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규
1. 개요
前 KBO 리그 심판위원이자 심판위원장, 경기감독관.
2. 선수 시절
군산상고 시절부터 어깨가 좋은 포수로 좋은 평을 받던 선수였고[2] ,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4년에는 소속한 군산상고가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 등에서 8강, 청룡기에서는 준우승[3] 에 오르는데에 큰 활약을 펼쳤다. 이 때문에 청룡기 때에는 감투상을 받기도 하였고,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그를 '호남 고교야구의 간판스타'라고 칭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 해 임호균, 장효조 등과 함께 대만원정 청소년 야구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4]
군산상고 졸업 후 건국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때에도 '일발장타의 폭발력'을 지닌 선수로 평가받았다. 1976년 백호기에서는 조흥운과 함께 대회 사상 최초의 백투백 홈런을 치기도 했고, 그 해 대통령기에서는 7타수 4안타 0.571의 타율로 개인 타격상을 받기도 하는 등 매 경기 홈런타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듬해에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 장효조, 선우대영 등과 함께 미국 원정 대학야구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하였고, 그해 백호기에서 감투상을 받는 등 팀이 준우승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5]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에는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6] 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건국대 졸업 후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하였고, 이후 육군 경리단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다. 입대 직후 경리단은 한국실업야구 후기리그 1위를 하게 되어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 나가게 되었으나, 롯데 자이언츠에 밀려 준우승에 그친다. 조종규는 당시 마지막 경기인 6차전에서 역전 2점 홈런을 쳐낸 바 있다. 1982년에는 백호기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1차전에서 대회 첫 만루홈런을 쳐내면서 개인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실업야구 등을 거쳐 198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포수 최대어로 평가받으면서,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해태에는 원년멤버로 박전섭, 김경훈, 김용만, 홍순만 등 무려 4명의 포수가 있었고, 더군다나 그해 KBO 야구규약에 '해외 교포 선수' 조항이 생기면서[7] , 이에 따라, 드래프트 직후에 해태에서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뛰던 포수 김무종을 영입하게 되어 경쟁자는 5명으로 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입단 초기부터 치열한 주전 경쟁에 투신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결국 당시 해태 김응룡 감독은 상위 리그인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해본 김무종을 중용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원래 있던 4명의 포수들과 함께 조종규 또한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실제로 82년 당시 해태 주전 포수는 박전섭(45경기 106타수 23안타 7타점 7득점 0.217)과 김용만(56경기 102타수 15안타 7타점 7득점 0.147)이 번갈아 포수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김경훈(29경기 35타수 3안타 1타점 3득점 0.086)과 홍순만(11경기 13타수 1안타 2득점 0.077)이 간간이 1군에 출장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무종이 입단한 1983년 이후 박전섭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1군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박전섭도 85년까지 23경기 출전하는데 그치며 1987년 빙그레 이글스로 팀을 옮겼으나 결국 1988년 이후 은퇴한다. 홍순만은 1982년 시즌 후 방출된 뒤 1985년에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고 다음 해인 1986년에는 1군에 단 3경기만 출장하며 은퇴한다. 참고로 김무종은 1983년 93경기에 출장하여 309타수 81안타 12홈런 60타점 43득점 0.262의 성적을 보여주었는데, 위 4명과 기록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김무종이 자신의 실력으로 무려 4명의 밥그릇을 뺏은 셈. 여담으로 원년멤버 박전섭은 조종규의 군산상고 후배인데 둘 다 다른 학교 야구부 해체 후 전학을 왔다(박전섭-광주 숭의실고(75년 시즌 후) 조종규-한영고(73년 시즌 후)). 설상가상으로 김무종은 그해 12홈런에 0.262의 타율을 보여주며 타격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등 명실공히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결국 조종규는 입단 첫 해 17경기 27타수 1안타 0.037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1984년 OB 베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OB에는 이미 해마다 주전 경쟁을 벌이는 김경문과 조범현이라는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고, 이곳에서도 자리잡지 못한다. 그 해 성적은 29경기 출장하여 21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0.095이 전부.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하였고 1986년을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3. 심판위원 시절
1987년 2월에 KBO 리그 심판위원이 되었다.
2008년 2월까지 심판을 맡고 2008년 2월부터 심판위원장이 되었다. 그가 심판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오심이 많이 나와 논란을 빚었으나, 정작 자르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박근영.
2013년까지 심판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심판위원장을 그만둔 이후 2018년까지 KBO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하였다.
4. 사망
2019년 12월 28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날 윤석환의 직구 직설(2019.12.27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5. 연도별 성적
6. 2018년 6월 6일 (수요일) 잠실구장 사건 관련[8]
2018년 6월 6일 잠실구장에서 발생한 경기감독관 구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유일하게 알리바이가 없는 감독관(2018년 6월 11일 기준).
이 시점 5명의 감독관은 한대화, 김시진, 김용희, 임채섭, 조종규 등 5명인데 각자 알리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6월 7일부터 성희롱 감독관의 직무가 정지되었으므로''' 이후라도 감독관으로 활동하면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한대화는 6월 6일 마산 경기 감독관, 김시진은 주말시리즈 대구 경기 감독관, 김용희는 6월 6일 고척 경기 감독관, 임채섭은 주말시리즈 사직 경기 감독관이었기에 빼도박도 못 하는 확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