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대한민국 제55대 법무부 장관
강금실
康錦實 | Kang Keum-sil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57년 2월 12일 (67세)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1]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본관'''
곡산 강씨
'''재임기간'''
제55대 법무부 장관
2003년 2월 27일 ~ 2004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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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강계돈
'''학력'''
숙명여자중학교 (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불교천주교(세례명: 에스더)
'''신체'''
160cm, A형
'''경력'''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서울고등법원 판사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
민변 부회장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제55대 법무부장관

1. 개요
2. 생애
2.1. 법무부 장관 이전
2.2. 법무부 장관
2.3. 정치 활동
3. 논란
3.1. 라임 사태 연관 논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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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전 정무직공무원, 전 정당당직자.
법무부 장관,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2. 생애



2.1. 법무부 장관 이전


1957년 2월 12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태어났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2],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여성 최초로 형사단독판사가 됐다.
1988년 2차 사법 파동을 계기로 박시환, 김종훈 등과 개혁 성향 법조인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강금실 등 우리법연구회 창립했던 주축은 1993년 3차 사법 파동을 이끌며 김덕주 대법원장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에서 물러나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에는 논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를 이석태 변호사와 함께 저술하며 호주제의 위헌성을 설파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약칭 민변)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2. 법무부 장관


2003년 참여정부에서 제55대,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2004년 7월 28일까지 활동하였다.[3] 이때 노무현에게 강금실을 천거한 사람이 문재인이다. 문재인은 노무현에게 강금실을 환경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노무현은 여성이 그런 부처 장관에만 임명되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며 노동부나 법무부 장관에 기용할 뜻을 밝힌다. 강금실은 노무현의 뜻을 전달한 문재인에게 노동부 업무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여서 망설여지지만, 권력기관인 법무부에서 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법무부장관직에 뜻을 보인다. 노무현은 강금실의 뜻대로 그를 법무부장관에 임명한다. 이로 인해 검찰 내 비주류가 계속 지적했었던 조직순혈주의, 남성중심주의, 기수중심주의, 관료이기주의가 깨졌다. 참여정부는 여성, 법관, 변호사, 낮은 기수 출신의 장관을 임명함으로서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4] 노무현은 검찰개혁에 대한 의지와 여성이 임명되는 영역이 특정 부처에 국한되어야 하냐는 고정관념 타파를 이유로 임명을 강행한다.
그러나 강금실의 장관직 수행은 순탄치 않았다. 강금실 장관 자신도 평가하듯 검찰을 개혁하는 힘이 부족했다. 임명으로 인한 상징성은 컸지만 조직 실태 파악 및 팀을 꾸리는 데 실패했다는 자평이다. 천정배 당시 원내대표의 생각도 유사하다. 법무부 자체가 주요 포스트를 검찰파견인력으로 채웠기에 검찰 주류 시각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법무부 파견 검사도 친정으로 돌아가면 인사권을 가진 검찰 주요책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임명 직후 법무부+청와대에서 기존 관례를 깨고 검찰총장과의 상의 없이 검찰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이 반대건의서를 올리는 등 집단반발했으며, 이 때문에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인사를 하도록 검찰청법 34조 1항이 개정되는 일도 벌어졌다. 노무현은 강금실과 법무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일부 평검사들은 인사권과 예산권 이관 등 검찰의 독립을 요구했다. 검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노무현과 강금실은 평검사와의 대화를 기획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와의 존폐 문제 등을 두고 송광수 검찰총장[5]을 비롯한 검찰 지도부와 참여정부의 갈등도 계속됐다. 검찰 개혁에 대한 평검사와 여론의 지지를 얻는데는 성공했지만 대선자금 수사가 이어지며 개혁을 밀어붙이는 데 실패했다. 검찰의 인기가 올라가며 개혁의 설득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개각 때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의 성과로는 호주제 폐지가 있다. 재임 초기인 2003년 3월, "법무부는 법의 집행뿐 아니라 ‘소수자 집단’의 인권 향상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남녀불평등을 야기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 '호주제'의 폐지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라고 말하며 호주제 폐지를 공언하였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고, 2005년 3월에 민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3년 후인 2008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되었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구치소,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향상에 노력한 점이 있다.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외국인 지문날인 폐지'''가 있다. 2003년 5월 7일 정책간담회에서 "2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지문을 날인하도록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투자하러 오는 사람에게까지 지문날인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해 (관련 법 조항을) 삭제하라고 했다"며 외국인의 지문날인 폐지를 암시하였고#, 22일 법무부가 공식적으로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하기로 정했다.#
그런데 정작 내국인에 대해서는 17세 이상일 경우 주민등록증 발급을 통해 전부 지문채취를 하는데, 외국인은 지문채취도 하지 않는 데에 대해 역차별 논란이 있었다.# 한편으로 2001년 9.11테러로 인해 미국,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들이 입국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 취득 정책을 추진하던 세계적 추세와도 전혀 맞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외국인 범죄가 발생하여 지문까지 남겨져도 지문 일치 대상이 없어 잡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문이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러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가, 외국인 지문 채취 시행 이후 해결된 사례도 있었다. 결국 다음 정권인 이명박 정권 때 17세 이상의 모든 외국인에 대해 지문과 얼굴 등의 생체정보 취득이 다시 시행되었다.#

2.3. 정치 활동


퇴임 이후 본업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서울특별시장후보로 출마했다. 열린우리당의 참패가 예고됐던 선거에서 강금실은 한때 홍준표, 맹형규한나라당 후보군을 앞지르며 열린우리당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뒤 정치를 떠나있던 오세훈을 불러들여 출마시켰다. 결국 강금실은 선거 과정 내내 뒤지다 더블 스코어로 참패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다.
대선 패배 직후인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의 최고위원에 임명된다. 이때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제의를 받았으나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가 2016년 총선에선 녹색당을 지지했다.[6] 이후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문대림 제주도지사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여하는 등, 민주당 지지를 이어가고 있다.

3. 논란



3.1. 라임 사태 연관 논란


라임 사태에서 라임자산운용의 돈세탁을 맡은 디에이테크놀로지의 사외이사로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2006 - 2007
정계 입문

2007 - 2008
합당[7]

2008
합당[8]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2
합당[9]

2012 -
탈당[10]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1,077,890 (27.31%)
낙선 (2위)


6. 여담


  • 서울대 캠퍼스커플이던 출판인 김태경과 1984년 결혼했다. 1988년 김태경이 자본론을 출판해 구속되자 현직 판사 신분으로 검찰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2000년 김태경의 사업 실패 등으로 이혼했으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금실이 장관이 되었을 당시, 전 남편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이혼한 사이임에도 서로 연락을 할 정도로 친구 같은 사이라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2014년에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하였다. 기사
  • 불교 신자로 알려졌으나 2004년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에스더.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이자 법조계 선배였던 이영애대모가 됐다.
  • 김영란 전 대법관, 조배숙 전 의원과 고교, 대학 동기이다.


[1] 인근의 종달리, 김녕리와 함께 곡산 강씨 집성촌이다.[2] 박한철, 황교안 등이 사법시험 동기다.[3] 이후 두 번째 여성 법무부 장관이 나오기까지는 16년이나 걸리게 되며 강금실을 천거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게 된다.[4] 그러나 강금실이 검사가 이닌 판사 출신이고 당시 검찰총장이던 김각영보다 사법고시 및 연수원 기수가 한참 후배로 현직 차장/부장검사와 비슷한 기수라는 점 때문에 검찰을 통솔해야 하는 법무부장관 자리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강금실을 추천한 문재인 민정수석조차도 법무부 장관 임명에는 반대했다.[5] 중수부를 폐지하려는 참여정부에 "차라리 내 목을 치라"며 저항했다.[6] 김종인 비대위원장 선임 후 계속된 우클릭에 대한 반발이 가능성이 크다.[7]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8] 민주당과 신설 합당[9]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0] https://www.google.com/am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Amp.html%3fidxno=156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