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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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후이성 허페이시 출신으로 북송 인종 시대 개봉부윤으로 재임한 명재상. 당시 남긴 고사들이 훗날 판관 포청천의 배경이 된다.
이름은 포증(包拯, 999~1062년), 자는 희인(希仁), 시호는 효숙(孝肅)[1] 이다. 흔히 알려진 이명인 청천(靑天)은 공명정대한 판결과 인품을 칭송하는 의미로 사람들이 붙인 일종의 별명이다. 얼굴이 검다 하여[2] 포흑(包黑)[3] 이란 별명도 있었다 하는데, 경극에서 검은색은 공정과 강직함을 상징한다. 다만 그가 실제 가무잡잡한 피부색이었는지, 혹은 그가 청렴했기 때문에 경극에서 검은 얼굴로 등장시켰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4]
2. 청백리
가난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으며, 언제나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고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아서 크게 존경받았다고 한다. 유난히 부패한 관리들이 많았던 송나라 때의 사람이라서 더욱 부각되는 듯 하다.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사적인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사심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쳐 백성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이에 기득권층에게 암살 위협같이 신변을 위협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각지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자원해서 모여들어 포청천의 신변을 보호해주기도 했다.[5]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귀족과 황족, 외척 등에 의한 횡포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고, 강도와 마적떼를 소탕하였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사치를 하지 않고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그가 죽자 민중들은 그를 그리워하였고, 이후 민담과 전승의 대상이 되었다.
판관이라고 해서 그의 직업을 법관으로 간주하면 오산이다.[6] 당시 송나라는 삼권분립 체제의 도입 이전이라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료들이 수사와 재판, 처벌을 모두 담당했다. 포청천 역시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고을 주민들의 재판도 함께 맡아 처리한 것에 불과하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수령, 즉 사또들이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인 동시에 직접 죄인들을 수사하고 처벌을 내리는 일도 맡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특히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송의 개봉부윤을 지낸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판사 + 검사 + 경찰의 콤비네이션. [7] 포청천이 개봉부윤으로 활동한 기간은 가우 원년(1056년) 12월부터 가우 3년(1058년) 5월까지의 1년 6개월간으로 생각보다 짧은 편이지만, 개봉부윤에 취임하기 전에도 부패한 고관들을 탄핵하는 등의 활약도 하였다. 포증은 1037년에 관직에 복귀하여 천장현지현(天長縣知縣), 지단주사(知端州使)를 거쳐 감찰어사대행(監察御史代行),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을 때 고관들의 부당한 처사를 간하여 탄핵시켰다. 이후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1050년에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를 거쳐 지간원(知諫院)으로 재직 중 권세를 휘두르는 귀인 장씨의 인척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였는데 장요좌의 경우 인종의 외척이라 할 수 있기에 당대 정국을 흔드는 대형사건이었다.
실은 장요좌의 경우는 그가 월권을 하거나 큰 비리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으나 귀인 장씨의 권세를 믿고 여러 관직을 겸하려 하였기에 포증이 탄핵한 것이고 실제로 포증 혼자가 아닌 모든 대간들이 인종에게 대항하여 이를 막았지만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 당대 지간원이던 포증이었다.
이후 1057년 3월 동경 개봉부 부윤으로 임명, 1060년 3월 이임된다. 그가 부임시 받았다고 하는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는 현재 카이펑에 현존하고 있다. 작두는 사형(死刑) 집행시에만 쓰던 것으로, 용작두는 황족과 왕족, 호작두는 관리와 귀족, 개작두는 일반 평민과 천인에게 적용하던 사형기구였다.
포청천은 개봉 부윤으로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개봉 주변의 마적과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유목 민족 도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포청천이라 불리는 포증이 송나라 수도를 책임지는 개봉부윤으로 임명된 이유는 송인종의 결단이 있었다.
송인종 치세에 사용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
천성(天聖, 1023~1032.11)
명도(明道, 1032.11~1033)
경우(景祐, 1034~1038.11)
보원(寶元, 1038.11~1040.2)
강정(康定, 1040.2~1041.11)
경력(慶曆, 1041.11~1048)
황우(皇祐, 1049~1054.3)
지화(至和, 1054.3~1056.9)
가우(嘉祐, 1056.9~1063)
인종은 가우 말년에 승하한다. 1010년에 태어나 12살인 1022년에 즉위해 41년 동안 정무를 봤으니 가우 연간 인종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들은 요절한 데다[8] , 사촌동생인 복안의왕 조윤양의 열셋째 아들이자 자신의 5촌 조카인 조서를 양자로 삼았다.[9]
태자로 삼은 조서 역시 워낙 병약했기에 자신 대에 문란한 정치세태를 타파하기 위해 인재를 영입하려 하였고, 정치변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관리 중에서, 그래도 관리 생활은 좀 했는데도 때묻지 않은 이라는 조건에 포증이 들어맞아서였다.[10]
당시 포증의 관직은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 였는데 한마디로 5품에서 3품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11] 이때 처음 맡긴 직책이 개봉부윤 및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였다.[12]
이후 약 2년간의 포증은 개봉부윤으로서 백성을 착취하는 황족, 관리들을 수사한 후 참수하면서 청천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송나라의 재판은 세번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수사끝에 혐의가 확실한 이들을 참수했을 것이다.
이때 포증의 나이는 인종보다 11살이나 연상으로, 가우 원년 개봉부윤을 지낼 당시의 나이가 57살이었다. 송나라 사료를 봐도 인종이 막판에 기대보는 심정에 하급 관리를 등용해 자리를 맡긴 것인데 너무 잘 해주니 마음에 들어 1년 반 후에는 개봉부윤에서 승진을 시켜주게 된다. 이후 단주부사→ 동부승지→ 추밀직학사→ 추밀부사·간의대부까지 지낸 뒤 사망하게 되고, 사망 직후에 동해군개국후→ 49재에 예부상서→ 1년 뒤 포증의 기일에 맞춰 이부상서에 추증된다. 추밀부사·간의대부는 정2품직이고 사망 후에는 제후에 1품으로 격상되는데, 인종 치세의 사료를 봐도 공이 있는 신하가 죽었다고 저렇게 벼슬을 붙여준 경우는 포증이 유일무이하다.
3. 법조인으로서의 포청천
포청천이 다른 지방관들과 달랐던 것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에게 관청 앞으로 직접 나와 북을 치도록 한 점. 얼핏 조선의 신문고 제도와 비슷하다.[13] 포청천의 수사와 양형은 하도 엄격해 권문세족조차 그가 두려워 감히 법을 어기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서민들 사이에선 '''"청탁이 통하지 않는 이는 염라대왕과 포청천 뿐."'''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하니 그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사후에 염라대왕이 되었다고 중국설화에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현실에 살다가 사후에서만은 공정한 판결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명판관을 염라대왕으로 추앙하는 신앙이 있으며,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사당도 존재한다고 한다.
평생을 강직한 공직자로 살아왔던 인물인 만큼 죽을 때 그의 유언은 이랬다.
자기가 죽고 향을 피울 때 목향을 사용하면 후에 자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후손 및 일가친척들이 전부 이런 위대하신 분의 장례를 그런 싸구려 향으로 할 수는 없다면서 고급향을 사용한 결과 환생하지 못하고 저승에서 염라대왕으로 취직하게 됐다는 설화도 있다. 중국민간설화는 불교와 도교가 뒤섞여 있다. 불교에선 명부에 진광왕, 송제왕, 평등왕, 도시왕, 태산왕, 평등왕, 염마왕, 변성왕 등등 이른바 시왕(十王)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중에 염마왕이 염라대왕으로, 염마왕 개인을 가리킬 때도 있고 시왕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쓰일 때도 있다. 또한 도교의 세계관은 중국 관료제도를 모방했는데, 염라대왕은 특정인물이 아닌 관직명으로 본다. 따라서 염라대왕 임무를 맡은 이는 세월에 따라서 바뀐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다.'''"내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4. 후대의 창작
4.1. 소설
포증을 주인공으로 한 여러 소설군은 삼협오의, 칠협오의 등이 있다. 또한 이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경극이나 연극, 영화, 드라마도 많이 있다.
수호지의 서장에도 등장하는데, 당시 송의 태자(후일 인종)가 태어난 후 울음을 절대 그치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 그 울음을 며칠 이상이나 그치지 않자 장천사[14] 가 나타나 태자의 귀에 대고 "문곡성文曲星[15] 과 무곡성武曲星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는가" 라고 하자 울음을 그쳤다고 전해진다. 이 중 문곡성이 바로 이 포청천을 의미한다. 다른 한 명인 무곡성은 서하국을 정벌한 적청을 말한다.
4.2. 드라마
4.3. 만화
프랑스에서 포청천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만들었다. 그림 스타일이 독특하게 여겨지는 듯. 삼협오의를 일본에서 순정만화로 만든 북송풍운전이라는 작품에 등장한다. 국내에도 출판되었다. 신 연예인 지옥에서 정지혁 병장이 구정치를 단죄할 때 포청천 분장을 했다.
4.4. 게임
대만의 RAYS에서 제작한 '포청천 칠헙오의'가 있다. 국내에도 한국어화로 정발된 바 있다.
패미컴으로도 발매된 게임이 있긴 하나... 이쪽은 중화권의 가성(卡聖)이란 곳에서 1996년에 발매한 해적판이다. 횡스크롤 액션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전조. BGM은 비인가 게임 치곤 제법 괜찮은 편이나 게임 밸런스가 다소 괴악하다. 왜인고 하면 일단 조작이 영 좋지 않은데 특히 점프 조작이 극악이다 보니 적에게 맞아 죽는 경우보다 발판에서 떨어져서 죽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 문제는 떨어져 죽기 쉬운 구간이 게임의 초반부, 그것도 1-2 스테이지에 나오는 데다 여기에 발판이 뚝 떨어지는 건 덤. 더러운 조작감과 발 밸런스의 조화로 이래저래 해적판 똥게임의 전형을 보여준다.
[1] 고전소설 《삼협오의》에서 포증의 자는 문정(文正)이라 되어있으나 위에서 말했듯이 포증의 자는 희인이며, 문정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포증 사후 문중에서 정리해 펴낸 유고의 제목인 <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증에게 주어진 시호는 처음부터 효숙이었다.[2] 포청천의 또다른 상징인 이마의 달은 후세 사람의 창작이다.[3] 별명이 아니라 아명(兒名) 이었다는 설도 있다.[4] 비슷한 예로, 흔히 잘 익은 대춧빛 피부 운운하는 식으로 묘사되는 관우도 실제로 얼굴색이 붉었다기보단 경극 등에서의 이미지가 정착된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수호지에서 송강이 검은 얼굴로 묘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5] 그래서 금초군 드라마의 오프닝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6] 그리고 당시의 판관은 별도의 직책이었다.[7] 실제로 저지 드레드 소설이 국내에 출간됐을 때 '미래의 포청천'이란 문구를 넣기도 했다.[8] 인종의 첫 번째 황후는 곽씨였으나, 투기가 심하고 인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는 이유로 폐위하여 사사하였다. 계후로 개국공신 조빈의 증손녀인 조씨를 황후로 세웠지만(자성광헌황후 조씨) 슬하의 9명의 아들이 모두 요절.[9] 자식이 없어 양자로 들인 후, 인종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아들이 다시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양자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궁으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이후 조서는 송영종으로 등극한다.[10] 장요좌의 탄핵을 주도한 것이 포증이었기에 권세에 굴하지 않는 것이 참작되었을 수 있다.[11] 송의 삼사는 이재(理財)를 맡아보던 세 관아, 곧 염철(鹽鐵), 호부(戶部), 탁지(度支)를 말하는데 국가세금을 다루는 직책이라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중앙에서는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정무를 봐야했다. 송인종은 지방에서 관직을 도는 포증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인 것 이다.[12] 개봉부윤은 송의 수도인 개봉을 책임지기는 했으나 황궁 출입을 할 수 있는 관직은 아니어서, 황궁에 간언을 할 수 있는 자리인 용도각대학사 자리를 별도로 포증에게 준 것이다. 훗날 이보다 더 높은 직위를 역임했음에도 포증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한 직함이 바로 용도각직학사였다.[13] 북 옆에 관원을 배치하여 그 호소를 듣고 소장을 작성하게 했다고 하는 걸 보면, 글을 모르는 계층을 위한 배려도 포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14] 도교의 한 원류인 오두미도의 교조. 오두미도 후세에 장천사(張天師)라 불리우게 되는 장릉(張陵, 34-156)이 서천 지방에서 영험한 학명산(鶴鳴山)에서 도를 닦고 경전을 정리하여 청성산으로 들어가 만든 도파로 장릉 이후 장천사는 오두미도의 교조들에게 주어지는 별호와 같은 것으로 수호지가 송나라 배경이므로 수호지 서장에 어린 인종의 눈앞에서 등장하는 장천사는 후대의 장천사이다. 이후 인종 시기에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나라에 역병이 돌자 인종이 태위 홍신에게 장천사를 찾아가 역병을 해결하는데 도와달라고 청을 올리고 오라고 해서 홍신이 장천사에게 찾아갔다가 장천사가 없자 복마전을 구경하다가 장천사가 봉한 108마신이 봉인된 항아리를 가짜라고 여겨 뜯었는데 실제로 108마신이 봉해진 항아리라서 108마신이 도망쳐 인세에 흩어진다. 혼비백산한 홍신이 뒤늦게 찾아온 장천사에게 사실을 얘기하며 도와달라고 하자 장천사가 역병을 해결하고 인종에게 찾아간다. 화가 난 인종이 홍신을 참하려는 것을 만류하고 인종이 홍신을 보낸 것이나 홍신이 봉인을 푼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니 홍신을 살려달라고 요청해서 홍신은 목숨을 건지는데 걱정하는 인종에게 황제에게는 문곡성, 무곡성의 화신이 있어 당대에는 마신들이 마성이 발호하지 않지만 후대에 국가기강이 문란해지면 발호할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이때 마신들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지겠다고 걱정하는 인종에게 '''설마 모르지요, 마신들이 나라에 보탬이 될지도요''' 하며 빙긋이 웃으며 새옹지마와 같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떠난다. 이는 이 마신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송강(수호지)을 위시로 한 양산박 108호걸이 되어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들은 나라에 대적했기에 마성이 폭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의적들이며 나중에는 외적과 맞서 싸우기까지 하니 장천사의 예언처럼 108마신들이 나라에 보탬이 된 것이다.[15] 고려의 명신이자 명장인 강감찬 도 이 별의 화신처럼 여겨진 것으로 유명하다. 포증의 나라인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와서 강감찬에게 "문곡성이 안 보인 지 오래였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고 인사했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강감찬(948~1031)과 포증의 생존기간은 약 32년 정도 겹쳐서 문곡성의 화신이 둘이 존재한 셈이 되어버린다. 그 때문에 '''문곡성이 '이중성'이 아니냐'''는 농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