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비판 및 논란

 



2. 과거사 청산 방해
2.1. 친일청산 법안 반대 논란
4.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5. 법안 날치기 통과
5.1.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6. 성추행 논란


1. 환생경제


2004년 참여정부 시절에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에서 만든 정치풍자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갖은 인신공격과 색깔론으로 맹비난을 받았고 당시 정당 대표였던 박근혜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빈축을 샀다. 상세 내용은 문서 참조.

2. 과거사 청산 방해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일해온 정부 관료 출신들, 전두환 정권 시절 집권 여당이었던 공화당-민정당 인사로 구성돼있던 데다가[1] 과거 친일파도 껴 있었던 재벌들의 지지까지 업혀 가고 있는 당이기 때문에'''[3]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시절 진행된 과거사 규명 작업의 발목을 잡아 왔다. 즉, 독재정권 시절 벌어진 간첩조작사건, 군 의문사, 정치미제사건, 부정축재 의혹, 친일청산 좌절 등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반대해왔기 때문에 반대자들에게서 한나라당=보수정당=친일파란 비판을 받아온 주된 이유가 됐다. 결국 MB정부에서 기한 연장 없이 활동이 종료되었다.

2.1. 친일청산 법안 반대 논란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2월 18일 최용규 의원 등 여야 55인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환수에관한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당시 총선거로 논의도 못하고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그후 17대 국회가 구성된 후 2005년 2월 24일, 노회찬, 최용규 의원 및 167명이 발의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환수법)을 발의했다. 한나라당 이해봉, 안상수, 배일도, 김성조, 박계동, 주성영 의원도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관련기사[4] 이후 이 법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155명 만장일치로 통과된다친일재산환수법 국회통과. 당시 한나라당은 재경위 소위원회의 부동산 관련 법안 강행처리에 반발해 국회 의사 일정 거부를 선언하며 본회의에 불참했다정기국회 막판 파행.
반면 제16대국회 제245회 제11차 국회본회의(2004년03월02일)에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친일진상법)은 통과시 163명 출석에 찬성 151명 반대 2명 기권 10명으로 통과되었는데 이중 반대자 2명이 한나라당 소속(이강두·김광원), 기권자 10명 중 7명도 같은 당 소속(김동욱·김기춘·박진·윤두환·하순봉·이상배·정문화)[5]이었다. 법안 처리 며칠 전인 2월 27일에서 당 지도부가 본회의 연기를 요구하는 등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관련기사.
이후 이 법안은 개정안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나라당은 자체 개정안을 만들었는데 이는 열린우리당안보다 조사범위가 넓었다. 장교의 경우 소위 이상인건 같지만 헌병과 경찰의 경우 기준을 둔 열린우리당안과는 달리 한나라당은 기준을 두지않고 전부 대상에 포함했다. 또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의 경우 열린우리당은 중앙조직 간부만이지만 한나라당안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조직 간부까지 대상으로 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여당안과 달리 당연범 규정이 없으며 여당안은 동행명령에 불응할 경우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했지만 한나라당은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다. 조사기간 또한 여당은 5년인데 비해 3년으로 잡았다. 또한 위원회 소속과 위원의 자격도 다르다관련기사.
열린우리당은 비공개회의에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핑계삼아 '친일'을 '부일'로, 조사 대상을 '지위'에서 '행위'로 변경한다는 소식에 욕을 엄청 먹었다. [6] 이후 한나라당안을 대폭 수용해 조사범위를 확대했고 동행명령에 불응할 경우 한나라당 요구대로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부과키로 했다관련기사. 헌데 행자위 전체회의에서 표결을 해 찬성 13, 반대 5, 기권 1표로 가결됐는데 반대 5인이 전원 한나라당이었다관련기사. 간사인 이인기 의원만 찬성했다. 지들이 조사범위 대폭 넓혀놓고 반대하는건 뭘까. 법사위에서 법 적용 시점을 `국권침탈 전후'로 규정했지만, 이날 처리된 법사위 대안에서는 법 적용 시점이 1904년 러일전쟁 이후로 확대됐다관련기사. 12월 '부일'이 아닌 '친일' 그대로 전면개정되어 통과되었다. 하지만 법안명에서는 '친일'이 빠져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 개정안'에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 개정안'로 변경되었다. 법안명에서 '친일'이 빠진 이유는 여당이 외교 때문에 뺐다는 얘기와 일본의 요청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한 얘기가 없다. 당시 투표의원은 227명으로 찬성의원 166명 중 한나라당 의원수가 55명이었다. 당시 국회회의록

3. 차떼기 사건


너무나도 유명해서 별도 문서로 분류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았던 불법적인 정치자금 사건으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뇌물을 수송하여 이슈가 됐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4.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의 최고의결기관이다.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1) 당강령의 채택과 개정 2) 당헌의 채택 및 개정 3) 당의 해산과 합당에 관한 사항 4) 대표최고위원 및 최고위원의 지명 5) 대통령후보자의 지명 6) 기타 주요 당무에 관한 사항의 의결 및 승인을 결정한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 선출 및 대선후보 지명 과정에서 돈봉투가 오가는 등 부정한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2011년 고승덕 의원(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못난 애비가 미안하다' 발언으로 이슈가 된 인물)이 2008년 전당대회에서 돈봉투가 전달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난리가 났다.#
이후 고승덕이 채널A에서 관련 논란으로 대담을 진행하면서 한나라당의 부정한 관행이 언론에서 확대재생산되어 주요 정치권 논란으로 확산되었고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취소, 박근혜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였다. 이로 인해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전당대회 캠프 상황실장이었음)은 각각 직위에서 사퇴하였고 박희태의 경우 혐의를 인정하며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5. 법안 날치기 통과


국회선진화법이 없던 시절엔 원내 과반수의 찬성만 있으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므로, 18대 총선에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여 야당 지지자들의 분노를 샀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지원 법안과 관련되었는데,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의 경우 정상적인 검토와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과 민의 대변 기관인 국회의 성격을 크게 더럽히는 처사란 비판, 그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가 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회 공성전 문서에 날치기 진행 과정과 일련의 폭력사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새해 예산안은 3년 연속 한나라당의 단독 처리로 통과되었다. 그외에 미디어법과 한미FTA재협상안,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날치기당했다. # ## 특히 2011년 예산안 날치기 사태가 가관이었는데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7]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위들의 호위 속에 처리하였다.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이전에 야당과 합의한 내용과 다르게 처리되는 경우가 빈반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하였다.

5.1.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소위 '종편' 방송이 생기게 된 법안 통과 과정에서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리 투표 등 갖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8] 투표가 종료되고 보니 재적 145명, 찬성 142명으로 재적 의원의 수가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의장을 필두로 '''재투표'''라는 전례 없는 절차 무시 방식으로 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고 결국 재적 153명, 찬성 150명으로 가결되었다. 한나라당의 다음과 같은 처사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헌법재판소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단 사실을 인정했지만 법적 효력 또한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날치기까지 해서 나온 종합편성채널들은 '''훗날 큰 보답을 한다.'''

6. 성추행 논란


한나라당은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기 전까지 보수정당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성적 태도를 보여와 지탄을 받았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 의원의 경우, 중앙일간지의 수위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으며[9]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10], 이명박 대통령의 '마사지걸' 발언, 정우택 충북지사의 '관기' 발언, 박계동 의원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11]관련기사,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줘야 한다",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김윤옥 여사만 없었으면 네 휴대전화 번호를 땄을 것"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민주, 진보 지지자들은 '성나라당', '성희롱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만들어 부르게 됐으며 이후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뀐 지금도 '색누리당', ‘자위한국당’, ‘발정당’ 등 성적인 것을 엮어서 조소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심학봉 의원과 김형태 의원이 성추문을 일으켰으며, 자유한국당으로 개편된 뒤에는 홍준표 대선후보가 19대 대선 기간 중에, 회고록에서 발정제 사건을 언급하는가 하면, 실수로 '홍준표 찍어야 자유대한민국 지킨다'라는 선거문구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홍찍자지라는 괴악한 선거문구가 나오는 바람에 그런 이미지가 더 강해졌다.
정리기사1정리기사2

7.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디도스 사건


검찰 수사 결과 한나라당 의원과 정부관료가 공모하여 디도스 테러를 가한 사건. 결국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사퇴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8. 한나라당 매크로 여론조작 의혹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1] 이 인사들 중 나름 네임 밸류 있는 사람들은 후신 격인 한나라-새누리-자유한국당에서 상임고문을 맡고 있으며, 여의도의 고급 식당에서 한국당 지도부와 식사하며 환담을 나눈다는 기사로 이따금씩 다시 이름을 알린다. 참고로 한국당 홈페이지에 상임고문단 명단이 '19년 5월 기준 몇 달 전까지 올라와 있었으나 최근에 갑자기 나오지 않게 되었는데, 그 때 보았던 것으로는 수십 명이었다. 이는 민주당 상임고문단이 겨우 7명인 것과 크게 대조되며 (물론 양당의 상임고문 선정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전신정당들의 집권 역사가 길었음을 웅변한다.[2] 그래서 한나라당, 그리고 그 후신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역사를 가장 길게 소급할 때는 '63년의 민주공화당이나 '61년의 5.16 쿠데타로 본다. 이승만의 자유당과는 4.19라는 큰 결절점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대부분 소급하지 않는다.[3] '''단, 이승만 정권 시절의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박정희의 5. 16 쿠데타와 집권으로 상당수 숙청당하거나 강등당하면서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거의 쫓겨 나가고[2] 대부분 박정희의 5. 16 군사정변 참여자들로 공석이 채워지게 된다.''' 그렇지만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공통점이 깊은(TK & 군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거의 3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한데다가 그 와중에 기득권층에도 손을 뻗친 만큼, 재벌 계열들도 이쪽 지지율이 압도적이거나, 재벌 계열, 장교를 포함한 공안, 치안, 안보 계열 인사들은 정치에 입문할 때도 대부분이 이쪽으로 입문하는지라...[4] 당시 기사엔 열린우리당 152명을 149명이라고 잘못써서 166명이라 써있으나 169명이 맞다.[5] 나머지 3명은 박상희·박병윤·양승부로 민주당 소속 의원이다.[6] # [7] 2014년 코디 성추행,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등으로 논란을 산 인물[8] 가관인게 야당인 민주당이 법안에 반대해 퇴장했을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빈 야당의원 좌석의 투표 컴퓨터를 돌아다니며 '찬성'버튼을 누르는 짓거리를 벌였다.. 이건 가관을 넘어서서 범죄수준이다[9] 관련기사[10] 이 사건의 여파로 2006년에 최연희 의원은 출당되었고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지만 복당하지는 못 했다. 결국 19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은퇴했다.[11] 저 사건이 터지고 박계동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유일호 박사에게 빼앗겼고 국회사무총장이 되었다가 19대 총선에서 또 낙천되자, 박세일, 전여옥과 손을 잡고 국민생각을 창당해서 나가지만 또 낙선되었고 정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