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캇 롤렌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3루수로 현재 골드 글러브 16회 수상의 브룩스 로빈슨과 10회 수상의 마이크 슈미트에 이어 골드 글러브를 8회 수상해 놀란 아레나도와 함께 역대 3루수 골드 글러브 수상 횟수 3위에 올라 있다.
2. 선수 경력
인디애나 주 에반스빌에서 태어나 재스퍼 고등학교에 진학한 롤렌은 고등학교 농구 코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으며 두 종목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롤렌은 고등학교 농구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활동하면서 농구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줘 인디애나 주의 Mr. Basketball을 뽑는 투표에서 3위에 입성하기도 했다. 롤렌이 나온 학교가 소위 깡촌에 있는 학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한편 롤렌은 고등학교 야구팀의 에이스 투수이자 유격수로 활동하면서 야구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줘 인디애나 주의 Mr. Baseball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야구팀의 코치였던 테리 고버트는 롤렌의 어깨와 팔꿈치에 걸리는 피로를 고려해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그의 포지션을 3루수로 옮기게 했다.
롤렌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앨라배마 대학교와 조지아 대학교에서 농구 장학금을 제시받았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카우트인 스캇 트르카가 롤렌의 부모님을 설득했고 롤렌 역시 야구에 대해 열정을 보이면서 자신의 진로로 야구를 택하게 되었다.
롤렌이 참가신청을 내었던 199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트롯 닉슨, 토리 헌터, 까지 대어들이 많았던 드래프트였다. 롤렌은 이 해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46순위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지명되었다.
2.1. 필라델피아 필리스
입단 이후 롤렌은 마이너 리그를 한 단계씩 차근차근 씹어먹으면서 올라갔다. 1994년 싱글A에서 야구선수로서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낸 롤렌은 .294 .362 .462 14홈런 72타점의 뛰어난 성적과 함께 코치들의 조언을 빠르게 흡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탑 유망주로서 주목받게 되었고 이듬 해에도 하이A에서 주눅들지 않고 .290 .392 .487 10홈런 39타점이라는 성적을 낸 롤렌은 후반기에 더블A로 승격되었다.
1995년 후반기 더블A로 승격된 롤렌은 .289 .353 .447 3홈런 15타점을 기록했고 1996년에는 더블A에서 .361 .445 .591 9홈런 42타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보이면서 트리플A로 승격되었다. 1996년 롤렌은 트리플A에서도 .274 .376 .411 2홈런 19타점의 성적을 내고 있었다.
1996년 7월 3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메이저 리그로 콜업된 롤렌은 이후 꾸준한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9월 7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중 상대 투수의 투구에 오른쪽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시즌을 마감해 최종적으로 .254 .322 .400 4홈런 18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롤렌은 아직 신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1997년 메이저 리그에서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롤렌을 당시 필리스의 감독이었던 테리 프랑코나는 팀의 주전 3루수로 낙점했고 롤렌은 .283 .377 .469 21홈런 92타점이라는 화려한 성적과 함께 만장일치로 내셔널 리그 신인왕에 선정되었다. 이 해 아메리칸 리그에서도 만장일치로 신인왕이 선정되었는데 수상자는 노마 가르시아파라였다.
주전 3루수로 완벽하게 정착한 롤렌은 풀타임 2년차에 1998년 .290 .391 .532 31홈런 110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간판 타자가 되었고 커리어 첫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1999년에는 등 부상으로 50경기를 결장했음에도 .268 .368 .525 26홈런 77타점을 기록했고 2000년에도 롤렌은 .298 .370 .551 26홈런 89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서 자리를 견고히 했다.
그 당시 필리스에서 롤렌은 팀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그러나 2001년부터 롤렌은 팀과 갈등을 빚게 된다.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테리 프랑코나는 지금은 유명한 명장이지만 필리스의 감독을 맡던 시기에는 감독 경력이 부족한 초짜였고 결국 2000년 시즌 도중 해고당하게 된다. 이후 팀의 암흑기를 지탱해오던 커트 실링마저 팔아버리는 프런트를 본 롤렌은 팀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2001년 감독으로 부임해 온 래리 보와는 롤렌과 물과 기름처럼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고 곧 롤렌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보와는 시즌 초반 팀의 중심 타선에 있던 바비 어브레유와 롤렌이 부진하자 곧바로 그들을 비난했고 이에 롤렌도 지지않고 대들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본 필리건들은 롤렌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프런트에서도 롤렌을 공격했다. 에드 웨이드 단장의 선임 보좌관이었던 댈러스 그린이 지역 라디오에서 보와를 두둔하면서 롤렌을 깎아 내리는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롤렌은 .289 .378 .498 25홈런 107타점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보여줬다.
롤렌은 필리스의 운영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팀이 과연 우승할 생각이 있는 것인가라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하기 시작했다. 이에 필리스는 롤렌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10년 140M의 대형 계약을 제시했지만 롤렌은 이를 거절했다.
필리스의 리빌딩 타이밍에도 롤렌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필리스는 롤렌을 중심으로 바비 어브레유, 팻 버렐, 지미 롤린스 같은 유망한 타자들로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투수진은 진짜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즉 필리스는 투수진에 돈을 써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필리스는 2004년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개장에 맞추어 리빌딩을 진행하고 있었고 1996년 데뷔한 롤렌은 데뷔 9년차가 되어서야 팀이 포스트시즌에 도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2002년 스프링 트레이닝 첫 날부터 롤렌은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구단의 운영을 비난했다. 이 인터뷰에서 롤렌은 (1) 사실 140M이라는 거액을 거절하는 바보는 어디 있겠나. (2) 그러나 나에게는 돈보다 승리가 중요하다. (3) 나에게 돈을 퍼주느라 다른 선수들을 영입하지 못한다면 이 팀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라는 발언을 했다.
인터뷰가 있고 며칠 후 래리 보와는 롤렌에게 다가가 말다툼을 벌였는데 이 대화가 언론에게 노출되어 버렸고 곧 보와는 에드 웨이드 단장에게 롤렌을 트레이드 시킬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기 동안 .259 .358 .472 17홈런 66타점을 기록했고 커리어 첫 올스타에도 선정되는 등 롤렌은 자기 할 일을 하였다.
2.2.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필리스가 롤렌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지만 FA까지 고작 반 년 남은 선수를 그 어떤 팀도 유망주를 주고 데려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심장마비로 에이스 데릴 카일을 잃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자신들의 에이스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헌정하고 싶어했고 이에 월트 자케티 단장은 기존의 3루수였던 플라시도 폴랑코에 선수들을 얹어 롤렌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롤렌은 카디널스로 건너와 남은 경기 동안 .278 .354 .561 14홈런 44타점을 기록해 2002년을 .266 .357 .503 31홈런 110타점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팀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탈락했다.
카디널스로 건너올 당시 롤렌은 지속적인 등 부상으로 인해 배트 스피드가 줄어들면서 우려를 보이고 있었지만 카디널스에서 스윙 각도를 바꾸면서 다시 배트 스피드를 회복하게 되었다. 또한 인조 잔디를 사용하던 베테랑스 스타디움에서 천연 잔디를 사용하는 부시 스타디움으로 넘어오면서 부상 우려를 덜 수 있게 되었다.
오프 시즌 카디널스는 롤렌에게 8년 90M의 계약을 선사해주었고 롤렌 역시 .286 .382 .528 28홈런 104타점이라는 성적으로 팀의 기대에 보답해주었다.
2004년 카디널스의 타선은 그야말로 살인타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알버트 푸홀스를 중심으로 짐 에드몬즈, 에드가 렌테리아, 토니 워맥, 래리 워커, 레지 샌더스가 뭉쳐있던 카디널스의 타선에서 롤렌 역시 .314 .409 .598 34홈런 124타점을 기록하면서 살인타선에 한 몫을 보탰다. 그러나 팀은 월드 시리즈에서 밤비노의 저주를 깨려는 팀에게 패배하게 된다.
2005년 자신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뒤로 했던 롤렌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투수 땅볼을 친 뒤 1루로 전력 질주하고 있었는데 투수의 악송구를 받기 위해 1루 선상에 나와있던 빅초이와 부딫치게 된다. 어깨가 탈골된 롤렌은 시즌 중 복귀를 시도했으나 건강하게 복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006년 건강하게 복귀한 롤렌은 .296 .369 .518 22홈런 95타점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었으나 어깨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롤렌은 이 시즌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2007년 어깨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커리어 로우를 보냈던 롤렌은 알버트 푸홀스과 토니 라 루사 감독과의 갈등, 라 루사 감독과 월트 자케티 단장간의 파워 게임 등 여러모로 악재가 겹치자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게 되었다.
2.3. 그 이후
트로이 글로스와 트레이드 되어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온 롤렌은 하필 인조 잔디를 쓰는 로저스 센터에서 뛰면서 계속 부상에 시달렸다. 2008년을 완전히 말아 먹은 롤렌이 2009년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 가치가 웬만큼 오르는 모습을 보이자 월트 자케티 단장이 있는 신시내티 레즈로 시즌 중반에 트레이드 되었다.
다시 돌아온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에서 2009년에는 상대적으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2010년에는 .285 .358 .497 20홈런 83타점을 기록하면서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조이 보토, 제이 브루스와 함께 신시내티 레즈의 지구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롤렌 역시 노쇠화를 피하지 못해 2011년과 2012년에는 연이어 성적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토드 프레이저가 레즈의 3루수로 정착하게 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이 시기 롤렌은 경기 외적으로도 보토에게 클럽하우스 리더의 모범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프레이저의 수비를 개인적으로 훈련시키며 명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팀에 기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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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렌을 평가할 때 모두가 주목하게 되는 것이 바로 골드 글러브 8회 수상으로 증명된 수비력으로 무지막지하게 넓은 수비 범위로 대표되는 롤렌의 3루 수비는 당대 최고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롤렌은 수비 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수준급의 장타력과 컨택 능력을 갖춘 전천후 3루수로 2000안타, 500 2루타, 300홈런, 1200타점을 모두 기록한 역대 세 번째 3루수였다. 앞선 두 명은 다름아닌 조지 브렛과 치퍼 존스.
주루 능력도 괜찮아 필리스 시절에는 심심치 않게 도루를 기록했으나 인조 잔디에서 뛴 후유증으로 인해 주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롤렌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자식들에게 종종 "뭔가를 잘했을 때 다른 이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다 안다." 라고 누차 가르쳤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롤렌 역시 겸손하고 우직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 실제로 롤렌과 같이 뛰어왔던 선수들과 감독들 모두 롤렌의 성실함과 진지함을 모두 높게 평가해왔다.
신인때와 변함없이 베테랑이 된 이후에도 홈런을 치면 고개 숙이고 묵묵하게 베이스를 돌았고 클럽하우스에서도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는 등 팀에 많은 도움이 된 선수
4. 명예의 전당 떡밥
특유의 허슬 플레이로 인해 잦은 부상을 겪었어도 수준급의 장타력과 컨택 능력, 골드 글러브 8회 수상이라는 실적까지 갖춘 전천후 3루수였기에 40대 초반까지 누적 스탯을 쌓아나간다면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커리어를 생각보다 일찍 접으면서 스탯이 다소 애매해졌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입성은 힘들 것이라고 평가 받았다.
2018년 첫 해 투표에서 10.2%의 득표울에 그쳤고 다음 해에도 17.2%를 기록하는데 그쳤지만 2020년에 35.3%, 2021년에는 52.9%로 크게 뛰면서 희망이 생기고 있다. 특히 온라인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어 전망이 밝은 편이다.
보통 WAR 60 정도를 명예의 전당 커트라인으로 보는데 롤렌은 공, 수, 주에서 모두 좋은 활약을 해왔던 선수라 누적 bWAR이 70.1, fWAR은 69.9나 되기에 충분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고도 남는다고 평가받고 있다.
5. 여담
- 신시내티 레즈 시절 리더십을 발휘한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2010년의 어느 날 롤렌은 더스티 베이커 감독으로부터 다음날 경기는 쉬라는 통보를 받았다. 편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려던 롤렌은 상대 선발 투수가 로이 할러데이임을 확인하고는 베이커를 찾아갔다. 자신이 빠지면 미겔 카이로가 3루수로 나서야 했는데, 카이로는 앞선 선발 출장에서도 잭 그레인키라는 에이스를 상대했기 때문이었다. 롤렌은 베이커 감독에게 내일은 자신이 나설테니 좀 더 쉬운 투수를 상대하는 경기에서 카이로에게 기회를 주라고 부탁했다. 이러한 롤렌의 이타적인 태도는 보토에게 리더로서 나아길 길을 보여준 것이었다. #
- 한편으로는 최근 험악해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신시내티 레즈 간의 라이벌리에서 카디널스의 부주장 야디어 몰리나와 브랜든 필립스[1] 의 싸움에서 크리스 카펜터와 야디어 몰리나를 뜯어말리며 양 팀 선수들의 싸움에 있어 중재자가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과 설명[2] 그리고 험악해진 라이벌리에 대한 소개
- 필리건들에게는 여전히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고 있다. 2010년 NLDS 1차전에서 로이 할러데이가 5회에 스트라이크 존에 아주 살짝 걸치는 삼진을 잡았을 때 짜증을 내는 롤렌에게 퍼부어지는 광적인 팬들의 야유는 해당 게임의 하이라이트와도 같을 정도[3] 였으며 윌슨 발데스가 2011년에 투수로 등판했을 때에도 롤렌이 엉덩이에 볼을 맞고 걸어나가자 19회 새벽까지 남아있던 필리스 팬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실컷 야유를 퍼부었다.
- 롤렌이 카디널스로 향할 때 필리스로 온 플라시도 폴랑코가 필리스에서 2루수로 자리를 잡고 2003년을 앞두고 3루수 데이비드 벨이 영입되면서 말 그대로 새가 된 선수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체이스 어틀리다. 당초 필리스는 어틀리를 3루수로 기용할려고 했으나 3루에서 폭풍 에러를 거듭해 다시 2루수로 돌아가게 되어 어틀리는 결국 2004년에도 플래툰으로 우울한 시즌을 보내야 되었고 2005년 26세 시즌에서야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낼 수 있었다.
- 카디널스에 있을 때 동료인 짐 에드몬즈와 알버트 푸홀스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고 한다. 관심 받기 좋아하고 매 경기를 즐긴다는 자세로 임해와서 에인절스에서 뺀질이 소리까지 듣던 에드몬즈나 자부심이 넘쳐 흐르던 푸홀스와는 다르게 롤렌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실제로 세 선수는 생각보다 그다지 친하지 않았으나 경기 내에서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니 대단할 뿐이다. 다만 세 선수 모두 플레이에 있어 성격과 상관없이 허슬 플레이어로 유명했다.
[1] 카디널스를 더러운 암캐...라고 디스하기도 했으며 2000년대 후반 들어 카디널스 팬들 사이에선 공적 1순위로 꼽힌다. 오죽하면 라 루사 감독이 필립스에게 "카디널스 출신 애들이랑 자케티 단장한테 민망하지 않냐"면서 적당히 까라고 했을 정도. 롤렌 말고도 레즈에는 카디널스 출신 선수들이 굉장히 많으며 월트 자케티 단장도 카디널스 출신이다.[2] 영상에서는 롤렌이 껴안고 있다가 갑자기 배틀이 벌어지는데, 이건 롤렌이 싸움을 건게 아니라 카펜터를 껴안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자니 쿠에토가 펀치를 날린 것이다. 실제로 카펜터와 롤렌은 친한 사이이며 잘 보면 해설자가 오해를 하는 영상에서도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펜터와 함께 빠져나온다.[3] 다만 이 판정에 대한 보상판정 성격으로 제이 브루스가 풀카운트에서 볼넷을 골라 나가는 바람에 퍼펙트 게임이 무산되었다. 그런데 필리스 팬덤에서는 두번째 퍼펙트게임을 무산시킨 원흉으로 구심이 아닌 롤렌을 지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