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라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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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언급된 원문
4. 여담

힌디어: कुमारजीव
영어: Kumārajīva[1][2]
한자: 鳩摩羅什[3]

1. 개요


煩惱是道場(번뇌시도장)

번뇌가 있는 곳이 도(道)를 터득하는 장소이다.

인도의 불교에서는 번뇌를 멀리하는 것이 깨달음의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쿠마라지바는 이 번뇌야말로 깨달음의 장소이며 번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번뇌를 멀리하려고 할수록, 그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점점 더 늦어질 것이다. 그러니 번뇌 자체를 혐오하거나 멀리하지 말고, 번뇌의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그 번뇌 속에서의 평온을 추구해야 한다.

쿠차 왕국[4] 출신의 승려. 생몰연대는 344년 - 413년[5]
생전에 30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불경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발자취를 남겼다. 4대 역경가[6]의 한 사람으로써, 현장이 천축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갖고 와서 번역한 불경이 퍼진 뒤에도 쿠마라지바의 불경은 구역(舊譯)으로 불리며(현장이 번역한 불경은 신역(新譯)) 오늘날까지 한역불경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2. 생애


아버지 쿠마라야나는 인도 카슈미르 태생의 명문 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 지바는 쿠차 왕국의 공주였다. 고승전에 따르면 지바가 쿠마라지바를 임신하고 나서 갑자기 생전 배운 적도 없는 언어를 모두 알아듣고 구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쿠마라지바가 태어나고 나서는 그런 능력이 다시 사라져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쿠마라지바라는 인물이 후대에 불경 한역(漢譯)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룰 것을 예고하는 상징으로써의 한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356년에 쿠마라지바는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원시 경전이나 아비달마 불교를 배우며 자랐고, 369년에 대승불교로 전향, 불경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384년에 중국 전진(前秦)의 장군 여광이 쿠차로 쳐들어왔을 때[7] 쿠차국왕 백순이 살해되고, 여광의 포로가 된 쿠마라지바는 이후 18년 간 양주(涼州)에서 여광의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여광은 양주에서 후량(後凉)을 세웠다.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잡아놓고 "네까짓 중놈이 도사들보다 나은 게 뭐냐?"며 온갖 수모를 주었는데, 그를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하고, 쿠차 왕녀(즉 쿠마라지바의 사촌여동생)를 강제로 쿠마라지바의 방에 밀어넣어 "동침하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이때 쿠마라지바는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고 만다.
401년에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그를 맞이해 장안으로 옮기고, 402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역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불교 용어 극락(極樂)이나 지옥(地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들이 모두 그가 번역한 것.
쿠마라지바의 번역 불경은 그때까지와 다른 엄격한 규칙을 갖고 번역한 것으로 그 정확성이나 번역 수준이 그전까지의 불경에 비해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번역 스타일은 현장과 비교하면 의역직역으로 설명되는데(현장은 직역, 쿠마라지바는 의역) 원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아미타경 같은 경우는 공명지조(共命之鳥)[8] 같은 원전에 없는 내용을 추가시켰다.
<십주경(十住經)>의 경우 쿠마라지바 자신이 가져온 경전이 아니라서 본인이 이 경전에 대해 확실하게 몰랐는데, 이 때문에 쿠마라지바는 원본을 받고도 한 달을 묵혀두었다가 해당 <십주경>에 대해 잘 아는 승려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초청하여 이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난 뒤에야 번역에 들어갔다. 이미 다른 사람의 번역본이 있으면 그 옛 번역본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한 다음 번역에 들어갔으며, 번역 용어 선택이나 잘못된 곳을 고칠 때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거쳐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또 옛 번역본의 오류 뿐 아니라 원본의 오류에 대한 교정도 시도해, 서역의 음이 틀린 곳은 인도어로 고치고, 중국어가 틀린 곳은 글자의 뜻을 교정하였으며,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기록하고, 다른 이름은 올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의 음이 반 이상이었다고.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에는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그야말로 현대의 전문 번역가 못지 않은 수고를 들인 셈.[9]
쿠마라지바는 죽기 전에 "'''내가 번역한 불경에 조금의 틀린 점이 없다면 내가 죽은 뒤 내 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를 화장하고 나서 보니 그의 혀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10]
쿠마라지바, 현장 번역이 있는데, 오늘 현장의 번역이 중국입장에서 했으니 벌써 260년 후에 나온 것이니 더 좋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훨씬 쿠마라지바가 아름다운 번역이에요. 현장은 훨씬 인도식 스타일이에요. 인도에 충실하게 번역한 거에요. (현장의 번역 : 직역 스타일 쿠마라지바의 번역 : 의역 스타일) 직역이고 음사도 너무 심하게 하고, 그래서 중국인의 감정의 흐름을 봐도, 현장의 번역이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비해 떨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 쿠마라지바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해당 강의록 전문
또한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이 중요한 점은 그의 불경 번역으로 불교계의 폐단으로 지목되었던 격의불교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의 중국, 한국 등에서 불교는 기존의 토착 종교(중국의 경우는 주로 도교)와 습합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11] 이러한 격의불교는 포교에 유용하기는 했지만 포교 과정에서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쿠마라지바가 불경을 번역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서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남긴 사람이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이 배운 것으로 알려진 삼론종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불경을 소의경전[12]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기 때문. 삼국유사에는 신라십성의 한 사람인 혜공이 쿠마라지바의 제자였던 후진의 승려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을 보고 "'''이거 전생에 내가 지은 거야'''"라고 대답했었다고 전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서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데 조선 후기의 문인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쿠마라지바가 불경 번역에 대해 남긴 말(위의 쿠마라지바의 발언 가운데 밑에 있는 것)을 인용해 한글로 창작된 정철관동별곡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중국식 칠언고시로 번역하려 하는 것을 두고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며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표기하지 않은 순수 한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급하거나 저속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표현의 참신함과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한국어)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3. 언급된 원문


天竺國俗, 甚重文製. 其宮商體韻, 以入絃為善. 凡覲國王, 必有贊德. 見佛之儀, 以歌歎為貴. 經中偈頌, 皆其式也. 但改梵為秦, 失其藻蔚, 雖得大意, 殊隔文體, 有似嚼飯與人, 非徒失味, 乃令嘔噦也.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양고승전(梁高僧傳)>권2, 진장안구마라집(晉長安鳩摩羅什)[13]

'''

鳩摩羅什有言曰, "天笁俗最尙文, 其讚佛之詞, 極其華羙. 今以譯秦語, 只得其意, 不得其辭理." 固然矣.

쿠마라지바가 말하길, "천축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으로 삼는, 그 찬불가의 가락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근데) 지금 이것을 한문(秦語)으로 옮기려니, 그 뜻은 얻을 수 있는데, 그 말의 이치까지 전할 수는 없도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

'''김만중, 서포만필(西浦漫筆) 下 647-648쪽(권한 필요)'''

因法相遇, 殊未盡伊心. 方復後世, 惻愴何言. 自以闇昧, 謬充傳譯. 凡所出經論三百餘卷. 唯十誦一部, 未及刪煩. 存其本旨必無差失. 願凡所宣譯傳流, 後世咸共弘通. 今於眾前發誠實誓. 若所傳無謬者, 當使焚身之後舌不燋爛.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14]

[15]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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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 구마라습과 쿠차왕국 -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1] 산스크리트어로는 '꾸마라지와'로 들린다. 본 항목의 제목 '쿠마라지바'는 로마자 표기를 곧이 곧대로 읽은 것이다.[2] 현재 산스크리트어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될 외래어 표기법이 없다. 개별 질문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은, (일단은)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읽으면 된다고 한다. 만약 산스크리트어의 표기법이 생긴다면, 무기음과 유기음을 구별하는 언어의 파열음은 각각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그 표기를 구별하는 관습에 따라(태국어, 베트남 어 등), 'k'는 'ㄲ'으로 옮길 것이다('kh'는 'ㅋ'이 된다.). 'v'는 'ㅂ'이 될 것 같지만 외국어의 접근음은 한국어의 비슷한 반모음으로 쓰기에 '꾸마라지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불교학회의 산스크리트어 표기법과도 일치하게 된다.[3] 마지막 글자를 습 또는 집으로 읽는데 이에 따라 구마라습 또는 구마라집이 되기도 한다.[4]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아커쑤 지구,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 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 가운데 하나.[5] 또는 350년 - 409년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6] 중국 불교에서는 현장과 쿠마라지바와 함께 진제(眞諦, 499~569)와 불공금강(不空金剛, 인도명 아모가바즈라, 705~774)을 포함시켜 4대 역경승(譯經僧)으로 꼽는다. 불공금강 대신 의정(義淨, 635~713)을 넣어 4대 역경승으로 꼽기도 하는데, 현장과 쿠마라지바가 워낙 넘사벽이라서 나머지는 다소 묻힌 경향이 있다.[7] 양고승전에 따르면 전진이 쿠차를 공격한 것은 쿠마라지바를 중국으로 데려오라는 부견의 명령 때문이었다. 덤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았던 쿠차 왕국에 대한 정복욕도 있었다.[8] 공명조라고도 하며,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머리가 서로 붙어 있는데 두 머리가 사이가 안 좋아서 밤낮으로 티격태격 싸우다 결국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독을 먹여 죽이지만 애초에 몸을 공유하고 있던 나머지 한쪽 머리도 죽고 만다는 전설. 이렇게 사이 나쁜 새도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 아미타경의 설명이다.[9] 출처: 불교신문 [10] 쿠마라지바 번역의 생명력은 당장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당장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관음보살)이라는 단어보다 현장이 번역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을 더 많이 찾고 더 익숙해하는 편이다.[11] 당장 공(空)이라는 단어부터가 불교 재래 전까지 중국에서는 주로 도교의 용어였다.[12] 어떤 종파가 그 종파 교리의 뿌리로 내세우는 경전.[13] 해당 전기는 현재 고려대장경 및 다이쇼신수대장경에 실렸다.고승전2 구마라집전(국역 한글대장경) 국역 한글대장경 사이트에서 양고승전의 원문을 제공하고 있는데 검색할 때는 양고승전이 아니라 고승전으로 입력해야 나온다.[14]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전한 말. 마찬가지로 양고승전에 실린 쿠마라지바의 전기에 실려 있다.[15] 당시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통강, 즉 강의를 하면서 하는 번역이었다 쿠마라지바가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해석하면서 강의하면, 제자들이 정리하여 윤문하고 그걸 다시 쿠마라지바가 원문을 참조하여 수정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쉽게 말하면 구술 번역. 그래서 손이 아닌 혀를 언급한 것이다. 후대 번역자인 현장 법사도 이런 식으로 번역하였으리라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