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clearfix]
1. 개요
[image]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 現 제21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을).
1982년 사법시험(24회)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14기)을 수료하고 1984년 청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데뷔하였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권력형 비리와 조직폭력배의 범죄를 성역 없이 수사한 정의로운 검사[9] 였고, 이러한 활약상이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소개되면서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 인지도를 바탕으로 YS에게 발탁되어 신한국당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4선 국회의원과 이명박 정부 시절 한나라당 원내대표 및 당대표를 거쳐 박근혜 정부 시절 제35·36대 경상남도지사를 지냈다. 2017년 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19대 대선에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2위로 낙선했다. 헌정 사상 최다 표차로 문재인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탄핵 정국임에도 안철수를 누르는 등 기대 이상으로 선방했고, 이로 인해 당내 입지가 더욱 커져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2018년 7회 지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변호사 개업을 신청하고 유튜브 활동을 하며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2020년 21대 총선 때 미래통합당의 컷오프#s-1에 반발하여 탈당 후 대구 수성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10]
[image]
종합적으로 볼 때 논란이 많지만 '''대권 잠룡으로서 현존 보수정당 정치인 중 가장 경력이 좋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12][13] 서울[14] 4선 국회의원, 재선 도지사, 원내대표 1회, 당대표 2회[15] 를 거쳐 보수정당[16] 대선 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17] 21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재입성하는 것도 성공했다. 2020년 현재에도 차기 대선의 주요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출신에 경상남도지사까지 역임했지만 정치적으로 PK보다는 TK계열로 분류되는데 중·고등학교를 당시 경상북도였던 대구시에서 다니며 성향과 인맥이 형성된 경우로 볼 수 있다.[18] 본인도 스스로 TK의 성골은 아니라도 진골은 된다고 주장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53년 11월 20일, [19][20]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남지리 서동마을에서 2남 3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때 이름은 홍판표(洪判杓). 그의 아버지는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21] 는 문맹이었다. 어머니가 고리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창녕군과 합천군, 대구시 등지를 전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고 초등학교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영양 부실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몸이 야위었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키가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합천군을 벗어나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부친과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부친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홍준표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지만 명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경북의 일류 명문이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컴플렉스였고,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 첫 소개팅 자리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가 "집이 어디냐?", "대구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냐?" 하기에, "영남고다" 그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22] 이때 상처를 받은 이후로 미팅 종류의 활동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밑에 첨부된 그의 대학 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준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한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혹시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의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컴플렉스는 검찰 생활에까지 이어졌는데,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서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고등학교 동문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하여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했고, 법학과 졸업생도 아니었으며[23][24]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서 검찰 내에서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는 커리어에서 평생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25] 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도 있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다고 한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26] 아버지가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자 했다.#[27] 그런데 어느 날 대구광역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28]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29] 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30]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31]
대학생 시절 때는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활 4년 중 고연전조차 딱 한 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선후배들과 중지를 모아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처음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었다.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고.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시국 행동은 못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동기로는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1952) 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송하진 전북도지사 등이 있다.
그가 대학생 시절 기거하던 종암동의 하숙집 동기들도 유명하다. 당시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지척인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때여서, 하숙집 동기들이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이때 같이 친하게 지낸 이들이 기획재정부장관을 지낸 박재완(서울대학교 경제학과 73학번),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을 지낸 장충기(서울대학교 무역학과 72학번), STX 팬오션 부사장을 지낸 서충일, 주 태국대사를 지낸 정해문 등이었다.[32]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광역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갔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33] 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34] ,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고된 노동과 무리한 음주로 몸이 상해서인지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운동권이었고 박정희 유신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남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따라 더 이상 강성으로 나가지는 않았고 성북경찰서에서 풀려나면서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간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생활을 이어가던 중(1차는 붙은 상태였다), 고려대학교 부근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서 일하던 당시 20세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35]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그 여인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36] 홍준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라북도 군산시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서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 그랬다며, "어떠셨대??" 하고 묻는 그에게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그 덕에 "장모는 혹 용돈을 드려도, 장인어른은 용돈은 커녕 26년간 내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고 훗날 2017년 자유한국당 후보 군산시 유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홍준표가 장인 모시고 병수발하고, 임종도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시라"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37]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 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방위병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창피했던 그는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초소에서 복무하였다.[38]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리고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30살, 호적상 29살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고시 시험에 합격하였다.[39]#
2.2. 검사 시절
특이사항으로 검사 초년 시절 개명하여 현재 홍준표가 되었다.
2.3. 정계 활동
3.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4. 비판 및 논란
5. 저서
[image]
꿈꾸는 대한민국 - 2020년
[image]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 - 1996년
[image]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 - 2000년
[image]
나 돌아가고 싶다 - 2005년[40]
[image]
변방(이제, 중심을 꿈꾸며 힘들었던 삶의 가장자리를 이야기하다) - 2009년
[image]
홍준표가 답하다(변방에서 중심으로) : - 2017년
[image]
소신이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 - 2017년
6. 별명
7. 어록
"막말을 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준표가 항상 하는 말이고, 특히 19대 대선토론기간 다른 후보들로부터 막말 공격을 받을 때 많이 한말이다.
'''자존심 하나로 사는데, 아바타 정치는 안 한다!'''
2017년 4월 1일, 조선일보 <홍준표 후보가 걸어온 길> 中, 선정민 기자
'''“저는 ‘독고다이’지 독불장군은 아닙니다.”'''
2017년 8월 1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에서
" 내가 나중에 저승가서 성완종이한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왜 돈은 엉뚱한 사람한테 다 줘놓고 나한테 덮어 씌우는지 "
"남북정상회담은 위장평화쇼이다. "
남북정상회담 직후 발언하였다. 특히 당시에는 막말공격을 받았으나, 현재는 어느정도 인정받는 발언.
"제가 당대표를 했으면 대통령과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접촉해서라도 조국 장관을 임명을 안하도록 했을껍니다.
100분 토론에서 만약 조국사태때 당대표였다면 조국사태에 삭발을 했을 것이냐는 질문에 답하며 #
" 아니지 나는 빨갛게 있지"
100분 토론에서 유시민 장관이 홍준표가 문정권이 온기관을 장악하고있다고 하자, 온세상이 시뻘겋고 혼자만 파랗게 있는것 같은 느낌일것이다 라고 하자 한 말(일종의 드립) https://youtu.be/19nuMCFq2GI?t=2483
"그러면 국내에서 탱크 타고 다녀도 되겠네! 안전하게!"
2020년 10월 15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의 공군본부 대상 국정감사에서 서욱 국방부 장관이 공중급유기를 이용해 출장을 다녀온 것을 질타하며 [42]
#
8. 여담
- 홍준표의 부친은 힘이 장사였지만, 본인은 어려서 가난 때문인지 7살까지 엄마 젖을 먹을 정도로 유약했다. 적은 몸무게 때문에 방위병으로 입대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그래서 영남중학교(대구)에 다닐 때부터 태권도를 열심히 배웠고, 4년 동안 대구시의 무덕관을 다녔다. 초단 실력으로 24~25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 경남 FC 구단주를 지냈다. 당시 여러 언행으로 관심과 논란이 있었다.[43] 해당 기사
- '답십리'라는 동네와 인연이 상당한데 그 이유는 홍준표가 동대문 을 지역구에 4번 나와 3번 당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표는 대부분 답십리에서 나왔다. 그러나 19대 대선 때는 답십리1동과 2동 모두 안철수에게도 밀리는 20%대 초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 이것도 옛날 이야기일 듯. 실제로도 홍준표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예 답십리는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이라고 대놓고 얘기하고 다녔으며 선거 포스터에서부터 동대문이 키운 인물이라고 아예 대놓고 써있다.
- 이경규랑 닮은 것으로 보도 되기도 하였다. @자세히 보면 김창완도 조금 닮았다. 실제로 가장 닮은 연예인은 박상원(?!)으로 그래서 모래시계에서 홍준표의 포지션이라고 하는 해당 인물의 배역을 박상원이 담당했다.
- MBC 개그맨 공채를 응시를 했었다. 응시 원서까지 냈는데 유신 체제 발동으로 인해 (아마도 계엄령으로 추정된다.) 시험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머감각이 타고났다. 심지어 엄숙한(?) 제19대 대선 토론장에서도 유머를 자주 보였는데, 본인이 웃기려고 한 말인지 진지하게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대선 이후 출연한 냄비받침에서 밝히길 그때 MBC 개그맨 공채가 되었다면 김병조, 이용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개그맨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44]
- 개그맨 공채시험 지원자답게 예능감이 매우 탁월하다. 19대 대선후보 토론에서도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빛을 발했었고 대선 이후 출연한 냄비받침[45] 에서도 이경규 뺨치는 예능감을 선보였다. 강적들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감기에 걸려서 몸이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예능감각을 발휘했다. 고정패널 전원책과 경상도 사투리 콤비를 결성해서 케미가 폭발하는 바람에 중간에 껴있던 김성경이 들러리가 되어 버렸다.
- 19대 대선 전까지 홍준표 하면 가장 유명했던 식사준표는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당내 경선에서 친이계의 자리인 클린정치위원장 자격으로, 당시 이명박 후보의 큰 이슈였던 BBK 주가조작 사건 관련 박근혜 후보 및 야당의 공세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면서 붙었다. 클린정치위원회는 김경준과 이명박 후보가 주고받은 편지와 자필 메모를 공개하며 "이명박 후보와 김경준은 (BBK 설립 이후인) 2000년에 만났다."는 주장을 했는데[46] , 이에 대해 기자들의 (해당 증거는 설립 이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증거일 뿐, 이전에 만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안되지 않느냐는) 반박 질문이 이어지자, 말을 돌리려고 뜬금없이 "식사하셨어요?"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면서 식사준표라는 가장 유명한 별명을 얻었다. 그에 이어 경상남도 무상급식 강제중단 파문으로 또다시 식사준표가 나오게 되었다.
- 다소 의외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딴지총수 김어준과도 친분이 있다. 일단은 서로 동향 사람이고 딴지일보의 2002년 대선주자 인터뷰를 통해서 서로 친분이 생긴 듯하다.[47] '나는 꼼수다' 때문에 한참 한나라당이 고생하던 시절 당대표 자격으로 출연하여 김어준과 토크를 했을 정도. 정작 그 나꼼수의 효과였던 오세훈의 무상급식 스캔들 때문에 당 대표 자리를 날리다시피 했으니 이가 갈렸을 듯.[48] 그럼에도 아직 김어준과 서로 정치 노선이 다름에도 친하게 지내는 듯. 당장 오세훈 사퇴 이후 9개월 남짓 지나서 홍그리버드 영상을 찍었는데 "나꼼수의 으준아 니도 한 번 해봐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과거 나는 꼼수다에서의 언급과 김어준의 얘기들을 듣다 보면, 홍준표는 김어준을 편하게 부르고, 김어준도 홍준표에게 '형님', '홍반장'이라 부를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파진영으로부터는 대체로 좋지 못한 인식을 받고 있는 손석희 JTBC 사장과는 비록 때로는 티격태격한 적도 있지만, 손석희 사장에게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는 한나라당 당 대표로서 서울시장 후보로 손석희 영입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고, 2017년 제19대 대선 JTBC TV토론회에서는 JTBC토론이 가장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고 생방에서 말한 적이 있으며, 2019년 손석희의 폭행논란이 벌어졌을 때는 그를 위로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 “한국도 (자신과 같은) ‘우파 스트롱맨 시대’를 해야 도널드 트럼프와 맞짱 뜰 수 있고, 시진핑과도 맞짱 뜬다”는 발언을 했다.#
- 홍준표의 연관 사건 목록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오거돈이 양산시 부산 편입을 언급하자 "부산의 상수원을 틀어막겠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49]
- 정통시사토크쇼를 표방하였던 "박중훈 쇼 대한민국 일요일 밤" 2009년 1월 11일자 방영분에 여당 원내대표로서 출연하였다. 박중훈 쇼의 해당 회차는 당시 여야 3당 원내대표를 동시에 초청하여 서로 지갑 내용물을 공개하는 등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한 야심적 기획이었으나 시청률 6.6%로 신통치 않은 결과만 가져왔다.
- 2011년 한나라당 대표시절의 어느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소개팅 경험담을 얘기해서 여성비하 논란을 일으켰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남경필, 원희룡 최고위원을 두고 한 대 패주고 싶다고 비난한 것과 엮였고 곤욕을 제대로 치뤄야 했다.
- 2015년 12월 22일, 경남선관위에게서 "박종훈 경남도교육감 주민소환" 관련 허위서명에 가담한 것으로 홍준표 측근이 고발되었다. 서명운동본부는 이듬해 1월 자진해산 했으며, 2016년 7월 8일 검찰에 징역이 구형되었다.# 측근의 허위서명이 드러나면서 항의농성을 하는 정의당 여영국 도의원에게 "한 2년간 단식해봐. 쓰레기가 단식해봐야"라는 막말과 함께 구설수에 올랐다.#
-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막말 정치인이 아니라 소박한 민중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 성완종 리스트에 대해 "성완종이 살아 있었으면 무조건 성완종을 고소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너무나 억울해서 미치겠다. 마치 노상 강도를 당한 기분이다. 곧 항소하겠다." 그리고 "저승에 가게되면 성완종에게 꼭 따지겠다"라고 말했다.
- 2017년 2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부장 이상주)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홍 지사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추징금 1억 원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 누나가 둘이 있었는데, 큰 누나는 결혼했지만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됐다. 작은 누나는 홍준표보다 더 똑똑해 아이큐가 158까지 나왔으나[50] 공장을 다니며 홍준표를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누나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51]
- 슬하에는 아들만 둘을 뒀다. 큰아들에게 기대가 많았는지 꽤 엄격하게 길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큰아들은 고시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현재는 국내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작은아들은 학교에서 "홍준표의 아들이냐?"고 물으면 동명이인이라고 답할 정도로 독립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실제로 방학이 오면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매사에 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특히 해병대 자원 입대할 당시 에피소드가 많았다. 수송 병과로 가기 위해 대형 1종 면허를 취득했지만, '아버지가 홍준표'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수송병과를 가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가정교육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 2011년 한나라당의 당대표, 2017년~2018년 자유한국당의 당대표를 맡으면서 유일하게 여당 당대표와 야당 당대표를 모두 해 본 정치인이 되었다.
- 2017년 3월 경선토론에서 보수끼리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유로 바른정당과의 연합을 찬성했다.#
- 19대 대선 구호로 "홍준표 찍어야 자유대한민국 지킵니다"를 내걸었는데, 공간 제약상 네 줄로 나눠서 쓰다보니 각 줄의 앞 글자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졸지에 19금 세로드립이 되고 말았다(...). 당 차원에서도 뒤늦게 이를 알아차렸는지 마지막 "지킵니다"를 옆으로 밀어서 홍찍자로 무마하려 했지만, 가뜩이나 돼지발정제 논란이 돌고있었기에 인터넷이 한바탕 뒤집어지면서 홍준표의 별명이 "홍찍자지"가 된 것은 물론이고, SNL 미우프는 물론 SBS 인터넷 뉴스에서까지도 패러디당했다.
- 19대 대선 선거운동 도중에 양화대교 아치 꼭대기에서 사법고시 폐지에 반대하면서 농성을 벌이던 사법 고시생을 설득해서 구조될 수 있게 해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고시생은 구조된 뒤에 신촌에서 열린 홍준표 후보의 유세에 참가했다.
- 2017년 4월 11일 대선 선거 유세로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보수대통합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는 중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부패한 보수를…"이라고 해서 웃음을 주었다.
- 삼국지덕후로 추정된다.“지금 이 땅의 국민들과 널리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무엇인가?”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팀이 2017년 대선 후보 5인에게 던진 질문에서 홍준표는 삼국지연의를 추천하면서“내가 살아가며 실천해 온 모든 처세술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다름 아닌 내 ‘인생의 책’이라 꼽을 만하다”고 답했다.#
-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패했다. 그래도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망하기 직전의 당을 이끌고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를 이기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를 통해 진짜 보수가 누구인지 부각시켰기에 낙선한 후보로서는 이례적으로 엄청나게 기뻐했다. 기뻐한 이유라는 게 "그래도 우리 당은 살려내서 다행이다."라 말했다. 박근혜가 죽인 보수를 홍준표가 살려냈고 홍준표는 이걸 기뻐하는 것이다. 사실 썰전에서의 나경원 의원을 통해서도 밝혀진 사실이지만 19대 장미대선에서 자유한국당 측에서는 전략적인 허세가 담긴 발언들과는 별개로 승리할 것이란 장담을 전혀 하지 않았다. 16% 이하의 지지율임에도 불구하고 궤멸 직전의 보수를 목소리는 낼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니 자화자찬이 아니라 실제로도 꽤나 선전한 셈이다.[52]
- 위와 마찬가지로 홍준표 본인도 강적들 216화(2018년 1월 3일 방송)에서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 어차피 내가 떨어질 줄 알고 나갔다고 밝혔다. 보수 우파 궤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출마했다고 밝혔다. 탄핵당하고 망한 정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으면 소멸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출마했다고 밝혔다. #
- 새누리당 때 당색이 빨간색으로 바뀌기 전에도 빨간색 넥타이를 애용해 왔다. 이는 2010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가 주최한 호법제 강연회에서 "고대이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고대의 상징색이 빨간색이다. [53]
- 미우프에서 본인의 포지션을 맡은 레드준표 정이랑과 직접 만났다. 본인의 분장을 한 레드준표와 나란히 서서 선거 유세를 보러온 시민들에게 재차 "내가 진짜 이 사람하고 닮았어요?"라고 물어보고, 정이랑과 악수를 나눴다.[54] 정이랑은 대선이 끝나고 몇 달 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홍준표에게 돼지흥분제 논란 등 악재가 터질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고 밝혔다.
- 19대 대선 기간 중 한국일보의 '대선주자 악플을 읽어봤다' 기획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유일한 인물이다. 어차피 안 찍을 사람들인데 뭐하러 읽느냐는 반응. 다만 이 때문에 욕을 먹었다.
-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는 캐릭터가 모래시계(드라마)의 강우석(박상원 분)이다. 아버지가 비료 도둑 누명을 써서 검사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것, 은행원 아내를 만난 것, 슬롯머신 수사 등 강우석은 명백히 홍준표가 모델이며 제작진도 이를 공인한 바가 있다.
- 감독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는 없지만, 네티즌들 사이에선 내부자들(영화)의 장필우(이경영 분)의 모델로도 추정된다. 장필우는 빠찡코 깡패들과 결탁한 자기 상관을 구속했다가 검찰에서 옷 벗고 정계에 입문한 사람이라는 게 그 이유. 다만 장필우는 검사 시절 강직함을 버린 비리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홍준표는 이 영화를 관람한 후 "재벌혐오에 정치혐오, 검찰혐오, 언론혐오까지 보태어 한국사회 리더 그룹들을 모두 파렴치한으로 만들었다"며 혹평을 했다. 정황상 자기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인데, 대놓고 인간쓰레기로 묘사했으니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었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은 처음부터 로스쿨에 반대했다면서 대통령이 되면 사시를 존치하고 로스쿨을 폐지하겠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홍준표는 정작 변호사시험법 제정 당시에는 "혹시 법조인 여러분들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찬성해 주셔야지 법학대학원이 순조롭게 갑니다."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55]
- 2017년 8월과 9월에 육군 11사단과 연평도를 방문했는데 자유한국당 당비로 회식비를 전달했다.[56]
-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실제로 대선 때는 유세현장에서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아주 쉽게 볼 수 있었고 또 가창력도 상당한 수준이다.[57] 본인 말로는 부친이 판소리를 한 것이 자기한테 이어져 왔다고 하며, 지금은 목소리가 갔지만 젊었을 때는 훨씬 잘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약사가수 주현미에 대항마인 검사가수 홍준표(...)로 데뷔할 뻔한 전력이 있었으나 아내의 강한 반대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 의외로 가정적인 듯 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세 가지 중 첫 번째로 '현재 각시를 만난 것'을 뽑기도 했고 관련 행사에 함께 참여한 모습을 보면 시종일관 편안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부부 관계도 좋은 편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에 가 있는 첫째 아들과 매일 아침마다 영상 통화를 한다고 토크 콘서트에서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홍준표 본인은 여성비하 관련 논란을 굉장히 많이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본다면 아이러니하다.
- 이경규뿐만이 아니라 박명수와도 상당히 닮은 꼴이다. 막말, 험한 인상, 흙수저 출신, MBC 개그맨 공채 지원 경력(...)[58] , 의외의 패밀리가이, 업계 최다 별명 보유자[59] 라는 점까지...
- 묘하게 가수 권인하와 닮았다는 얘기도 있다,
-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에 대해 "위장평화쇼"라며 이전의 6.15 남북공동선언 등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후퇴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당시에는 평화 분위기로 보였던 때라 이 발언으로 정계에서뿐만 아니라 범국민적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고 당내에서조차 비판 목소리가 나왔으나,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의 핵 포기 의지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며 결국 맞는 이야기가 되었다.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이 터지자 2년 전의 해당 발언이 다시 언급되기도 한다.[60]
- 지지자들이 연 홍카콜라 채널에 출연하고 있다.
- 다른 우파 유튜버들과 다르게 5.18이 민주화 운동임과, 전두환이 독재자란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한 번은 5.18, 4.19, 3.15 전부 다 똑같은 민주화 라고 운동이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사실 이는 대부분의 김영삼계 인사[61] 라면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이지만, 최근 활동하는 우파 유튜버들 대다수가 5.18을 폭동이라고 왜곡하기 때문에 이 점은 긍정적으로 봐야할 것이다. 애초에 비박계인 데다 특권 폐지를 강하게 주장하고,[62] 이런 태도를 보면 개혁보수와는 거리가 있고 말은 거칠지라도 극우인사는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 강성보수라고 생각하면 된다.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비판참여정부가 민주화 이어야 한다
- 기본적으로 단어 선정도 굉장히 과격하며 막말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소신있는 행보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17대 국회 당시 병역법을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자식의 병역면탈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다시는 우리나라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한다고 연설해서 여야 의원 모두의 호응을 이끌어낸 일이나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무죄 탄원서에 서명한 일, 한나라당 대표 재임 당시 을사늑약, 매국노 소리를 들어먹으며 한미 FTA 비준안을 강행 처리한 일[63] 등이 있다. 이외에도 19대 대선 토론 당시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면책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사형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사형제 존치 및 사형집행에 찬성한다, 일본에 반감은 있더라도 외교적으로는 한미일 동맹의 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등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는 편이다. 최소한 우파로서의 신념은 명확한 듯 하다. 또한 유병재 등 좌파성향 연예인들이 박근혜 정부 때는 열심히 비판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도덕성 문제가 빚어진 조국 사태는 침묵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상당한 공감을 얻기도 했다. 애초에 홍준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표현인 만큼 본인의 의견은 눈치 안보고 확실히 말하는 케이스이다.
-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를 봤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는 '기생충' 같은 영화는 보지 않는다." 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홍준표 "영화 기생충 안 봐!"
- 전교조와 민주노총 해산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정치인이다.
[image]
[image]
- 21대 총선 기간에 이태원 클라쓰를 패러디한 '홍새로이' 홍보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화제가 되었다.[64] 이후 원작자의 '정치색 입히지 마라'는 항의를 받아 삭제되었다.[65]
- 좋아하는 연예인은 씨스타의 효린이라고 밝혔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옛날 노래를 풍부한 성량과 탁월한 가창력으로 리메이크하는 걸 보고 반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남지사로 재직할 당시였던 2016년, 광복 경축 음악회에 씨스타를 초청했지만, 단가가 너무 비싸서(...) 안 될 걸 사정사정해서 깎은 뒤 겨우 불렀다고 한다.
- 팬들도 많지만 안티도 많은(...) 연예인 같은 정치인 중 하나인데 기본적으로 막말을 많이 하는 이유로 호불호가 갈린다. 맞는 말을 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소속과 관련해서도 범비박계로 볼 수는 있지만 그래도 바른정당계(김무성, 유승민, 주호영 등등) 정치인들처럼 탈당한 전력은 없다. 자유한국당 내에서는 20년 이상 선거이력을 가지고 있는 대표주자임에 틀림없는데 앞서서도 여러 번 나와있듯 막말이 많고 표현이 거친 편으로 그런 점에서 불호가 많은 편이다.
- 젊은 시절에는 한 외모 했다. 본인도 언급을 했을 정도고 식스팩도 있었다. 식스팩은 오히려 못 먹어서 생겼다고...게다가 당시로써는 큰 키로 취급되던 170을 넘긴 키를 가지고 있었다.
- 박원순과는 바로 이웃동네에 살던 또래다. 이 때문에 20대 대선에 박원순이 나온다면 전국 버전 창녕군수 선거라는 농담도 쳤다. 그러나 박원순 성추행 사건으로 박원순 본인이 자살하면서 그런 빅매치를 볼 일이 없게 되었지만...[66] 박원순이 아름다운가게를 운영할 때 후원을 했다고 한다. 둘이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고 괜찮은 편이라고 YTN 대선 안드로메다에 출연하여 말했다.
- 19대 대선 시절 로고송을 합성한 낚시 영상이 여러 스트리머들에게 영상 도네이션으로 올려지고 있다.[67] 후원자는 재미있어서 올렸겠지만 도네를 받는 스트리머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정치색이 입혀지는 걸 원치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당연히 당황하며 영상을 보낸 후원자에게 영구 밴을 먹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 말자.[68]
- 2022년에 치뤄질 20대 대선에 야권 단일 대선후보로 나올 유력한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으로 인해 복당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김종인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당시 검사 홍준표에게 조사 받다가 20분만에 자백을 받아냈다는 과거가 있기에 김종인 입장에서는 홍준표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보수 지지층, 그 중 특히 보수 콘크리트 지지층(대표적으로 TK나, 장년·중년, 60대 이상)은 홍준표를 다음 대선후보에 출마되길 바라고 있다.
- '타도 문재인! 선택 홍준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문재인 정부를 매우 비판하고 있다.
9. 소속 정당
- 당의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신한국당부터 미래통합당까지 같은 족보가 유지됐기에[71] 탈당이 없었다.[72] 그러나 2020년 21대 총선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선된 이후 복당을 시도하고 있지만 계속 복당이 불허된다면 18대 국회 당시의 유성엽처럼 4년 내내 무소속으로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