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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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국당 원내총무 '''
제2대
서청원

제3대
''' 박희태 '''

제4대
강재섭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남''' '''남해군''' ''' · ''' '''하동군''')'''
제12대
박익주
최치환

제13~17대
''' 박희태 '''

제18대
여상규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남''' '''양산시''')'''
제17대
김양수

제18대
''' 박희태 '''

제19대
윤영석

'''대한민국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
박희태
朴熺太 | Park Hee-tae
'''
'''출생'''
1938년 8월 9일 (85세)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1][2]
'''본관'''
죽산 박씨
'''재임기간'''
제42대 법무부 장관
1993년 2월 26일 ~ 1993년 3월 7일
제17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004년 6월 7일 ~ 2006년 5월 29일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
2010년 6월 8일 ~ 2012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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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김행자
'''자녀'''
슬하 2녀
'''학력'''
경남고등학교 (졸업 / 11회)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건국대학교 (법학 / 석사·박사)
'''병역'''
면제
'''종교'''
무종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3''', '''14''', '''15''', '''16''', '''17''', '''18'''
'''경력'''
제42대 법무부 장관
신한국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당연직 당무위원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윈회 위원장
前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前 새누리당 상임고문
제13~18대 국회의원

1. 개요
2. 생애
3. 몰락
4. 여담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유행어
8. 기타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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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검사, 변호사, 정치인, 관료, 제18대 국회의장.

2. 생애


1938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11회)[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에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박상천과는 한때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친분을 쌓았다. 1961년 이래 검사로 근무하면서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을 비롯해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 춘천지검장, 대전지검장, 부산지검장, 부산고검장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춘천지검장 시절 폭탄주를 고안하였다.[4]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남도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대변인을 역임하며 사법시험 동기이자 평화민주당 대변인이던 박상천과 설전을 주고받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의 초대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맏딸의 편법입학 논란에 휩싸였다. 박희태의 미국 연수 중 태어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던 맏딸은 3살 때부터 줄곧 한국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고3 때 성적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기 어려워지자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외국인 특례입학으로 이화여대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박희태는 딸의 편법을 묵인한 책임을 지고 취임 열흘 만에 사임한다. 이후 국회에 돌아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자, 한나라당에서 대선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결과가 바뀌지 않자, 서청원 대표가 사임하면서, 차순위 최고의원으로서 2003년 1월에 당 대표직을 승계하여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5]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당 중진의원으로서 탄핵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또한 2006년까지 2년 동안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친이계였음에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 탈락하였다. 이후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다. 2009년 경상남도 양산시 지역구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출마했으며, 김양수 대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18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장 재임 당시 한나라당의 각종 날치기를 주도하여 당시 정몽준, 안상수, 홍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했다.[6]
2012년 초 고승덕 국회의원이 2008년의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희태 씨가 돈봉투를 살포하였다고 폭로하여 국회의장직을 사임하였고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국회의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3. 몰락


이후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었다가, 2014년 9월 11일, 강원도 원주시의 모 골프장에서 캐디성추행하여 논란이 되었다. 당시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것."이라고 해명하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검찰은 사건을 질질 끌며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국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자 결국 기소하였다.
그 결과 1심 재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을 선고받았다. 그 직전에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석좌교수로 재임용될 뻔 했으나, 이 사건 때문에 결국 재임용도 철회되는 망신을 당했다.[7]
그 후 2016년 1월 20일, 2심인 항소심에서도 감형 받지 못했다. 현재 박희태 측이 항소를 제기해 대법원까지 가야 결론이 나겠지만, 이 정도면 무죄나 벌금형은 글렀다 봐야 한다. 인생 말년이 꽤 피곤해질 듯. 상고심에서도 감형 받지 못할 경우 국회의장이면 당연히 가는 국립묘지 안장 혜택도 못 누리게 된다. 게다가 이미지가 나쁜 성추행범이라 죽어서까지 좋은 소리는 못 들을 수도.
2017년 4월 28일, 대법원 1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박 전 의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수강 명령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국립묘지 안장 혜택은 날라갔다.
성추문 사건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었으나, 2017년 1월에 인명진 비대위체제가 되자, 새누리당에서 '''제명'''되었다. 성추행 사건과 돈봉투 파동을 일으킨 사람이기에 잘려도 싸다는 반응.[8]

4. 여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김포시 갑에 출마해 당선된 김두관과는 동향으로 꽤 가까운 사이라 한다. 2003년 김두관이 행정자치부 장관에 올랐을 당시 박희태는 한나라당 대표권한대행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를 향해서는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다가도 김두관 장관에게는 이런저런 덕담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 해 9월 김두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될 때 마지막까지 반대한, 몇 안 되는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명 '이장 비하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서청원, 최병렬 등의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와 골프를 하다가 '''"우리도 다 같은 촌놈 아니냐. 김두관이도 이장하던 촌놈이 장관까지 되었는데 이번에는 좀 봐주자."'''라고 말했는데 앞부분이 쏙 빠지고 김두관을 지칭하는 부분만 언론에 나가서 곤욕을 치렀다(...). 사실 김두관을 옹호한 건 단순히 고향 후배라서가 아니라 이듬해 선거에서 맞대결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게 가장 컸다는 게 중론이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46,381 (52.93%)'''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49,378 (60.22%)'''
'''재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49,874 (75.83%)'''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8,615 (59.63%)'''
'''4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34,106 (53.50%)'''
'''5선'''
2009
2009년 재보궐선거
경남 양산
'''30,801 (38.13%)'''
'''6선'''[9]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7 - 1990
정계 입문

1990 - 1995
합당[10]

1995 - 1997
당명 변경

1997 - 2010
합당[11]

2010 - 2012
국회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12 - 2017
복당

2017 -
제명
정계 은퇴

7. 유행어


국회의원으로서의 행적보다도 유명한 것이 바로 유행어. 정치계를 넘어 일상생활에서도 쓰이는 유명한 유행어들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유행어 제조기다.
정치 9단,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줄여서 내로남불)''', '''총체적 난국''' 등, 박희태는 몰라도 이런 단어는 들어본 사람도 많을 정도다.
그가 몰락한 성추행 사건에서 남긴 '딸 같아서 그랬다'는 변명도 안 좋은 의미로 유행어이긴 하다.

8. 기타


부인인 김행자 前 건국대 교수도 한때 논란이 되었다. 1990년 김 씨는 실수로 도서관 책을 무단 반출한 학생에게 "이런 학생은 사회에서 매장돼야 한다" "가정교육이 잘못돼 도둑질을 했다" 같은 말을 했다. 이듬해 이 학생이 자살하자 총학생회 등은 김 씨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둘째 사위인 김형준 전 부장검사는 스폰서에게 술, 여자 접대를 상습적으로 받은 사실이 드러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김 전 검사도 장인처럼 정치권 진출을 꿈꿨다고 한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당시 부산고검장 근무 이력으로 인해 사건 은폐 가담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201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박희태를 찾아가 인터뷰했지만, 그는 "기억이 안 나 모르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수사담당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가 한나라당에 있었을 때 같은 친이계였으면서 둘 사이에 분위기는 험악했다고 한다.

9. 둘러보기








[1] 죽산 박씨 집성촌이다.[2] #[3] 이병태, 이학봉과 고등학교 동기다. 김기춘은 12회다.[4] 다만 폭탄주가 이전부터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5] 여름에 열린 조기 전당대회에서 최병렬이 대표로 선출.[6] 대표적으로 미디어법 날치기가 있다. 그리고 날치기는 아니지만 홍준표, 남경필 등이 주도한 한미 FTA 비준안 강행처리에도 암묵적으로 동조하였다.[7] 참고로 박희태의 부인이 김행자 前 건국대학교 교수이다. 박희태 본인도 건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8] 이병석 前 국회부의장, 이한구 前 원내대표, 현기환 前 정무수석 등도 같이 제명되었다.[9] 전임자 허범도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 하반기 국회의장[10]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1]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