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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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 2군 감독 겸 타격코치 재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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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타격코치 시절
1. 소개
KBO리그 초창기 인천야구를 대표했던 '''인천 프로야구의 초대 프랜차이즈 스타'''.
2. 선수 경력
인천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타자로 각광받았고, 인하대학교에 진학하여 인하대 야구부의 창단 멤버로 대학야구 타격왕, 홈런왕을 석권했다. 실업야구 포항제철 야구단을 거쳐 1982년 한국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고향인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창단 당시 삼미는 원년 구단 6개 가운데 자타가 공인하는 최약체였는데,[3] 그 팀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선수로 평가받았던 인물이 바로 양승관이었다. 외야수로서 적절한 타격 실력과 상당히 뛰어난 수비력을 가지면서 삼미의 외야를 지켰고, 그 결과 외야수 골든 글러브의 원년 수상자가 되었다.
특히 대한민국 외야수 역사상 최고의 어깨를 꼽으라면 늘 첫 손에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인데, 경기 시작전 토스로 몸을 풀때 홈 플레이트에서 다이렉트로 중앙 펜스를 쉽게 넘기는 무시무시한 강견을 자랑했다. 게다가 송구의 정확도도 대단해서, 엄청난 보살 장면을 밥먹듯 연출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는 우익수에서 '''안타 타구를 잡아 1루로 던져서 우익수 땅볼을 만든 것'''. 그리고 이 때 타구를 친 선수는 '''전설적인 도루왕인 해태 타이거즈의 김일권'''이었기 때문에 양승관의 어깨가 그야말로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4] 또한 삼성 라이온즈의 황규봉이 삼미를 상대로 9회 1사까지 완벽하게 막아 퍼펙트 게임을 눈앞에 뒀으나 양승관이 안타를 치면서 치욕스런 기록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원년 삼미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상모까지 돌리는 활약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원년부터 1989년까지 팀 이름이 삼미-청보-태평양으로 바뀌는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함께 했다. 1983년 장명부의 가세와 함께 반짝 돌풍을 일으킬 때 3할 타자로서 한몫했고, 팀이 끝없는 연패에 빠질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잦은 부상 때문에 실제 가동 시즌 자체가 적었다. 쇄골 뼈 부상, 인대가 끊어지고, 발목 부상, 허벅지 부상 등등. 결국 1989년을 끝으로 태평양에서 방출당한 후 자신의 스승이던 백인천 밑으로 가서 한 시즌을 더 뛰고, 1990년 한국시리즈를 마지막으로 LG 트윈스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양승호의 뒤를 이어 파주 챌린저스 단장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LG 코치, 태평양 타격 코치, 현대 타격 코치, SK 타격 코치, 롯데 외야수비 코치 등을 역임하다가, 롯데 시절 그를 부른 백인천이 백골프로 흑화하면서 해임된 후, 한동안 프로 무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교인 인하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인하대학교 야구부 감독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12년 넥센 히어로즈의 2군 감독을 맡아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2012년 시즌 종료 후 넥센의 코치진 개편에 따라 2군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 NC 다이노스의 2군 타격코치로 새롭게 부임했다. 스카우트로 일하던 동생 양후승도 2군 재활코치에 선임되면서 형제 코치가 탄생했다. 2013 시즌 종료 후 NC 다이노스의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한편 동생은 다시 스카우트로 보직 변경.
2016년 시즌 종료 후 신진발굴을 위해 C팀 타격코치로 이동하였다.
2018 시즌 이도형, 김민호 1군 타격코치 체제에서 프로야구 37년 역사상 가장 낮은 65의 wRC+를 4월까지 기록하면서 결국 1군 타격코치로 올라왔다. 하지만 2018년 6월 3일 김경문 감독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유영준 단장이 감독대행을 맡으면서 코치진 개편 때 김평호 코치와 함께 스스로 사임하고 팀을 떠났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5. 여담
- 김은식 이 본인의 저서인 "야구의 추억"의 첫 번째 인물로 꼽았던 인물이다. 연재 제목은 "슈퍼스타즈의 유일한 스타, 양승관."
-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김혁이 양승관 역을 맡아 삼미 선수들을 아니꼽게 생각한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달리 실제로는 삼미의 클럽하우스 리더로서 언제나 선수들을 따뜻하게 독려했다고 한다.
- 동생인 양후승과 양주승 모두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한 때는 3형제 모두 야구 지도자로 활동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바로 아래 동생인 양후승은 고교 야구 지도자로 명성을 떨쳤고, 양주승 역시 오래동안 아마야구 지도자로 활약했다. 다만, 이들 형제 중에서 선수로서 가장 대성한 것은 큰형인 양승관이다. 양승관과 양후승은 청보 핀토스 시절인 1986년 프로야구 최초의 한경기 형제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 아들인 양원혁 선수 또한 인하대학교 출신이다. 2013년 졸업 후 LG 트윈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여 2015년에 처음으로 1군에 올랐다. 본인은 LG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아들은 LG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셈.
[1] 청보 핀토스에서 데뷔해서 태평양 돌핀스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선수 생활을 한 뒤 1992년 시즌 후 은퇴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모교인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했는데 2004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와 2005년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 최우수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하며 인천고의 반짝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재원, 이명기, 김재환 등이 그가 인천고 감독 시절 키운 제자들이다. 야인으로 지내다 형 양승관과 함께 NC 다이노스에 둥지를 틀었고 현재 NC 다이노스 스카우트팀장으로 재직 중이다.[2] 3형제 중 막내지만 프로 선수 데뷔는 하지 못했다. 대신 모교인 인천숭의초등학교 야구부 감독만 20년 역임했다고 알려져 있다.[3] 단적인 예로 삼미 창단 선수단에는 국가대표 경력의 선수가 없다시피 했다.[4] 여담으로 김일권은 삼미 상대로 홈스틸을 해냈을 정도로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