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개요
2. 질문의 가치와 대한민국에서의 인식
3. 나무위키에서
4. 예외
5. 다른 영장류에서
6.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
7. 관련 문서


1. 개요


, / Question

'''There's no such thing as a stupid question.'''

'''바보같은 질문은 없다.'''

어떤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묻는 것. '물음'이나 '질의'(質疑)라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연소한 사람이 나이가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하거나 친구나 동생에게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문제나 궁금한 점을 질문함으로써 그 문제나 궁금한 점을 해결하게 되거나 해결할 단서를 찾게 된다. 질문을 하는 것은 사회조사에서도 핵심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막 보급될 무렵에는 윈도는 사용자에게 특별한 것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작업을 처리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이와 유사한 종류의 유머도 발생했다.

PC의 보급화로 덩치가 커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자동차는 에어백의 다음과 같은 기능 때문에 소비자들이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엄청난 혹평을 하게 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에어백 : '''튀어나올까요?'''

상대방에게 질문공세를 퍼붓는 식으로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SNSAsk.fm이 있다.

2. 질문의 가치와 대한민국에서의 인식


소크라테스가 "산파술" 로 불리는 문답법을 통해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하며, 유태인들은 스승이 제자에게 끝없이 질문하고, 제자들이 스승에게 끝없이 질문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지식을 쌓는 걸로 유명하다. 항간에는 유태인 어린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부모들이 "오늘은 스승에게 무엇을 물어보았느냐"며 질문한다는 말도 있다. 이런 전통을 받아들인 구미권에서도 오히려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을 좋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 강사나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것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요점을 단순히 암기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심화 학습의 단계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경의 경우 석가모니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어떤 내용의 설법을 행하거나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제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고[1] 그것에 대해 석가모니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설법이 진행된다. [2] 석가모니 부처는 또한 자신의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 앞에서도 "내가 이제 곧 열반에 들려고 한다. 나중에 가서 스승께서 계실 때 여쭤볼 걸 후회하지 않게 지금 너희가 궁금한 것을 질문하라. 너희 일이 아니라면 너희 친구들의 일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 질문해라."[3]라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사회 각지의 프레젠테이션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질의응답 과정이고, 여기서 질문이 얼마 나오지 않거나 내용을 재정리하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면 청중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여 발표자가 좌절감을 겪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교육법 중 하나이며, 모든 학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질문을 자꾸 하면 오히려 대인관계에 지장을 주는 행위로 인식해서 지못미스럽다. 한국에서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다른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첫인상을 준다. 남들보다 질문을 자꾸 하는 학생에게는 주변 학우들이 '''"왜 저렇게 혼자 나대냐. 재수없다."'''고 비난한다. [4]

제가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몹시 두려웠습니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게 가장 많이 두려웠었죠. 그래서 선배한테 자문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학생들 앞에서 떨지 않을까요? 그때 그 선배가 저한테 큰 용기를 준 말이 있었습니다.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학생들은 결코 질문하지 않는다.'''"

- 정효찬, 한양대 교수

이는 대학 프리젠테이션에서도 동일해 거의 일상적으로 발표 말미에 질의응답을 실행해도 학습이 실속있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질문을 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소극적으로 "이러이러한 점이 이해되지 않는데 보충 설명 좀 해주겠냐"고 질문하게 된다. 이에 대해 질문의 느낌이 날카롭거나 강도가 센 사람들에게는 상술한 내용과 동일한 반응으로 '''"왜 저렇게 혼자 나대냐. 재수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에서 취업한 이후에도 회사에서 미팅도 하며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질문이나 제안을 하는 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금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감히''' 상사의 프로젝트나 제안에 질문을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예배 중에도 목사의 설교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금기인 경우가 많다[5]. 그러나 미국 등지에서는 설교 중에 신도들이 자유롭게 손을 들고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코멘트를 하는 경향이 더 크다.[6]

3. 나무위키에서


* 나무위키 질문게시판에서 질문할 수 있다.
* 과거에는 나무위키:보존문서/문의 게시판의 토론창에서 질문이 가능했다.

4. 예외


표면은 의문문인데 일반적인 질문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도 있다. 이는 특수의문문으로 불리운다. 예를 들면 반어법설의법이 있다. 가끔 이런 표현은 편집의 방향을 강제하지 않는 나무위키에서도 올라온다.

5. 다른 영장류에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질문하는 모습이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침팬지, 보노보 등 영장류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기도 하고 공감능력도 있으며, 연구자의 질문에 답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학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같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는 전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의견이 다수이다. 이 가설은 다음과 같은 수화를 배운 영장류들이 다음 시험에 실패함에 뒷받침된다.

갑돌이와 을순이가 한 방에 있었다. 갑돌이는 과자를 찬장 속에 두고 방을 나갔다. 을순이는 과자를 옮겨 책상서랍속에 숨겼다. 갑돌이가 방에 다시 들어왔다. 갑돌이는 과자를 찾기 위해 어디를 볼까?

다른 영장류들의 답: 서랍속

인간도 어렸을 때는 다른 영장류들과 같은 대답을 했다는 보고가 있다.

6.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


질문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다보니 질문을 무조건 좋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동양이나 서양의 고전에선 나쁜 질문의 예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두고 질문을 받은 사람이 심지어 성인들이었지만 질문한 사람을 두고 '이뭐병'이라며 비난한다.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農”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好禮則民莫敢不敬, 上好義則民莫敢不服, 上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번지가 농사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밭 가꾸는 일에 대해 묻자 말씀하셨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이로구나 번지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진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릇 이렇게 하면 사방의 백성이 자기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몰려올 것인데, 어찌 농사에 힘을 쓰겠는가."

- 논어 자로편[7]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 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하고 묻던 제자였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21:20~22[8]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 존자 만동자(鬘童子)[9]

는 혼자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연좌(燕座)하고 사색하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은 영원한가,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세존께서는 이런 소견들은 다 제쳐놓고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으며, 나는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그 분을 따라 범행을 배우리라. 그러나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그를 힐난한 뒤에 그를 버리고 떠나리라.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그분을 따라 범행을 배우리라. 그러나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그를 힐난한 뒤에 그를 버리고 떠나리라.”

존자 만동자는 해질 무렵에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 혼자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연좌하고 깊이 사색에 잠겼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가,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세존께서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다 제쳐놓고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으며 저는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만일 세존께서 분명하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알고 계신다면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만일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한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신다면 ‘나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씀하여 주소서.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세존께서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아신다면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그러나 만일 세존께서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알지 못하신다면 ‘나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씀하여 주소서.”

세존께서 물으셨다.

“만동자야, 내가 이전에 혹 너에게 ‘세상은 영원하다. 그러니 너는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전에 혹 너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동자야, 너는 이전에 혹 내게 ‘만일 세존께서 저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여래는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동자야, 너는 이전에 혹 내게 ‘만일 세존께서 저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겠습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동자야, 나도 이전에 너에게 말한 일이 없고 너도 또한 이전에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너 미련한 자야, 어찌하여 너는 부질없이 나를 모함하고 비방하느냐?”

이에 존자 만동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직접 꾸지람을 듣고 마음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머리를 떨구고 잠자코 말이 없었으나, 무엇인가 물을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세존께서 만동자를 면전에서 직접 꾸짖으신 뒤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일 세존께서 나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일 세존께서 나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 그가 독화살로 말미암아 매우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그 친족들은 그를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의 이익과 안온을 위해 곧 의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자.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그 사람이 어떤 성ㆍ어떤 이름ㆍ어떤 신분이며, 키는 큰가 작은가, 살결은 거친가 고운가, 얼굴 빛은 검은가 흰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가, 찰리족인가 혹은 바라문ㆍ거사ㆍ공사의 종족인가, 동방ㆍ서방ㆍ북방 어느 쪽에 사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이 산뽕나무로 되었는가, 뽕나무로 되었는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가, 혹은 뿔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궁찰(弓扎)[10]

이 소 힘줄로 되었는가, 노루나 사슴 힘줄로 되었는가, 혹은 실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의 색깔이 검은가, 흰가, 붉은가, 혹은 누른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줄이 힘줄로 되었는가, 실로 되었는가, 모시로 되었는가, 혹은 삼으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화살이 나무로 되었는가, 혹은 대나무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살촉을 화살대에 고정시킬 때 소 힘줄을 썼는가, 노루나 사슴 힘줄을 썼는가, 혹은 실을 썼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화살 깃이 매 털로 되었는가, 보라매독수리 털로 되었는가, 고니털로 되었는가, 혹은 의 털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살촉이 넓고 길쭉하며 얇은 비(錍)모양인가, 창 모양인가, 혹은 양쪽으로 날이 선 칼 모양인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살촉을 만든 사람이 어떤 성ㆍ어떤 이름ㆍ어떤 신분이며, 키는 큰가 작은가, 살결은 거친가 고운가, 얼굴빛은 흰가 검은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가, 혹은 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의 어느 쪽에 사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결국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세존께서 나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 중간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라는 견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일 세존께서 나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 중간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런 견해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이런 소견이 있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라.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는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라.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남[生]이 있고 늙음[老]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과 울음ㆍ근심ㆍ괴로움ㆍ번민이 있으니 이렇게 하여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이 있다. 세상은 끝이 없다. 목숨은 곧 몸이다. 목숨은 몸과 다르다. 여래는 마침이 있다. 여래는 마침이 없다.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하다.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다’는 견해를 가진 자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과 울음ㆍ근심ㆍ괴로움ㆍ번민이 있으니 이렇게 하여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기느니라.

‘세상은 영원하다’고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또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이 있다. 세상은 끝이 없다. 목숨은 곧 몸이다. 목숨은 몸과 다르다. 여래는 마침이 있다. 여래는 마침이 없다.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하다.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다’고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또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느니라.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나는 이런 이치를 한결같이 말하나니, 곧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발생[苦集]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자취이니, 나는 이것을 한결같이 말한다. 무슨 까닭으로 나는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이것은 이치와 맞고 법과 맞으며 또 이것은 범행의 근본으로서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이것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가지고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상윳따니까야》 말룽꺄뿟따의 짧은 경(Cūl.amālun.kyaputtasutta) 및 《중아함경》 중 전유경(箭喩經)에서##[11]

  • 좋은 질문의 예
    • 구체적인 질문
    • 본질적인 질문
    • 맥락이 있는 질문
    • 다른 청중들도 궁금해하거나 궁금해할 사항에 대한 질문
  • 나쁜 질문의 예
    •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묻는 것
      • 답정너
      • 누구나 뻔히 아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 남의 질문이나 말에 제대로 응답하지도 않고 되묻는 것
    • 맥락을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12]

6.1. 되묻기


나쁜 질문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대단한 결례가 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되묻기를 해야 할 수도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주변이 시끄러워서 청자가 화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
  • 정리를 해야 하고 어려운 내용을 요약하여 확인할 경우.
  • 되돌릴 수 없는 일로,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경우.
반면 되묻기가 결례가 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의도적이지 않은 경우
    • 습관적으로 되묻는 경우.
    • 다른 생각을 하다가 사과도 하지 않고 되묻는 경우.
    • 부분적으로 못 들은 내용을 두고 네? 왜? 뭐?라며 전체를 다시 설명할 것을 요구할 경우.[13]
  • 의도적인 경우
    • 특별한 이유도 언급하지 않고 남을 의심하는 경우.
    • 질문에 대한 대답도 회피하는 경우.
    •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합의를 거치지 않고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경우.[14]
    • 번외 : 결정권자가 아닌 입장에서,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계속해서 되묻는 경우.[15]
결례가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서브컬처에서 자주 접하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는 대사 역시 바로 되묻기를 뜻한다.
의도적인 경우는 아예 상대방을 무시하는 의도도 있으니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뜻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의도적이지 않은 되묻기를 자주 하면 행동교정을 받아야 한다. 이는 질문을 금기시하는 문화와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어떤 문화권을 접하든 결례에 해당한다.
본인이 이러한 습관이 있으면 대답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대답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되묻는 것에도 요령이 있어서, 그래서 XXX에 대해서 말하는 거지?라며 요약하여 되물으면 그나마 낫다. 최악의 경우는 네? 왜? 뭐?라며 한 마디로 되묻는 경우이다.

7. 관련 문서



[1] 이를테면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어떤 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보살의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어떤 나라의 왕은 어째서 어떤 나라를 멸하게 되었는지 등등[2] 몇 안 되게 석가모니 부처가 먼저 말을 꺼내서 설법한 경우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전을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라고 부르며, 이 무문자설경에는 아미타경, 법화경 등이 있다.[3] 디가 니까야 수록 '대반열반경' 및 장아함경 수록 유행경[4] 질문은 하고 싶은데 정 눈치가 보인다면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거나 쉬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다.[5] '''설교 도중에 끼어드는 상황'''이라면 이해가 갈 수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자기 말을 하려고 말을 끊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설교를 마치고 예배가 끝난 상황'''인데 질문이나 제안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 목사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든 신도에게도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성경에서 사도 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다가 예수의 부활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야 믿은 것을 두고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한 것이 임팩트가 좀 크다보니... 물론 예수가 그런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도 토마스 항목 참조.[6] 일례로 미국의 흔한 목사 중 하나인 더글러스 코넬리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목사에게 궁금한 점을 묻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렇게 하셔서는 안 됐습니다!" 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7] 공자는 번지가 물어본 덕에 대한 질문을 두고 좋은 질문이라며 대답해주고 칭찬해주기도 한다.[8] “누가 당신을 팔아넘기는데요?”라는 질문을 예수가 대답했다. 당신이 로마군에 체포되기 직전에 있었던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이 끝까지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그리고 예수로서는 본인의 운명에 대한 결말이 정해졌을 때에 누구 탓이냐, 누가 원인이냐, 그런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구구하게 따져봐야 뭐하느냐는 의미에서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되묻을 수도 있었다.[9] 상윳따니까야에는 말룽끼야뿟따(Māluṅkyaputta) 존자라고 나온다.[10] 활의 재료를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한 접착제.[11] 이때 석가모니 부처에게 만동자(말룽꺄뿟따)가 묻고 석가모니 부처가 "그런 것을 알고 모르고에 집착하는 것은 해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걸 모르는 것이 해탈에 걸림돌이 되냐? 알면 니가 또 뭐할 건데?"라고 일축해버린 문제들을 불교에서는 십사무기(十四無記)라고 해서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실천적인 물음이 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 공자계로로부터 사후세계나 귀신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람도 제대로 섬기고 대하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고 대하겠느냐(未能事人 焉能事鬼)", 살아있는 동안의 삶도 다 알지 못하면서 죽은 뒤의 일을 뭐하러 알려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한 것과 취지가 비슷하다.[12] 남녀 간 갈등이 여기서 자주 터지고는 하는데, 남자에 비해 관계 중심적인 여자는 비교적 질문의 빈도가 많다. 왜냐하면 체면을 고려하는 남자에게 뜬금없는 질문은 부끄러운 행동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여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강요하는 경우에 갈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답답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저 질문 하나인데'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오히려 남자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혹은 '저 사람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은데' 가 앞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관계 중심적이라 함은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중시 여기지 않고, 특정 인물을 의식하지 않는 것 = 특정 인물을 인간관계상의 대상 A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관계 중심적인 사람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자주 바뀌기도 하고, 누구 보단 어떤 사람에 더 집착하는 성향을 띈다. 그래서 여성이 말싸움을 하다 말 꼬투리를 그냥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닌 것이다.[13] 이 경우 국소적으로 질문하는 게 예의이다. 왜냐하면 국소적으로 못 들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단한 결례로 느낄 수 있다. 괜히 '니가 들은 게 맞아, 이 XX야'. 라며 욕하며 화내는 게 아니다.[14] 하지만 모두가 주제를 바꾸고 싶어하는 눈치가 있으면 결례가 아니다.[15] 하지만 되묻기에만 한정되지는 않고 전체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매우 이기적인 행위이다. 또한 소수의 입장 역시 존중받아야 하지만 단체 행동에서는 다수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우선시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