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
''Time Person of the Millennium''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본명'''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Johannes Gensfleisch)'''
'''출생'''
1398년경, 신성 로마 제국 라인란트팔츠 마인츠
'''사망'''
1468년 2월 3일, 신성 로마 제국
'''국적'''
신성 로마 제국 [image]
'''직업'''
금세공업자
1. 개요
2. 생애
3. 인쇄기 개발
3.1. 개발사
3.2. 본격적인 인쇄술
3.2.1. 문자적인 이유
3.2.2. 민간 개발
3.3. 영향
4. 구텐베르크 성서
5. 그의 이름을 딴 것들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세공업자로 인쇄기의 발명자.

2. 생애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1]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그의 이름이 요하네스인 것에 착안하여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을 그의 탄생일로 지정한 것. 원래 이름도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이며 구텐베르크는 그의 가문 대대로 살아온 저택의 이름이다. 요하네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드물며 인쇄기를 고안한 업적 외에는 알려진 일화가 거의 없다(…).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인쇄기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아서 부자인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결국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에 의한 원금반환 소송에 휘말린다. 이에 대해서 독일 괴팅겐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일부분이 기록되어 남았다. 이 기록에 의하면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길더를 갚으라는 판결로 내려졌으며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줄 이 없었기에 인쇄 장비를 비롯한 모든 걸 압수당해야 했다. 푸스트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구텐베르크를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재정적으로 파산한 그는 절망에 빠져 어려움을 겪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1971년 마이클 하트가 인류의 자료를 수집해 전자정보로 저장, 배포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

3. 인쇄기 개발



미국 유타주 크랜달 인쇄 박물관에서 시연중인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기를 통한 문서 인쇄 영상.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문서 인쇄가 가능하다.
세계사에서는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역사상 최초의 본격 대량 인쇄술'''로 공인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구텐베르크를 금속활자의 개발자라고 부르며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그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 제작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고 비교하곤 하지만, 사실 세계적으로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것 중 중요한 건 인쇄기로 보고 금속활자는 그 부속품 중 일부 정도로 취급한다. 즉, 인쇄기의 대중화를 통한 문서의 대량생산과 이를 통한 활자화된 지식의 전파에 폭발적인 가속을 이루었다는 점이 구텐베르크를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꼽는 원동력인 것.
목판을 이용한 원시적 인쇄술 자체는 이미 세계적으로 있었고 책의 보급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던건 인쇄기 덕분인데다가, 고려의 금속활자는 당시 최씨 무신정권의 통치기반이 되었던 불교의 전파를 위한 불교서적 출간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영향이 미미했던 걸 고려하면 본격적으로 인쇄물과 인쇄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게 한 역사적 가치는 구텐베르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1. 개발사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의 조폐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활자 기술을 창안한다.[2] 금화, 은화의 초상화 도안을 찍어내는 펀치에다 글자를 거꾸로 새겨 철판에다 찍어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다 철로 만든 주조기를 덧씌워 안티몬, 주석 합금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 방식은 철로 만든 형틀 및 주조기를 쓴 덕분에 수천 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형틀이 망가지더라도 펀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제작이 가능했다. 조판과 활자에 서로 요철(凹凸)을 만들어 꽉 물리게 하는 방식을 썼으므로 수백 장을 찍어도 활자가 밀리는 일 역시 거의 없었다. 여기에 대량 인쇄에 용이하게끔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한다. 활자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지만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현재도 신문과 언론을 press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450년 경에 인쇄기를 발명하고,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 가량을 인쇄할 수 있다고 한다. 인쇄 속도에 비해서 만들어진 성서의 숫자가 적어 보인다. 그 이유는 구텐베르크는 인쇄본 성서가 필사본과 같아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컬러 그림등을 넣어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거기에 삽화나 머리말 장식등은 따로 필사의 과정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의 세부는 각각 조금씩 다르다.
현대 인쇄기와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기술적인 면에서 크게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제본을 고려하지 않고 양적으로만 환산하면 현대 기계식 인쇄기는 1분에 800~3,200장 가량 인쇄되어 대략 80~1600배 빠른 셈이다. 어쨌든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속도는 필사에 의존하던 기존의 방식과 비교하면 혁명적으로 빨랐다. 이후 활자 인쇄술은 급속히 퍼져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50년 동안 3만 종의 책을 총 2,000만부 인쇄했다고 한다. 이는 이전 1,000년 동안 출판된 책보다 더 많은 양이라고 한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앨 고어가 2005년에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떡밥을 던지기도 했고. 이를 추적한 영화 '직지코드'를 통해 확인해 보면 그 개연성을 조금이나마 짐작 할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While metal movable type printing was invented in Korea and the oldest extant metal print book had been printed in Korea, 'Korea never witnessed a printing revolution comparable to Europe's':

Korean printing with movable metallic type developed mainly within the royal foundry of the Yi dynasty. Royalty kept a 'monopoly of this new technique' and by royal mandate suppressed all non-official printing activities and any budding attempts at commercialization of printing. Thus, printing in early Korea served only the small, noble groups of the highly stratified society.

요약하면, 고려 금속활자술이 세계 최고(最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지배층만 인쇄술을 독점했기에 한국에 유럽의 인쇄 혁명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후술되겠지만 사실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의 문자 차이에 기인한 바도 크다. 서구 제어를 표현하기 위한 활자는 알파벳 대소문자 + 약간의 구두점과 조정 문자 + 숫자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 전통 문어인 한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족히 수만 자의 한자 활자가 필요했다. 국가 레벨에서나 겨우 관리할 수 있는 규모. 당연히 보급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3.2. 본격적인 인쇄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본격적인 인쇄술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3.2.1. 문자적인 이유


유럽에서 사용되는 페니키아 문자 기반의 알파벳 계열 문자는 기본적으로 20~30개 내외이다. 대소문자를 구분하고 장식용 글자체를 따로 둔다고 해도 만들어야 할 활자의 개수가 한정적이라 활자를 양산하기 쉽다. 또한 음성을 바로 적을 수 있다는 알파벳의 특성상 알파벳을 알고 자국어를 발음대로 적기만 하면 소통이 가능했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 비해 문맹 퇴치가 용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는 상용한자만 수천 자에, 전체 한자는 수 만여 자에 달하므로 활자를 만들기 힘들다. 조선의 금속 활자 주조량은 구텐베르크의 열배에 달했지만, 한자 전체 숫자를 생각하면 그걸로도 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한자의 모양의 복잡성 때문에 활자 자판을 맞추는 과정도 매우 복잡하다.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판을 맞춰야하는데, 이조차도 좌우가 뒤집힌 모양 때문에 잘못 맞춘 경우가 흔했다.
한글은 표음 문자라는 점에서 한자보다 나았을 수도 있지만, 사실 자모를 결합해서 하나의 글자를 만들기 때문에 인쇄에는 더욱 복잡하다. 이론상 만들어야 하는 한글활자의 수는 1,638,750 개로 한자보다 훨씬 많다. 일제 시대에 주시경이 풀어쓰기를 주장한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심지어 문자가 전산화된 현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니코드 항목 참조

3.2.2. 민간 개발


민간인인 구텐베르크가 발명해 주로 민간 영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당시 유럽은 중세를 거쳐 근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으므로 상공업이 발달하는 상황이었다. 거래정보 및 시세 같은 정보를 빨리 대량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상공업에서 적용되어 인쇄술이 전파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유럽의 정신세계 기반을 형성한 성경을 이전까지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이 독점했던 것을 마르틴 루터등이 자국어로 번역, 보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인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통해 단 2주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후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의 보급은 종교개혁의 열기를 급속히 확산시켰다. 그것이 유럽 역사의 대격변 출발점이었다.

3.3. 영향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전에도 이미 최소 14세기에는 이미 유럽에서도 목판인쇄술이 자체적으로 발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목판인쇄술은 몇가지 이유로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일단 기술적으로도 구텐베르크 인쇄술에 비해서 열등했다. 목판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위에 올린 후 롤러로 미는 방식으로 인쇄했는데, 이 과정에서 잉크가 번지거나 종이가 찢어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인쇄의 질은 좋지 않았다. 또 인문주의자들이 이런 '싸구려' 책을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책의 수요가 제일 많은 대학에서도 이미 필경사들을 대규모로 고용해서 자급하는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또 외면 받았다. 결국 목판 인쇄는 성화를 양산하기 위한 용도로 한정된다.
그래서 구텐베르크는 저 기술적 열등함을 해결하는 것과, 책이 싸구려로 보이지 않게 하는데에 많은 공을 들였다. 생산성이 확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생산량을 제한했고 삽화가를 동원해서 그림을 그려넣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진가는 책보다는 싸구려 출판물에 더 특화되어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물 중에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성경이지만, 사실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는 성경 말고도 다른 많은 인쇄물이 생산되었는데, 주로 똑같은 서식과 문장이 반복해서 계속 쓰이는 행정 서류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름 아닌 면벌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문주의자와 대학이 초기에 인쇄기를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기는 책의 소비자 가격을 20%로 확 줄여버렸기 때문에 인쇄기의 가능성에 온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필사의 시대에는 책의 가격이 책의 문자수와 정비례했다. 성경 1질 값이 시골의 농노의 집보다도 비쌌고, 도시의 잘 지어진 연립 주택 1채보다 약간 낮은 가격이었다.
1470년대에는 이미 유럽 주요 대도시 12곳에 인쇄소가 열렸고, 1500년이 되면 온 유럽에는 240곳으로 확 늘어났다. 이 시대의 책은 국제 교역에도 쓰일 수 있는 고급 상품이었기 때문에 70%가 넘는 책이 라틴어로 계속 쓰였고, 국제 교역망을 따라 퍼진 염가의 책은 기존의 5배나 비싼 필사본 책들을 결국 밀어내버렸다. 발명 전 유럽에서 500~1400년대까지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 여권으로 추산된다.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었다. 이는 이전 인류가 생산한 책의 숫자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로 인해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철학이나 과학을 연구하고 발표 및 정리해서 출간하여 학자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학문상의 '촉매 작용'이 활발해졌다. 물론 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플레잉 카드같이 비 학문 분야(…) 역시 인쇄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한 필사 시대에는 오·탈자 및 왜곡의 여지도 많았는데, 이것은 필사 과정에서 어느 사본이 신뢰도가 높은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성경을 예로 들자면 요한 복음서간음하다 잡힌 여인 파트는 초기 사본에는 나타나지도 않다가 후대에 각주로 첨가된 것인데, 필사 과정에서 스리슬쩍 성경 본문으로 뒤섞이는 오류가 나타났다. 심지어 어느 필사자가 '이 문단은 내가 본 다른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지웠다가, 또 다른 필사자가 '옛 글을 마음대로 왜곡하지 마시오'라며 옆에 낙서를 해놓고 다시 더한 사본도 있다. 책을 생산하는 방법이 오직 필사뿐이니, 이미 유통되어서 필사되고 있는 책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원저자도 불가능했고 어느 것이 진짜 원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쇄로 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자 '표준적인 원본'이 생겨났고 심지어 그것을 수정한 새 판본을 찍어내서 유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서지학(書誌學)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전까지 필사로 유통되었던 책들에 대해서도 '표준적인 원문'을 정리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심지어 성경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시작은 무명의 수도사제였던 마르틴 루터가 제기한, 독일 제국교회 수석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 발행한 면벌부에 대해 비판이었다. 원래 당시 규정상 가톨릭대주교직은 30세 미만이면 안 되고 겸직도 안 되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23살에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1513년 당시로서는 막대한 돈인 29,000길더를 당시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가 된다. 1년 후 마인츠 대주교직도 따낸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2군데의 대주교직을 얻는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금전 손실을 보충하고 '본전'을 뽑기 위해 면벌부 발행을 시작한다. 이를 교황 레오 10세도 허락하고 수입(…)을 반반씩 나누기로 합의했다. 면벌부는 연옥에서 받을 벌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를 겁탈했다 하더라도 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곳도 있었으니, 양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런 행동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면 이렇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은 원래 졸라게 자비로우신 분이라서, 그의 아들의 죽음을 대가로 전 인류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갱신하는 행위인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다만 겨우 그거로 죄를 용서 받는다고 퉁쳐버리자니 별 싸이코들이 자긴 용서 받았다면서 뻔뻔하게 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에 따라 가톨릭은 '죄는 용서 받지만 고해성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은 연옥에서 받게 된다.' 는 교리를 만든다. 이 벌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보속을 통하여 사면될 수 있는데, 살아서 보속을 행하지 못했으면 연옥에 가서라도 해야 한다. 지금은 동네 성당에 가서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면 "무슨 무슨 기도문을 외우세요" 같은 정도의 보속을 주지만, 당시 가톨릭의 보속은 고행, 성지순례[3] 등 굉장히 까다롭고 가혹한 면이 있었고, 많은 신자가 행하지 못했다.
당연히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특정 퀘스트 조건을 완수하면 그 신자에게 대사를 주었다. 이 대사의 효과가 '보속의 면제'이다. 문제는 루터 당시의 퀘스트 조건 중 하나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헌금 내기'였고 헌금을 낸 신자에게는 인증서를 주었다. 즉, 헌금을 내면 보속 없이도 벌을 받지 않는다가 되고 헌금을 냈다(=보속 면제)를 입증하는 증서가 속칭 면벌부이다. 문제는 이것이 '유전무벌 무전유벌'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면벌부 발행과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위법한 대주교 취임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가 이를 시원하게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걸었다. 이 반박문은 교회 동조자들 도움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통해 독일어 번역되어 활자 인쇄된 격문으로 만들어져 단 2주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진다. 안 그래도 기존 교회의 작태에 불만이 팽배했던 사회에 비판의 물꼬를 터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일개 수도사제에 불과했던 마르틴 루터는 단숨에 독일 인민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 개혁적 종교운동가로 위치가 격상된다.
이후 마르틴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황파인 요한 에크와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연설문, 논문, 논박문은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광범위하게 퍼지고 전유럽으로 불길이 번지면서 이를 통해 개신교 탄생의 시작이 된다. 또 신구교간 종교전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분위기상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겠지만, 짧은 시일 안에 막대한 양의 문서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단 2주만에 전 독일의 인민을 사로잡은 종교개혁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전에 제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종교개혁은 한참 늦게 시작되었거나 얀 후스, 존 위클리프의 선례처럼 실패했을 것이다.
또한 루터가 1522년 34년 발간한 '독일어 성서'는 근대 독일어의 초석을 다졌고 민족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에선 매년 100만 권 가량의 책이 인쇄되었다는데, 이 중 1/3이 루터의 저서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인쇄술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번역된 공인 성경과 기도서 미사경본[4]을 각 지방교회에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도록 해 가톨릭이 하나로 뭉치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효율적으로 개신교에 반박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대항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개신교 평신도 A가 성경을 근거로 가톨릭을 비판하고, 가톨릭 평신도 B가 성경을 근거로 개신교를 비판하는 식의 일이 가능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종이를 대량생산후 배포할 수 있는 미디어로 만든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은 일반인들에게 비쌌다. 1628년 영국 기준 성경 1권은 183파운드 금화로, 일반인 농부는 몇 세대에 걸쳐 돈을 모아야 살만한 가격이었다. 1604년 발간된 돈키호테 종이 코덱스 1권의 정가는 290.5 마라베디 은화로, 금화로 치면 8.5개에 준하는 값이었다. 현대 가치랑 비교하면 몇백만원은 된다. 책의 생산 속도는 빨라졌어도 종이 생산이 획기적으로 는 것은 아닌지라, 구텐베르크 이후에도 책의 가격은 종이의 생산량과 가격에 많이 구애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급격히 전파되고 유럽 사회를 흔든 것은 높은 도시화율과 도시민들의 높은 교육률이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지, 반대로 구텐베르크 때문에 이전에 교육이나 지식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대중들까지 지식 사회로 편입되는 격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보다 수백년 뒤인 나폴레옹 시대까지조차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정도의 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고급 인력으로 취급되었다.
유명한 일화로 링컨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위인전 창작이 아닌 사실로 드러난 일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린 링컨이 이웃 부유한 농장에 가서 일했는데, 어릴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한 어린 링컨에게 농장주가 책을 빌려줬다. 집에서도 책을 읽으며 잠이 들었더니만 비가 와서 창가에 둔 책이 비에 젖었다. 링컨은 스스로 농장주에게 다음 날,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책값으로 한동안 거저 농장일을 하기로 농장주와 합의했다는 것. 책값이 약 360여년전보다 많이 싸졌지만, 여전히 책값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뭐 링컨은 부지런히 다 일해서 책값을 갚았는데 농장주가 기뻐하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선물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국내 위인전에서도 해당 일화를 싣으며 1820년 초반 미국에서도 책은 매우 고급스런 물품이라 보통 사람이 책 한권 사자면 당시 평균 일당으로 며칠이나 보름 이상까지 갈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고 나올 정도였다. 알다시피 종의 기원만 해도 1859년에 나온 초판 8000 부가 모두 팔리자 엄청난 대박이었듯이 그 때도 책값은 상당히 비쌌다.

4. 구텐베르크 성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image]
[image]
이름
한글
양피지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동시대의 배경 문서
영어
42-line Gutenberg Bible, printed on vellum,
and its contemporary documentary background
프랑스어
La Bible dite de 42 lignes de Gutenberg
국가·위치
독일 괴팅겐
소장·관리
니더작센 주립 대학도서관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01년
제작시기
1450년경
구텐베르크가 1455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불가타 성서다. 한쪽당 42줄씩 인쇄되었기 때문에 42줄 성서라고도 불린다. 상술한 바와 같이 서양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책이기에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판본과 더불어 전세계 도서관이 소장하고 싶어하는 희귀템. 현존하는 구텐베르크 성서는 49개로 독일(13), 미국(11)[5], 영국(8), 프랑스(4), 러시아(2), 스페인(2), 바티칸(2), 오스트리아(1), 벨기에(1), 덴마크(1), 일본(1), 폴란드(1), 포르투갈(1), 스위스(1)의 도서관들이 소장하고 있다.[6]

5. 그의 이름을 딴 것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구텐베르크 다이어그램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균등하게 분할된 정보를 보게 될 때 '왼쪽 위→오른쪽 위→왼쪽 아래→오른쪽 아래' 순으로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담뱃갑 경고 그림의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마인츠에 소재한 마인츠 대학교 역시 정식 명칭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마인츠 대학교(Johannes Gutenberg-Universität Mainz, 약칭 JGU)이다.

[1] 그래서인지 70~80년대 인명대백과 사전이나 학습서에선 구텐베르크 생몰연도를 1400~1468 이라고 표기한 게 많았다.[2] 실재로 금속 활자 까진 아니지만 금속을 이용한 인쇄는 조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국에 경우 고려의 금속활자보다 먼저 1154년부터 지폐 인쇄에 동판을 사용했다. 이를 기반으로 최초의 금속활자도 중국에서 만들었을 꺼라고 중국학자들은 추측하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 개발 타이틀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다.[3] 마땅한 교통편도 없는 중세에 이스라엘까지 갔다오다가 납치당해 노예로 팔려가느니, 그냥 지옥 가는 게 나을 것이다.[4] 이때문에 트리엔트 미사가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5] 영화 투모로우에서 혹한 속에 뉴욕 공립 도서관에 고립된 주인공들이 얼어죽지 않기 위해 도서관의 장서들을 태우자 도서관 사서가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이것만은 안된다'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품에서 놓지 않고 보호한 책이 바로 미국이 소장한 구텐베르크 성경 중 하나다.[6] 출판 당시 각 페이지 단위로 분리하여 판매하여 소장한 것까지 합치면 더 많은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