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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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카롤 카라이만
(Carol Caraiman)
'''출생'''
1893년 10월 15일
루마니아 왕국 시나이아 펠레슈성
'''사망'''
1953년 4월 4일 (59세)
포르투갈 공화국 리비에라 이슈토릴
'''재위'''
루마니아 왕국의 왕
1930년 6월 8일 ~ 1940년 9월 6일
'''배우자'''
지지 람브리노 (1918년 결혼 / 1919년 무효화)
그리스덴마크의 엘레니 (1921년 결혼 / 1928년 이혼)
마그다 루페스쿠 (1947년 결혼)
'''자녀'''
카롤 람브리노, 미하이 1세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
'''어머니'''
에든버러의 마리
'''형제'''
엘리사베트, 마리야, 니콜라에, 일레아나, 미르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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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1. 개요


루마니아의 국왕.

2. 생애


카롤 2세(Carol II)는 호엔촐레른의 페르디난드 1세와 에든버러의 마리[1]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루마니아 땅에서 태어나고 루마니아어가 모국어인 최초의 호엔촐레른 왕조 왕이다. 그는 1914년 아버지가 루마니아 왕 페르디난드 1세로 즉위하자, 아버지를 따라 왕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엘레니 공주(1896~1982) [2] 와 결혼해 아들 미하이를 얻었다.
문제는 그가 여자를 매우 밝혔다는 거다.[3] 엘레니 공주와 만나기 전에 지지 람브리노(1898~1953)라는 여성과 사귀면서 카롤 람브리노(1920~2006)이라는 아들을 낳았다.[4]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왕세자 시절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와 혼담이 오갔을 때, 올가 공주는 그의 플레이보이 기질 때문에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해 거절했다.
게다가 군 복무 중에는 군무이탈을 서슴치 않아서 당시 지휘관이자 이후 내각총리대신이 된 이온 안토네스쿠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5] 지지 람브리노와의 연애는 그렇다 치더라도, 엘레니 공주와 결혼한 뒤에도 마그다 루페스쿠 부인(1895?~1977)과 대놓고 동거를 했다.[6]
결국 이러한 난잡한 짓으로 페르디난드 1세와 백성들의 신뢰를 잃은 카롤은 1925년 왕위계승서열에서 배제되었고, 아버지가 승하하자 1927년 아들 미하이 1세가 즉위하였다.
그런데 1930년 카롤은 미하이를 몰아내고 즉위했다. 카롤은 2년 전 아내 엘레니와 이혼한 후였지만 의회는 카롤이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조건 하에 즉위를 허락했다. 그러나 '''카롤 2세로 즉위한 뒤에도 계속 마그다를 만나면서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없음을 인증했다.'''
거기다 카롤 2세는 정치적 권모술수가 뛰어난 인물이라 코드레아누철위대에게 몰래 자금을 지원했고[7] 농민당과 자유당에 내분을 조장하여 무너뜨렸다. 결국 루마니아 의회는 군소정당들이 난립하며 난장판이 되었고 이를 빌미로 그는 '''군주 독재정의 수립을 선언하였으며''' 1938년 2월, 1933년에 자신이 폐지한 헌법을 대신할 새 헌법을 만들어 의회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민족 재건 전선이라는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 독재 정치를 펼쳤다. 당연히 이로 인해 그는 민심을 잃어버렸는데, 특히 사형 제도를 부활시킨 게 결정타였다. 그나마 유일한 업적(?)이라면 축구광이어서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1930년 월드컵에 참가시켜 루마니아를 월드컵 원년 멤버로 만든 정도...
결정적으로 1940년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북부 트란실바니아헝가리 왕국에, 남부 도브루자를 불가리아 왕국에 할양한 것으로도 모자라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소련에 할양하게 되면서 선왕 시절에 이루어 놓은 대루마니아의 영토가 대폭 줄어들어 버렸다.[8] 이온 안토네스쿠와 의회는 끝내 폭발하여 카롤 2세를 폐위시키고 왕세자로 격하되어 있던 미하이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포르투갈 이슈토릴[9]에 정착하여 1953년 사망. 아들 미하이 1세는 어머니를 버리다시피한 아버지 카롤 2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1940년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불참했다.
사망 후 포르투갈에 묻혔으나 2003년 루마니아로 유해가 돌아와 묻혔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군주 독재제 수립 중점을 타면 루마니아 국가원수로 등장하는데 국가원수로 등장하기 전부터 사치를 부리느라 소비재 공장 비율을 강제로 늘리는가 하면 애인과 놀아나느라 정치력 소모를 강요하는 등 계속 사고를 치니 빨리 제거해야 한다. 국가 중점을 통해서 아들 미하이 1세에게 퇴위를 강요하게 할 수도 있고 아예 공산국가 수립이나 안토네스쿠의 파시즘 국가 수립도 가능하다.

[1]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넷째) 앨프리드 왕자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 사이의 장녀[2] 콘스탄티노스 1세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 사이의 장녀(셋째)이다.[3] 그의 어머니인 마리도 바람기가 심했다고 하니, 모전자전이다.[4] 카롤 람브리노의 장남인 파울필리페 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1948년생)은 자신이 가문의 주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2010년에 무려 62세(!)라는 나이로 아들을 낳았다.(인공수정 혹은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 정설이다. 더욱이 파울필리페의 부인은 1949년생. 공식적인 입장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렸다는데...) 미하이 1세는 딸만 5명을 둔 지라 자신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듯 하였으나, 호엔촐레른 가문은 살리카법귀천상혼이 둘다 적용되기 때문에 그도 계승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미하이 1세가 2011년에 아예 호엔촐레른 가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로므니아 왕가로 바꾸면서 사실상 꽝.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본가에서는 그래도 귀천상혼 쪽에 긍정적이었다고 한다.[5] 이러한 악연 때문에 나중에 이온은 카롤 2세를 몰아내고 독재 정치를 하여 루마니아를 전쟁으로 몰고 갔다.[6] 끝내 이들은 1947년에 정식으로 결혼한다.[7] 정작 코드레아누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질투하여 그를 처형해 버렸다.[8] 헝가리에 떼어준 북부 트란실바니아는 독일·헝가리와 전쟁을 해서 1945년에 되찾았지만, 그 외의 땅은 상실한 채 지금의 루마니아 국경선으로 굳어진다.[9] 호르티 미클로시가 1946년 헝가리 왕국이 패망하자 망명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