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제페를로
1. 개요
Heinrich Severloh (1923~2006)
독일 국방군 육군 병사로 1942년 7월 23일에 19세의 나이로 징병되어 서부전선의 육군 제321포병연대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통신병으로 보직을 받아서 통신병으로서 활동하다가 같은 해, 10월에 동부전선으로 재배치를 받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군과의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어 1943년 6월까지 군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퇴원 후 다시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 되어 기관총 사수로 보직이 바뀌게 된다. 그가 재복무를 하게 된 곳은 서부 전선에서도 정예 사단에 속했던 육군 제352보병사단이었다.
그는 1944년 6월 6일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당시 나치 독일의 상황은 동부전선으로 대부분의 전력이 몰려있었다. 때문에 독일군은 부족한 무기들을 동부전선에서 재배치될때 노획한 소련과 프랑스제 무기들로 싸웠다. 제페를로의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D-Day 당일 제페를로에겐 그의 MG42 1정과 7.92mm 링크탄 12,400발이 있을 뿐이었다.
제페를로가 당시 있던 곳은 그 유명한 오마하 해변이었다. D-Day 당일 중에서도 가장 많은 미군이 상륙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제페를로에겐 퇴로가 없었고,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MG42를 발사했다. 미군들을 향해 제페를로는 아낌없이 MG42를 발사하였고, 기본 탄띠를 모두 소진해서 대공용 탄띠까지 써야 했다. MG42의 총열이 모두 녹아서[1] Kar98k 소총으로 계속 응전하였다.
제페를로는 혼자서 1,500~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했고 이게 널리 퍼져 인간흉기로 언급되지만 과장일 가능성도 있다. 오마하 해변의 사상자는 학자에 따라 2,000~5,000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그의 주장과 겹쳐보면 다른 독일군은 명중탄이 거의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다만 오마하 해변의 MG 사수였으니 백 단위 정도는 될 것으로 보이므로, 그 참상을 만드는 데 꽤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후 제페를로가 머물고 있던 대대의 대대장은 상황이 불리하다며 퇴각을 명령했고, 제페를로 역시 당연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제페를로는 D-Day 바로 다음 날인 6월 7일, 미합중국 육군의 데이빗 실바 보병 병장이 쏜 M1 개런드 소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곧 포로가 되었다.
이후 전후인 1947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그는 독일로 돌아와 자신의 가업인 농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의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곤 했다. 신기한 것은 그가 종전 후, 자신을 쏜 실바 병장과 다시 만나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는 것[2] 인데, 그 두 사람은 6월 6일만 되면 오마하 해변을 함께 방문하여 1944년 당시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한다. 서로 농담 삼아 "내가 그때 자네를 죽였어야 했는데..." 라면서 놀려 먹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독일 국방군 참전용사들이나 실바를 비롯한 연합군 참전용사들하고도 만나 우정을 쌓다가 2006년 1월 14일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