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우드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우완 투수로, 시카고 컵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에이스였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량이 하락해 불펜으로 보직을 변경했고, 결국 이른 나이에 커리어를 끝내게 된 비운의 스타다.
2. 커리어
2.1. 시카고 컵스
유서 깊은 텍사스산 파이어볼러 계보의 일원이었던 우드는 1995년 고졸 신분으로 시카고 컵스의 지명을 받고 마이너에서 담금질을 거쳐 1998년 데뷔했다. 아직 솜털도 보송보송했던 우드는 1998년 5월 6일 리글리 필드에서 생애 5번째 선발 등판을 하게 되었고, 그 날 그는 킬러 B's를 위시한 막강한 타선을 자랑하던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내셔널 리그 처음으로 '''단일 경기 9이닝 20탈삼진'''이라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2] 이날 첫 이닝에서 킬러 B's 크레이그 비지오-데릭 벨-제프 배그웰을 모두 삼진으로 처리한 것을 시작으로 출루를 허용한 것은 비지오에게 몸에 맞는 공 하나와 리키 구티에레즈에게 맞은 유격수 방향의 내야 안타뿐이었다. 이 게임은 투수가 게임을 어느 정도 지배했는지 나타내는 게임 스코어에서 105점을 달성해 역대 9이닝 경기에서 1위[3] 를 차지하고 있다.
이 경기 이후로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고, 시즌 성적 26경기 166.2이닝 13승 6패 ERA 3.40 233탈삼진(NL 3위) 9이닝당 탈삼진율 12.582를 기록하면서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랜디 존슨을 제치고 역대 1위를 마크하게 된다.[4] 이런 무시무시한 시즌을 보낸 우드는 토드 헬튼을 한표차로 제치고 신인왕에 선정되었다.
1999년에는 아예 메이저 등판을 하지 못했고, 2000년에도 부진했지만 그 가능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라 2001년부터 신인왕 시즌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기 시작한다.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키며 2001년에는 28경기 174.1이닝 12승 6패 ERA 3.36 217탈삼진(NL 4위), 2002년에는 33경기 213.2이닝 12승 11패 ERA 3.66 217탈삼진(NL 3위), 2003년에는 32경기 211이닝 14승 11패 ERA 3.20 '''266탈삼진(NL 1위)'''을 기록하며 삼진을 양산해내는 시카고의 에이스가 되었다. 이 중 백미는 2003년으로 슬라이더와 커브의 구위가 정점을 찍으며 삼진을 엄청나게 솎아내며 이 해 슬라이더의 피치밸류는 무려 14.8, 커브는 6.9를 기록했다.[5]
하지만 '''부상'''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6] 첫 해의 퍼포먼스를 뒤로하고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되어 99년을 날렸고, 이후로도 매년 20경기를 조금 넘는 등판 횟수에 그치는 등 강력한 패스트볼 - 폭포수 커브볼 - 슬라이더 - 체인지업이라는 대단한 스터프를 견뎌낼만한 튼튼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 결국 2004년을 기점으로 부상이 계속 악화되더니 어깨 부상까지 당하며 팔꿈치와 어깨에 모두 칼을 대는 신세가 되어 커브의 구사 비율을 줄이면서[7] 패스트볼의 구위를 상실한데다 고액 연봉의 값을 하지 못하는 먹튀가 되고 말았으며 해도해도 너무한 부상의 늪에 빠진 그에게 팬들도 점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무렵 구단에서는 전에 비해 굉장한 폭으로 하락한 헐값의 연봉을 오퍼하며 불펜 투수로의 전향을 권유하여 우드도 동의했다.[8]
불펜으로 옮긴 것은 선수 생명을 늘리는 데엔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우드에게는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불펜으로 웜업 지시를 내리는 전화가 올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구위가 점점 올라오며 컵스의 필승계투조로 등극하였고 2007년에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것에 이어 2008년에는 마무리를 맡아 비록 ERA는 마무리치곤 높은 편이었지만[9] 34세이브를 거두며 올스타에 선정되어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몸상태를 확신하지 못했던 컵스 짐 헨드리 단장은 결국 그와 재계약을 포기했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2년 $20.5M의 계약을 맺으며 시카고를 떠나게 됐다.
2.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09년 인터리그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인디언스 유니폼을 입고 선 리글리 필드 마운드에서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는 명장면을 연출했지만 성적은 $10M이라는 연봉의 리그 정상급 마무리의 면모와는 전혀 딴판으로 다시금 부상과 부진이 거듭되며 먹튀가 되고 말았다. 결국 부상과 불질을 거듭한 끝에 인디언스는 2010년 데드라인에 연봉보조를 하여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10] 해버렸다.[11]
2.3. 뉴욕 양키스
하지만 양키스로 이적한 이후 우드가 다시 폼을 되찾으며 이 이적은 양키스 입장에서 '''신의 한수'''가 되었고, 마리아노 리베라의 앞에서 던지는 셋업맨으로서 0점대 ERA를 찍으며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의 연봉에 대한 부담이 컸던 양키스는 $11M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옵션을 포기했고, 우드는 FA가 되었다. 부활의 전조를 보인 그에게 많은 팀들이 관심을 보였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4M을 거절한 우드는 $1.5M이라는 헐값에 친정팀 시카고 컵스로 돌아왔다. 클리프 리, 제이슨 워스, 칼 크로포드라는 빅 3가 무시무시한 계약들을 따내는 등 엄청난 돈잔치가 벌어진 2010-11 오프 시즌 FA 시장에서 우드의 이 디스카운트 계약은 많은 올드비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감동을 자아냈다.
2.4. 시카고 컵스 2기
2011년에는 난장판이 된 컵스의 불펜에서 55경기 51이닝 3승 5패 1세이브 21홀드 ERA 3.35 57탈삼진을 기록하며 그나마 유일하게 제 몫을 해준 우완 셋업맨으로서 컵스 팬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2011년 종료 이후 우드는 "컵스가 아니면 은퇴할 것"이라면서 가족들도 시카고로 옮겼다.
3. 은퇴
하지만 2012 시즌 초부터 제구 난조로 부진에 빠지며 2패 ERA 8.64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다가 2012년 5월 18일 전격 은퇴 선언을 하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강판될 때 리글리 필드의 관중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줬다.
이후 2014년까지 34번은 임시 결번으로 봉인되었는데, 2015년 빅딜을 체결하고 입단한 존 레스터가 34번을 달면서 일부 컵스 팬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레스터의 활약으로 2015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고 2016년 108년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뒤에는 반발이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적잖은 올드비 컶빠들은 우드의 저지를 입고 다니는 편이다. 2016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프로그레시브 필드 직관에 나선 원정팬들 사이에 우드 저지가 목격되며 우드에 대해 전혀 좋은 기억이 없는 클리블랜드 팬들이 피꺼솟(...)하기도 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커리어 초기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구위의 포심[12] 과 폭포수 커브를 앞세워 탈삼진을 양산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포심의 구위는 부상 이후에도 위력을 어느정도 유지하여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산 9이닝당 탈삼진은 무려 '''10.32'''이다.[13] 그런데 커리어 하이였던 2003년 이후, 그러니까 2004년 부터는 커브의 구사비율이 엄청나게 줄어들고[14] 슬라이더가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체인지업은 계속 던지긴 던졌으나 구사비율은 5% 미만으로 적었던 편이었다. 다만 볼넷이 많은 편이라 ERA에 비해 FIP가 꾸준하게 높은 타입이었고, 대신 구위가 워낙 좋아 피홈런은 적었다.
부상으로 인해 불펜 전향을 한 이후에는 커터도 꽤나 많이 던졌는데 말년에는 부상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슬라이더를 아예 '''봉인'''해버리고 체인지업도 아예 던지지 않았으며, 커터와 포심 두가지의 패스트볼만 90퍼센트 가까이 던지기도 했다.
5. 연도별 성적
6. 기타
- 슬하에 아들 저스틴 우드, 딸 케이티 우드와 샬롯 우드를 두고 있다. 2008년에 시카고로 이사해서 지금까지도 시카고에 살고 있다.
- 2013년 시카고에서 패들 보드를 타다가 사체를 발견했다.(...) 우드는 이를 바로 신고했고 신원 조회 결과 실종신고 된 40대 남성이었다고...
- 2018년이 되면서 명예의 전당 입후보 자격을 얻었지만 단 2표(0.5%) 받고 곧바로 광탈했다.
7.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미국에선 1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커버 모델로 나온 스포츠 선수는 부상을 입는다는 저주가 있었고, 이 둘이 나왔을 때도 팬들은 설마설마 했는데... [2]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로저 클레멘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달성한 적이 있고, 후에 랜디 존슨이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소속으로 기록했다. [3] 연장 경기까지 포함하면 1920년 5월 1일 브루클린 다저스와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연장 26이닝 1:1 무승부 경기다. 당시 두 투수는 각각 26이닝 완투하였고 게임 스코어는 149, 141을 찍었다. [4] 물론 바로 다음해에 페드로가, 페드로의 다다음해에 랜디 존슨이 깨긴 했다. [5] 쉽게 비교해보자. 2017년의 크레이그 킴브럴의 포심 피치밸류가 19, 2015년의 맷 하비의 포심이 16.3이었다. 거기다가 이 시기는 스테로이드 시대의 정중앙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6] 일부에서는 우드와 프라이어의 몰락을 더스티 베이커 감독의 혹사 때문이라 하지만, 프라이어의 경우 inverted-W 같은 위험한 투구폼, 우드의 경우는 원래 유리몸 끼가 보였다는 등의 변명이 가능해 프라이어의 경우는 아직 논란이 많지만 우드의 경우는 유리몸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편이다. [7] 보통의 투수는 커브보다는 슬라이더 쪽이 팔꿈치의 무리를 준다고 알려져 있으나 우드의 경우에는 커브가 팔꿈치의 부담이 더 왔다고 한다. [8] 대신 불펜으로 주로 뛰던 라이언 뎀스터가 컵스 스타팅 로테이션으로 옮겼고 에이스 노릇을 하게 되었다. [9] 다만 FIP 2.32라는 좋은 수치를 기록한 것을 보면 운이 나쁜 시즌이었다. [10] 당시 우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박찬호가 지명할당되었다. [11] 이 당시 추신수와 그래디 사이즈모어 등 클리블랜드의 외야수들이 케리 우드가 마무리를 보러 올라오면 했던 뒷담화를 김형준 기자가 몇 년 후에야 공개를 했는데 서로 '야 또 케리 우드 올라온다' '우리의 경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라는 자조섞인 잡담을 나눴다고 한다. [12] 평균 구속 95.4마일로 현대 야구를 보는 팬들은 뭐가 빠른가 싶은 구속이지만 테일링이 끝내줬다. [13] 이는 10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중 랜디 존슨에 이어 역대 2위, 현역 선수들을 포함해도 7위에 달하는 기록이다. [14] 2002년 22.2%, 2003년 16.6%에서 5% 수준으로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