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캐슬 유나이티드 FC

 




[image]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Newcastle United F.C. '''
'''정식 명칭'''
<colcolor=black,white>Newcastle United Football Club
'''애칭'''
'''The Magpies (맥파이스)
Toon (툰)[1]
The Geordies (조르디스)[2]
'''
'''창단'''
1892년 12월 9일
'''소속리그'''
'''프리미어 리그 (The Premier League)'''
'''연고지'''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타인 위어뉴캐슬어폰타인 (Newcastle upon Tyne)
'''홈 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3] (St James' Park)
(52,354명 수용)
'''라이벌'''
'''선덜랜드 AFC''' - '''타인위어 더비'''[4]
'''미들즈브러 FC''' - '''타인티스 더비'''[5]
'''구단주'''
마이크 애슐리 (Mike Ashley)[6]
'''감독'''
스티브 브루스 (Steve Bruce)
'''주장'''
자말 라셀스 (Jamaal Lascelles)
'''부주장'''
존조 셸비 (Jonjo Shelvey)
'''역대 한국인 선수'''
기성용 (2018~2020)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팬 사이트 및 팬 카페'''
[7]
'''우승 기록'''
''' 프리미어 리그 (1부)'''
(4회)

1904-05, 1906-07, 1908-09, 1926-27
'''EFL 챔피언십 (2부)'''
(4회)

1964-65, 1992-93, 2009-10, 2016-17
'''FA컵'''
(6회)

1910, 1924, 1932, 1951, 1952, 1955
'''FA 커뮤니티 실드'''
(1회)

1909
'''UEFA 인터토토컵'''
(1회)

2006
'''인터-시티 페어스컵'''
(1회)

1969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조엘린톤 (Joelinton)
(2019년, From TSG 1899 호펜하임, 400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앤디 캐롤 (Andy Carroll)
(2011년, To 리버풀 FC, 3500만 £)
'''최다 출장'''
지미 로렌스 (Jimmy Lawrence) - 496경기 (1904~1922)
'''최다 득점'''
앨런 시어러 (Alan Shearer) - 206골 (1996~2006)
'''리그 득점왕'''
(5회)

알버트 셰퍼드(1910-1911)
조지 로블레도(1951-1952)
맬컴 맥도널드(1974-1975)
앤드루 콜(1993-1994)
앨런 시어러(1996-1997)
'''2020-21 시즌 유니폼 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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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AWAY'''
'''THIRD'''
'''GK HOME'''
'''GK AWAY'''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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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주요 업적
3. 역사
3.1. 2009년 이전
3.2. 챔피언십 강등의 수모
3.3. 프리미어 리그 복귀
4. 최근 시즌 요약
5. 1군 스쿼드
6. 뉴캐슬을 거쳐간 인물들
6.1. 뉴캐슬을 거쳐간 유명인들
6.2. 뉴캐슬을 거친 막장 인물들
6.2.1. 선수
6.2.2. 감독
7. 기타


1. 개요


영국에서 축구는 종교나 다름없어.

런던에도 , 중부 지방도 마찬가지야. 맨체스터에 , 리버풀도 , 글래스고도 ...

'''근데 에는 하나 뿐이지.'''[8]

- 영화 <골!>의 대사 中.

'''Newcastle United Football Club'''. 잉글랜드 북동부의 공업 도시인 타인위어 주 뉴캐슬어폰타인에 위치한 오랜 역사를 가진 클럽이다. 구단의 라이벌로는 선덜랜드미들즈브러가 있다.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명장과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바비 롭슨 경과 앨런 시어러가 몸담았던 명문 클럽이다.
많은 서포터를 가지고 있고 인기구단임에도 팀 재정은 늘 어려워 하고 있는 구단이다... 구단주인 마이크 애슐리는 2008년 아랍에미리트로 가서 인수 논의를 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왔었다[9]. 2010년 말에도 계속 오일 달러 부호의 인수 떡밥이 돌고 있으나 죄다 빗나가고 있다. 애슐리의 요구때문에 인수는 어렵다는 반응. 애슐리가 있으면 팀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데, 팀이 팔리지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
하지만 2019년 만수르의 사촌인 셰이크 칼레드가 5270억으로 인수 직전까지 갔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해 국내외 툰 아미들은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다. 거기에 2020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차기 국왕이 될 왕세자 빈 살만도 이 팀을 노리고 5000억대로 사고자 협상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 맨시티 구단주보다 압도적인 부자로 알려진 빈 살만 왕세자가 공교롭게도 노리던 팀이 바로 맨유로 글레이저에게 4조원 이상이라는 돈을 부르며 사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뉴캐슬을 대신 살 것이라는 보도이기에 꿩 대신 닭으로 뉴캐슬을 산다고 나선 셈이라 뉴캐슬 서포터들은 좀 씁쓸한 느낌도 들겠지만 이는 맨시티도 그랬었다. 공교롭게도 알 나얀도 맨시티보다 먼저 사려고 나섰던 팀이 뉴캐슬이었고 이게 무산되자 발렌시아를 사려다가 거부당해 결국 3번째로 나선 것이 바로 맨시티. 여길 사서 3부리그 강등도 겨우 90년대 말엽에 당하고 2부리그 강등안하면 다행이던 하위팀 맨시티가 알 나얀 왕자의 엄청난 돈투자로 리그 우승후보로 탈바꿈했었다. 우습게도 외국인 구단주를 거부하며 알 나얀 왕자가 포기한 발렌시아는 10년도 안가 2010년대 중순에 재정난에 빠져 결국 중국계 싱가포르 재벌 피터 림에게 팔려서 발렌시아 서포터들은 차라리 외국인에게 팔릴 바, 예전 알 나얀에게 팔렸더라면 팀 역사가 달라졌으리라고 아쉬워한다...뉴캐슬도 줄곧 이러는데 과연 어찌될지.
이런 가운데 더 선은 2020년 2월 26일(현지시간) “빈 살만 왕세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 그리고 다시 맨유를 인수하려고 한다”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자세한 건 알려지지 않았으나.뉴캐슬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고 있기에 빈 살만 왕세자가 뉴캐슬을 포기하고 다시 맨유를 값을 더 부른 5조 5천억원이라는 뉴캐슬 인수 비용 추정치의 11배를 부르고 있기에 어찌될지 모른다.
그리고... 2020년 3월 30일자 영국 언론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뉴캐슬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 컨소시엄 입찰이 수 개월 내 완료 될 것"이라며 "인수 금액은 3억4000만 파운드(약 5160억 원)다.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 아라비아 공공투자기금(PIF)가 지분 80%를 소유하는데 이 PIF는 총 자산 3200억달러(약 392조 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이다. 여기와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 본사를 두고 있는 PCP 캐피탈과 뉴캐슬 레이싱 코스를 갖고 있는 루벤 브라더스가 10%씩 나눠갖는다는 것. 입찰을 확인한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은 컨소시엄이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지 필요 점검에 나선다.
결국 7월말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서 사는 일은 취소되었다. 영국 ‘스카이스포츠’와 'BBC’ 등은 7월 30일(한국시간) 일제히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뉴캐슬 인수 계획을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의 승인만 남겨둔 상황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려왔다. 사우디의 인권 침해, 자국 내 무단 프리미어리그 스트리밍 방관 등 논란이 이어졌고, 결국 인수 철회되었다. 팬들은 2021 시즌은 강등당할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뉴캐슬 측은 2020년 9월 10일 홈페이지를 통해 "EPL 사무국이 사우디 자본 컨소시엄의 구단 인수를 부적절한 판단으로 거절했다"고 지적했다. 사우디 극부 공공투자펀드(PIF) 중심 컨소시엄은 3억파운드(약 4623억원)에 뉴캐슬 인수를 추진했으나 승인에 앞서 소유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소유주 테스트는 개인이 구단주가 되는 걸 금지하는 요건을 의미한다. 여기에 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 스포츠나 프로 기구에 의한 금지, 승부 조작 같은 일부 규정 위반이 들어간다.
EPL 사무국은 이 가운데 PIF를 사우디 왕가의 소유로 볼 소지가 있다고 봤다. 결국 PIF 콘소시엄은 지난 7월 뉴캐슬 인수 계획을 철회했다. 인수 기대감이 높았던 뉴캐슬 측은 "PIF는 사우디 정부로부터 독립돼 있다.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과 법적 의견을 EPL에 전달했지만 계획을 무산했다"며 "모든 방안을 검토해 대응하겠다"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글쎄. 사우디 국부펀드부터가 결국 사우디 왕가로부터 나온 돈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보니....

2. 주요 업적


  • 프리미어 리그
    • 우승: 1905, 1907, 1909, 1927
    • 준우승: 1996, 1997
    • 3위: 1902, 1912, 1994, 2003
  • 챔피언십 리그
    • 우승: 1965, 1993, 2010, 2017
    • 준우승: 1898, 1948
    • 3위: 1984, 1990
  • FA컵
    • 우승: 1910, 1924, 1932, 1951, 1952, 1955
    • 준우승: 1905, 1906, 1908, 1911, 1974, 1998, 1999
  • FA 커뮤니티 실드
    • 우승 : 1909
    • 준우승: 1932, 1951, 1952, 1955, 1996
  • UEFA컵
    • 우승: 1969

3. 역사



3.1. 2009년 이전


1892년에 뉴캐슬 이스트 엔드와 뉴캐슬 웨스트 엔드가 합치며 탄생하였다. '유나이티드'라는 명칭은 이 두 팀이 합쳐졌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으로, 창단 후 현재까지 뉴캐슬어폰타인의 유일한 축구팀으로 남아 있다.[10][11]
뉴캐슬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랭크 와트 비서가 1895년부터 35년간 비공식적으로 팀을 지휘하여 콜린 비치, 스탠 시모어, 앤디 커닝엄, 휴이 갤러거 등을 중용했고, 1900년대에 3번, 1920년대에 1번이나 리그에서 우승하는 등 나름 전성기를 지녔으나 1934년에 처음으로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1938년에 단장으로 돌아온 스탠 시모어는 이듬해부터 감독도 맡아 1943년 재키 밀번을 영입하여 새 시대의 기초를 다지고, 1948년 1부 리그에 승격시켜 1950년대에 FA컵을 3번이나 우승시켰다. 이후 시모어 시대에 주장으로 활약한 조 하비가 1962년부터 팀 감독이 되어 1965년에 2부 리그 우승으로 또다시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뒤 1969년에 인터-시티 페어스컵 결승에서 헝가리의 우이페슈트를 꺾어 우승컵을 차지하기도 했다. 허나 그 역시 리그에서의 지지부진한 성적으로 팬들의 원성을 사서 1974-75 시즌을 끝으로 물러났다.
후임으로 블랙번 감독이던 고든 리를 선임한 것을 시작으로 리차드 디너스, 빌 맥개리, 아더 콕스, 잭 찰튼, 짐 스미스,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등이 지휘를 맡았으나, 팀은 끝없는 부진에 시달리며 1부와 2부 리그를 오갔다. 그러나 1988년에 부임한 회장 존 홀 경이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하여 1992년에 친정팀에서 뛰었던 케빈 키건을 감독으로 임명시켰고, 이에 따라 팀은 더욱 강해져 1993년 2부 리그에서 승격하여 1993-94 시즌 바로 3위를 차지하였고, 1995-96[12], 1996-97 시즌 2연속으로 2위에 오르는 등 단박에 프리미어 리그의 강호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잠시 주춤하다 1999년부터 5년간 재임한 바비 롭슨 감독의 지휘 하에 다시금 챔피언스 존을 확보하며 강력한 모습을 선보였다. 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뉴캐슬은 97-98년 UEFA 챔피언스리그에 데뷔했고[13]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FC 바르셀로나'''에 짜릿한 3-2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2002-03 시즌 정규시즌에서 파죽지세로 3위를 찍어 챔스 티켓을 따냈고, 같은 시즌 챔스에서 조별 리그 첫 세 경기에서 모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 디나모 키예프, 페예노르트와 같은조에 있었다.) 16강에 진출했다. 다만 16강에 진출해도 2차 조별리그가 있었고, 그 조에는 FC 바르셀로나, 인터밀란, 바이어 레버쿠젠과 한 조였는데 2승1무3패로 조 3위로 탈락했다. 03-04 시즌 챔스 3차예선 세르비아의 FK 파르티잔에 승부차기로 충격적인 광탈을 당한 이후로는 챔피언스리그와는 인연이 없다.
'엔터테이너'라고 불릴 정도의 공격적인 팀컬러와, 96-97 시즌을 앞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당시 세계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우며 앨런 시어러를 하이잭할 수 있었을 정도의 공격적인 투자가 어우러졌던 과거의 뉴캐슬은,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위상과 매력을 지닌 빅클럽이었다. 한국에 해외축구가 널리 유통되던 90년대 말 ~ 2000년대 초의 강팀이었기 때문에 한국에도 당시부터의 꽤 긴 구력을 지닌 뉴캐슬 팬들이 많다.[14] 이 시기에 팀이 강팀으로 자리를 굳히는 데에는 시어러의 월등한 득점력과 셰이 기븐 골키퍼의 철벽수비가 한몫했다. 이 외에 우구 비아나와 저메인 제나스 등 유망주들의 활약도 빛을 발했다.
그러나 프레디 셰퍼드 당시 구단주의 무리한 투자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던 데다[15], 유명한 막장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롭슨 경의 뒤를 맡으면서 2000년대 중반 이후 뉴캐슬은 드라마틱한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2007-08 시즌을 앞두고 볼튼을 중상위권으로 이끌었던 샘 앨러다이스를 선임했다. 그리고 오언의 부상 복귀와 함께 카사파, 제레미, 스미스, 비두카, 파예, 베예, 엔리케를 폭풍 영입하며 토트넘과 함께 빅4의 대항마가 되리라는 예상 이 있었다.[16] 그리고 3B의 일원이던 타이투스 브램블을 위건으로 방출하는데도 성공.[17]
빅 샘의 출발은 상큼했다. 개막전에서 친정팀 볼튼을 방문하여 마르틴스의 오버헤드킥 포함 2골로 3대1로 승리하며 올해는 다르다가 될 줄 알았다. 더비에 패하기도 했으나[18] 그래도 초반 9경기에서 5승2무2패로 나름 순항했다. 그러다가 11라운드 레딩 원정에서 1-2 0패배로 삐걱대더니 12 라운드에서 포츠머스 FC에 안방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전반 8분부터 11분까지 3골을 내주며 4-1로 패배하며 홈관중들이 전반도 마치기 전에 빠져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곧이어 리버풀과의 홈경기도 3-0 완패, 빅 샘은 홈관중에게 대놓고 삿대질을 당하는 등 홈팬으로부터 사실상 지지를 잃었다. 단독꼴찌 더비와의 홈경기도 이기지 못하며 결국 빅 샘은 2008년 새해가 된 뒤 얼마 안가 경질당했다. 감독 대행으로 경기를 치른 맨유 원정에서 후반에만 6실점하며 0-6으로 졌다. 이 경기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커리어 첫 해트트릭 허용구단이 되었다.
맨유전 대참사 이후 케빈 키건이 1997년 1월 이후 11년 만에 컴백하자 홈팬들은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키건의 부임 이후에도 연말부터 이어진 무승 행진이 이어졌다. 아스날에 3-0, 빌라엔 4-1 대패를 당한 뒤 27라운드 맨유에 홈에서 1-5로 패하며 맨유전 도합 11골을 헌납했다. 심지어 타인티스 및 타인위어 더비 1차전에서 무승부를 한 데다 블랙번에 홈에서 0-1로 패배, 리버풀에도 0-3 대패를 당하는 등 무승 기록은 13경기까지 이어지며 한때 강등권에 간당간당하게 앞서게 되었다. 대패를 많이 허용해 골득실도 불리했다.
다행히 31라운드 풀럼전에서 2대0으로 승리하며 키건 감독은 부임 후 9경기 만에야 복귀승에 성공했다. 이어서 토트넘과 레딩에 대승을 거두고 타인위어 더비 2차전도 승리하며 강등 걱정에서 벗어났다. 결국 12위로 리그를 마감하게 되었다.

3.2. 챔피언십 강등의 수모


키건 감독은 07-08 시즌 종료 후 여름 이적 시장에서 구단 측과 마찰을 빚었다. 키건은 네임벨류 높은 프리미어리그 출신 스타들의 영입(베컴, 앙리 등)을 강조했고, 당시 데니스 와이즈 디렉터는 대륙의 자원들(콜로치니, 구티에레즈 등)의 영입을 고수했다. 계속되는 구단의 잔류 설득에도 끝내 결별을 선언했다. 키건 감독이 부임 8개월, 시즌 3경기 만을 치르고 떠나게 되어 열받은 팬들이 구단측에게 격렬하게 반발하자, 애슐리 구단주는 구단 매각방침을 세워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적극적인 인수자가 등장하지 않았다.(당시 유력 인수자 후보로 베리 모트라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인수를 위한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현재는 잠정적으로 매각을 포기하고 계속 운영중.
키건의 후임으로 임시감독 조 키니어[19]가 부임했으나 일전 감독 경력에서 채 채우지 못한 퇴장 명령(…)이 남아 몇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봐야 하는 개그를 하기도 했다. 게다가 임시감독 키니어가 윔블던 때처럼 심근경색 수술을 받자 당시 수석코치였던 크리스 휴튼이 임시감독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임시감독의 감독대행이라니 눈물이 저절로 나올 것 같다. 구단은 앨런 시어러를 임시감독으로 데려오는 강수까지 두었으나 결국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라이벌 선더랜드에게 밀린 데다, 헐 시티가 뉴캐슬에 승점 1점차이로 앞서 있었고 골득실차에서 뉴캐슬이 앞섰기 때문에 마지막 라운드에서 비기기만 해도 잔류하는 상황...에서 더프의 자책골로 18위로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어 09-10시즌을 챔피언십에서 보냈다.[20]

3.3. 프리미어 리그 복귀


뉴캐슬은 09-10 시즌 구단주가 팀을 시장에 내놓고 그간 투자했던 비용을 구단주에 대한 부채로 처리해 거의 돈을 쓰지 못했는데,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덕장 휴튼 감독이 선수단을 신뢰하며 팀을 뭉치게 만들었고, 여기에 니키 버트, 숄라 아메오비, 스티브 하퍼 등의 베테랑 보컬리더들이 별 말 없이 잔류하면서 분위기를 수습해 갔다. 또한 전시즌 중반 합류한 케빈 놀란이 시즌 17골로 챔피언십 09-10 최우수 선수상을 거머쥐며 맹활약했고, 키만 큰 멀대였던 유망주 앤디 캐롤이 하부 리그에서 경험치를 쌓아 역시 시즌 17골을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호재도 뒤따랐다. 크리스 휴튼 임시감독은 임시감독 신분으로 코카콜라 이달의 감독상을 수 차례 받는 등 선전하여 정식 감독으로 계약했다.
시즌 중반 이후 줄곧 1위를 달렸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2010년 4월 6일 챔피언십팀 중 가장 먼저 승격을 확정지었다. 경기 시작 전 3위 노팅엄 포레스트카디프 시티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승점 72점을 기록, 뉴캐슬은 승점 86점으로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자력으로 승격을 확정지었다. 이어 열린 경기에서 뉴캐슬은 페테르 뢰벤크란츠와 케빈 놀란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두며 승격을 자축했다. 결국 챔피언십 역대 최다 승점 2위인 승점 102점으로 코카 콜라 트로피를 손에 쥐며 험난했던 챔피언십 시절을 화려하게 마감하고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했다.
여담으로 09-10 시즌 어웨이 유니폼은 홈 유니폼과 디자인이 똑같았는데 줄무늬 색상만 달랐다. 그런데 그 색깔이 노랑-흰색 줄무늬라서 일명 참외(...) 유니폼으로 통했는데 역사상 최악의 유니폼으로 꼽힌다. 그래도 이 시즌 유니폼이 뉴캐슬과 줄무늬 정체성을 공유해 잘 어울리던 아디다스가 제작한 마지막 유니폼이어서[21]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4. 최근 시즌 요약



4.1. 2010-11 시즌




4.2. 2011-12 시즌




4.3. 2012-13 시즌




4.4. 2013-14 시즌




4.5. 2014-15 시즌




4.6. 2015-16 시즌




4.7. 2016-17 시즌




4.8. 2017-18 시즌




4.9. 2018-19 시즌




4.10. 2019-20 시즌




5. 1군 스쿼드




6. 뉴캐슬을 거쳐간 인물들



6.1. 뉴캐슬을 거쳐간 유명인들


그리고…

6.2. 뉴캐슬을 거친 막장 인물들



6.2.1. 선수


  • 로랑 로베르: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왼쪽 윙어로 활약했으며, 당시 EPL 최고급 윙어로 유명했다. 엄청난 왼발 중거리슛과 프리킥 능력으로 '미친 왼발'이라 불렸는데 성격도 미쳐 있었다... 덕장인 바비 롭슨이 감독으로 있었을때는 비교적 말을 잘들으면서 기량을 뽐냈지만, 후임인 그레이엄 수네스감독의 활약에 팀이 부진에 빠지자 감독과 선수단을 싸잡아 비난했고 결국 떠나게 되자 마지막 경기에서 유니폼을 훌훌 벗어던지고 팬 앞을 뛰어다닌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 조나단 우드게이트: 부상의 레전드 우드게이트는 2003년 1월에 뉴캐슬로와 2005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뉴캐슬은 우드게이트를 900만 파운드에 사 1,340만 파운드에 팔아먹는 사기를 쳤는데 마이클 오언으로 톡톡히 앙갚음을 당했다.
  • 크레이그 벨라미 :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앨런 시어러와 투톱을 이루어 활약했다. 그러나 그래엄 수네스 감독과의 불화로 팀에서의 입지를 잃고 셀틱으로 임대를 갔는데 뉴캐슬이 FA컵 4강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를 당하자 앨런 시어러에게 비웃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시어러는 '돌아오면 강냉이 날라갈 각오하라'며 격분했고 그로써 벨라미와 뉴캐슬의 관계는 끝났다.
  • 키어런 다이어 & 리 보이어: 2005년 4월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경기[24]에서 공과 관련 없는 상황에 서로 멱살잡고 치고박아 상대팀 주장 가레스 배리가 이들을 뜯어말리는 촌극을 벌였다. 당연히 즉결 퇴장과 세 경기 정지 처분을 받았고 선빵을 때린 보이어는 더 많은 벌금을 내야 했다. 이 둘은 나중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서도 함께 뛰었다. 보이어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시절 우드게이트와 함께 폭행사건을 저지른 전력이 있을 정도로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음은 유명한 선수였고, 다이어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활약했을정도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알아주는 유리몸이기도.
  • 셀레스틴 바바야로, 장-알랭 붐송, 타이터스 브램블: 3B
  • 마이클 오언: 2005년 여름 친정팀 리버풀, 에버튼 등의 제의를 뒤로 하고 뉴캐슬에 입단했다. 곧 2005년이 끝날 때까지 리그에서 7골을 넣는 등 활약했으나 2005년의 마지막 날 토트넘의 골키퍼 폴 로빈슨과 충돌하여 발가락뼈 골절상을 입었다. 월드컵을 뛰기 위한 열망으로 굳이 회복 기간이 긴 수술을 선택, 잔여 시즌 결장이 확정되었고 월드컵에서도 무릎 부상을 당해 이듬해 봄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복귀 후에도 지지부진한 재계약과 무성의한 플레이로 충성심을 의심받았다. 케빈 키건 감독 체제에서는 주장 완장을 달고 나름대로 책임감 있는 활약을 보이기도 했으나, 팀의 상태가 점점 막장으로 치닫자 결국 재계약을 거부하였다. 뉴캐슬이 강등되자 자유계약인 그를 영입해갈 팀들을 위해 34쪽의 홍보물을 스스로 제작해 돌렸다. 뉴캐슬에서 뛸 당시 주급은 11만 파운드로 알려졌으나 공식적인 금액이고 이면계약으로 얼마를 더 받았을지 알 수 없다. 먹튀 중의 먹튀. 그가 떠난 후 선수단 분위기는 급속도로 밝아졌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뉴캐슬이 승격한 후 뉴캐슬이 승격해 와서 좋다고 하였다. 그래도 먹고 튄건 미안한 건지...
과거 오언은 언론관리가 철저하여 전 소속팀에 관하여 입을 안 여는 걸로 유명했지만, 트윗질을 개시하면서부터는 맨유에서 벤치 워머로 있으면서 "강한 팀에서 가끔씩 뛰는 게 별볼일없는 팀에서 매 경기 뛰는 것보다 낫다"는 둥의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뉴캐슬 팬들의 분노를 샀다. [25]
  • 조이 바튼: 끝판왕. 월드컵씩이나 나가서 사고를친 상또라이들 탓에 묻혀버렸지만 이놈도 월드클래스급 미친놈이다.[26] 맨체스터 시티에서 버려지다시피한 걸 갱생전문가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자신 있게 영입했다. 그러나 2007년 크리스마스에 고향 리버풀에서 사촌들과 함께 시비거는 행인을 폭행했고 2008년 5월엔 급기야 교도소에 가는 신세가 되었다. 풀려난 후에는 맨시티 시절 동료 우스망 다보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든 데 대한 징계가 내려져 여섯 경기를 뛸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장기 부상에 신음하다 복귀한 강등 싸움을 위한 중요한 경기인 리버풀전에서 사비 알론소에게 무리한 태클을 가해 퇴장당했다. 경기종료 후 락커룸에서 자신을 질책하는 임시감독 앨런 시어러에게 "당신의 전술은 형편없는 쓰레기"라는 막말을 날렸다. 강등 후 많은 구단의 입질이 있었지만 뉴캐슬에 남았고, 시어러와는 화해했다.[27] 현재 프리미어 리그에서 가장 큰 야유를 당하는 선수. 성질 잘 죽이고 뛰나 싶었더니, 2010년 11월 11일 경기중 블랙번 선수 모르텐 감스트 페데르센의 배를 풀파워로 때린 게 포착되어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술 먹으면 성질이 돋는 대표적 선수. 다만 피나는 재활 끝에 술을 끊은 지금은 성질을 많이 자제했다. 그 예로, 2011년 2월 아스날과의 4:4 경기에서는 자신의 뒷덜미를 잡고 밀어버린 아부 디아비에게 아무런 행위를 가하지 않았다.[28] 그런데 뉴캐슬 팬들을 제외한 해외축구 팬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바튼이 먼저 도발했을 것" 이라고 하기도..
성격은 많이 죽었는지 몰라도 경기 외적으로 사고치는 성향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는지 트위터를 가지고 뉴캐슬 구단의 경영진을 비난하다가 자유계약으로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당했다. 이적하면서 본인은 끝까지 가고싶지 않았다고 트위터에 적어놓았다.(...)
다만 뉴캐슬 팬들에게는 승격 이후 보여 줬던 준수한 경기력과 헌신적인 플레이로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으며, 실제 바튼의 트위터 계정을 보면 팀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뉴캐슬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모습이다. 적어도 뉴캐슬 시절만큼은 바튼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그외, 잉글랜드 쪽 선수들은 불륜이나 업소 추문에 휘말리는경우가 많은데, 바튼은 의외로 이성 사생활은 상당히 깨끗했다고 한다.다만 그놈의 성질머리를 제어 못해서 그렇지(…).
  • 샤를 은조그비아: 2009년 1월 위건 어슬레틱으로 이적하기 전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조 키니어 임시감독을 "그는 내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인섬니아라고 부른다"고 비난했다. 키니어는 이에 "그는 매일 빅클럽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환상의 나라 속에 사는 미키 마우스 같다"며 응수했다. 빅클럽[29] 으로 이적하면서[30] "뉴캐슬은 날 떠나보낸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과연 뉴캐슬과의 원정 경기에서 두 골을 넣고 앨런 시어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뭐랬어." 이후 위건에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지 '뉴캐슬은 빅클럽' 이라며 뉴캐슬로 돌아가고 싶다는 언플질을 일삼으며 팬들의 뒷목을 또다시 잡게 했다…. 만 결국 아스톤 빌라로 이적.
  • 앤디 캐롤: 뉴캐슬과 재계약을 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리버풀 FC로 이적하였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하지만 8년뒤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하였다.
  • 호세 엔리케: 이적해 온 첫 시즌엔 적응 못하고 빌빌 헤매다가 온갖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못하는 선수야 안 쓰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당시 뉴캐슬에는 전문적으로 왼쪽 측면 수비수를 보는 선수가 호세 엔리케를 제외하면 전무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중앙에서 콜로치니와 테일러가 자동문 수비를 선보이고 있던 참이고, 딱히 기용할 수 있는 선수가 없던 참이라 꾸준히 출장하게 되었고, 당시 주전 골키퍼 셰이 기븐만 죽어라 고생하는 상황이 계속 되던 와중에 기븐이 맨체스터 시티 이적 하면서 팀이 강등당하고 만다(…).
챔피언십에서는 적응을 끝마친 덕분에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2부 리그 측면의 절대자가 되어 있었고, 그 탄탄한 수비와 준수한 오버래핑은 호나스 구티에레스의 능력과 함께 챔피언십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왼쪽 라인이 되었다. 다음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윙백으로 평가받기 시작하지만…
뉴캐슬과의 계약이 거의 다 끝나가는 시점에 챔스권 팀으로 이적하고 싶다.며 땡깡을 부리다 재계약을 거부하고, 유에파컵에도 못나가는 리버풀로 이적하며 뉴캐슬 팬들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엔리케가 재계약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유럽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난 시즌의 거한 삽질로 챔피언스리그는커녕 유에파 컵에도 출장하지 못하는 리버풀로의 이적은 뉴캐슬의 팬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엔리케가 리버풀로 이적을 한 11-12 시즌은 뉴캐슬은 5위를, 리버풀은 8위를 기록하며 엔리케와 리버풀은 슬픈 결산을 했다.
  • 무사 시소코: 14-15 시즌까지는 그럭저럭 활약해 왔지만 15-16 시즌 내내 태업을 의심케 할 정도의 무성의한 플레이로 팀의 강등에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그의 부진한 플레이가 여기저기서 지탄을 받을 때도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은 "시소코가 살아야 팀이 산다"며 주장 완장을 채워 줬지만, 시소코는 팀이 강등을 확정지은 후에야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최종전에서 토트넘을 5-1로 털어버리지 않나, 급기야 유로 2016에서는 결승전에서 MOM급 활약을 펼치며 뉴캐슬 탈출의 열망을 전세계에 드러냈다. 강등당하자 책임을 통감하며 팬들에게 사과를 남긴 다른 모든 주전급 선수들과 달리, 이분은 강등되자마자 "챔피언십에 있기에 나는 너무 큰 선수"라며 동네방네 이적하겠다며 떠들고 다녔고, 뉴캐슬은 유로에서 거품도 꼈겠다 계약도 3년이나 남았겠다 돈도 있겠다 가격표 £35m을 붙이며 응수했다. 자신의 이적이 쉽지 않게 되자 시소코는 1주일에 한 번씩 팀을 비난하며 차원이 다른 징징거림을 선사해 툰 아미들은 흡사 마이클 오웬이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이적 시장 마지막 날 토트넘으로 £30m에 이적하면서 소원 성취에 성공했는데, 웃긴 건 시소코는 평소 뉴캐슬에서 뛰면서도 "내 심장은 아스날에 있다"는 인터뷰를 서슴치 않던 선수였다는 점. 이적 시장 막판에도 에버튼이 먼저 이적료에 합의한 후 뒤이어 토트넘이 이적료를 맞추자 전용기를 대기시키고 기다리던 에버튼 쪽의 전화를 받지 않고 토트넘으로 향하는 등 끝까지 인성을 보여 줬다. 뉴캐슬 팬들에게는 새로운 금지어, 시발놈으로 불리게 될 듯 하다.

6.2.2. 감독


  • 그레이엄 수네스: 위 모든 인물과 연관된 막장 중의 막장.[31] 04-05시즌 초반에 부임해 전시즌 5위로 마쳤던 팀을 14위로 추락시켰다. 특정 선수를 편애하고 장기적인 구상이 없다는 원성이 높았으며 아메오비와 벨라미를 양쪽 윙에 놓는 막장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2005년 여름 총 5000만 파운드(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잔디를 갈기 위한 200만 파운드 제외[32]) 를 썼음에도 순위가 강등권 바로 위에서 허덕이자 2006년 2월 2일 경질되었다.[33]
  • : 외부에서 최고 성적만 놓고 보면 성공한 축에 속하지만 결국 아래의 맥ㅋ 까지 이어지는 나락의 밑바탕을 깔아놓기도 했다. 덕분에 뉴캐슬 팬 중에서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편.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스티브 맥클라렌: 잘못된 전술과 선수단 장악 실패로 70m 파운드를 쓰고도 뉴캐슬을 또다시 강등시킨 원흉

7. 기타


한국에도 의외로 오래된 팬 커뮤니티가 있다. 바로 툰코리아인데, 1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원래 카페 형식이었다가 규모가 커지며 사이트로 독립한 것이다. 중소 규모 EPL 클럽 중 가장 팬 커뮤니티가 잘 구축되어 있다.
우스갯소리로 공격진의 마크 비두카 때문에 강등됐다고 하는데 마크 비두카의 전 팀인 리즈 유나이티드미들즈브러 FC가 현재 챔피언쉽 죽돌이가 된 걸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선수로 나이젤 콰시(웨스트 브롬)이 있는데 이쪽 역시 세 팀을 강등시켰다.
이렇게 선수들 성격이 개차반이라서 막장을 달리거나, 마이클 오언처럼 멀쩡한 폼을 가지고 입단했음에도 막장화가 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없는 부진에 빠지고 연속 부상 크리를 당하는 등, 유독 뉴캐슬 소속 선수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비꽈서 홈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수맥'''이 흐르는게 그 이유라고 주장하는 국내팬들이 있다. 2005년 여름 당시 감독이었던 그레엄 수네즈가 선수 한 명을 사들일 만한 거금인 200만 파운드를 들여가며 구장 잔디를 죄다 갈아버리는 공사를 하다가 수맥을 건드렸다는게 그 이유라고(…).[34][35]
훌리건 천국 잉글랜드에서도 팬들이 열정적이기로 손꼽힌다. 근 100년간 리그 우승은 커녕 중하위권에서 자주 논 클럽인걸 감안하면 대단한, 아니 엄청난 수치. 연고지인 뉴캐슬은 축구만 하는날엔 도시 전체가 축구에 미친다. (그런데 이것은 잉글랜드 중부, 북부의 많은 도시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담으로 유명한 뉴캐슬의 팬으로는 영국의 전 수상인 토니 블레어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완 앳킨슨이 있으며, 스팅,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리더 마크 노플러, AC/DC의 보컬 브라이언 존슨[36], The 1975의 프론트맨 매티 힐리[37] 등의 뮤지션들도 뉴캐슬의 서포터들이다. WWE프로레슬러 네빌애쉴리 콜의 전 부인으로 가장 유명한 WAG의 한 명인 셰릴 콜도 토박이 뉴캐슬 팬이다. 한준희 축구 해설위원의 아스날 FC에 이은 세컨드 팀이기도 하다.
뉴캐슬이 강등당한 해의 입장료 수입과 타 구단의 입장료 수입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다. 08-09 시즌 뉴캐슬은 유럽 대회도 못 나가고, 리그 컵은 두 경기만에 탈락, fa컵은 헐시티와 재경기 끝에 첫 판에서 떨어지는 등 리그 외의 수입이 사실상 없었는데도 높은 수입을 올렸다. 당시 빅4나 런던 특수에 관중석 많은 토트넘보단 떨어지지만 훨씬 축구는 잘하던 에버튼이나 아스톤 빌라 맨시티보다 수익이 우월했다. 타 리그와 비교하자면, 09-10년도에 유로파컵을 우승한 아틀레티코가 간신히 08-09 시즌 뉴캐슬의 관중수입을 넘기는 정도다. 오죽하면 강등 당하고도 평균관중 5만명[38]에 근접하면서 역대 챔피언쉽 최다 평균관중수를 찍었다(....) 그리고 결국 2016년에 다시 강등되어 챔피언쉽 16/17 시즌에서도 최다 평균관중을 기록하고 유유히 우승했다(...)
하지만, 이럼에도 팀의 재정 형편은 근래 들어 좋았던 적이 없다. 위에 서술하듯이 아랍 왕족 인수 문제도 무산되었으니 차후 더 어려울 듯 하다.
한국 선수들로는 김태영, 조재진, 조용형 등과의 링크가 있었다. 특히 조재진은 감독 목 갈아치우기 좋아하던 보드진 아래서 버티기는 성적이 위험했던 당시 감독 샘 앨러다이스가 뻥축 좋아하는 본인 취향에도 맞고 자리도 위험해 큰 돈 쓰기 어려운데 월드컵 활약도 있고 아시아 프리미엄에 값도 싸다고 봐서 영입을 시도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조재진의 은퇴 후 메디컬 테스트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이적이 취소되었다고 밝혀졌다.
2011년 4월 말에는 앤디 캐롤의 대체자로 지동원을 노린다는 링크가 떴지만, 뜬소문에 불과한 루머 였으며, 정작 지동원은 뉴캐슬 최대의 라이벌 팀으로 가 버렸다.
그렇게 계속 링크만 뜨다가 마침내 2018년 6월 스완지 시티 AFC와 계약 만료 후 FA 신분이던 기성용이 뉴캐슬과 2년 계약을 맺으면서 뉴캐슬 역사상 첫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39] 기성용은 뉴캐슬 역사상 처음 입단한 아시아계 선수이기도 하다. 예전에 기성용은 같은 타인위어 주 내 라이벌 프로축구 클럽인 선덜랜드 AFC에서 잠시 임대 선수로 뛴 적이 있다.
한국의 토터들에게는 언제나 예상과 다른 경기결과를 보여주어 지탄의 대상이다. 2010-11 시즌만 놓고봐도 아스톤 빌라 격파, 블랙풀에 패배, 첼시에 무승부, 아스날과 리버풀에 승리 등등...비슷한 예로 헤타페우디네세가 있다.
선수들 탓인 건지 팬들 성향이 대체로 유쾌한 건지 많은 전현직 선수들의 항목이 멋진 해학과 블랙 유머로 가득하다. 영국판 롯데 자이언츠
이 팀은 리버풀 FC처럼 크리스마스에 1위를 2번이나 달성하고도 우승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1] 뉴캐슬 사투리로 "도시(Town)"를 의미한다. 조르디 사투리에서는 -own 이 -u:n 에 가깝게 발음되는데, 뉴캐슬 사람이 "우리 동네"라는 의미의 Toon 이라 말하는 것이 그대로 뉴캐슬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2] "뉴캐슬 사람", 혹은 "잉글랜드 북동부 사람"을 의미한다. 어원은 몇가지 설이 있지만 불분명하다. 원래는 잉글랜드 북동부 주민을 아울러 이르는 단어였지만 라이벌 도시인 선덜랜드가 부상하면서 이쪽을 부르는 "매켐(Mackem)"과 나눠져 현재는 뉴캐슬과 그 주변지역 주민만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3] 한때는 구단주인 마이크 애슐리가 수익을 위해 경기장 이름을 판매하려다 여의치 앉아 자신의 모회사인 스포츠 다이렉트사의 이름을 붙인 '''스포츠 다이렉트 아레나'''로 변경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존 팬들은 반발하였고, 대부분의 팬들은 바뀐 이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세인트 제임스 파크라고 불렀다. 현재는 뉴캐슬의 새 스폰서가 될 예정인 업체에서 구장명명권을 구입하여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되돌려 놓았다.[4] 뉴캐슬과 선덜랜드는 잉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라이벌이다. 두 도시에 흐르는 강 이름을 따 '''타인위어 더비'''라 부른다. 뉴캐슬어폰타인과 선더랜드는 도시간 근 천 년을 헤아리는 대립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 미들즈브러의 타인티스 더비보다 더 치열하다.[5] 미들즈브러 역시 북동부에 위치해있으며 두 도시에 흐르는 강 이름을 따 '''타인티스 더비'''라 부른다.[6] 사우디아라비아 차기 국왕인 빈 살만이 주도하는 사우디 국부펀드에 팔린다고 아는 이들이 많으나 2020년 7월 30일, 사우디 공공투자 컨소시움이 인수를 포기하였기에 여전히 마이크 애슐리 구단주 체제이다.[7] 팬 사이트에 등록되는 기사나 사설을 보기 위해선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다만 신규가입은 매월 3일 딱 하루만 허용되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상당히 폐쇄적인 커뮤니티로 보이기도 하며, 자체적인 규율이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눈에 띄는 어그로 종자에 대한 저지력이 상당히 강하므로 외부에서의 이미지와 맞게 깨끗한 커뮤니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 예절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도 글이나 댓글을 작성할 때 한 번쯤 생각하고 달아야 할 커뮤니티라 하겠다. 일부 네임드의 텃세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나, 무분별하게 신규가입자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타 커뮤니티에 대한 반감도 적은 편이기 때문에 큰 사건 사고는 터지지 않는 편이다. 기존 유저들이 새로운 유저들을 환영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쓰기 전 규율을 먼저 한번 읽어본다면 적응하는데 큰 문제는 없는 편. 보통 제제를 받는 경우는 비속어를 쓰거나 특정 인종이나 대상을 비하하는 발언인데 일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비해 엄격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펨코에 툰코리아 스샷을 찍어 올리면서 씹선비들이라고 조롱하다가 쫓겨난 회원이 있었다.[8] 영국의 여타 도시와 달리 뉴캐슬어폰타인에 존재하는 클럽은 단 하나 뿐이라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정체성을 단번에 보여주는 대사로 유명하다.[9] 포포투 보도에 의하면 가서 8000억 이상을 생각하며 팔려고 했으나 아부다비나 두바이에선 그다지 관심도 안 보여서 그냥 피서나 즐기고 왔다고 비꼬았다. 솔직히 이 돈은 너무 비싸다는 게 공통된 의견. 참고로 첼시같은 경우나 맨시티도 4000억대에 팔렸다는 게 정설이다... 사실 첼시나 맨시티나 팔리기 전까지는 뉴캐슬에 비해서 한끗 처지는 클럽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물가상승도 있고, 최근 축구산업이 엄청나게 파이가 불었다는 걸 생각하면 4000억보다 비싸야하는 건 맞다. 하지만 2000년대 말이라면 당시 너무 비싼 돈이었다. 그나마 당시에는 맨유가 1조원이 넘는 돈에 미국인 말콤 글레이저에게 팔렸던 적이 있지만 글레이저는 이 돈을 빌려가면서 내야했기에....[10] 이렇듯 도시의 유일한 팀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뉴캐슬 팬들은 다른 '유나이티드' 명칭을 쓰는 팀(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등)이 스스로를 '유나이티드'라고만 칭하면 상당히 아니꼬와한다.[11] 다만 보통 영국의 "유나이티드"의 의미는 팀의 출신 배경이 "노동조합(United)" 인 경우가 많아서 뉴캐슬과는 의미가 다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셰필드 유나이티드 등등.[12] 시즌의 2/3가 진행되었던 무렵 맨유에 승점 12점차로 앞서가며 우승이 매우 유력했으나 갑자기 8경기에서 5패를 당하고, 에릭 칸토나의 복귀를 앞세운 맨유에 승점차를 다 따라잡히며 결국 4점 차로 준우승했다.[13] 2승 1무 3패로 조 3위로 탈락했다. 디나모 키예프, PSV 아인트호벤, FC 바르셀로나와 한 조 였는데 의외로 바르셀로나는 1승 2무 3패라는 성적으로 4위로 탈락했다.[14] 지금 와서 영화 '골!'을 본 사람들이 뉴캐슬이 무슨 챔스를 노리냐며 비웃기도 하는데 영화의 배경은 앨런 시어러가 현역으로 뛰던 2000년대 초의 뉴캐슬이다. 이때 뉴캐슬은 우승권까진 몰라도 맨유나 리버풀 등의 빅클럽과 충분히 경쟁이 가능한 명문 구단이었다.[15] 무분별한 빅네임 영입과 방만한 운영으로 당시 구단 부채는 1억 파운드에 육박했다. 리즈 꼴 안 난 게 다행일 정도.[16] 스미스와 비두카의 영입으로 밀너와 함께 리즈의 강등멤버가 3명이나 재회하게 되었다.[17] 장 알랭 붐송은 2006년에 이미 유벤투스로 떠났고, 바바야로는 시즌 도중 방출돼서 LA 갤럭시로 이적했다.[18] 2007-08 프리미어 리그의 최하위인 더비 카운티의 유일한 1승 상대가 바로 뉴캐슬이다. 당시 1무 1패로 더비에 승점 4점 헌납. 챔피언십에서 잘 나가던 시즌에도 더비에게는 이기지 못했다. 09-10시즌에도 결국 1무 1패를 기록했다 더비의 상징인 양에 빗대어 반농담으로 건초라고 부르기도...[19] 여담으로 2013년 대한민국의 월드컵 8회 연속 진출 기념 다큐멘터리 태극전사의 탄생에서 86 멕시코 월드컵 예선 당시 상대팀이었던 네팔의 외국인 감독과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바로 그 네팔의 감독이 젊은 시절의 조 키니어다. 당시 네팔 대표팀은 지금처럼 약체 취급에 한국의 고등학교팀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조 키니어 스스로조차도 한국에 3-0으로만 져도 다행이라고 말했으나 한국에 홈에서 의외로 선전하며 자책골과 페널티킥골로 2-0으로 졌고 동대문에서 4-0으로 졌는데 한편으로는 한국을 홈에서 잡은 말레이시아와 홈에서 0-0으로 비겨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어느 정도 일조했다. 또 1992년부터 1999년까지 크레이지 갱 막바지 때의 윔블던 FC 감독이기도 하다.[20] 36R가 더비 라이벌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였는데 당시 뉴캐슬의 순위가 18위, 보로가 19위였다. 그야말로 강등권의 단두대 매치. 여기서 뉴캐슬은 3-1로 승리하여 보로를 사실상 강등으로 몰아넣었음에도 결국 라이벌과 사이좋게 강등당한 것.[21] 10-11 시즌부터 20-21 시즌까지는 푸마가 킷 스폰서였고, 21-22 시즌부터는 영국의 신생 브랜드 '카스토어'가 유니폼을 제작할 예정이다.[22] 안좋은 의미로 매우 유명하다. 뉴캐슬의 금지어.[23] 축구 영화 "골" 의 주인공. 배우는 멕시코 배우인 쿠노 베커. 뉴캐슬을 챔스권에 올려 놓고 다음 시즌, 갈락티코 1기 멤버가 되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레알 마드리드를 이끄는 핵이 된다는 내용[영화] 내용 산티아고는 미국에서 접시를 닦으며 어렵사리 축구 선수의 꿈을 이어가던 멕시코계 불법체류자인데 우연히 뉴캐슬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뉴캐슬로 향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 선수로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속편에서 마이클 오웬과 맞트레이드되었다는 설정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1편은 꽤나 잘 만들어진 스포츠 영화지만 속편들이 영 똥망이라 정신건강상 1편만 보는 게 좋다. 이 덕에(?) 뉴캐슬 경기가 있을 때에는 뮤네즈 안 나오냐는 농담이 오가곤 했고, 영화 개봉이 10년이 지난 2015년에는 뉴캐슬의 전설 혹은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로써 회자(?)되곤 한다. 이 영화를 접하며 뉴캐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결국 팬이 된 사례도 드물지 않게 있는 편.[24] 경기는 애스턴 빌라에게 0:3으로 완패했다. 후반 경기 끝나기 10분도 안 남겨두고 같은 팀끼리 주먹질을 나누는 드문 볼거리를 제공한 셈. 당시 다 이겨가던 아스톤 빌라 선수들이 나서서 필사적으로 이 둘을 잡고 같이 말렸었다….[25] 맨유 이적 뒤로는 전 소속팀 팬들 뒷목을 잡게 하는 언플을 많이 해서 욕을 들어먹고 있다. 리버풀 팬들 역시 이젠 오언에 대해 결코 좋게만, 안타깝게만은 보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6] 조이 바튼 본인도 저 또라이들중 한명미친행동에 대해 디스한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며칠후 나머지 한놈이 더 미친짓을 벌이고야 말았다.[27] 이 이유로 오언은 틈만 나면 까인다. 그 나쁜 바튼도 남았는데![28] 물론 태클상황이 먼저 있었는데, 깊숙하긴 했지만 공을 건드린 정당한 태클이었다[29] 이걸 비꼬아 뉴캐슬 팬들은 위건을 빅클럽이라 부른다.[30] 이때 맞트레이드로 뉴캐슬로 온 선수가 라이언 테일러로 은조그비아가 생각나지 않을 만한 좋은 활약과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1] 마이클 오언이 뉴캐슬로 온 이유 중 하나가 리버풀 레전드 수네스가 있었기 때문이다.[32] 이것 때문에 수네스는 뉴캐슬 시절 '잔디관리사'로 통했다.[33] 케빈 키건, 케니 달글리시를 비롯하여 그나마 좋은 분위기(…)였던 리버풀과 뉴캐슬간의 인재 이동은 수네스(이 쪽은 리버풀도 버려놨다.)와 오언, 그리고 캐롤로 인해 꽤나 험악하게 바뀌었다.[34] 진지한 반론이라면, 뉴캐슬은 수네스 시절 이전부터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가 많았다. 무패 우승 이후에 매번 부상에 시달리는 아스널과는 엎치락 뒤치락 할 수 있을 정도다.[35] 그러나저러나 2019년과 2020년에도 5대리그 부상자 발생 최다팀으로 등극했다...[36] 영화 Goal! 에서 미국 술집 뉴캐슬 팬 1 로 까메오 출연 하기도 했다..[37] 오른쪽 팔에 구단 로고를 타투로 세길 정도의 광팬[38] 홈구장 세인트 제임시스 파크의 최대 수용인원이 52,354명이다. 즉,원정석을 제외하면 거의 항상 꽉찼다는 뜻...[39] 계약 만료 후 이적이라서 뉴캐슬이 스완지에 지급한 이적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