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메이슨
1. 개요
前 NBA의 농구 선수. 포인트 포워드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유행시킬만큼 독특하고도 세련된 플레이를 선보여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통제하기 힘든 사고뭉치에 가까웠던 성격으로 인해서 NBA에서만 6개의 팀을 거친 저니맨이었다. 팬들에게는 90년대 중반 뉴욕 닉스에서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 등과 함께 패트릭 유잉의 보디가드로 활동했던 시절의 이미지가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었다.
2. 커리어
커리어 하이라이트 필름
2.1. NBA 입성 이전
1966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났으며 가족들과 함께 뉴욕 퀸스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테네시 주립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4년간 총 111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3.6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6.1%, 평균 18.7득점, 8.1리바운드, 2.4 어시스트라는 상당히 준수한 성적을 선보여주었지만, 메이슨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4번을 보기에는 무척이나 작은 201cm의 신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 1980년대 농구는 2010년대 후반처럼 슛과 스몰라인업이 중시되는 시대가 아니었고,[2] 이로 인해서 메이슨은 드래프트 3라운드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포틀랜드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머캠프에서 메이슨은 포틀랜드 수뇌부들의 눈에 드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개막을 앞두고 방출을 당하고 만다. 그 후로 몇년간은 눈물젖은 빵을 먹는 시절의 연속. 터키 리그에서 뛰는가 하면[3] USBL과 같은 미국 내 실업리그에서도 뛰고는 했다. 이후로도 뉴저지 네츠, 덴버 너기츠에서 단기 계약을 맺었지만 그에게 정식 계약을 제시하는 팀은 없었다.
2.2. NBA 입성 이후
2.2.1. 뉴욕 닉스 시절
그러던 중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1991년 닉스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팻 라일리.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이라면 NBA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맹장의 눈에, 헝그리 정신과 강인한 체력으로 똘똘 뭉친 메이슨이 포착되었고 그렇게 메이슨은 NBA에 안착할 수 있었다. 91/92시즌부터 94/95 시즌까지 4년 동안 메이슨은 닉스의 키식스맨으로 활동하면서 맹활약을 선보였고, 특히 조던이 은퇴했던 94년 닉스가 21년만에 파이널에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파이널에도 절륜한 수비력을 앞세워서 팻 라일리 감독에 의해 올라주원의 전담 수비수로 붙여졌고 뛰어난 플레이를 펼쳤지만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석패. 또한 이듬해인 94/95 시즌에는 77경기에 출장(선발 11경기), 평균 32.4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56.6%, 평균 9.9득점, 8.4리바운드, 3.1어시스트, 0.9스틸을 기록하면서 올해의 식스맨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게 된다.
이러한 메이슨의 활약에 고무된 닉스 프런트는 95/96 시즌을 앞두고 메이슨에게 6년간 25mil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계약을 안겨주게 되고, 마침 그 시즌에 부임한 신임 감독 돈 넬슨은 기존의 주전 스몰포워드였던 찰스 스미스를 벤치로 내리고 메이슨을 주전으로 올리며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맡겼다. 그렇게 맞이한 시즌에서 메이슨은 82경기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무려 평균 42.2분을 뛰며 경기당 14.6득점, 9.3리바운드, 4.4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닉스의 코어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식스맨에서 벗어나 주전으로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맡으면서 기량이 만개한 케이스.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인 스카티 피펜을 스핀무브로 벗겨내고 레이업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부드럽고 세련된 플레이가 전매특허였다. '''하지만 메이슨과 닉스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번번이 챔피언으로 가는 길 앞에서 무너졌던 닉스의 프런트진은 전력 개편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고, 메이슨은 래리 존슨을 받아오는 댓가로 샬럿 호네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메이슨은 "래리 존슨이 나보다 잘난게 대체 무엇인가? 한 시즌 평균 득점이 6점 높은 것? 그 6점을 위해서 그는 나보다 1년에 슛을 600번은 더 쏘지 않았나?"라는 독설을 남겼고, 뉴욕의 극성맞은 팬들 역시 닉스 프런트진을 성토해서 GM이 "우리는 재능을 얻기 위해 또다른 재능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할 정도였었다.(...)
2.2.2. 샬럿 호네츠 시절
그렇게 이적한 샬럿 호네츠에서 평균 43.1분을 소화하며 야투율 52.5%, 평균 16.2득점, 11.4리바운드, 5.7어시스트를 기록한 커리어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리그 1위의 플레이 타임과, 리그 3위에 해당하는 리바운드 기록을 수립하면서[4]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NBA All-Defensive Second Team과 All-NBA Third Team에 선정되었다. 한편 이 시즌 메이슨 본인이 직접 볼을 상대편 진영으로 운반하여 탑에서 리딩 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본격적으로 선보여주면서 포인트 포워드라는 개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후로도 어깨 부상으로 인해 개점휴업 상태였던 98/99 시즌을 제외하면 메이슨은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샬롯 호네츠가 박터지던 90년대 중후반 동부 컨퍼런스[5] 에서 파이널 진출 경쟁력을 갖추는데 크게 기여한다.
2.2.3. 마이애미 히트 시절
한편 00/01 시즌 도중 메이슨은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되어 옛 은사였던 팻 라일리와 재회했다. 마이애미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활동하면서 80경기에 출장, 평균 40.7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8.2%, 평균 16.1득점, 9.6리바운드, 3.1어시스트, 1.0스틸을 기록하였다. 특히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된 것도 이 때의 일.[6]
2.2.4. 밀워키 벅스 시절
이후 밀워키 벅스로 옮겼지만 이 곳에서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본인의 성적 역시 뚝 떨어졌으며 조지 칼 감독 및 다른 팀원들과 계속 불화를 빚으면서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 02/03 시즌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이후 2015년 메이슨은 심부전으로 인해 4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 플레이 스타일
'''현대형 포인트 포워드의 시초'''
외국 리그를 떠돌다 온 선수답게 허슬이 엄청났다. 착화 201cm라는 파워 포워드치고는 부족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트위너스러운 키는 도리어 수비 범용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점프력은 별로지만 발이 빠르고, 버티는 힘이 좋기 때문에 발빠른 1번에서 바클리, 말론과 같은 S급 빅맨까지도 막아낼 수 있었다. 특히 1994 NBA 파이널 당시 파이널 진출의 핵심 중 하나였다.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 패트릭 유잉과 같은 뛰어난 수비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지만 메이슨의 절륜한 수비력은 이 사이에서도 빛났다. 스탁스가 엄청난 활동량으로 가드 수비를 맡고, 유잉은 우직하게 골밑을 지키며, 오클리가 궂은 일을 담당했다면 메이슨은 스위치 디펜스라는 개념이 정착되기 이전 미스매치를 견뎌내는 선수였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포인트 포워드로서의 능력. 지금이야 르브론 제임스, 드레이먼드 그린 등 적지않은 포인트 포워드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메이슨은 폴 프레시[7] 이후 스카티 피펜등과 함께 개념을 정립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하프코트 볼운반을 무리없이 할 수 있고, 1대1 상황에서도 상대 수비수를 무리없이 제칠 수준의 드리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타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탑에서 단독으로 리딩을 진행할 수 있었다.[8] [9]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언더사이즈 빅맨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림프로텍팅에서 약점이 있었고, 때문에 그의 파트너로는 림프로텍팅이 확실한 빅맨을 붙여줘야 했다. 또한 뛰어난 볼핸들링과 시야와는 별개로 점퍼나 외곽 슈팅 능력은 없는 수준이었고, 때문에 그가 평균 15득점을 넘긴 시즌은 단 2번 뿐이다.[10]
4. 이모저모
- 굉장히 터프한 이미지였으며, 실제 성격 역시 터프한 것을 넘어서 사고뭉치에 가까워서 소속팀 감독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와 관련된 이런 저런 사건사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뉴욕 닉스에 사실상 연습생에 가까운 신분으로 초대된 서머 트레이닝 첫날, 포지션 경쟁자이자 당시 닉스의 주전 포워드였던 자비엘 맥대니얼과 바로 난투극을 벌임.[11]
- 출장시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다가 1994년 4월과 1995년 3월 각각 3경기, 5경기에 해당하는 자체 징계를 팻 라일리 감독으로부터 받음.
- 샬럿 호네츠에서 뛸 시절 팀메이트 먹시 보그스가 엉망진창의 리딩을 선보이자 "그따구로 하면 내가 포인트가드 보는 수가 있다."라고 사자후 시전.
- 1998년에는 강간 혐의로 피소
- 말년이었던 밀워키 벅스 시절에는 체중 관리 문제로 인해 팀원들 및 감독 조지 칼과 불화를 빚음.
- 2015년 메이슨이 사망한 후, 기자들이 그의 오랜 팀메이트였던 패트릭 유잉에게 찾아가 메이슨에 관련된 일화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자 유잉은 "말해도 기사화 될 수 없을 이야기들이 대부분(I don't think a lot of them can be put in the paper)"이라고 답변(...)
- 이러한 사고뭉치의 모습과 별개로 따뜻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선수이기도 했다. 뉴욕의 노숙인들에게 20불을 베풀기도 했고, 장기계약을 맺은 후에는 성공을 도왔던 주변의 사람들에게 300만원 짜리 고급 코트를 선물하기도 했는데, 이는 어려웠던 본인의 사회 초년생 시절을 잊지 못해서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일관된 진술.
- 샬럿 호네츠 시절에는 동료 먹시 보그스와 함께 방한한 적도 있다.
- 비스티 보이즈가 메이슨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본인들의 노래 가사에도 실명을 언급할 정도.
- 무지막지하게 강인한 체력으로도 유명하다. "메이슨은 48분을 뛰어도 안지칠 것 같다."라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나돌 정도. 닉스의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팻 라일리는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무려 4시간의 트레이닝을 감행했는데,[12] 이 트레이닝을 가장 잘 견딘 독종 중 하나가 바로 메이슨이었다. 그리고 95/96 시즌에는 전경기를 선발로 뛰면서 무려 42.2분의 플레이타임을 뛰었고, 이듬해 샬럿으로 이적해서는 전 경기 출전을 하지는 못했지만 경기당 43.1분을 소화하는 기염을 보여주기도 했다.
[1] 터키 리그[2] 실제로 앤서니 메이슨과 매우 비슷한 플레이스타일(트위너로 평가받은 작은 신장, 탁월한 수비력,리딩 능력 겸비, )을 보유한 드레이먼드 그린 역시 대학시절 4번을 보기에는 너무 작은 신체 조건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았으며, 데뷔 초반에 받은 평가가 '''"앤서니 메이슨 season 2"'''였었다.[3] 터키 리그에서도 초반부에는 적응에 애를 먹어서 모친이 이역만리 뉴욕에서 터키까지 날아가서 멘탈 케어를 시전해줬다고 한다.[4] 1위는 데니스 로드맨 16.1개, 2위는 디켐베 무톰보 11.6개.[5] 90년대 중후반 동부 컨퍼런스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GOAT가 버티는 시카고 불스, 친정팀 뉴욕 닉스, 옛 은사 라일리의 조련 하에 강팀으로 거듭난 마이애미 히트,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등..[6] 팀 메이트였던 알론조 모닝의 신장 이상 및 그랜트 힐의 부상으로 인해 대체자로 선정.[7] 1980년대 밀워키에서 뛰었던 스몰 포워드. 애초에 포인트 포워드라는 단어가 그의 플레이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8] 마이애미 시절 돈 넬슨은 가드 1명, 포워드 3명에 메이슨을 무려 '''슈팅 가드''' 슬롯에 세우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메이슨은 넬슨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펼친다.[9] 흔히 아름다운 패싱 농구하면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밀레니엄 킹스를 많이 떠올리지만, 페자 - 웨버 - 디박 이전에 1990년대 후반 샬럿의 라이스 - 메이슨 - 디박이 있었다. 이타적이고 넓은 시야와 패싱 스킬을 가진 빅맨들, 폭발적인 외곽 슈터인 스코어러.[10] 샬럿에서 뛴 1996-97 시즌과 마이애미에서 뛴 2000-01 시즌[11] 이 싸움은 메이슨의 부고를 다루는 기사에서도 거의 대부분 언급될만큼 매우 유명한 일화인데, 후일 닉스 선수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런 bad ass한 팀 분위기를 좋아했던 라일리는 두 선수의 주먹다짐을 다른 선수들이 만류하지 못하게 내버려두었다고 전해진다. 덧붙여서 유잉의 회상에 따르면 싸움 결과는 무승부(...)[12] 당시 닉스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남긴 회고에 따르면 뛰다가 토하는 선수들이 부지기수라 아예 양동이까지 훈련장에 대령해 놓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