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힐
1. 개요
NBA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소속의 농구선수로,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이다.
2. 커리어
2.1. NBA 입성 전
유년기 시절, 언젠가 NBA에서 뛰고 싶은 꿈을 꾸기 위해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와 같은 선수들을 동경하였으며 Broad Ripple 고등학교에 입학해 마지막 학년 때 1경기당 평균 36.2득점을 올리며 역대 시즌 5위를 기록했다.
고등학교 때 활약을 인정받아 인디애나 대학교를 비롯해 수많은 대학교 팀으로부터 영입을 거절하고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나가기 부담스러워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IUPUI[1][2] 에 입학했다.
2.2. NBA 입성 후
2.2.1. 샌안토니오 스퍼스
IUPUI에서 4년동안 활동하면서 4학년 시즌에 21.5 평득/6.8 리바/4.3 어시를 기록하며 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한 힐은 2008 NBA 드래프트에 지원했고, 힐의 공격능력을 높이 평가한 그렉 포포비치 감독의 선택으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입단했다. 현재까지 IUPUI 유일한 드래프티.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의 역할은 토니 파커와 마누 지노빌리의 브릿지, 백업 역할로, 듀얼 가드로써 주로 파커의 볼 핸들링을 보조하면서 2대2 공격이나 3점 받아먹기에 주력하는 3&D 키 식스맨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2011년 상황이 바뀐다. 카이리 어빙을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적인 유망주가 나오지 않아 흉년으로 평가받던 드래프트 유망주들을 살펴보던 중 포포비치가 샌디에이고 스테이트라는 2부리그급 대학교의 한 팔 길고 잘 뛰는 포워드 선수를 발견한 것. 포포비치는 이 선수에게 푹 빠졌고 이 선수를 반드시 지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가진 드래프트 순위가 너무 낮았다. 당시 스퍼스는 1라운드 끝자락인 29번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선수가 아직 다른 팀의 레이더에는 포착되지 않았지만 뺏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포포비치는 결단을 내려서 당시 등부상의 후유증이 재발하며 급격히 유리몸이 된 T.J 포드 때문에 대런 콜리슨 1명으로 겨우 버틸만큼 1번 뎁스가 약했던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새 헤드코치 프랭크 보겔에 문의하여, 조지 힐과 1라운드 15순위 트레이드에 합의했고 페이서스가 스퍼스의 요청대로 지명해 교환하기로 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바로 '''카와이 레너드'''.[3]
2.2.2. 인디애나 페이서스
그렇게 루키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팀을 옮긴 조지 힐은 스퍼스때처럼 슈팅 가드에 가까운 듀얼 가드가 아닌 주전 포인트 가드 대런 콜리슨의 백업으로 좀 더 포인트 가드에 가까운 위치 이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핸들링이 되는 장신 스윙맨이었던 폴 조지와 공을 나눠 가지면서 플레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부터 주전 포인트 가드 역할을 맡았다. 팀은 지난 시즌 주전 1번이었던 대런 콜리슨을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시키고, 시즌 개막 직전 무릎을 크게 다친 팀의 상징 대니 그레인저 대신 2년차 랜스 스티븐슨을 주전 2번, 폴 조지를 주전 3번으로 옮기는 변혁을 단행했다. 이는 성공적으로 안착해 그동안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대니 그레인저와는 이후 다소 불편하게 이별했지만, 힐과 스티븐슨에게 백코트를 맡긴 선택이 적중하여 페이서스는 보겔 지도 하에 조지 힐, 랜스 스티븐슨, 폴 조지, 데이비드 웨스트, 로이 히버트라는 단단한 수비팀을 구축해 11~12시즌에는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13~14시즌에는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가는 강력한 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동부에는 끝판왕 르브론 제임스가 버티고 있었고, 빅 3가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의 벽에 가로막혀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2.2.3. 유타 재즈
그렇게 제임스에 막혀 파이널을 못간 페이서스는 팀 재편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팀의 감독을 네이트 맥밀란 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감독으로 교체한다.
똑같이 수비지향적이지만 좀더 속공 전환을 좋아하는 맥밀란 스타일에 조지 힐은 주전 1번으로써 부족했고 특히나 히트와의 경기에서 지적되었던 탑에서의 볼 간수능력 부족때문에 힐을 믿지 않았던 맥밀란은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힐을 유타 재즈로 보내고, 애틀랜타 호크스의 제프 티그를 영입한다.
그렇게 유타로 떠난 힐은 커리어 하이인 16.9 평득을 올렸고, FA가 되어 다시 유타를 떠난다.
2.2.4. 새크라멘토 킹스
FA가 된 힐은 킹스와 3년 5700만 달러의 거액 계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약체팀이었던 킹스는 힐과 계약하면서 동시에 드래프트 전체 6순위로 제2의 스테판 커리로 기대받던 오클라호마의 가드 버디 힐드를 지명한다.
힐드의 지명은 곧 주전 경쟁을 의미했고, 3년 계약을 했지만 돈값을 그다지 못한 힐은 다음해 2월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한다.
2.2.5.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페이서스 시절 자신을 가로막던 끝판왕 르브론 제임스의 팀으로 와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된 힐은 캐벌리어스에서 생애 첫 NBA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된다.
수비가 니갱망 수준이었던 클리블랜드에서 괜찮은 슈팅과 수비능력으로 무난히 기여했으나, 대부분의 팬들에게 클리블랜드에서 조지 힐에 대한 기억은 파이널 1차전에서 역전 자유투를 놓친 장면 뿐(...)[4]
2.2.6. 밀워키 벅스
파이널은 진출했지만 혼란기가 길었던 캡스는 17~18시즌 종료후 르브론 제임스가 다시 고향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하고, 동시에 18~19시즌 초반 일어난 케빈 러브의 왼쪽 엄지발가락 부상 장기화로 사실상 탱킹팀이 되어버리면서 힐도 잉여자원화 되었다. 그때문에 힐은 2018년 12월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벅스와 3년 2900만 달러의 연장계약을 체결했다.
2.2.7.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2019-20시즌 종료 후, 즈루 홀리데이가 메인 트레이드 칩인 밀워키, 뉴올리언스, 덴버, 오클라호마의 사각 트레이드에 따라 밀워키를 떠나 뉴올리언스 소속이었던 조쉬 그레이, 다리우스 밀러, 켄리치 윌리엄스, 질런 치덤과 함께 오클라호마에 새 둥지를 틀었다. 등번호는 전임자 크리스 폴의 3번을 물려받았다.
OKC에서는 주전 포인트 가드로 활약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경기 운영과 베테랑 보컬 리더로서의 존재감으로 팀이 예상 이상의 승수를 거두는 데에 한몫을 하고 있다. 시즌 중반 컨텐더 팀들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있다. OKC가 2021 지명권을 가지고 있는 클리퍼스로는 갈 수 없겠지만...
3. 플레이 스타일
'''볼소유가 적고 효율적인 3&D 포인트 가드'''
3점 슛과 수비가 뛰어난 선수로 3&D타입의 포인트 가드이다. 스팟업 슈팅에 능하며, 몸이 얇고 팔이 길어서 악착같아 달라붙어 컨테스트를 하는 플레이에 능숙하다. 이 점은 조지 힐이 샌안토니오 스퍼스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유는 샌안코치진이 이 점을 잘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사이즈가 좋아 슈팅 가드 롤도 볼 수 있다. 볼 소유가 적어도 되는 포인트 가드이기 때문에 가드가 아닌 선수가 리딩을 보던 팀인 과거의 르브론 제임스가 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나 현재의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있는 밀워키 벅스와 같은 팀에 매우 어울리는 선수이다.[5] 그렇기 때문에 2019-20 시즌에도 벅스가 힐을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9-20시즌 3점 성공률 40%를 넘나들며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 선수의 가장 큰 단점은 역시 포인트 가드를 보기에는 무리인 드리블 실력이다. 드리블이 높고 불안정하며 패스 능력도 좋지 않아서 주전 포인트 가드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 돌파력에도 한계가 있어 많은 롤을 맡기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식스맨 포인트 가드로 쓸 때 최고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선수다.
4. 관련 문서
[1] 건강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서 진학했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힐이 진학처를 결정한지 몇개월 뒤에 숨을 거두었다.[2] 인디애나 대학교와 퍼듀 대학교가 공동으로 인디애나폴리스에 세운 분교다.[3] 만약 트레이드 없이 그대로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레너드를 지명했다면 2020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서 결성된 레너드-폴 조지의 조합이 더 빨리 실현될 수도 있었다.[4] 2018년 역대 최강급 팀이었던 골스를 상대로 르브론이 본인의 커리어에서도 최고로 꼽힐 만한 퍼포먼스를 보이며(51득점 8어시스트 8리바운드, 야투 19/32, 3점 3/7, 자유투 10/11)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승리를 가져가나 했지만,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1점 뒤진 상태에서 조지 힐이 자유투 2구 중 두번째를 놓쳤다. 하지만 직후 발생한 전설의 명장면으로 조지 힐의 자유투 미스는 완전히 묻혀버린다(...)[5] 인디애나 페이서스 시절에는 랜스 스티븐슨이 실질적인 포가롤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