순위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나는 가수다가 종영한 이후 DAUM에서 투표한 결과 감동무대 best5에 선출되기도 했다.
7월 24일 방송에서는 박미경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을 편곡했으며 순위는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 이 날 그가 보여준 극한의 가성과 전제덕의 하모니카 연주는 나가수의 무대를 예술적으로 끌어올렸다는 호평을 얻었다. ~
7월 31일 5라운드 1차 경연 방송에서는 나훈아의 '고향역' 을 편곡해서 5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8월 14일 5라운드 최종 경연에서는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을 편곡하여 불렀는데 이 노래는 듀엣곡이다! 그는 초반부를 남성톤으로 낮춰 부르고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톤을 올려부르는 방식으로 솔로로 듀엣곡을 소화해내었고 '하얀 나비' 이후로 오랫만에 4~6위의 성적에서 벗어나 3위를 기록했다.
가성을 쓰긴 하지만 그 스타일이 전혀 다른 임재범의 '그대는 어디에'를 불렀을 때는 7위의 굴욕을 맛봤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해당 곡은 조관우에게 굉장히 어울리는 곡이기도 했던데다가 곡 자체는 굉장히 좋게 뽑혔기에 평가는 좋다.
다음 경연에선 김현철의 '달의 몰락' 을 디스코펑키하게 편곡해서 3위에 안착, 또 다시 생존하게 되었다. 이 날 대기실에서 조관우의 율동을 지켜보던 여가수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방송 내에서는 겸손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음악이 경연에 어필하기 힘든 스타일이라 그렇지 이 사람도 음반 판매량이 앨범 천만 장을 팔아치운 조용필, 김건모, 신승훈 같은 괴수들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약 700만 장 정도). 실력이 부족해서 나가수의 성적이 나쁜 건 아니라는 의미.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게 된 것은 제작진에게 임재범이 조관우를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재범은 자신처럼 방송에 자주 나오지 않는 조관우가 출연하면 좋겠다며 '자신은 범처럼, 이승철은 매처럼, 조관우는 뱀처럼 노래한다' 라고 말했다고. 조관우는 이에 공감하며 임재범은 입을 크게 벌려 통성으로 '어흥' 하는 듯 노래하고 이승철은 먹이를 본 매처럼 쪼아 부르고 자신은 입부터 벌리는 게 아니라 뱀처럼 몸으로 말아서 노래하는 스타일이라고 부연했다.
10월 2일 7라운드 2차 경연에서 최종 6위를 하면서 나는 가수다에서의 도전을 마쳤으며 명예졸업을 2라운드 앞둔 상태에서 하차해서 아쉽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조관우 본인은 실수[24]를 인정하고 겸허히 최종 결과를 받아들였다. 원곡의 창법을 생각해봤을 때 조관우에게 딱 어울리는 선곡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가사를 틀리면서 회생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여기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조관우는 원래는 조용필 스페셜에서 '한 오백년' 을 부를 예정이었으나 제작진의 뜻에 따라 '단발머리' 로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한 오백년' 을 정말 1위를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도록 편곡을 하느라 '단발머리' 준비를 많이 못했다고. 본인이 말한 것이라 사실인지는 확인이 불가하나 조용필 스페셜의 선곡이 '''대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완전히 픽션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제작진이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게 된 것이므로 적지 않은 파문이 예상된다.
그의 7라운드 2차 경연이 나는 가수다에서의 마지막 무대가 된 요인으로는 '''이제는''' 호불호가 갈리는 팔세토 창법[25], 어울리는 곡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유니크한 음색 등이 꼽힌다. 경연보다는 음원용의 음악적 색깔들로 여겨지는데, 이를 증명하듯 가수 시즌 1이 끝난 이후 DAUM에서 하얀나비가 네티즌 선정 감동 무대 3위, 남행열차가(경연에서는 5위를 했음에도) 네티즌 선정 다시 보고 싶은 무대 BEST5에 올랐다. 평소 나는 가수다의 체제를 부담스러워 한 조관우지만나는 가수다를 통해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등의 추억을 생각하면 나는 가수다에 대해서 시원섭섭함을 느낀다고. 언제나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기에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후 19대 총선에서 나는 가수다 멤버가 모여 부른 총선 홍보곡에 참여했으며 잘 보면 다들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는데 '''혼자만 벗고 있다'''.

5.1. 경연곡


'''날짜'''
'''노래'''
'''순위'''
2011년 6월 19일
이별 여행 - 원미연
공동 6위
2011년 7월 3일
하얀 나비 - 김정호
2위
2011년 7월 10일
남행열차 - 김수희
5위
2011년 7월 24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 박미경
4위
2011년 7월 31일
고향역 - 나훈아
5위
2011년 8월 14일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 조덕배
3위
2011년 8월 21일
사랑했으므로
4위
2011년 8월 28일
그대는 어디에 - 임재범
7위
2011년 9월 11일
달의 몰락 - 김현철
3위
2011년 9월 18일
이름 모를 소녀 - 김정호
6위
2011년 10월 2일
단발머리 - 조용필
6위(탈락)
평균 순위
4.64위

6. 디스코그래피


  • 1994년 정규앨범 1집 "My First Story"
  • 1995년 정규앨범 2집 "Memory"
  • 1996년 정규앨범 3집 "영원"
  • 1997년 콘서트 라이브 앨범 Part 1, Part 2
  • 1997년 정규앨범 4집 "Waiting"
  • 1999년 정규앨범 5집 "실락원"
  • 2000년 베스트 라이브 앨범 "파리넬리"
  • 2001년 정규앨범 6집 "연(緣)"
  • 2002년 정규앨범 7집 "My Memory II"
  • 2003년 정규앨범 8집 "Impression"
  • 2005년 EP앨범 "가을의 기적"
  • 2006년 베스트 앨범
  • 2008년 디지털싱글 "날 버려요"
  • 2008년 디지털싱글 "소나기"
  • 2013년 디지털싱글 "화애"
  • 2014년 디지털싱글 "Maybe U"
  • 2014년 디지털싱글 "All for you"
  • 2014년 EP앨범 "Friday Night"
  • 2014년 디지털싱글 "풍등"
  • 2015년 디지털싱글 "불꽃"
  • 2016년 디지털싱글 겨울이야기 Part 2
  • 2018년 정규앨범 9집 "다시 시작"

7. 여담


동갑내기 가수인 이승환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였으며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는 엄혹한 시기였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시기에도 꾸준히 노무현 대통령 기념 음악회에 참석해서 축하의 노래를 불렀고 노무현 대통령 헌정곡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조관우가 대중들에게 본인을 각인시킨 나는 가수다가 방영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어렵기도 해서 립싱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팝핀현준과도 친분이 있다. 나는 가수다 출연 당시에 그는 팝핀현준의 춤은 경지에 올라왔다, 그의 춤은 국악의 살풀이를 보는 것 같다고 칭찬했다. 나가수 무대뿐만 아니라 조관우의 개인 콘서트나 방송 무대에서도 자주 서는, 굉장히 친한 사이다. 또한 의외의 사실로 팝핀현준의 첫 연예인 제자라고 한다. 팝핀현준의 말에 의하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고 몸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 1990년대 가요계에서는 음반사나 기획사가 가수를 데뷔시켜준 대가로 음반 판매 및 공연으로 인한 수익을 대부분 가져가고, 가수는 밤무대 출연 등으로 수입을 얻었는데 조관우는 밤무대 출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 2집의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수 본인은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3집부터는 1, 2집의 기획자인 작곡가 하광훈과 결별하고 본인이 직접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2] 본인이 섭외하는 것인지 방송 제작진이 준비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라디오 방송에 잠깐 출연하여 노래를 하더라도 연주자가 한 명 이상 동반하여 반주를 한다. 드물게 녹음된 반주에 노래하는 영상이 있어 언제부턴가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3] 조관우가 방송에서 얘기했던 에피소드인데, 학창시절 뭔가를 잘못했을 때 선생님이 "아버지는 통달했고 할머니는 초월했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고 하셨다고... 그리고 옆에 있던 달성이는 "넌 뭘 달성할 건데?" 하며 덩달아 머리를 맞았다는 우스갯소리이다.[4] 중학교 때 조관우는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누군가 조관우에게 연극 대회에서 상을 타면 특례로 갈 수 있다고 해서 조관우는 연극부에 들었고 큰 상도 탔다. 그러나 당시에는 연기를 잘해서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한 군데도 없었고 조관우는 절망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가야금을 가르쳐줘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악고는 음악 분야에서도 서울, 선화예고와 함께 본좌급 학교다.[5]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도 가야금을 연주하기도 하였고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 출연했을 때는 직접 가야금을 연주하기도 했다.[6] 비지스는 3인의 백인으로 구성된 형제 그룹으로 팝-락으로 시작해서 디스코까지 넘어간 그룹이다. 시대에 따라서 음악성이 많이 갈리는데 조관우가 참고한 것은 'Holiday' 등의 서정적인 팝발라드 시절이다.[7] 참고로 처음에 아버지 조통달은 고자 창법이라며 말렸다고 한다(...).[8] 다만 예능 '승승장구'에 출연해 "전성기때엔 클래식 기타가 제 소리를 못 잡았어요." 라고 밝힌 적은 있다.[9] 휘슬을 사용하지 않은 가성으로 4옥타브까지 올라간다... 창법이야 다르지만 그야말로 한국의 비타스.[10] 일본의 유명 가수 토쿠나가 히데아키도 리메이크를 많이 하고 목소리도 비슷한 스타일이어서 조관우와 비교되는 일이 잦지만 실제로 토쿠나가는 팔세토 창법을 사용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음역대가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한다.[11] 다만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대체로 100만 장 정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130만 장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명확치는 않다.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는 130만 장이라 나왔다.[12] 17년 가수 생활 동안 MBC 방송 출연이 15번밖에 안된다.[13] 8집에 실린 '중독'이라는 곡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사를 보면 "널 갖고 싶어 나 오늘도 혼자인채로 또 널 느끼네", "감당할 수도 없을만큼 커지고 혼자만의 상상 속에 빠져드는데", "어느새 끝은 허무해진 한숨뿐 사라져버리는 너" 등 '늪'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내용이 많으나 1~3집에 비해 8집의 인지도가 낮고 타이틀곡도 아닌지라 화제는 되지 않았다.[14] 2집은 1집보다 더 통계가 혼란스럽다. 당시 조관우의 소속사가 탈세를 위해 판매량을 거짓보고 했기 때문. 지난 2002년에 조관우 2집의 판매량이 320만 장을 넘었다는 보도가 난 적이 있다. 참고로 공식통계상 대한민국 가요계를 통틀어서 이 앨범보다 많이 팔린 앨범은 김건모 3집과 신승훈 5집, 그리고 방탄소년단 2장 딱 네 장뿐이다.[15] 여기 수록된 8곡 중 6곡이 리메이크 곡인데, 다 여자노래다. 심지어 여자노래에서 키를 높여 노래했다.[16] 주위에서는 떴으니 한 턱 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돈이 없어 도망다녔다고 한다.[17] 발매 당시가 아니라 서서히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 나중에 100만 장을 돌파한다. 4연속 밀리언 셀러 ㅎㄷㄷ.[18]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소재로 했으며, 박시은유인촌이 출연했다.[19] 정확하게는 박초월은 조통달의 셋째 이모로서, 조관우의 이모할머니가 된다. 단, 박초월이 조카이자 제자였던 조통달을 양자로 들였다는 자료도 있으나, 조통달의 아들 조관우와 박초월 사이에 대를 이어서 조손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20] 탤런트 출신이지만 원래는 조관우와 같은 소속사의 가수 지망생이었다. 결혼 후에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2006년에 본인의 앨범을 내서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다.[21] 히든싱어 조관우 편에 모창능력자로 나왔다.[22] 불후의 명곡에서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이 경연에 나와 피아노를 쳤고 부모님과 같이 유자식 상팔자에 출연한 적이 있다.[23] 그러나 이날은 1위와 최하위의 표차가 6%밖에 나지 않는 접전이 벌어졌던 날이다. 500명 중 6%인 30명 차이로 1등을 놓쳤다라고 생각하면 크게 부진한 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24] '단발머리' 에서 가사를 틀렸고 에드리브도 부족했다고 스스로 평했다.[25] 전성기 때만 하더라도 모두를 자지러지게 만드는 '''마성'''이었으나 지금은 중후한 팔세토가 되었다. 그 외에도 조관우의 음색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게 많이 변화한 시대 상황도 나름 요인이라면 요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