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운

 

'''조흥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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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3번'''
팀 창단

'''조흥운(1982~1985)'''

팀 해체
'''청보 핀토스 등번호 3번'''
팀 창단

'''조흥운(1985~1986)'''

양후승(1987)

[image]
어린이 팬들에게 싸인하는 현역 시절 조흥운.
'''이름'''
조흥운(趙興雲)
'''생년월일'''
1954년 8월 13일 (70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인천광역시
'''학력'''
인천고-건국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 원년멤버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77, 1980~1981)
육군 경리단 (1978~1979)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2~1986)'''
1. 개요
2.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1954년 8월 13일생 70세 야구선수. 인천고, 건국대를 졸업했으며,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에서 뛰었다.
아마시절엔 빠른 발과 펀치력으로 유명했으나 프로에 와선 홈런이라곤 없다시피 했으며 1982년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성적을 보이지 못했다.

2. 선수 생활


고교시절엔 인천고에서 4번타자를 맡으며 호성적을 올렸으며 1972년 열린 한일 고교 올스타전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대학교 시절에도 건국대의 클린업 트리오의 일원으로 홈런을 적시적소에 쳐대며 1974년 대학야구가을리그의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나 1976년 백호기에서 조종규와 함께 이루어낸 대회 최초의 백투백 홈런 같은 진기록도 뿜어냈다. 실업야구 시절엔 한국화장품 야구단의 창단멤버로 1977년 우승에 힘을 보탰으며, 1978년과 1979년에는 육군 경리단에서 뛰었다. 그 후 1980년에는 한국화장품에 복귀해 1981년까지 뛰었다.
1982년에는 인천 출신이니 삼미슈퍼스타즈 창단멤버로 참가. 여기서 웃긴 점이 있다면 1981년 기사를 보면 조흥운을 모두 삼미의 주력타자로 봤으나 한 신문에선 포수, 다른 신문에선 외야수로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내야수로 뛰었다는 점.
부족한 팀 상황에서 도루 2위 기록인 44개를 기록했으며 타율 또한 팀내 최고인 0.284를 기록했다. 단, 타자의 생산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wRC+[1]에선 104로 121.5인 금광옥에 뒤져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2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경우 더 놀라운데, 전반기가 끝나던 시점에선 타율 0.325로 리그 9위를 찍고 있었으며 도루의 경우 29개의 도루를 기록해 김일권을 누르고 전반기 도루왕을 차지했기 때문[2]. 올스타전에도 베스트 10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감독추천으로 3루수로 출전했다.
하지만 그 후 후반기에 팀내 주력 타자인 양승관, 금광옥이 부상으로 빠지고 전반기에 0.338을 찍던 김경남이 극심한 부진으로 0.269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김호인 또한 부진한 상황 속에 조흥운이 그나마 잘 견뎌내서 0.284인 것. 김은식의 기사에선 4월 25일 대첩 후 감독대행을 맡은 이선덕의 조급증을 이런 부진의 원인으로 뽑았다. 후반기에 도루가 조금만 추가된 것은 출루율 자체가 낮아진 것도 있지만 박현식 감독과 이선덕 감독대행의 성향차이 때문으로 시도 자체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는 기사도 있다.
그래도 별다른 선수도 없던 1982년에도 이 정도 성적이었으니 이선웅, 정구선, 이영구, 김진우 등이 보강된 1983년에는 더 잘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 이후 폭망. 타율 0.240를 넘긴 시즌이 한 번도 없었다. 1983년엔 성적이 폭락한 선수로 곧잘 언급되곤 했다. 당시 긍정적인 기사는 장명부와 친한사이라는 거 정도? 1983년 시즌이 끝난 후엔 삼성 라이온즈에서 김한근+함학수<->조흥운+금광옥 트레이드를 제안했으나 무산.
1985년 청보 핀토스로 팀이 바뀔 때는 팀 대표로 인터뷰에 나와 충격이다란 말과 함께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란 말을 남겼는데 1985년 시즌 종료 후 계약양도 선수로 나오며 은퇴하게 된다.

3. 은퇴 이후


1987년에는 은퇴한 팀동료인 김호인, 허운과 함께 심판 합격 1차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야구팬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다른 길을 걸어간 조흥운과 달리 김호인과 허운 이 둘은 심판계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훗날 파벌 싸움도 벌인다.
이후 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았고 1998년에는 부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자리를 맡았다. 그 뒤엔 포천시에서 동생과 함께 유리사업을 했다. #
2012년엔 임호균과 함께 야구 박람회에 참석했었다.

4. 기타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출연. 빠른 발을 가진 선수로 나왔으며 싸인 무시하고 도루 시도 했다 도루사 하거나(…) 양승관의 에러성(…) 안타 타구 때 1루에서 스타트해서 득점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 도루가 주특기라 스파이크를 매일 깨끗이 닦는 습관이 있었는데 영화에선 나올 때마다 뭘 닦는 장면을 보여줘서 이 습관을 고증했다고 한다.
마구마구에선 조독운이란 가명으로 등장.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미
79
299
.284
85
16
4
4
35
43
'''44'''
(2위)
24
.405
.338
1983
80
254
.236
60
9
4
0
27
24
11
17
.303
.284
1984
46
126
.206
26
6
0
1
6
17
7
10
.278
.26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삼미 / 청보
59
90
.178
16
2
0
0
3
13
7
10
.200
.257
1986
청보
18
5
.000
0
0
0
0
0
3
0
0
.000
.000
<color=#373a3c> '''KBO 통산'''
(5시즌)
282
774
.242
187
33
8
5
71
100
69
61
.324
.297
[1] 스탯티즈 기준[2] 김일권이 조흥운을 앞선 것은 하루 5개의 도루를 기록한 후기리그 7일 째부터였다. 그 당시 조흥운 30, 김일권 29->34. 당시에도 전반기랑 후반기 타이틀 시상을 따로 하지 않았기에 사실 전반기 도루왕이란 타이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