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그리브스
1. 소개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잉글랜드 축구계를 평정한 희대의 스트라이커였다. 첼시에서 17살에 데뷔한 이래 4시즌 동안 124골을 몰아치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고 토트넘 역대 최다 득점자(266골)이다. 또한 국가대표로서도 해트트릭을 6번 기록하는 등 무지막지한 활약을 선보이며 통산 57경기 44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 내내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 전성기를 일찌감치 마감했고 이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평생 고통받고 있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2.1. 첼시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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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그리브스는 1940년 2월 20일 에섹스 주의 마너 파크에서 태어났고 런던의 에노에서 자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첼시 FC의 스카우트를 받아 학교에서 축구를 익혔고 1955년 첼시 유스팀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그후 그리브스는 유스팀에서 1955-56시즌에 51골(!), 1956-57 시즌에 122골(!!)을 몰아치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또한 1958 FA 유스컵 대회 결승전에서 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정작 팀은 올버햄튼에게 홈원정 합계 7:6으로 패했다.
이후 그리브스는 1957년 여름 1군에 합류했고 곧바로 유스팀에서 보여줬던 무지막지한 득점 능력을 보여줬다. 이 17살의 소년은 1957년 8월 24일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작렬해 팀의 1:1 무승부에 기여하더니 1957-58 시즌 37경기에 출전해 22골을 기록해 잉글랜드 전역에 대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브스는 1958-59 시즌에 지난 시즌 리그 챔피언인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상대로 5골을 몰아넣으며 팀의 6:2 대승에 기여했다. 이후 첼시는 14위에 그쳤지만, 그리브스는 44경기에 출전해 32골을 기록, 리그 득점왕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1959-60 시즌, 그리브스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를 상대로 5골을 몰아넣어 5:4 승리에 기여하는 등의 활약을 선보이며 40경기에 출전해 29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첼시는 그의 이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강등권과 승점차가 3점에 불과한 18위를 거두는 데 그쳤다. 1960-61 시즌, 그리브스는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블랙번 로버스 FC,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 FC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노팅엄 포레스트 FC를 상대로 4골을 몰아넣었고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FC를 상대로 5골을 기록, 팀의 7:1 완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그는 1960년 11월 19일 맨시티 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할 때 개인 통산 100번째 골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0살 290일로, 이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100골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브스는 자신의 이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첼시가 강등권에 인접한 성적이나 거두며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환멸을 느꼈고 마침 AC 밀란이 그를 영입하려 하자 즉각 구단에 이적을 요청했다. 이에 조 미어스 회장은 그리브스의 이적에 동의했고, 그리브스는 1961년 4월 29일 1960-61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해 노팅엄 포레스트 FC를 상대로 4골을 몰아넣으며 4:3 승리를 이끈 후 밀란으로 이적했다. 그리브스는 1960-61 시즌에 40경기에 출전해 41골을 기록하며 또다시 리그 득점왕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첼시에서 통산 169경기에 출전해 132골을 기록했다.
2.2. AC 밀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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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6월, 그리브스는 세리에 A의 명문구단 AC 밀란에 8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입단했다. 이때 그는 한주에 140파운드를 받았고 1만 5천 파운드의 보너스도 지급받았다. 그런데 그리브스는 돌연 런던을 떠나고 싶지 않아져서 계약이 성립되기 전에 취소하려 했다. 그러나 그를 영입하는 것을 주도한 당시 AC 밀란 감독 주세페 비아니가 그런 그를 애써 설득했고 결국 그리브스는 밀란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그런데 시즌이 시작되기 전, 비아니는 느닷없이 심장마비에 걸리는 바람에 축구계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 새 밀란 감독으로 부임한 네레오 로코는 선수의 자율성보다는 체계적이고 엄격한 훈련 체제로 선수단을 통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첼시에서 자유롭게 훈련에 임하는 것에 익숙했던 그리브스는 로코의 이같은 성향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두 사람간의 불화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래도 그리브스는 밀란에서 14경기 9골을 기록하며 득점기계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런데 삼프도리아 전에서, 그리브스는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상대선수를 걷어차는 바람에 퇴장당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리브스의 퇴장으로 프리킥을 얻어낸 삼프도리아는 이를 잘 살려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결국 그 때문에 승리를 놓쳤다고 판단한 네레오 로코 감독은 그리브스가 그날 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문에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불화는 극에 달했고, 그리브스는 방출명단에 등재되었다. 이에 첼시와 토트넘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1961년 12월 토트넘 측이 9만 9천 999파운드[1] 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그를 전격 영입했다. 훗날 그리브스는 자신의 밀란 행에 대해 "젊은 나이에 저지른 실수였다."고 회고했으며 네레오 로코 감독이 잉글랜드인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2.3. 토트넘 홋스퍼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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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 토트넘에 이적한 그리브스는 곧바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블랙풀과의 홈경기에서 플라잉 시저스 킥을 선보이는 등 멋진 슈팅 감각을 선보이며 해트트릭을 기록, 팀의 5:2 승리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FA컵에서 7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하며 팀을 FA컵 우승으로 인도했다. 이후 토트넘은 리그에서만 22경기 21골을 몰아친 그의 대활약을 앞세워 리그 3위를 기록했는데, 리그 우승팀인 입스위치 타운 FC와의 승점차는 4점에 불과했다.
그리브스는 1962년 커뮤니티 쉴드에서 입스위치 타운을 상대로 2골을 기록해 팀의 5:1 완승에 기여했다. 또한 1962-63 시즌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윕스위치 타운, 그리고 리버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는 4골을 기록해 9:2 완승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토트넘은 리그 41경기 37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선정된 그리브스의 활약을 앞세워 리그 준우승을 거뒀는데, 리그 우승팀인 에버튼과의 승점차는 6점이었다.
또한 그리브스는 유러피언 위너스컵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결승전에 진출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준결승전 1차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축구 구단 OFK 베오그라드의 센터백 Blagomir Krivokuća를 폭행하는 바람에 퇴장당해 결승전에서 나오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UEFA가 그에게 1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를 내린 덕분에, 그리브스는 결승전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후 그리브스는 결승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5:1 승리에 기여해 토트넘의 위너스컵 우승에 공헌했다. 이로서 토트넘은 잉글랜드 축구팀 중 최초로 유럽 대회를 우승한 팀이 되었다.
1963-64 시즌, 빌 니콜슨 감독은 핵심 선수들을 대거 물갈이하는 리빌딩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브스는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팀의 핵심 스트라이커로서 역할을 수행했고 1963-64 시즌에 노팅엄 포레스트, 블랙풀, 버밍엄 시티, 그리고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토트넘은 41경기 35골을 기록한 그리브스의 활약을 앞세워 4위를 기록했는데, 리그 우승팀인 리버풀과의 승점차는 6점에 불과했다. 그후 토트넘은 1964-65 시즌에 6위로 떨어졌지만, 그리브스는 41경기 29골을 기록해 여전한 득점 기계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1965-66 시즌, 그리브스는 평소 술을 지나치게 마신 여파로 간염에 걸리는 바람에 3개월 동안 재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복귀 후에는 역시나 득점 능력을 과시해 31경기 16골을 기록, 팀내 득점 1위를 기록했다. 다만 토트넘은 그가 빠진 여파를 메꾸지 못해 8위로 추락했다.
1966-67 시즌, 그리브스는 47경기 31골을 기록, 토트넘이 리그 선두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승점차가 4점에 불과한 3위를 찍는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FA컵에서 8경기 6골을 기록해 팀을 결승전으로 진출시켰고 토트넘은 FA컵 결승전에서 첼시를 2:1로 격파하고 우승을 달성했다.(다만 그리브스는 결승전에선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1967-68 시즌, 토트넘은 실망스럽게도 7위로 떨어졌고 FA컵과 위너스컵도 일찌감치 탈락했다. 이때 그리브스 역시 그동안 보여준 활약상에 비해서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다만 그 '저조한 성적'이라는 게 39경기 23골(...)이었고 팀 내에서는 여전히 득점 1위였다. 이후 1968-69 시즌, 그리브스는 42경기 27골을 기록하며 토트넘을 6위로 올렸다. 그러나 1969-70 시즌 토트넘은 성적이 떨어졌고 그리브스 역시 1970년 1월 28일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FA컵 경기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 팀의 패배를 막지 못한 뒤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도 그는 이 시즌에 33경기 11골을 기록해 팀내 득점 공동 1위를 기록했다.
1970년 3월, 그리브스는 마틴 피터스 선수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웨스트햄으로 이적하면서 영광스러웠던 토트넘에서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토트넘에서 통산 381경기 266골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2.4.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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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브스는 웨스트햄으로 이적하기 전에 더비 카운티의 명장 브라이언 클러프로부터 이적을 제의받았다. 하지만 그리브스는 런던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아서 런던의 축구팀인 웨스트햄을 선택했다. 그는 3월 21일 웨스트햄 선수로서 데뷔전을 치뤄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2골을 기록, 팀의 5:1 완승에 기여했다. 그런데 1971년 1월, 그리브스는 블랙풀과의 FA컵 경기를 앞두고 경기 전날 술 마시지 마라는 론 그린우드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팀동료인 바비 무어, 브라이언 디어, 그리고 클라이드 베스트와 함께 밤늦게 술을 마셨다. 그리브스와 그의 팀동료들은 경기장 잔디가 서리로 인해 얼어붙어 경기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기자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경기가 취소될 거라고 지레짐작해 동료들과 함께 라거 12병(!)을 마시고 새벽 1시 45분까지 웨스트햄 선수들이 숙박하고 있는 호텔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경기는 열렸고 웨스트햄은 4:0으로 완패했다. 그리브스는 전날 밤 술을 진탕 마신 것 때문에 패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웨스트햄 보드진은 당연히 그의 형편없는 프로 의식에 분노해 결국 그리브스를 전격 방출했다.
웨스트햄 시절, 그리브스는 체중 관리에 실패했고 동기 부여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팀동료들의 실력이 너무도 형편없다고 느꼈고 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종종 웨스트햄 훈련장 근처의 술집으로 가서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술을 퍼먹었다. 이런 와중에도 40경기 13골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의 축구 선수로서의 실력은 실로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러나 갈수록 나태해지고 알코올 중독의 초기증상마저 보이니, 웨스트햄으로서는 그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5. 선수 말년
그리브스는 웨스트햄을 떠난 후 4년간 축구 경기장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종일 술을 마셨고 얼마 안가서 알코올 중독에 걸려버렸다. 그는 하루동안 20파인트에 달하는 라거를 마셨고 저녁에는 보드카 한 병을 마셨다. 훗날 그는 이러한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기도 했음을 시인했다. 이러한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브스는 1976년 12월 논리그 팀인 브렌트우드에 입단함으로서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재개했다. 이후 1976년 여름, 그리브스는 첼름스퍼드 FC로 이적해했으나 거기서도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급기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장기 입원해 치료받아야 했다.
1977년 8월, 그리브스는 바넷에 입단해 미드필더로서 경기를 뛰며 25골(리그에선 13골)을 기록해 바넷 구단의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와중에도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1979년 우드포드 타운 FC로 이적해 1980년까지 활약하다가 1980년 선수 인생을 정리했다.
2.6.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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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브스는 1957년 9월 25일 잉글랜드 U-23 대표팀 선수로서 불가리아와의 경기에 출전해 대표팀에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날 그는 2골을 기록해[2] 대표팀의 6:2 완승에 기여했다. 그리브스는 1959년 5월 17일 페루와의 경기에 출전함으로서 성인 국가대표팀으로서의 경력도 시작했다. 이날 잉글랜드는 4:1로 완패했는데, 그리브스는 잉글랜드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는 아메리칸 대륙 친선 대회를 치뤘으나 페루, 브라질, 멕시코에게 완패하는 등 성공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리브스는 자신의 잠재력을 잘 발휘해 다른 선수들에게는 맹비난을 퍼붓던 언론에게 호의를 샀다.
1960년 10월 8일, 그리브스는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리고 10월 19일, 그는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역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1961년 4월 15일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 9:3 완승을 이끌어내 잉글랜드 축구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 후 1962년 칠레 월드컵이 열렸을 때,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로서 4경기를 치렀다. 그중 아르헨티나와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그리브스는 한 골을 기록해 대표팀의 3:1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2라운드에서 브라질에게 패해 대회에서 탈락했다.
1962 칠레 월드컵 잉글랜드 VS 브라질과의 2라운드 경기 때, 개 한마리가 경기장에 난입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선수들은 왠 개가 느닷없이 경기장에 뛰어들어오자 알아서 나가겠거니 하고 무시하거나 신경질적인 태도로 나가라고 손짓할 뿐 개를 내보내려는 별다른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그리브스는 뜬금없이 네발로 기어가며 개에게 친근하게 대하더니 번개같이 개의 목덜미를 잡아 생포한 후 경기 진행요원들에게 넘겨줬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 선수였던 가린샤는 그리브스의 이 같은 행동에 감명을 받았고 경기장에 난입한 그 개를 애완동물로 삼았다고 한다.
1963년 11월 20일, 그리브스는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4골을 기록하며 8:3 대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다음해 10월 3일, 그는 또다시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또한 1966년 6월 29일 노르웨이와의 친선경기에서 4골을 퍼부으며 6:1 완승을 이끌었다. 이렇듯 대활약을 선보인 그리브스는 당연히 조국에서 열리는 1966년 월드컵의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리브스는 조별 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했고 잉글랜드는 순조롭게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런데 조별 예선 3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프랑스의 미드필더 조세프 보넬의 태클로 인해 그의 정강이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가 입은 부상은 심각해서 14바늘이나 꿰매야 했고 이로 인해 생긴 흉터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었던 그리브스는 열심히 재활해 결승전에서 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알프 램지 감독은 그를 대신해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제프 허스트를 믿어보기로 결정해 결국 그리브스는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1966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우승을 차지했으나, 당시 규정상 오직 결승전에서 출전한 11명의 선수만이 메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브스는 메달을 받지 못했다. 그는 훗날 이 당시에 느꼈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이에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FIFA에게 모든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에게 메달을 수여해달라고 요청했고 마침내 2009년 6월 10일, 그리브스는 고든 브라운 FA 회장에 의해 메달을 수여받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2014년 11월, 그는 정작 이 메달을 옥션에 넘겨 4만 4천 파운드의 수익을 챙겼다(...)."나는 모두와 함께 승리를 만끽했지만 위대한 행복의 순간에도 깊은 슬픔을 느겼다. 나는 축구 선수로서의 경력 내내 월드컵 결승전에서 뛰기를 꿈꿔왔다. 내가 결승전을 놓친 것은 나에게 있어 일생 일대의 상처였다."
그리브스는 1966 월드컵 이후 대표팀에서 3경기를 출전해 1골을 기록한 뒤 1968년 대표팀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57경기에 출전해 44골을 기록해 웨인 루니, 보비 찰튼, 게리 리네커에 이은 잉글랜드 역대 최다 득점 4위에 랭크되었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6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잉글랜드 선수들을 가장 많은 해트트릭 기록이다.
3. 플레이 스타일
그리브스는 뛰어난 위치 선정, 오프 더 볼과 헤딩, 그리고 엄청난 골 결정력, 날아오는 공을 다이렉트 슛으로 연결하는 테크닉도 있었다.
4. 은퇴 후의 삶
축구 선수 인생을 마감한 뒤, 그리브스는 1980년대 초 더 선 신문지의 칼럼니스트가 되어 30년간 매주 일요일에 칼럼을 연재했다. 또한 그는 1980년부터 축구 전문가로 활동했고 1982년 FIFA 월드컵 때 ITV의 초빙을 받고 축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이후 그리브스는 '스포츠 오브 월드'의 MC인 이안 세인트 존과 파트너쉽을 맺고 1985년 10월부터 1992년 4월까지 '세인트 앤 그리브스'라는 축구 쇼를 선보였다.
세인트 앤 그리브스 프로그램이 끝난 뒤, 그리브스는 방송계를 떠나 가끔씩 TV에 출연할 뿐 일반인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갔다. 2003년, 그는 자신의 자서전 'Greavsie'를 출간했고 평생동안 친구 사이를 유지했던 기자 겸 작가인 노먼 길러와 함께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이렇듯 축구 선수 인생을 정리한 뒤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이지만 그놈의 알코올 중독은 그의 말년을 괴롭게 만들었다. 2012년 2월, 그리브스는 경미한 뇌졸증을 앓은 후 목 부분의 동맥 수술을 받았다. 그후 2015년 5월 심한 뇌졸증이 발생해 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사들은 그의 회복이 더디게 진행될 것이며 평생 걸을 수 없게 될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이후 그는 현재까지 실어증에 걸린 채 휠체어를 타고 뇌졸중에서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2020년 4월 8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토트넘 핫스퍼 공식 SNS에 올라왔다.[3]
2020년 12월 31일, 5등급 대영제국 훈장 (MBE) 를 수훈 받았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토트넘 홋스퍼 FC
- FA컵: 1961-62, 1966-67
- 채리티 실드: 1962, 1967
-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1962-63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66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4, 1965, 1966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3위: 1963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득점왕: 1958-59, 1960-61, 1962-63, 1963-64, 1964-65, 1968-69
[1] 영국 축구 역사상 10만 파운드를 넘은 선수로 기록될 시 받을 압박감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가격을 책정했다고 한다.[2] 이때 그리브스는 페널티 킥을 실축해 해트트릭을 아쉽게 놓쳤다.[3]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