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맥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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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arold Macmillan
보수당 소속의 영국 정치인이다. 제65대 영국 총리를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의 생애
1894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맥밀런 출판(Macmillan Publishers)[3] 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출판업자였고, 어머니는 미국 출신의 예술가 겸 사회운동가였다.
영국 최고의 명문 중고등학교인 이튼스쿨을 다녔으며,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맥밀런은 베일리얼(Balliol) 칼리지 출신이며,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4] 대학 진학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밀런은 육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전선에서 복무하다가 1915년 9월 루 전투당시 손과 머리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복귀해서 다시 참호로 돌아갔다가 1916년 솜 전투 중에 또 중상을 입고 간신히 후송되었다.[5] 이때문에 휴 게이츠컬이나 랍 버틀러, 해럴드 윌슨 등 군복무 경력이 없는[6] 동료 정치인들을 대놓고 경멸했다는 말도 있다. 종전 이후 맥밀런은 옥스퍼드로 복학하는 대신, 자신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출판사에 입사하였다.[7]
2.2. 정치인으로서의 생애
1924년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29년 총선에서 낙선하지만, 1931년 총선에 다시 당선되면서 정치 경력을 이어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었던 1940년에 윈스턴 처칠에 의해 보급부 장관[8] 에 임명되었다. 이 후 보수당이 정권을 탈환[9] 한 1951년에 다시 처칠에 의해 주택자치부 장관[10] 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국방부 장관으로 승진한다. 이 후 총리로 취임한 앤서니 이든에 의해서 외무부 장관으로, 다시 재무부 장관으로 승진하면서 맥밀런은 이든을 이을 유력한 총리 후보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
이 후 1957년에 이든이 제2차 중동전쟁을 발발시킨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11] , 맥밀런은 보수당 당수 겸 총리로 선출된다.[12] 총리로서 맥밀런은 제2차 중동전쟁을 둘러싼 외교 갈등으로 인해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민생안정을 위한 다양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의 내각에서 1950년대 중후반의 영국 경제는 일시적인 호황을 누렸다.
이를 두고 맥밀런은 "부자들에게 있어서도 사치였던 물건들이 널리 보급되어, 서민들의 생활에서도 필수적인 물건들이 되었다(The luxuries of the rich have become the necessities of the poor)"는 것을 강조하며, "대부분의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제호황은 생전 처음일 것(Most people had not had it so good)"이라고 자신했다. 이러한 경제성과 덕분에 맥밀런이 이끄는 보수당은 1959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특히 전통적인 텃밭인 잉글랜드 남부에서는 의석을 싹쓸이하다시피 하였다.[13]
하지만 맥밀런 내각이 자랑하던 경제의 호황은 당시 영국 경제가 전후 가지고 있던 인플레이션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종의 거품 경기로 경제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것이었으며, 결국 해외 경기가 위축됨에 따라 수출이 감소세로 돌아서자 국내 경기 역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영국의 장기 불황으로 이어졌다.
또한, 맥밀런 내각이 자랑하던 또다른 측면인 대외 정책의 회복 역시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합격점을 줄 수 있겠으나, 유럽과의 관계는 극히 냉랭해졌다. 당시 유럽은 미국이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원치 않았으며, 영국이 미국과 밀월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탐탁치 않아 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영국과 맥밀런 내각에 가지고 있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영국의 ECC가입 거부 등)
한편,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맥밀런의 2기 내각이 이어졌다. 2기 내각에서도 경제 정책과 대외 정책의 기본적인 기조는 유지되었다. 다만,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 열망이 높아지고 식민지 유지 비용의 문제 등이 대두됨에 따라(그리고 유럽에서 냉대받음에 따라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원하는 식민지는 독립하는 것을 막지 않는 쪽으로 식민지 정책이 변화된 시기이다. 총리 본인이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타운에서 한 유명한 연설인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 은 이와 같은 식민지 정책 변화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상징이다.[14] 이 연설을 통해 영국 정부는 식민지의 독립을 막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 나이지리아, 영국령 소말리아 등이 독립한데 이어 남카메룬, 탕가니카(오늘날의 탄자니아), 북로디지아(잠비아), 니아살랜드(오늘날의 말라위) 등이 차례로 독립하였다. 이후로도 영국 식민지의 독립은 이어졌으며, 아프리카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도 이 시기에 독립하였다(말라야,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가 1963년 말레이시아로 독립).
이후 프로퓨모 사건[15] 이 터졌고, 처음에는 총리 본인이 존 프로퓨모를 옹호했으나 결국 사건이 커짐에 따라 해럴드 맥밀런은 이에 책임을 지고 1963년 10월 사임하였다. 후임으로 앨릭 더글러스 흄이 내각을 승계해 1년 정도 임기를 보냈으나, 결국 다음해 실시된 총선에서는 10여년 만에 노동당이 보수당을 누르고 승리함에 따라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총리는 해럴드 윌슨.
3. 평가
전임자인 앤서니 이든의 최대 실책 중 하나인 수에즈 사태 이후 혼란에 빠진 영국 정치를 비교적 잘 수습하였고 어느 정도의 경제 정책의 성과를 일구어냈다는 평가도 있으나, 집권 말기에 보여준 무자비하고 변덕스러우며 독단적인 일반적 면모 뿐 아니라, 경제 정책의 수립에 있어서도 입안 과정에서의 독단적 모습, 일관되지 않은 경제 정책 입안 등의 모습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결국 이로 인해 해럴드 맥밀런의 임기 이후 영국 경제는 완전히 수렁으로 빠져들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헌[16] 등의 재임기에도 영국 경제는 침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가렛 대처의 시기에 이르러 신자유주의를 전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러한 상태에 반전이 생기게 되지만, 이 반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의 별명 중 하나였던 Super Mac은 해럴드 맥밀런의 재임 기간을 잘 보여준다. 재임 초기에는 그가 스스로 자랑했던 경제 정책 및 대외 정책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의미로도 일부 사용되었으나, 재임 기간이 길어지고 맥밀런 본인과 보수당 내각의 실책이 이어짐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어 시대착오적이고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실책이나 기타 행운에 따라 간신히 총리직을 유지하는 맥밀런과 보수당 내각을 풍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4. 여담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시즌2에 앤턴 레서가 그를 연기한다. 이든을 부추겨 수에즈 전쟁을 유발시키고 책임을 덮어씌워 총리 자리에서 몰아내는 정치력과 이후 혼란을 수습하는 뛰어난 행정력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든 내각의 일원으로서 응당 가져야할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자신의 일이 아닌것처럼 얘기하기도 하고, 스푸트니크 쇼크에 대해서 여왕에게 설명할 때 여왕이 뭐라 말하기전에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해야한다는 자기 말만 해버리는 비호감적인 행동을 보인다. 마지막엔 프로퓨모 스캔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채 임신한 상태였던 엘리자베스 2세의 만류에 불구하고 양성 종양을 핑계로 사임해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2] 1st Earl of Stokton[3] 영미권 최대 출판사 중 하나다. 영미권에서는 흔히 맥밀런과 펭귄 랜덤하우스, 하퍼콜린스(HarperCollins), 해체트(Hachette), 사이먼앤슈스터(Simon & Schuster) 다섯을 묶어 출판업 Big 5로 분류한다.[4] 현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맥밀런의 이튼스쿨, 베일리얼 칼리지, 옥스퍼드 유니언 후배이다.[5] 당시 중상을 입은 채 12시간동안 방치되었는데, 그 동안 독일 제국군의 눈을 피해 죽은 척을 하기도 했고, 아이스킬로스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으면서 구조를 기다렸다고. 이 부상이 완치되는 데에 거의 4년이 걸렸고, 이후에도 살짝 다리를 절었으며 손글씨를 쓰기 버겨워했다.[6] 게이츠컬이나 윌슨은 나이가 너무 어려 참전이 불가능했다. 게이츠켈은 개전 당시 6살이었고, 윌슨은 아예 1916년생이기 때문. 버틀러는 어렸을 때 사고로 오른팔에 복합골절을 입었다가 치료에 실패해서 악수도 제대로 못 했다.[7] 이를 두고 맥밀런은 '독일 황제가 나를 퇴학시켰다'라고 농담을 했다.[8] 전시 상황을 위한 임시 보직[9] 1945년부터 1951년까지는 노동당이 여당이었다.[10] Minister of Housing & Local Government. 공공주택 보급과 지방자치 감찰을 담당하는 부처이다. 현재는 다른 부처들로 통폐합되었다.[11] 다만 맥밀런도 이집트를 침공하는 것에 강하게 찬성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12] 다만, 당시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 유력한 총리 후보는 앤서니 이든 내각에서부터 내정을 주로 담당했던 재무부 장관 출신이자 앤서니 이든이 건강 문제로 부재할 당시 내각을 이끌었던 랍 버틀러였다.[13] 다만 보수당은 해당 선거를 기점으로 하여 단 한 번도 스코틀랜드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14] 정확히는 영국 보수당의 기조 변화를 상징한다. 2차 대전 종전 직후 집권했던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은 이미 식민지의 독립을 정책으로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1951년 선거에서 패하여 다시 보수당이 집권함에 따라(총리는 윈스턴 처칠) 이 정책은 중지되었다.[15] 1963년 국방장관 존 프로퓨모가 불륜 및 소련 스파이 등과 연루됨에 따라 사임하게 된 정치 스캔들[16] 해럴드 맥밀런 사퇴 이후 1년만 재임한 앨릭 더글러스 흄은 제외.