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現 상하이 선화의 코치.
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남 마산 출신으로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상무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쳤다.[2] 제대한 후 1999년 J리그 클럽 비셀 고베에 입단하였다. 비셀 고베에서 김도훈, 하석주와 함께 코리안 삼총사로 활약하며 2시즌 동안 51경기에 출장하였다. 2001년에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클럽인 LASK 린츠로 이적해 13경기동안 1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2부리그로 강등되었고, 다음 시즌에는 6경기 출장에 그치던 도중 2002년 K리그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다. 수원에서 5시즌동안 컵대회를 포함해 104경기를 뛰면서 1골 5도움을 기록하였고, 팀이 리그, FA컵, 하우젠컵,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아시아 슈퍼컵, A3 챔피언스컵 등 수많은 대회에서 트로피를 획득하는데 일조하였다. 2006년 7월 요코하마 FC로 임대되어 22경기에 출장하며 팀의 1부리그 승격에 공헌하였다. 2007년 울산 현대로 이적하며 K리그에 복귀했으나 8경기 출장에 그쳤고, 2008년 J2리그인 더스파 구사쓰로 이적하였다. 구사쓰에서 3시즌 동안 48경기에 출장하고 축구 선수 생활을 마쳤다.
2.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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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19일 일본과의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고, 1998년 3월 4일 중국 전에서 데뷔 골을 기록하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발탁되어 조별리그 3경기 모두 오른쪽 윙백으로 출장하였다. 이후 2000년 AFC 아시안컵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엔트리에 포함되었지만, 한일 월드컵에서는 1경기도 출장하지 못하였다.
한일전에서는 일본 에이스급 선수들의 전담마크맨으로 알려졌는데, 빠른 발과 강한 체력, 우수한 맨마킹 능력을 고루 갖춰 해당 롤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마에조노 마사키요를 전담마크해서 성공을 거뒀고, A대표팀에서도 당시 일본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나카타 히데토시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다만 이 전술은 나카타가 세리에 A에 진출한 이후 피치컬적인 능력을 보완하고 나와 신체적인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일본에서도 나카타 전담마크맨으로 제법 유명했으며 이런 부분이 J리그에 진출하는데 발판이 되기도 했다.
A매치 64경기 출전 기록이 말해주듯 국가대표로서 제법 족적을 남긴 선수였다. 상술했듯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의 주전이었고 하석주와 더불어 주요 전술 루트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월드컵은 한국 대표팀에게 있어 흑역사로 남게 되었고,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인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엔트리에 들었음에도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데다가 월드컵 이후에는 대표팀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다소 묻혀버린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엄청난 체력으로 폭주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에서는 한때 나카타 히데토시의 마크맨으로 활동했으며 1998년 월드컵 때에도 주전 윙백으로 활약했다. 빠른 발과 우수한 체력 그리고 엄청난 맨마킹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자리에 이영표, 송종국이라는 걸출한 유망주와 선수들이 있어서 출전할 기회가 없었다.
4. 스태프
은퇴 이후 2011년 강원 FC 리저브팀 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였고, 2013년부터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7년에는 공석인 팀의 피지컬 코치를 한시즌 동안 병행하였다.
2019년 다롄 이팡의 코차로 부임하였지만, 시즌 중반 최강희 감독을 따라 상하이 선화 코치로 부임하였다.
5. 여담
#이 짤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2003년, 일본 출신의 여배우 아베 미호코와 결혼하여 슬하 2남을 두었다. 결혼 13년 째이던 2016년 2월에 KBS 2TV 글로벌 남편백서 내편 남편에 출연하여 근황을 알렸다.
SNS를 젊은 선수들 못지 않게 꾸준히 이용하는 보기 드문 코칭스태프다. 그의 인스타그램에서 최성용의 팀에 대한 애정과 아들바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모 일본 방송사의 이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