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사적 번호 시작

'''1호'''

2호
'''경주 포석정지'''
김해 봉황동 유적
[image]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호'''
'''경주 포석정지'''
慶州 鮑石亭址
Poseokjeong Pavilion Site\,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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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3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면적'''
5\,23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위치'''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경주역사유적지구
영어
Gyeongju Historic Areas
프랑스어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 연도
2000년
등재 기준
[1], Ⅲ[2]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불교건축 및 생활 문화와 관련된 뛰어난 기념물과 유적지가 다수 분포해 있다.[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신라 왕실의 역사는 1,000년에 이르며, 남산을 비롯해 수도 경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신라 문화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용도 논쟁
5. 관람
5.1. 입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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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순환로 816 (배동)에 위치한 사적지. 공식 명칭은 '경주 포석정지'로 통일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던 정자(亭子) '포석정'이 위치했던 터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조성 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주로 통일신라 시대의 기록에 등장한다. 관련 기록은 극히 부족한 편이지만, 묘사에 따르면 대체로 국왕들이 유흥을 즐기던 놀이 공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헌강왕때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처음 언급되어 남북국 시대인 8-9세기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이 홀로 보았다. 어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 스스로가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紀異第二)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中

또한 《삼국사기》를 포함한 여러 기록에서 927년, 경애왕후백제의 왕 견훤이 경주를 급습해올 당시에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고 전해지며 견훤에게 붙잡혀 자결을 강요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국세가 기울어가던 신라의 망국은 사실상 확정되어 버렸다.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순왕이 이후 고려의 왕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3]

에서 우리[신라] 군사를 침범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을 공격해 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4]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땅을 기면서 노복이 되기를 구걸했으나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사#s-4(公私)의 재물 모두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權知國事)[5]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新羅本紀 第十二) 경애왕(景哀王) 4년 가을 9월(四年秋九月) 中


3. 구조


보통 포석정이라고 하면 포어(鮑魚)[6]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석구(石溝)를 말하지만 사실 이 석구는 포석정의 부속 기물 중 하나일 뿐이다. 일부 인터넷 네티즌의 경우 구덩이가 무슨 연회 장소냐며 말하지만, 본래 이 위에 포석정의 본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정자가 있었으나 없어진 것이다.
포석정의 석구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 위한 용도다. 유상곡수연의 기원은 4세기 위진남북조시대서예왕희지에서 비롯됐는데,[7] 물이 흐르는 수로의 첫 부분에 술이 담긴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구조인데, 수로를 기가 막히게 설계하여 술잔이 떠내려가는 중에도 기울어지거나 부딪히지 않았다 한다. 이 술잔이 떠내려가는 동안 시를 짓고 만약 못 지으면 벌주 3잔을 마시는 식으로 노는 것이 유상곡수연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수로를 물길을 꼬고 수로의 깊이까지 계산하여 설계하여 술잔이 오래 떠내려가게 하여 시를 지을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석굴암과 함께 통일신라 석조건축기술의 정밀함을 알 수 있는 유적.[8]
다만 1915년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새로 보충하는 등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은 잃어버렸다고 한다. 거기에 위 사진 속에도 보이는 나무가 자라면서 돌을 건드려 미세하게 밀려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므로 지금은 물이 흐르고 술잔을 띄워도 끝까지 흔들림없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크기를 다양하게 다듬은 돌 63개가 사용됐고 크기는 길이 10.3 m, 폭 7 m 정도이고, 물길 길이는 약 22m이다. 물길의 폭은 최소 24 cm에서 최대 40 cm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30 cm 정도이다. 깊이도 평균적으로 22 cm 정도이며 물길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 cm 정도이다.이러한 특징 때문에 각 위치마다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뒷산에서 물을 받아 토하는 거북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1871∼1873년 사이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전할 뿐 소재를 알 수 없다. 다만 물을 토하는 거북이가 있었다는 것은 곧 그 거북모양 돌 밑에 배수로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용도 논쟁


포석정에 대한 관련 기록은 비록 부족한 편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서는 한결같이 왕들이 놀이를 즐기던 곳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라의 경애왕이 후백제의 왕 견훤이 수도인 경주까지 침공해왔을 때에도 포석정에 나아가 놀고 있었다는 기록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에게는 망국의 상징 내지는 암군의 사치에 비유되는 등 이미지가 썩 좋지는 못한 편이다.
다만 제사공간이었는데 놀이공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헌강왕은 여기서 춤을 춰 산신을 만났다고 하고 있으며, 특히 경애왕이 여기서 놀다가 잡혀죽은 부분에서는 정황상 석연치않은 구석이 많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적국의 왕이 수도 코앞까지 진격해오는 다급한 상황이었고, 심지어 경애왕 본인조차 이를 알고는 고려의 왕 왕건에게 구원까지 청하고 있던 판에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신라는 망할 만 했으니 망했다"는 프로파간다가 필요했던 후백제나 고려가 만들어 퍼트린 이야기로 보고는, 사실 포석정이 연회, 제사용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견훤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최후의 발악으로 하늘에 제사라도 지냈다는 말이다.
이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 수긍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비록 그 분량이 극히 적기는 하지만, 포석정에 관련된 여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포석정은 그저 놀이공간이었을 뿐이었다. 포석정에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짓는 놀이인 유상곡수연을 위한 수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나라를 위해 왕이 직접 행차해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에 그런 향락적인 놀이공간이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정말로 신라의 왕들이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냈다면, 이는 요즘으로 비유컨데 나이트클럽에서 향피우고 제사상 차리는 격이다. 지금으로서는 기록을 따라서 포석정을 국왕의 놀이공간 정도로 추측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9] 그러나 이 시대는 현대가 아니라 고대 사회고, 고대사회는 성과 속이 그렇게 딱딱 구분되던 시대가 아니었다. 제사와 잔치가 한자리에서 벌어지는 것은 사실 동서양 고대 사회에서 흔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비유다.
또 한편으로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잡혀 죽었다는 음력 11월이 양력으로 치면 1월 한겨울인지라, 야외에서 유상곡수연을 하면서 한가하게 논다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럽고, 인근 1km 거리에 신라의(특히 박씨)의 성지나정신궁, 배동 삼릉 같은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를 제사공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에게 공격받아 죽은 시기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경애왕이 11월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 견훤열전에서는 10월이라고 하였고, 《고려사》 태조세가와 《고려사절요》에서는 경애왕이 죽은 시기를 9월로 기록하고 있다.
덧붙여 난정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유상곡수는 액을 쫓는 제의의 일종인 계사(稧事)의 뒤풀이 격으로 이루어진 행사였다. 따라서 포석정을 제의공간과 놀이공간으로 딱부러지게 구분하려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편견이라는 점도 감안되어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동궁과 월지처럼 이곳을 행궁이나 이궁을 지어서 휴식이나 제사를 동시에 겸할수 있는 시설이라는 추정을 하고있다.

5. 관람


입장료는 성인 1천원. 대중교통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500번, 505번, 506번, 507번, 508번을 타고 포석정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사실 동그란 포석정 수로는 위에서 언급했듯 신라시대 포석정의 '일부 시설'이다. 유물이 출토되고 건물터가 확인됐지만 2018년 현재 볼거리는 수로뿐이다. 입장료가 있는 경주의 네임드 유적지 중에서는 가장 썰렁한 축에 속하므로 역덕이 아니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주변에 보물 63호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등 다른 유적도 많고, 포석정 바로 뒤는 야외 박물관이란 별명이 있는 남산의 등산로 중 하나이기도 하므로 연계해서 둘러볼 수도 있다.

5.1. 입장료


주차요금
소형차
2,000원
대형차
4,000원
입장료
성인
1,000원
청소년/군인
600원
어린이
400원
자동차를 타고 갈 경우 주차장에서 주차요금과 입장료를 함께 받는다. 도보로 갈 경우 주차장 요금소에서 입장권을 사야 하니 이 점 참고하자. 경주시민은 주소가 표시된 신분증을 제시하면 입장료가 면제된다.

[3]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그런데 《고려사》 권57 지리 1 영주(永州)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에 신라시대의 임고군(臨皐郡)과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을 합하여 설치한 것으로, 일명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고 한 점에서 현재의 경북 영천 지방이 곧 고울부였음을 알 수 있다.[4] 삼공(三公)과 구경#s-3(九卿)과 대부#s-8(大夫), 곧 벼슬이 높은 사람들을 말한다.[5] ‘권’은 임시의 뜻이고 ‘지’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권지국사는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한 기간 동안에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로, 권서국사(權署國事)라고도 한다.[6] 소금에 절인 생선, 전복을 가리킨다. 통설은 전복.[7] 한국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기기 위해 만든 시설 중 다른 것으로 조선시대 창덕궁 후원 옥류천의 유적이 있다.[8] 그런데 술잔을 띄우는 게 아니라, 수로에다가 물 대신 술을 흘려보내고 그걸 떠다먹는 방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 굳이 따지자면, 견훤이 경주로 접근해오다가 군사를 돌리고 물러났다든가 혹은 오던 중에 고려의 공격을 받아 격퇴당했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고는 기념으로 연회를 하다가 꼼짝없이 당했을 가능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